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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나오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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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이 나오카츠는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이이 나오마사의 장남으로, 히코네 번주를 거쳐 안나카 번의 초대 다이묘를 역임했다. 나오마사 사후 히코네 번을 상속받았으나, 가신단의 갈등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통제 속에서 동생 이이 나오타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안나카 번으로 옮겨갔다. 이후 은거하여 1662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자손은 요이타 번주로 막말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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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나오카쓰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이 나오카쓰
본명이이 나오카쓰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1590년 2월
사망1662년 8월 24일
초기 이름만치요, 나오쓰구
계명운코인덴 겟산 료쇼 다이코지
묘소시즈오카현후쿠로이시가스이사
관위병부소보
씨족이이 씨
가문
가몬히코네 귤
가족 관계
아버지이이 나오마사
어머니하나(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마쓰다이라 야스치카의 딸)
형제자매마사코(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정실), 나오타카, 도쿠코인(다테 히데무네의 정실)
배우자정실: 도리이 다다마사의 딸, 계실: 나카지마 신자에몬의 딸
자녀나오요시, 이이 나오시게의 정실
경력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막부에도 막부
오미사와야마 번주 (히코네 번주) → 고즈케안나카 번주
이이 씨 당주1602년 ~ 1615년
전임이이 나오마사
후임이이 나오타카
안나카 번 초대 번주1615년 ~ 1632년
후임이이 나오시게

2. 생애

덴쇼 18년(1590년),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이이 나오마사의 장남으로 토오토미 국하마마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이 나오마사, 어머니는 도바이인이다. 부인은 토리이 타다마사의 딸과 나카지마 신자에몬의 딸이다. 자녀로는 이이 나오요시(나카지마 신자에몬의 딸 소생)와 딸(이이 나오시게와 결혼)이 있다. 게이초 7년(1602년), 아버지 나오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히코네 번주가 되었고, 이름을 '''나오쓰구'''로 개명했다.[1]

게이초 8년(1603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서쪽 지역을 향한 방어 거점으로서 히코네성 축성을 시작하여, 게이초 11년(1606년)에 완성되자 사와야마성에서 히코네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나오쓰구는 실질적으로 히코네번주의 지위에 있었지만, 가독 계승자로는 분가의 초대 당주로 취급되어 본가의 역대 당주로는 세지 않았다.[1]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시작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이 나오카쓰가 어리석다는 이유로 에도에 가두었다.[5] 이에야스는 나오카쓰 대신 이이 군의 대장으로 이복동생 나오타카를 지명했고, 나오카쓰는 안나카의 관소 경호를 맡았다. 오사카 겨울 전투 후, 이에야스는 나오타카의 활약에 만족하여 그를 정식으로 이이 씨의 가독을 잇게 했다. 한편, 나오카쓰에게는 코즈케 안나카 번 3만 석을 주었다. 이때 나오카쓰는 이름을 '''나오카쓰'''로 바꾸었다.

칸에이 9년(1632년)에 은거하여 장남 나오요시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나오요시는 쇼호 2년(1645년)에 미카와 국니시오번, 만지 2년(1659년)에 토오토미 카케가와번으로 이봉되었고, 은거한 나오카쓰도 이를 따랐다.

칸분 2년(1662년) 7월 11일, 토오토미 카케가와성에서 병사했다. 향년 73세로, 병약하다는 평가와는 달리 이이 종가의 가독을 이은 나오타카보다 장수했다. 자손은 카케가와에서 에치고 국 요이타로 옮겨 요이타번으로서 막말까지 이어졌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덴쇼 18년(1590년), 도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인 이이 나오마사의 장남으로 토오토미 국하마마츠에서 태어났다. 게이초 7년(1602년), 아버지 나오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히코네 번주가 되었고, 이름을 '''나오쓰구'''로 개명했다.[1]

게이초 8년(1603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서쪽 지역에 대한 방어 거점으로서 히코네성 축성을 시작하여, 게이초 11년(1606년)에 완성되자 사와야마성에서 히코네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나오쓰구는 실질적으로 히코네번주의 지위에 있었지만, 가독 계승자로는 분가의 초대 당주로 취급되어 본가의 역대 당주로는 세지 않았다.[1]

