리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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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처드 1세는 1189년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플랜태저넷 왕가의 군주이다. 그는 헨리 2세의 아들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살라딘과 대립했으며,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독일에서 체포되어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리처드는 용감한 군인이자 기사로 칭송받았지만, 과도한 잔혹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1199년 프랑스에서 석궁에 맞아 사망했으며, 잉글랜드 왕실 문장을 정하고, 로빈 후드 이야기 등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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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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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리처드 1세 |
다른 이름 | 사자심왕 (the Lionheart), 코르 드 리옹 (Cœur de Lion) |
로마자 표기 | Richard I |
출생일 | 1157년 9월 8일 |
출생 장소 | 잉글랜드 옥스퍼드 보몬트 궁전 |
사망일 | 1199년 4월 6일 (41세) |
사망 장소 | 프랑스 아키텐 샬뤼 |
매장 장소 | 프랑스 앙주 퐁트브로 수도원 |
왕조 | 플랜태저넷 왕가 (앙주 왕가) |
아버지 | 헨리 2세 |
어머니 | 엘레오노르 다키텐 |
배우자 | 베렝겔라 오브 나바라 (1191년 결혼) |
자녀 | 필리프 드 코냑 (사생아) |
통치 | |
왕위 | 잉글랜드 국왕 |
즉위일 | 1189년 9월 3일 |
대관식 | 1189년 9월 3일 |
이전 국왕 | 헨리 2세 |
섭정 | 엘레오노르 다키텐 윌리엄 드 롱챔프 |
다음 국왕 | 존 |
그 외 작위 | 노르망디 공작 멩 백작 앙주 백작 아키텐 공작 |
군사 활동 | |
주요 전투 | 1173–1174년의 반란 제3차 십자군 아크레 공방전 아르수프 전투 야파 전투 기소르 전투 |
참전 | 제3차 십자군 전쟁 아크레 해전 아크레 공성전 케사레아 전투 아르수프 전투 야파 전투 |
지휘 | 잉글랜드군 |
기타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언어 | 고대 노르만 프랑스어 (Quor de Lion) |
별칭 | 사자심왕 |
군주 스타일 | (더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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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리처드 1세는 1157년 9월 8일 옥스퍼드의 보몽 궁전에서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13] 어린 시절 잉글랜드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1165년 어머니와 함께 노르망디로 갔다. 세인트 올번스의 호디에르나는 그의 젖먹이였으며, 왕위에 오른 후 그녀에게 후한 연금을 지급했다.[16] 리처드는 리무쟁 방언와 프랑스어로 시를 짓고 글을 쓸 수 있는 교육받은 사람이었다.[18]
리처드는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머리카락은 붉은색과 금발 사이였고, 밝은 눈과 창백한 피부를 가졌다. 키는 약 1.83m였다고 한다.[21] 순례자의 여정과 리처드 왕의 업적(''Itinerarium peregrinorum et gesta regis Ricardi'')에는 "그는 키가 크고 우아한 체격이었다. 머리카락 색깔은 붉은색과 금색 사이였고, 사지는 유연하고 곧았다. 칼을 휘두르기에 적합한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 긴 다리는 그의 몸의 나머지 부분과 일치했다."라고 적혀 있다.[22]
1172년 6월, 14세의 나이로 리처드는 아키텐 공작과 푸아티에 백작으로 공식 인정받았다.[28][29] 1173년 헨리 2세의 아들 젊은 헨리는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30] 1174년 9월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39]
1183년 리처드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가스코뉴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형인 젊은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이에 가세하여 리처드를 몰아내려 했다. 1183년 6월 11일, 젊은 헨리가 갑자기 죽자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리처드는 반란을 진압하고 헨리 2세의 후계자가 되었다. 1189년 부왕이 시농에서 병사하면서 리처드는 왕위에 올랐다.
1191년 7월, 제3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아크레를 함락시켰다.[135] 1192년 9월 2일 살라딘과 휴전 조약을 맺었다.
1192년 12월 빈 근처에서 레오폴트 5세에게 사로잡혀 뒤른슈타인 성에 유폐되었다.[72] 1193년 리처드의 신병은 레오폴트 5세에게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에게로 양도되었다. 1194년 2월에 풀려났다.
