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 (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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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세는 343년 성한의 황제 이수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아들이 없어 동생 이광을 황태제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광을 모함하는 자들을 처형하고 이광을 자결하게 했다. 통치 기간 동안 그는 교만하고 음란한 정치를 펼쳤으며, 동진의 침략으로 인해 347년 항복하고 건강으로 보내져 귀의후에 봉해졌으며, 36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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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성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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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이세 |
자 | 자인(子仁) |
씨족 | 이(李) |
왕조 | 성한 |
즉위 정보 | |
칭호 | 황제 |
재위 기간 | 343년 9월 - 347년 4월 13일 |
연호 | 태화(太和): 344년 - 346년 가녕(嘉寧): 346년 - 347년 |
선대 황제 | 이수 |
후대 | 멸망 |
생애 | |
출생 | 미상 |
사망 | 361년 |
가족 관계 | |
부친 | 소문제(昭文帝) 이수 |
모친 | 이봉(李鳳)의 딸 |
배우자 | 이황후 |
자녀 | 미상 |
2. 생애
이세는 이수의 맏아들로 343년에 아버지 이수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했다. 이듬해 정월에 영내에 대사를 내리고 태화로 개원했다. 양모인 염부인을 황태후로, 아내인 이부인을 황후로 세웠다.
태사령한호는 "형혹성(화성)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종묘에 대한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이 원인인 듯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세는 군신들에게 논의하게 했고, 상국동교, 시중왕가 등은 이특과 이웅을 제사지내고 한왕이라 칭하도록 했다.
이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대장군·한왕 이광은 황태제의 지위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당과 해사명은 이세에게 이광의 요구를 허락하도록 강력히 권했다. 이세는 마당 등과 이광 사이에 모략이 있다고 의심하여 태보이혁을 파견해 이광을 공격하고, 동교에게 명하여 마당과 해사명을 체포하여 참수하고 삼족을 멸했다. 이광은 임경현후로 강등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결했다. 해사명과 마당은 훌륭한 신하였기에, 이 이후로 기강을 다잡고 간언하는 자가 없어졌다.
346년, 이혁이 난을 일으켜 진수에서 거병하자 촉인들이 많이 따랐고, 병력은 수만 명에 달했다. 이세는 성도성을 굳게 지키며 방어했고, 이혁이 단기로 문으로 돌격했을 때 수비병이 그를 사살했다. 이로 인해, 휘하의 병사들은 흩어졌다. 이세는 이혁의 죽음을 확인하고, 영내에 대사를 내리고 가녕으로 개원했다.
촉 땅에는 료족(서남방의 이민족)이 산에서 내려와 북쪽으로는 건위, 재동에 이르기까지의 산골짜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수는 10만 명에 달했고, 성한은 그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 백성들에게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료족이 난을 일으키자 성한 군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고, 성한의 영토는 날마다 축소되었다. 게다가 흉년까지 겹쳐 국력은 크게 쇠퇴했다.
이세는 교만하고 사치스러웠으며, 재물과 여색을 탐했다. 사람을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으며, 음란한 짓에 빠져 국사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 또한 의심이 많아 대신을 주살하고 형벌을 엄하게 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부조 이래의 옛 신하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측근 몇 명을 친임했으므로, 그들이 정치를 좌우했다. 또한, 이세는 항상 금중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공경들과 만나는 일이 적었다. 사관이 종종 재앙에 대해 상주하자 동교를 존경하여 태사를 더했지만, 실제로는 재앙을 나누어 가지려 했을 뿐이었다.
347년 2월, 동진의 대사마환온이 성한 공격을 위해 수군을 이끌고 진격했다. 동진군이 청의에 도착하자 이세는 대군을 이끌고 맞이했다. 이복과 참견 등에게 수천 명을 주어 산양에서 합수로 진군하여 적군을 막게 했다. 환온이 육로로 진군한다는 보고가 있자, 제장들은 강남에 복병을 설치하려 했지만, 참견은 따르지 않고 강북의 원앙기에서 건위로 향했다.
3월, 환온이 팽모에 이르자 이복은 사촌 형 이권 등과 함께 습격했으나, 되려 역습을 받았다. 이권 등은 연전연패했고, 군대는 흩어져 간도로 성도성으로 돌아갔다. 환온이 산양에서 강남으로 나갈 때, 건위에 도착한 참견은 엇갈린 것을 깨닫고 사두진에서 북쪽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환온은 이미 성도에서 10리 지점에 이르렀고, 참견의 군대는 싸울 의지를 잃고 스스로 무너졌다.
이세는 전군을 동원하여 착교에서 환온과 결전을 벌였다. 이세는 동진의 선봉을 격파하고 참군 공호를 죽였다. 한때 한나라 군대의 화살이 환온의 말 앞까지 닿을 정도로 몰아붙였지만, 강하상 원교가 군사들을 크게 고무하여 열세를 뒤집자, 한나라 군대는 패배했다. 환온 군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공격했고, 한나라 군대는 크게 궤멸되었다. 환온은 승세를 타고 성 아래에 이르자 불을 질러 성도 대성의 여러 문을 태우고, 성한 소성을 불태웠다. 이세의 병사들은 두려워했고, 중서감 왕가, 산기상시 상거 등은 이세에게 항복을 권했다. 이세는 시중 풍부에게 묻자 풍부는 "옛날, 오한이 촉 땅을 정벌했을 때, 공손씨(공손술)는 모두 주살되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글을 내려 여러 이씨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항복해도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이세는 밤에 틈타 동문으로 탈출하여 참견과 합류하여 90리 물러나 진수군의 가맹성에 이르렀다. 등숭과 참견이 항복을 권하자 이세는 마침내 항복을 결심했다. 항복문을 환온에게 보내고, 관을 메고 엎드려 환온의 군문으로 나아갔다. 환온은 그 묶음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이세와 숙부 이복, 사촌 형 이권 등을 시작으로 친족 10여 명을 건강으로 이송했다. 이렇게 성한은 멸망했다. 이세의 재위 기간은 5년이었다.