어린 나이 때문에 한동안 가로가 정무를 대행했지만, 원래 개성이 강한 자가 많았던 배하의 가신들이 통일되지 않았다. 또한 도쿠가와 가문의 직신에서 나오마사의 기병이 되어 이에야스의 명으로 그대로 이이 가문의 가신이 된 "부인"이라고 불린 중신들 중에는 나오쓰구와 맞지 않아 기회가 되면 다시 하타모토(도쿠가와 가문의 직신)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내부 대립이 심각해졌다. 이에야스는 키마타 모리카츠・스즈키 시게요시 두 명을 가로로 하여 나오쓰구를 보좌하게 할 방침이었지만, 게이초 10년(1605년)에는 부인의 무쿠하라 마사나오・사이고 시게카즈를 중심으로 한 가신단이 스즈키 시게요시・시게타츠 부자의 부정을 이에야스에게 직접 고발했기 때문에 시게요시가 추방되었고,[2] 게이초 15년(1610년)에 키마타 모리카츠가 사망하자, 나오쓰구는 이에야스의 승낙을 얻어 모리카츠의 양자 모리아스가 아닌 스즈키 시게타츠와 무쿠하라 마사나오를 가로로 임명했지만, 부자 모두 집안의 인망을 얻었던 키마타 가문의 배제는 가신들을 동요시켰다.[3][4]

이처럼 집안의 동요가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게이초 14년 12월 단계에서 이에야스는 히코네를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테루에게 주고, 나오쓰구를 타다테루의 가와나카지마로 옮기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듬해 윤2월의 에치고 후쿠시마 소동으로 인해 타다테루가 호리 씨의 구령을 가증받았기 때문에 전봉은 무산되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시작되자, 어리석었기 때문에 에도에 갇혀 있던 나오쓰구[5]의 대리로서 이에야스는 나오타카를 이이 군의 대장으로 지명했고, 나오쓰구는 안나카의 관소 경호를 맡았다. 오사카 겨울 전투 후, 이에야스는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보인 나오타카에게 정식으로 이이 씨의 가독을 잇게 했고, 나오쓰구는 코즈케 안나카번 3만 석을 분여받았다. 이때 나오쓰구에서 '''나오카츠'''로 이름을 개명했다. 이이 가문의 가독 교체는 공식적으로 나오쓰구의 병약함을 이유로 하고 있지만, 당시의 이이 가문(히코네번)은 이에야스의 직접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고 하며, 나오쓰구(나오카츠)・나오타카 사이의 가신단의 분할에 대해서도 이에야스의 명을 받은 막부 연로(로주)가 결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나오쓰구와 부인의 대립 등으로 이에야스로부터 집안을 통제하는 "수완"이 없다고 판단받은 나오쓰구가 당주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보여진다.[4] 이 분할에서는, 이이야마 이래의 가신은 나오쓰구에게, 가이 다케다 씨의 유신 등은 이복 동생 나오타카에게 배속되었다. 또한 이이 가문의 영지 중 히코네는 나오타카, 코즈케 안나카는 나오쓰구가 영유하게 되었다.

2. 2. 히코네 성 축성과 가신단 갈등

게이초 8년(1603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서쪽 지역을 향한 방어 거점으로서 히코네성 축성을 시작하여 게이초 11년(1606년)에 완성되자 사와야마성에서 히코네성으로 거처를 옮겼다.[1] 그러나 나오쓰구는 실질적으로 히코네번주의 지위에 있었지만, 가독 계승자로는 분가의 초대 당주로서 본가의 역대 당주로는 세지 않았다.

어린 나이 때문에 한동안 가로가 정무를 대행했지만, 배하의 가신들은 원래 개성이 강한 자가 많아 통일되지 않았다. 또한 도쿠가와가의 직신에서 나오마사의 기병이 되어 이에야스의 명으로 그대로 이이가의 가신이 된 "부인"이라고 불린 중신들 중에는 나오쓰구와 맞지 않아 기회가 되면 다시 하타모토(도쿠가와가의 직신)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내부 대립이 심각해졌다. 이에야스는 키마타 모리카츠・스즈키 시게요시 두 명을 가로로 하여 나오쓰구를 보좌하게 할 방침이었지만, 게이초 10년(1605년)에는 부인의 무쿠하라 마사나오・사이고 시게카즈를 중심으로 한 가신단이 스즈키 시게요시・시게타츠 부자의 부정를 이에야스에게 직접 고발했기 때문에 시게요시가 추방되었고,[2] 게이초 15년(1610년)에 키마타 모리카츠가 사망하자, 나오쓰구는 이에야스의 승낙을 얻어 모리카츠의 양자 모리아스가 아닌 스즈키 시게타츠와 무쿠하라 마사나오를 가로로 임명했지만, 부자 모두 집안의 인망을 얻었던 키마타가의 배제는 가신들을 동요시켰다.[3][4]