리처드는 잃어버린 노르망디 땅을 되찾기 위해 가이야르 성을 건설했다.[90] 1194년 프레테발 전투에서 필리프를 패주시켰고, 1198년 지소르 전투(쿠르셀 전투)에서는 ''Dieu et mon Droit|하느님과 나의 권리프랑스어''를 모토로 삼았다.
1199년 3월, 샤토 드 샤뤼 샤브롤 성을 포위하던 중 석궁 화살에 어깨를 맞았고, 상처가 괴저로 악화되어[102] 1199년 4월 6일 어머니의 품에서 사망했다.[104] 리처드의 심장은 루앙 대성당(Rouen Cathedral)에, 내장은 샤뤼에, 시신은 퐁트브로 수도원(Fontevraud Abbey)에 묻혔다.[104]
2. 1. 즉위 이전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로부터 아키텐 영지를 물려받았다. 1172년에는 푸아티에 백작이 되었다.[28][29]리처드는 1157년 9월 8일, 옥스퍼드의 보몽 궁전에서 태어났다. 헨리 2세의 차남이었던 리처드는 왕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13] 리처드는 어머니의 총애를 받는 아들로 묘사된다.[14]
어린 시절을 잉글랜드에서 보냈으며, 1165년 5월에 어머니가 그를 노르망디로 데려갔다. 그의 젖먹이는 세인트 올번스의 호디에르나였으며, 왕이 된 후 그녀에게 후한 연금을 지급했다.[16] 리처드는 시를 짓고 리무쟁 방언(오크어)과 프랑스어로 글을 쓸 줄 아는 교육받은 사람이었다.[18]
리처드는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머리카락은 붉은색과 금발 사이였고, 밝은 눈과 창백한 피부를 가졌다. 그의 키는 약 1.83m였다고 한다.[21]
순례자의 여정과 리처드 왕의 업적(''Itinerarium peregrinorum et gesta regis Ricardi'')에는 "그는 키가 크고 우아한 체격이었다. 그의 머리카락 색깔은 붉은색과 금색 사이였고, 그의 사지는 유연하고 곧았다. 그는 칼을 휘두르기에 적합한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긴 다리는 그의 몸의 나머지 부분과 일치했다."라고 적혀 있다.[22]
1159년 3월, 리처드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의 딸과 결혼하기로 정해졌으나, 이 약정은 실패했다. 1160년대 초, 리처드가 프랑스의 루이 7세의 넷째 딸인 벡생 백작 부인 알리스와 결혼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으나,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간의 라이벌 관계 때문에 루이는 결혼을 방해했다. 1169년 1월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리처드와 알리스의 약혼이 확인되었다.[25] 헨리 2세는 리처드에게 아키텐과 푸아티에를 상속할 계획이었다. 리처드는 프랑스 왕에게 아키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26]
1170년 헨리 2세가 병에 걸린 후, 그는 자신의 영토를 분할하는 계획을 실행했다. 1171년 리처드는 어머니와 함께 아키텐으로 떠났으며,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의 요청으로 그에게 아키텐 공국을 주었다.[27] 1172년 6월, 14세의 나이로 리처드는 공식적으로 아키텐 공작과 푸아티에 백작으로 인정받았다.[28][29]
1173년 헨리 2세의 아들 젊은 헨리는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30] 엘레오노르가 아들들이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는 소문이 있었다.[31] 젊은 왕 헨리는 프랑스 궁정으로 가서 루이 7세의 보호를 구했다. 리처드와 제프리는 곧 그를 따랐다.[32]
형제들은 프랑스 궁정에서 루이 7세와 프랑스 귀족들의 동의 없이는 헨리 2세와 협상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35] 1173년 7월까지 반란군은 여러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36] 리처드는 푸아투로 가서 아버지에 대한 반란에서 자신과 어머니에게 충성하는 귀족들을 규합했다. 그는 라 로셸을 점령하려 했지만 주민들에게 거부당했고, 생트 시로 철수했다.[37][38]
헨리 2세는 2만 명이 넘는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모았다.[36] 헨리 2세의 군대는 생트를 기습하여 많은 수비대를 사로잡았지만, 리처드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다. 그는 타이유부르 성에 피난했다.[37] 1174년 9월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39]
1174년 9월 8일 헨리 2세와 루이 7세가 휴전을 맺었을 때, 리처드는 제외되었다.[40] 리처드는 푸아티에에 있는 헨리 2세의 궁정으로 가서 용서를 구했다.[40] 며칠 후, 리처드의 형제들은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 그에게 합류했다.[40] 리처드는 푸아투의 두 개의 성과 아키텐 수입의 절반을 받았다.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가 사망할 때까지 포로로 남았다.[41]
1183년 리처드의 가혹한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은 가스코뉴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형인 젊은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이에 가세하여 리처드를 몰아내려 했다. 1183년 6월 11일, 맏형 젊은 헨리가 갑자기 죽자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리처드는 반란을 진압하고 헨리 2세의 후계자가 되었다.