이세는 건강에 도착하여 조정에서 귀의후에 봉해졌다. 승평 5년(361년), 이세는 건강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이세는 이수와 그의 후궁인 이비의 아들이었다. 이수는 성한의 창건 황제 이웅의 사촌이자 존경받는 장군이었기에, 이세 또한 군 장교였으며, 황제 이기의 총애를 받아 수도 경비대 장교가 되었다. 338년, 이수가 이기에 반란을 일으켜 수도 성도를 공격했을 때, 이세는 성문을 열어 이수의 군대를 들이는 데 일조했고, 이는 이기의 패배와 이수에 의한 제거로 이어졌다. 그 해 말, 이수가 스스로 황제를 칭한 후, 그는 이세를 태자로 책봉했다.조부 이상이 양주자사 이봉의 반란을 평정했을 때, 이봉의 딸은 이수의 측실로 맞아들여져 후에 이세를 낳았다. 정실 부인 염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세는 그녀에게서 양육되었다.
이세는 키가 7척 9촌이었고, 허리띠는 14围였다. 임기응변으로 사물을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범상치 않게 여겼다. 또한 용모가 수려했기 때문에 3대 황제 이기의 총애를 받았다. 이수가 한왕에 봉해지자 이세는 익군장군에 임명되어 한왕의 세자로 세워졌다.
한흥 원년(338년), 이수가 거병하여 성도로 오자 이세는 내부에서 호응하여 성문을 열고 이수를 맞이했다. 이수가 이기를 폐하고 황위를 찬탈하자 이세는 황태자로 세워졌다.
한흥 4년(341년) 12월, 이수에 의해 대장군·록상서사에 임명되었다.
2. 2. 즉위와 실정
이수의 맏아들로 343년에 이수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이광이 황태제(皇太弟)가 되기를 원하였다. 이에 345년에 마당(馬當)·해사명(解思明) 등이 이광을 황태제로 삼기를 권하였으나 이세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세는 마당 등이 이광과 모의하였을 것이라 의심하고 이들을 잡아 죽이고, 이광을 체포하여 작위를 깎았다. 이에 이광은 자살하였다.346년에는 이혁(李奕)이 모반을 일으켜 성도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전사하였으며, 촉의 산악 지대에 살던 요족(獠族)이 평지로 이주하여 분쟁을 일으키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세는 교만하고 음란하여 국정을 돌보지 않고 궁중에 틀어박혀 중요 신료들을 만나지 않았다. 또한 아첨하는 근신들을 총애하고 형벌을 사사롭게 실시하는 등 폭정을 펼쳤다.
346년 11월,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침입하였다. 347년 2월, 이세는 환온의 침략에 맞서 대군을 편성하여 맞서게 하였다. 제장들은 요충지를 점거하고 방어 작전을 펼칠 것을 권하였으나, 전장군(前將軍) 이잠견(李昝堅)은 정면 승부를 위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환온은 팽모(彭模)에서 군사를 추스려 주력을 이끌고 성도로 진격하였으며, 길이 엇갈린 것을 깨달은 성한군은 다시 환온의 뒤를 쫓았으나 동진군이 성도 근방에 진을 친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와해되었다. 이세는 남은 군대를 동원하여 동진군을 공격하여 한때 승세를 잡았으나 곧 반격을 당하여 크게 패배하였다. 밤을 틈타 성도를 탈출한 이세는 곧 항복하였다.
2. 3. 동진의 침공과 성한의 멸망
346년 11월,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침입하였다. 이세는 환온의 침략에 맞서 347년 2월에 대군을 편성하여 맞서게 하였다. 제장들은 요충지를 점거하고 방어 작전을 펼칠 것을 권하였으나 전장군(前將軍) 이잠견(李昝堅)은 정면 승부를 위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환온은 팽모(彭模)에서 군사를 추스려 주력을 이끌고 성도로 진격하였으며, 길이 엇갈린 것을 깨달은 성한군은 다시 환온의 뒤를 쫓았으나 동진군이 성도 근방에 진을 친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와해되었다. 이세는 남은 군대를 동원하여 동진군을 공격하여 한때 승세를 잡았으나 곧 반격을 당하여 크게 패배하였다. 밤을 틈타 성도를 탈출한 이세는 곧 항복하였다.항복한 이세는 건강으로 보내져 귀의후(歸義侯)에 봉해졌으며, 361년까지 동진에서 살다가 사망하였다.
3. 평가
이세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는 사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세가 성한의 마지막 황제였다는 점에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성한이 쇠퇴하고 멸망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4. 가계
- 아버지: 이수 (소문 황제)
- 어머니: 이비, 이봉의 딸
- 배우자: 이씨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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