이처럼 집안의 동요가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게이초 14년 12월 단계에서 이에야스는 히코네를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테루에게 주고, 나오쓰구를 타다테루의 가와나카지마로 옮기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듬해 윤2월의 에치고 후쿠시마 소동으로 인해 타다테루가 호리 씨의 구령을 가증받았기 때문에 전봉은 무산되었다.

2. 3. 오사카 전투와 가독 교체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시작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이 나오카쓰가 어리석다는 이유로 에도에 가두었다.[5] 이에야스는 나오카쓰 대신 이이 군의 대장으로 이복동생 나오타카를 지명했고, 나오카쓰는 안나카의 관소 경호를 맡았다. 오사카 겨울 전투 후, 이에야스는 나오타카의 활약에 만족하여 그를 정식으로 이이 씨의 가독을 잇게 했다. 한편, 나오카쓰에게는 코즈케 안나카 번 3만 석을 주었다. 이때 나오카쓰는 이름을 '''나오카쓰'''로 바꾸었다.

이이가의 가독 교체는 공식적으로는 나오카쓰가 병약하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이가(히코네번)가 이에야스의 직접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나오카쓰와 나오타카 사이의 가신단 분할도 이에야스의 명을 받은 막부 연로(로주)가 결정했다. 이는 나오카쓰와 이이가 가신들 간의 대립 등으로 인해, 이에야스가 나오카쓰에게 집안 통제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4]

이 분할에서 이이야마 이래의 가신은 나오카쓰에게, 가이 다케다 씨의 유신 등은 나오타카에게 배속되었다. 또한 이이가의 영지 중 히코네는 나오타카가, 코즈케 안나카는 나오카쓰가 영유하게 되었다.

2. 4. 은거와 죽음

칸에이 9년(1632년)에 은거하여 장남 나오요시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4] 나오요시는 쇼호 2년(1645년)에 미카와 국니시오번으로, 만지 2년(1659년)에 토오토미 카케가와번으로 이봉되었고, 은거한 나오카쓰도 이를 따랐다.

칸분 2년(1662년) 7월 11일, 토오토미 카케가와성에서 병사했다. 향년 73세.[4] 병약하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이 종가의 가독을 이은 나오타카보다 장수했다.

자손은 카케가와에서 에치고 국 요이타로 옮겨 요이타번으로서 막말까지 이어졌다.

3. 일화

1603년(게이초 8년), 이이 나오쓰구는 히코네성을 축성하고 있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천수각 축조에서 공사 지연이 발생했다. 측근은 인주(人柱)를 세울 것을 제안했지만 나오쓰구는 "인주 따위를 세워도 공사가 진척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동의하지 않았다. 공사 지연이 계속되자, 푸신 부교(普請奉行, 토목 공사 책임자)의 딸 기쿠가 인주가 되기를 자청했다. 기쿠가 인주가 된 후,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천수각은 천수대에 세워졌다. 공사가 문제없이 진행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자 푸신 부교를 불렀는데, 그 자리에는 기쿠의 모습이 있었다. 나오쓰구는 인주를 넣은 상자를 빈 상자로 바꿔치기했던 것이다.[1]

4. 계보

구 분내용
아버지이이 나오마사
어머니도바이인
부인
자녀


참조

[1] 서적 井伊家と彦根藩 彦根城博物館 2009
[2] 문서 子・重辰は椋原・西郷らと互いに起請文を取り交わして和解。
[3] 문서 異母弟の直孝も重臣の和田浄閑に宛ててこのことに不満を述べた書状を残っている。
[4] 논문 近世初期における譜代大名〈家中〉の成立 吉川弘文館 2015
[5] 간행물 当代記 1615-01-23 #慶長19年12月4日 (음력) -> 양력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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