헨리 2세는 리처드에게 아키텐을 존에게 양도하라고 명령했지만, 리처드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을 내줄 생각이 없어 거절하였다.
1188년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싸우던 중, 리처드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필리프와 합세하였다. 1189년 부왕이 시농에서 병사하면서 리처드는 왕위에 올랐다.
2. 2. 제3차 십자군 원정과 살라딘
제3차 십자군에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킬리키아에서 익사했다.[135] 필리프 2세와는 시칠리아섬에서 합류했으나, 필리프 2세의 이복 누나 알리스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나바라 왕 안초 6세의 딸 나바라의 베렝가리아와 약혼하여 대립했다.[135]1191년 봄, 키프로스에서 베렝가리아와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키프로스 태수가 그녀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5월 12일 베렝가리아와 결혼했다.
1191년 7월, 필리프 2세, 오스트리아 공 레오폴트 5세와 함께 아크레를 함락시켰으나(아크레 포위전),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을 찢어 모욕했기 때문에 레오폴트 5세는 귀국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차기 국왕을 두고 기 드 뤼지냥과 몬페라토 후작 콘라드 1세가 대립했고, 리처드는 콘라드 1세의 즉위를 승인했다. 그러나 1192년 콘라드 1세가 암살당하고, 샹파뉴 백작 앙리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기는 리처드로부터 키프로스 섬을 양도받았다.
필리프 2세는 1191년 7월 31일 귀국했다. 리처드는 단독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과 1년 이상 싸웠지만,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하고 1192년 9월 2일 휴전 조약을 맺었다.
2. 3. 독일에서의 체포 및 석방
필리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와 결탁하여, 리처드의 동생 존의 왕위 찬탈을 지원하였다. 리처드는 그 음모를 듣고 귀로를 서둘렀지만, 도중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어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하였다.[72]리처드는 변장을 한 채 신분을 위장하여 육로를 통해 잉글랜드로 향했지만, 1192년 12월 빈 근처에서 레오폴트 5세에게 사로잡혀 뒤른슈타인 성에 유폐되었다. 레오폴트는 리처드가 그의 사촌 콘라트 폰 몬페라의 살해를 사주했다고 비난했고, 아크레 성벽에서 자신의 깃발을 던져 모욕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72] 이때 왕제 존은 리처드가 죽었다고 공표하고 왕위에 오르려고 했지만, 영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단념하였다.
1193년에 리처드의 신병은 레오폴트 5세에게서 하인리히 6세에게로 양도되었다. 리처드는 슈파이어로 압송되어 트리펠스 성에 감금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를 몸값으로 잡아두었는데, 처음에는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거부하고 "나는 신 외에는 어떤 상관도 인정하지 않는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선언했다.[83] 그러나, 드뢰의 필립의 부추김으로 리처드의 감금 조건이 악화되었고, 그는 "말이나 당나귀조차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사슬에 묶여 있었다고 말했다.[84]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15만 마르크라는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다. 이는 당시 영국 왕실 연간 수입의 두세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85] 한편, 리처드의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아들의 석방을 위해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존과 필리프는 리처드의 석방을 늦추기 위해 하인리히와 교섭을 했지만, 리처드와 하인리히 간에 교섭이 성립됨으로써 리처드는 1194년 2월에 풀려났다. 이때, 필리프 2세는 존에게 "네 자신을 조심해라. 악마가 풀려났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2. 4. 귀환 이후와 죽음
리처드 1세는 1199년 리모주 자작령 샬뤼 성을 공격하던 중 석궁에 맞아 42세의 나이로 전사했다.[102] 그의 시신은 퐁트브로 대수도원에 매장되었다.[104]리처드의 부재 중, 그의 동생 존은 필리프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필리프는 리처드가 감금된 기간 동안 노르망디의 일부인 프랑스 벡생과 맞닿은 노르망 벡생을 정복했다.[88] 리처드는 다시 만났을 때 존을 용서하고 조카 아서 대신 그를 상속자로 임명했다.
