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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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자통은 수나라 말기 동해군 출신의 농민 반란 지도자이다. 615년 좌재상에게 합류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이후 두복위에게 의탁했다. 618년 수 양제가 살해된 후 강도(江都)를 점령하고 오(吳) 황제를 칭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621년 당나라에 패배하여 항복했으나, 장안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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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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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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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황제 |
시호 | 없음 |
묘호 | 없음 |
성 | 이(李, Lǐ) |
휘 | 자통(子通, Zǐtōng) |
연호 | 명정(明政, Míng zhèng) |
재위 기간 | 619년 - 621년 |
몰년 | 무덕(武德) 5년 (622년) |
수도 | 강도(江都, Jiāngdū) |
2. 초기 봉기
이자통은 동해군(東海|둥하이중국어), 지금의 롄윈강, 장쑤성) 출신으로, 젊은 시절 가난하여 낚시와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가난했지만 관대했고, 사소한 모욕에도 복수하는 성격이었다. 615년 무렵, 수나라에 대항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창바이산(長白山|창바이산중국어, 지금의 빈저우, 산둥성)의 반란 지도자 좌재상(左才相|쭤차이샹중국어)에게 합류했다. 이자통은 친절하고 관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합류했고, 반년 만에 1만 명의 병력을 모았다. 좌재상은 그를 질투하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자통은 615년에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회하를 건너 또 다른 반란 지도자인 두복위에게 합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자통은 두복위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수나라 장군 내정(來整|라이정중국어)에게 패배하여 하이링(海陵|하이링중국어, 지금의 타이저우, 장쑤성)으로 도망쳐 2만 명의 병력을 모으고 장군 칭호를 자칭했다. 615년에는 초왕을 참칭했다.[1]
619년 가을, 이자통은 당시 진릉(陳稜)이 통치하던 장두(江都, 현재의 장쑤성 양저우)를 포위했다. 진릉은 심법흥과 두복위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두복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릉을 구원했으며, 심법흥은 아들 심관(沈綸)을 보냈다. 이자통은 그의 관료 모문심(毛文深)의 제안을 받아들여 심의 군대인 척하며 두복위를 공격하는 군사를 투입하여 두복위와 심관을 서로 싸우도록 속였다. 두 사람 모두 진릉을 도울 수 없게 되었고, 이자통은 곧 장두를 점령했다. 그는 장두를 점령하자마자 오(吳) 황제의 칭호를 주장했다.[1]
辅公祏|보공석중국어에게 패하여 강도를 버리고 장강을 건너 여항으로 도망쳐 재기를 도모했다. 명정 3년 (621년) 두복위에게 다시 패하자 낙백통과 함께 장안으로 연행되었다. 고조 이연은 이자통에게 저택과 밭을 주어 후하게 대우했지만, 622년 낙백통과 모의하여 난을 일으키려다 남전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明政중국어 619-621
3. 강소성 및 절강성에서의 투쟁
620년, 이자통은 양쯔강을 건너 심법흥을 공격했고, 심법흥은 당시 필릉(毗陵,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에 수도를 두고 있었다. 이자통은 곧 징커우(京口, 현재의 장쑤성 전장)를 점령했고, 심법흥이 그의 장군 장원초(蔣元超)를 이자통에게 보내자, 이자통은 장원초를 격파하고 죽였다. 심법흥은 필릉을 포기하고 오군 (대략 현재의 장쑤성 쑤저우)으로 도망쳤고, 이자통은 필릉과 단양(丹楊, 대략 현재의 장쑤성 난징)을 점령했다. 한편, 당시 당나라에 항복하여 당 고조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받아 이복위로 알려진 두복위는 그의 장군 부공석, 감릉(闞稜), 왕웅탄(王雄誕)을 이자통에게 보냈다. 초기 전투에서 뚜렷한 승부가 나지 않다가, 이자통은 패배했고, 식량이 바닥나자 징커우로 향하다가 징커우마저 포기하고 심법흥을 공격했다. 심법흥은 자살했고, 이자통은 그의 영토, 즉 대략 현재의 저장성을 차지했다. 이자통은 그의 수도를 위항(餘杭, 현재의 저장성 항저우)에 두었다. 그의 옛 영토와 그해 초 심법흥으로부터 빼앗은 영토, 즉 단양과 징커우는 이복위에게 점령되었다.
황태 2년, 이자통은 강도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오'''로, 연호를 명정으로 정했다. 단양에 근거한 낙백통을 항복시키고 상서좌복야에 임명했다. 또한 심법흥을 격파하여 진릉을 빼앗고, 이백약을 비롯한 강남의 사대부들을 많이 귀순시켰다.
4. 패배와 죽음
5.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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