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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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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단학회는 1934년 이병도 등이 한국의 역사, 언어, 문학 등을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한글로 발표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같은 해 기관지 《진단학보》를 창간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중단되었고, 해방 이후 재개되어 《한국사》를 간행하며 실증사관에 입각한 연구를 수행했다. 진단(震檀)은 한국을 지칭하는 고유한 이름으로, 주역의 해석에 따라 존귀함과 동방을 의미하며, 일제강점기 친일 논란으로 학회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 역사

진단학회는 일제강점기 친일역사단체인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이었던 이병도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1934년 5월 11일 일본 학자에 의해 연구되던 한국의 역사, 언어, 문학 등을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한글로 발표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34년 11월 28일 기관지 《진단학보》를 창간하여 계간으로 14집까지 발행하였으나, 일본인의 압력으로 중단되었다. 해방 이후 다시 속간되어 15, 16집이 나왔고, 한국 전쟁 이후 17집부터 23집까지 간행되었다. 1959년부터는 《한국사》를 간행하였다.

진단학회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역사 서술(실증사관)을 민족적 의무와 사명감에서 정열적으로 행했다. 연구 분야는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렀고, 고고학, 민속학 등을 포함하는 폭넓은 것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활발히 연구된 것은 경제 문제를 주로 다루는 고대사 부분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57년 초판을 발행한 ‘진단학회 한국사’는 귀중한 재산의 역사로 겨레의 혼을 담았다고 평가받는다.

2. 1. 설립 배경 (1934년)

1934년 5월 11일,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 중심의 한국 역사, 언어, 문학 연구에 대한 반발로, 한국 학자 주도의 한국학 연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 등이 주도하여 진단학회를 설립하였다. 진단학회는 한국 학자들이 한국학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한글로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1]

2. 2. 설립 목적

진단학회는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이었던 이병도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단체이다. 1934년 5월 11일 일본 학자에 의해 연구되던 한국의 역사, 언어, 문학 등을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한글로 발표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2. 3. 기관지 발행

1934년 11월 28일, 진단학회는 기관지 《진단학보》를 창간하여 계간으로 14집까지 발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으로 중단되었다. 해방 이후 다시 속간되어 15, 16집이 나왔고, 한국 전쟁 이후 17집부터 23집까지 간행되었다. 1959년부터는 《한국사》를 간행하였다.

2. 4. 실증사관 추구

이 학파에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역사 서술(실증사관)을 민족적 의무와 사명감에서 정열적으로 행했다. 연구 분야는 고대사에서 현대사에까지 이르렀고, 고고학, 민속학 등을 포함하는 폭넓은 것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활발히 연구된 것은 경제 문제를 주로 다루는 고대사 부분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2. 5. 광복 이후

1934년 5월 11일 일본 학자에 의하여 연구되던 한국의 역사·언어·문학 등을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 한글로 발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설치되었다.[1] 같은 해 11월 28일 기관지 《진단학보》를 창간, 계간으로 14집까지 계속하다가 일본인의 압력으로 중단되었다.[1] 해방 이후 다시 계속되어 15·16집이 나오고 한국 전쟁 이후 17집이 나온 뒤로 23집이 간행되었다.[1] 1959년 이래 《한국사》를 간행하였다.[1] 1957년 초판을 발행한 ‘진단학회 한국사’는 귀중한 재산의 역사로 겨레의 혼을 담았다고 평가한다.

3. 진단의 어원

진단(震檀)은 고대로부터 한국 또는 한민족을 이르는 여러 이름 중 하나였다. '떨칠 진, 벼락 진(震)' 자는 지진과 같이 산하를 뒤흔드는 기상을 품은 박달나무(檀君)의 땅 또는 그 부족을 의미하며, 기개(氣槪)를 느낄 수 있는 글자이다. 진단(震壇), 진국(震國), 진단(震旦), 진역(震域) 등으로도 불렸다.[1]

주역(周易)에서는 진(震)을 존귀하다고 풀이하며, 설괘(說卦)에 나오는 진방(震方)은 동쪽, 즉 동방(東方)을 의미한다. 동쪽은 동서남북의 첫째이자 해가 뜨는 곳으로, 예로부터 진단대륙(震壇大陸), 진단대륙(震旦大陸), 진동대륙(震東大陸)이라 불렸다. 또한 동쪽은 음양오행(陰陽五行)에서 봄(春)에 해당되어 상서로운 이미지로 해석된다.[1]

3. 1. '진단(震檀)'의 의미

진단(震檀)은 고대로부터 한국 또는 한민족을 이르는 이름이다. '떨칠 진(震)' 자를 사용하여 기개(氣槪)를 느낄 수 있다. '지진과 같이 산하를 온통 뒤흔드는 기상을 품은 박달나무(檀君)의 땅' 또는 그 부족을 의미한다.[1] 진단(震壇), 진국(震國), 진단(震旦), 진역(震域) 등으로 칭했다.[1]