리처드는 잃어버린 노르망디 땅을 되찾기 시작했다. 1193년 프랑스군이 지소르 성을 함락시키면서 노르망디 방어선에 틈이 생겼다. 리처드는 랑드리 영지에 거대한 가이야르 성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고,[90] 가톨릭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건설을 강행하여 2년 만에 완공했다.[96][93][94] 가이야르 성은 당시 시대를 앞서 나가는 혁신적인 기술이 사용된 성으로, 군사 역사가들은 이 성을 "당대의 걸작"이라고 평가한다.[101]
리처드는 플랑드르의 발두인 9세, 르노, 불로뉴 백작 등과 반 필리프 동맹을 맺고 필리프의 땅을 공격했다. 1198년에는 그의 조카인 독일의 오토 4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되도록 지원했다. 1194년 프레테발 전투에서 필리프를 패주시켰고, 1198년 지소르 전투(쿠르셀 전투)에서는 ''Dieu et mon Droit|하느님과 나의 권리프랑스어''를 모토로 삼았다.
1199년 3월, 리처드는 샤토 드 샤뤼 샤브롤 성을 포위하던 중 석궁 화살에 어깨를 맞았고, 상처가 괴저로 악화되어[102] 1199년 4월 6일 어머니의 품에서 사망했다.[104] 리처드는 석궁 사수를 용서하고 100실링을 주어 보냈지만,[103] 리처드가 죽은 후 용병 대장 메르카디에(Mercadier)가 그를 생가죽을 벗겨 죽이고 교수형에 처했다.[103]
리처드의 심장은 루앙 대성당(Rouen Cathedral)에, 내장은 샤뤼에, 시신은 퐁트브로 수도원(Fontevraud Abbey)에 묻혔다.[104] 2012년 과학자들은 리처드의 심장 유해를 분석하여 유향 등으로 방부 처리되었음을 확인했다.[106]
리처드는 적법한 상속인이 없었고, 사생아 필립 드 코냐크(Philip of Cognac)만을 인정했다. 그의 동생 존이 왕위를 계승했지만,[109] 프랑스 영토에서는 존 대신 그의 조카 아서를 지지했다.[108] 리처드의 직계 상속자가 없다는 것은 앙주 제국(Angevin Empire) 붕괴의 첫 단계였다.[109]
3. 유산과 평가
리처드 1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용맹함으로 십자군 전쟁에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가혹한 통치와 과도한 세금 징수로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을 잉글랜드 밖에서 보냈으며, 잉글랜드 왕으로서의 책임보다는 개인적인 명예와 영토 확장에 더 관심을 쏟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역사가 존 길링엄(John Gillingham)에 따르면, 리처드 1세에 대한 평판은 수년간 "극심하게 변동"해왔다.[127] 그의 적인 필리프 2세 궁정의 역사가들조차 리처드가 필리프와 싸우지 않았다면 잉글랜드는 그보다 더 나은 왕을 가진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독일의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는 리처드의 관대함이 신하들이 왕의 몸값을 마련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살라딘 궁정의 인물들(바하 아드딘, 이븐 알아시르)도 리처드를 당대 가장 주목할 만한 통치자로 칭송했다. 심지어 스코틀랜드에서도 리처드는 역사 속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7]
리처드 사후 그의 이미지는 더욱 낭만적으로 미화되었고,[128] 적어도 4세기 동안 홀린셰드(Holinshed)와 존 스피드(John Speed)와 같은 역사가들에게 리처드는 모범적인 왕으로 여겨졌다.[7] 그러나 1621년 새뮤얼 다니엘(Samuel Daniel)은 리처드가 십자군과 프랑스 전쟁에 잉글랜드의 자원을 낭비한 것을 비판했는데, 이러한 관점은 결국 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이 되었다.[7]
1978년 이후, 리처드가 잉글랜드뿐 아니라 더 넓은 왕조의 수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당대의 여론을 중시하는 평가가 더 널리 인정받고 있다.[7]
