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언어학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윤재는 일제강점기 한글 연구 및 보급에 헌신한 언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3·1 운동 참여로 투옥되었으며, 조선어학회 활동을 통해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제정, 조선어 사전 편찬 등 한글 보급을 위한 민족운동에 기여했다. 1934년 진단학회 설립, 기독신문 주필 활동을 하였으며, 수양동우회 활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순국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묘소를 이장했다. 저서로는 표준 조선어 사전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김해동광초등학교 동문 - 민홍철
민홍철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4선 국회의원으로 경상남도 김해시 갑 지역구에서 활동하며 국토교통위원회와 국방위원회에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치고,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 등을 역임한 예비역 육군 준장 출신 변호사이다. - 김해동광초등학교 동문 - 김부관
김부관은 광주대학교 축구부에서 김해시청, 수원 FC, 부산교통공사를 거쳐 아산 무궁화 축구단에서 K리그2 우승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다. - 일제강점기의 학자 - 신익희
신익희는 해공이라는 호를 가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과 외무부장을 역임하고 국민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국회의장과 대통령 후보를 지냈고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학자 - 김규식
김규식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 학자로서, 미국 유학 후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했다. - 조선어학회 사건 - 정인승
정인승은 일제강점기 국어학자로서 국어사전 편찬에 기여하고, 해방 후에는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건국훈장과 국민훈장을 수훈받았다. - 조선어학회 사건 - 이희승
이희승은 국어학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서울대학교 교수로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에 기여했으며, 『국어대사전』 발간, 동아일보 사장, 대구대학교 총장, 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하고 학술원 부회장 등을 지내며 국어 교육 발전에 힘썼으며, 시집 《박꽃》, 수필집 《딸깍발이》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윤재 (언어학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학자 정보 | |
이름 | 이윤재 |
출생일 | 1888년 12월 24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남도 경남 김해 |
사망지 | 함흥형무소 병사 |
사망일 | 1943년 12월 8일 |
사망원인 | 고문후유증 |
국적 | 조선→대한제국 |
직업 | 독립운동가 언어학자 교육자 |
학력 | 베이징 대학 사학 1년 중퇴 |
소속 | 진단학회 |
2. 생애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여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였다.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 교원 시절 3·1 운동을 주도하였다가 평양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대학 사학과를 1년 수료한 후 신흥고보, 배화여고보, 이화여전 등에서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쳤다.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 창간 및 편집을 주도하고, 조선어학회 동료들과 함께 한글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조선어사전 편찬 등 한글 보급을 통한 민족운동에 힘썼다.
1927년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을 엮고, 식민사학에 대항하고자 1934년 국어학자·사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를 설립하였으며, 기독신문 주필을 맡았다. 수양동우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탓에,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넘게 다시 수감생활을 하였다. 출옥 후에도 조선어학회의 우리말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일제 형사들에게 매일 같이 구타당하고 물고문을 6번이나 받는 등[1] 심한 고초를 겪었다.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함흥형무소에서 악형과 추위에 시달리다 1943년 12월 8일 순국하였다.[1]
2. 1. 유년 시절 및 교육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였다.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였다.2. 2. 교원 생활과 민족운동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 교원 시절 3·1 운동을 주도하였다가, 평양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대학 사학과를 1년 수료한 후 신흥고보, 배화여고보, 이화여전 등에서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쳤다.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 창간 및 편집을 주도했다. 그는 조선어학회 동료들과 함께 한글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조선어사전 편찬 등 한글 보급을 통한 민족운동에 힘썼다.1927년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을 엮고, 식민사학에 대항하고자 1934년 국어학자·사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를 설립하였으며, 기독신문 주필을 맡았다. 수양동우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탓에,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넘게 다시 수감생활을 하였다.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윤재는 출옥 후에도 조선어학회의 우리말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였다.
2. 3. 조선어학회 사건과 투옥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윤재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는 일제 형사들에게 매일 같이 구타당하고 물고문을 6번이나 받는 등[1] 심한 고초를 겪었다.2. 4. 순국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함흥형무소에서 악형과 추위에 시달렸다. 함흥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일제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43년 12월 8일 순국하였다.[1]3. 업적
이윤재는 일제강점기에 여러 중등학교에서 교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특히 경신학교 교원 시절인 1933년과 1934년 사이에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잠시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라고 말하며 항일 교육에 힘썼다.[1]
그는 조선어 교과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삼국시대 역사, 태극기, 독립운동사 등을 가르치며 투철한 항일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1]
3. 1. 한글 연구 및 보급
이윤재는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 교원 시절 3·1 운동을 주도하였다가 평양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대학 사학과를 1년 수료하고 한글을 연구하며 교편 생활을 하였다. 환산 이윤재는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을 창간해 편집을 주도했다. 그는 조선어학회 동료들과 함께 한글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어를 사정하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등 한글 보급을 통한 민족운동에 몰두했다.[1]1927년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을 엮고, 식민사학에 대항하기 위해 1934년 국어학자·사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를 설립하였으며, 기독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수양동우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기에 1937년에서 1938년에 걸쳐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이 넘게 다시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우리말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였다.[1]
3. 2. 민족사학 정립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 교원 시절 3·1 운동을 주도하였다가 평양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대학 사학과를 1년 수료하였고, 여러 학교에서 우리 나라의 한글을 연구하며 교편 생활을 하였다. 환산 이윤재는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을 창간해 편집을 주도했다. 그는 조선어학회 동료들과 함께 한글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어를 사정하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등 한글 보급을 통한 민족운동에 몰두했다.1927년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을 엮고, 식민사학에 대항하기 위해 1934년 국어학자·사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를 설립하였으며, 기독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수양동우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기에, 1937년에서 1938년에 걸쳐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이 넘게 다시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우리말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였다.
4.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윤재 선생의 공헌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2] 선생의 묘소는 여러 번 이장되면서 방치되었는데, 국립묘지로 안장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여론이 있었다. 2013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으로 이장되었다.
4. 1. 대한민국 정부의 포상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윤재 선생의 공헌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2] 선생의 묘소는 여러 번 이장되면서 방치되어 있었는데, 국립묘지로 안장함이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여론이 있었다. 2013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으로 이장되었다.4. 2. 묘소 이장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윤재 선생의 공헌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선생의 묘소는 여러 번 이장되면서 방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립묘지로 안장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여론이 있었다.[2] 2013년이 되어서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으로 이장되었다.
5. 저서
- 표준조선어사전
- 도강록
참조
[1]
뉴스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창간하고 일본 고문에 순국한 환산, 그의 업적 담...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13-10-09
[2]
뉴스
아직도 제자리 잡지 못한 이윤재 선생 묘지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3-03-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