주역(周易)에서는 진(震)을 존귀하다고 풀이한다. 주역의 설괘(說卦)에 나오는 진방(震方)은 동쪽, 즉 동방(東方)이다. 동쪽은 동서남북의 첫째이자 해 뜨는 곳으로, 예로부터 진단대륙(震壇大陸), 진단대륙(震旦大陸), 진동대륙(震東大陸)이라 했다. 동쪽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봄(春)에 해당되어 상서로운 이미지로 풀이된다.[1]

3. 2. 다양한 표현

진단(震檀)은 고대로부터 한국 또는 한민족을 이르는 이름이다. 떨칠 진, 벼락 진(震)으로 기개(氣槪)를 느낄 수 있는 글자다. 지진과도 같이 산하를 온통 뒤흔드는 기상을 품은 박달나무(단군·檀君의 상징)의 땅 또는 그 부족을 이른다. 진단(震壇), 진국(震國), 진단(震旦), 진역(震域) 등으로 칭했다.[1]

문자의 뜻보다 주역(周易)에서의 풀이가 뜻이 깊다. 진(震)은 존귀하다. 주역의 설괘(說卦)에 나오는 진방(震方)은 동쪽, 즉 동방(東方)이다. 동쪽은 동서남북의 첫째, 해 뜨는 곳으로 옛부터 진단대륙(震壇大陸), 진단대륙(震旦大陸), 진동대륙(震東大陸)이라 했다. 동쪽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봄(춘·春)에 해당되어 상서로운 이미지로 풀이된다.[1]

3. 3. 주역(周易)에서의 해석

周易|주역중국어에서의 풀이가 뜻이 깊다. 진(震)은 존귀함을 의미한다. 周易|주역중국어의 설괘(說卦)에 나오는 진방(震方)은 동쪽, 즉 동방(東方)이다. 동쪽은 동서남북의 첫째, 해 뜨는 곳으로 옛부터 진단대륙(震壇大陸), 진단대륙(震旦大陸), 진동대륙(震東大陸)이라 했다. 동쪽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봄(春)에 해당되어 상서로운 이미지로 풀이된다.

4. 발기인 및 초대 위원

고유섭, 김두헌, 김상기, 김윤경, 김태준, 김효정, 이병기, 손진태, 이상백, 이선근, 이윤재, 이은상, 이재욱, 이희승, 문일평, 박문규, 백낙준, 송석하, 신석호, 우호익, 조윤제, 최현배, 홍순혁, 이병도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손진태, 김태준, 이윤재, 이희승, 조윤제, 이병도가 초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4. 1. 발기인

고유섭, 김두헌, 김상기, 김윤경, 김태준, 김효정, 이병기, 손진태, 이상백, 이선근, 이윤재, 이은상, 이재욱, 이희승, 문일평, 박문규, 백낙준, 송석하, 신석호, 우호익, 조윤제, 최현배, 홍순혁, 이병도

4. 2. 초대 위원

진단학회 초대 위원은 손진태, 김태준, 이윤재, 이희승, 조윤제, 이병도이다.

5. 친일파 제명 운동

광복 후 지식인들은 '친일 잔재 청산'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을 '친일'로 볼 것인지 명확한 기준이 없어, 지식 엘리트 집단의 내부 분열을 일으킬 만큼 심각했다. 진단학회는 학회 활동을 재개했지만, 손진태와 함께 신민족주의사관을 모색했던 조윤제가 친일파 제명을 주장하면서 내부 갈등을 겪었다.[1]

5. 1. 배경

광복 후 지식인들을 가장 괴롭혔던 문제는 '친일 잔재 청산' 문제였다. 무엇을 '친일'로 볼 것인지 명백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제도권 내로 진입한 지식 엘리트 집단의 내부 분열을 조장할 만큼 정체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식민지 시대 교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친일 문제와 연루될 수 있었다.[1]

5. 2. 경과

진단학회는 1947년 5월에 『진단학보』 제15호를 복간하는 등 학회활동을 재개했지만, 1949년에 제16호, 1955년에 제17호를 내는 정도에 그쳤다. 제17호에야 이병도가 복간사를 썼을 만큼 순탄하지 못했는데, 이는 진단학회 내부에서 일어난 친일파 제명운동사건과 연관이 있었다. 일제 말기부터 손진태와 더불어 신민족주의사관을 모색해온 조윤제가 해방 후 친일파 제명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1]

5. 3. 결과

광복 후 지식인들을 가장 괴롭혔던 문제는 '친일 잔재 청산' 문제였다. 무엇을 '친일'로 볼 것인지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제도권 내로 진입한 지식 엘리트 집단의 내부 분열을 조장할 만큼 정체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식민지 시대에 교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친일 문제와 연루될 수 있었다. 진단학회는 해방 후 1947년 5월에 『진단학보』 제15호를 복간하는 등 학회 활동을 재개했지만, 1949년에 제16호, 1955년에 제17호를 내는 정도에 그쳤고, 제17호에야 이병도가 복간사를 썼을 만큼 순탄하지 못했다. 그것은 진단학회 내부에서 일어난 친일파 제명 운동 사건과 연관이 있었다. 일제 말기부터 손진태와 더불어 신민족주의사관을 모색해 온 조윤제가 해방 후 친일파 제명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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