20세기 후반, 리처드 1세의 성적 취향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존 하비(John Harvey)는 이를 "침묵의 음모"라고 비난하며,[114] 리처드의 행동, 고해, 참회, 자녀 없는 결혼 생활 등을 근거로 동성애를 주장했다.[115] 리처드는 코냑의 필립이라는 사생아를 두었고, 원정 중 현지 여성과의 성관계에 대한 기록도 있다.[116] 역사가들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존 길링엄은 리처드가 이성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플로리는 리처드의 두 차례 공개적인 고해와 참회가 남색을 의미한다고 보았지만,[115] 리처드가 여성을 강제로 취했다는 기록도 인정하며, 남성과 여성 모두와 성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115] 다만, 리처드와 필리프 2세가 침대를 함께 사용했다는 기록이 성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는 플로리와 길링엄 모두 동의한다.[119]
3. 1. 문화적 유산
리처드 1세는 당대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무예가 뛰어난 왕이자 기사로 여겨졌으며, 이는 이러한 두 가지 역할의 조합으로는 최초의 사례였던 것으로 보인다.[110] 그는 용감하고 관대하며 유능한 군 지휘관이자 개인 전투원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그는 탐욕, 교만, 욕정, 그리고 잔혹성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여겨졌다. 랄프 오브 코지셜은 리처드의 업적을 요약하면서 그가 "죄인들의 막대한 무리" 중 하나였다고 개탄했다.[111]리처드 1세는 주변 인물이었던 트루베르와 트루바두르의 후원자이자 보호자였으며, 그 자신도 시인이었다.[7][112] 그는 글쓰기와 음악에 관심이 많았으며, 두 편의 시가 그에게 귀속된다. 첫 번째는 고대 프랑스어로 된 시르방트인 ''Dalfin je us voill desrenier''이고, 두 번째는 뒤른슈타인 성에 투옥되었을 때 지은 비가인 ''Ja nus hons pris''인데, 고대 오크어와 고대 프랑스어 버전이 있다.[112][113]
리처드 1세의 두 번째 왕실 대인장(1198년)에는 세 마리의 '지나가는 사자(passant-guardant)'가 그려진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이후 잉글랜드 왕실 문장으로 확립된 문장이 처음 등장한 경우이다. 따라서 리처드 1세가 이 문장 디자인을 도입했을 가능성이 높다.[120] 세 마리 사자 문장은 여러 파운드화 주화에 계속해서 잉글랜드를 나타내고 있으며,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등 여러 잉글랜드 국가 대표팀의 상징의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팀의 쓰리 라이언스 국가가 있다.[123]

13세기 중반 무렵, 리처드 1세가 붙잡힌 후 그의 음유시인 블롱델이 유럽의 성들을 돌아다니며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노래를 크게 불렀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마침내 그는 리처드가 갇혀 있는 곳에 이르렀고, 리처드는 그 노래를 듣고 적절한 후렴구로 응답하여 왕이 감금된 곳을 알렸다. 이 이야기는 앙드레 에르네스트 모데스트 그레트리의 오페라 '''리처드 꾸르 드 룅'''의 기초가 되었으며, 리처드 써프의 영화 ''아이반호''의 오프닝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16세기경부터 로빈 후드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를 리처드 1세의 동시대인이자 지지자로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리처드가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리처드의 악한 동생 존의 잘못된 통치 기간에 로빈이 불법으로 몰리게 되었다.[126]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에서는 리처드가 동생 존의 폭압적인 정치에서 나라를 구하고 의적 로빈훗과 의형제를 맺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에 산적이 늘어난 것은 리처드가 부과한 과중한 세금 때문이었다.

역사가 존 길링엄(John Gillingham)에 따르면, 리처드 1세에 대한 평판은 수년간 "극심하게 변동"해왔다.[127] 리처드의 대중적 이미지는 기사도와 군사적 능력의 긍정적인 자질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었지만,[110]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은 스티븐 런시먼(Steven Runciman)의 평결로 대표된다. "그는 나쁜 아들, 나쁜 남편, 그리고 나쁜 왕이었지만, 용감하고 훌륭한 군인이었다"("십자군 전쟁의 역사" 3권).
빅토리아 시대 잉글랜드는 리처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십자군 지도자이자 신앙인으로 존경하여 영웅적인 동상을 영국 의회 밖에 세웠다. 그러나 후기 빅토리아 시대 학자 윌리엄 스터브스(William Stubbs)는 그를 "나쁜 아들, 나쁜 남편, 이기적인 통치자, 그리고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에드먼드 앨런비(Edmund Allenby)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영국 언론은 리처드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마침내 나의 꿈이 실현되었다"라는 자막이 달린 만화를 인쇄했다.[130] 앨런비 장군은 그의 캠페인이 후대의 십자군으로 제시되는 것에 대해 항의하며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전략적 중요성에 있었고, 이 캠페인에는 종교적 충동이 없었다"고 말했다.[131]
리처드 1세는 정치적 업적보다는 일화가 많은 왕이었다. 주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일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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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앙주(Anjou)와 아키텐(Aquitaine)에서 성장하여 영국에 머문 시간이 적었고, 영어(중세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다.[136] |
아서왕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발굴된 엑스칼리버(Excalibur)로 여겨지는 검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검은 시칠리아 왕 탱크레드에게 증정되었다.[137][138] |
자신을 쏜 샤뤼 성의 젊은 궁수( 또는 베르트랑(Bertrand), 존 사브로즈(John Sabroz)라고도 함)에게 이유를 묻자, “폐하께서는 저의 아버지와 두 명의 형제를 죽이셨습니다. 저도 처형해주십시오. 적을 갚은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리처드는 “네 목숨은 살려주겠다.”라고 말하고, 정당한 전투 행위였으므로,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이 남자를 용서하라고 주위에 명령하고, 심지어 상금까지 주어 석방했다.[140] 그러나 리처드가 존(John)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자, 이 궁수는 잡혀 가죽 벗기기 형에 처해졌다. |
강적에게는 경의를 표했다. 적장 살라딘(Saladin)을 “틀림없이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사라센 지도자”라고 칭찬했다.[141] |
그 용맹함은 적이었던 무슬림들에게도 평가받았다. 는 리처드에 대해 “잉글랜드 왕의 진군 소식에 무슬림들은 떨었다……전장에 여러 번 나가 용맹한 전투력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프랑크인〉의 눈에는 프랑스 왕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지만, 부의 풍요로움, 그리고 군사적 수완과 용맹함에서는 단연 뛰어났다.”라고 기록했다.[142] 또한 동시대의 어떤 무슬림은 “그만큼 대담한 적, 그리고 머리가 좋은 적은, 지금까지 상대한 적이 없다.”라고 적었다.[143] |
독실한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종교적 편견에서도 자유로웠다. 휴전 협상 중, 알-아딜(Al-Adil)에게 “내 여동생과 결혼하여 기독교인이 되는 건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하여, 살라딘에게 빈정거림을 당했다고 한다. |
다른 나라의 군주들은 그때까지 십자군에 참전했지만, 헨리 2세(Henry II)는 교황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지로 가려 하지 않았다. 리처드 1세는 십자군에 참전한 최초의 잉글랜드 국왕이었고, 그 때문에 십자군, 몸값, 프랑스와의 전쟁 등으로 국민에게 막대한 부담을 지웠지만, 영웅으로서의 인기가 있었다.[144] 그 대가를 존이 치렀다는 측면이 있다. |
-- 과거의 잉글랜드 왕실 문장을 정한 것은 리처드 1세이다. 헨리 2세가 사자 문장을 채택하고, 리처드 1세가 그때까지 한 마리였던 사자를 세 마리로 늘렸다고 한다. 현재, 영국의 국장은 리처드가 정한 잉글랜드의 문장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문장이 더해진 것이다. 또한,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엠블럼은 이것을 바탕으로 장미 전쟁을 종식시킨 튜더 왕조의 문장인 홍백의 장미, 튜더 로즈를 장식한 것이며, 장미는 잉글랜드의 국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축구 잉글랜드 대표팀은 쓰리 라이언즈(Three Lions)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고, 성격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엘레오노르는 리처드가 포로로 잡혔을 때 몸값을 모으기 위해 분주했고, 고령에 혹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몸을 찾으러 쾰른(Cologne)까지 갔으며, 리처드의 임종에도 참석했다. |
자녀가 없었다(단, 서자로 필립 오브 코냐크(Philip of Cognac)가 알려져 있다). 희곡 『겨울의 사자』에서 묘사된 것처럼 동성애자라는 설도 있지만, 명확하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
아크레(Acre)에서 처형한 포로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있었다. 아랍 지역에서는 그 후,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리처드 왕이 잡으러 온다.”라고 협박했다고 한다.[145] |
리처드가 유폐되었을 때, 그의 안전과 감금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음유시인(기사의 트루바두르라고도 함) 브롱델이 독일 전역의 성 성벽 아래에서 리처드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리처드가 노래로 화답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전설이 있다.[146] 또한 리처드 작이라고 전해지는 단선율 노래 『포로는 결코』(Ja nus hons pris)가 있다. |
베르트랑 드 보른(Bertrand de Born)과 아르노 다니엘(Arnaut Daniel) 등과 교류했고,[147] 사망 직후에는 로부터 애가를 받는 등, 동시대의 트루바두르들에게 영웅시되었지만, 그 후 중세 기사도의 꽃으로 우상화되어, 소설 『아이반호』와 로빈 후드 이야기 등에서는 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
유언에 따라 시신은 아버지 헨리 2세가 잠든 퐁토브로 수도원(Fontevraud Abbey)에, 심장은 자신이 사랑했던 루앙(Rouen)에 있는 루앙 대성당(Rouen Cathedral)에(1961년 발굴에서 발견됨)[148], 그리고 뇌와 장기는 그의 마음의 고향인 푸아투-샤랑트 지역(Poitou-Charentes)의 샤뤼 수도원(Charroux Abbey)에 보내졌지만, 탄생지인 영국에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149] |
3. 2. 대중문화 속 리처드 1세
아이반호에서는 리처드가 동생 존의 폭압적인 정치에서 나라를 구하고 의적 로빈훗과 의형제를 맺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에 산적이 늘어난 것은 리처드가 부과한 과중한 세금 때문이었다.[126]13세기 중반 무렵, 리처드 1세가 붙잡힌 후 그의 음유시인 블롱델이 유럽의 성들을 돌아다니며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노래(그들이 함께 작곡한 노래)를 크게 불렀다는 여러 전설이 생겨났다.[125] 마침내 그는 리처드가 갇혀 있는 곳에 이르렀고, 리처드는 그 노래를 듣고 적절한 후렴구로 응답하여 왕이 감금된 곳을 알렸다. 이 이야기는 앙드레 에르네스트 모데스트 그레트리의 오페라 '''리처드 꾸르 드 룅'''의 기초가 되었으며, 리처드 써프의 영화 ''아이반호''의 오프닝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귀족 출신의 trouvère프랑스어인 실존 인물 장 '블롱델' 드 네슬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의 간수들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알렸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125]
16세기경 어느 시점부터 로빈 후드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를 리처드 1세의 동시대인이자 지지자로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리처드가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리처드의 악한 동생 존의 잘못된 통치 기간에 로빈이 불법으로 몰리게 되었다.[126]
베르트랑 드 보른과 아르노 다니엘 등과 교류했고,[147] 사망 직후에는 고셀름 파이디트로부터 애가를 받는 등, 동시대의 트루바두르들에게 영웅시되었지만, 그 후 중세 기사도의 꽃으로 우상화되어, 소설 『아이반호』와 로빈 후드 이야기 등에서는 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4.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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