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약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백약은 564년에 태어나 북제, 수나라, 당나라 시대를 거치며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수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당나라 건국에 기여했다. 627년 중서사인에 임명되었고, 628년 예부시랑을 거쳐, 토지 분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태자 이승건에게 간언하는 글을 지었으며, 아버지의 유고를 이어받아 636년에 《북제서》를 완성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이백약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이백약 |
로마자 표기 | Li Baiyao |
생년월일 | 565년 |
사망일 | 648년 |
자 | 중민(重敏) |
출생지 | 정주 영양(현재의 허난성 정저우시) |
국적 | 당나라 |
관직 | |
주요 관직 | 비서감(秘書監) 예부시랑(禮部侍郎) |
저서 | |
주요 저서 | 북제서 |
가문 | |
씨족 | 농서 이씨 |
아버지 | 이덕림 |
2. 생애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관료이자 역사가이다. 아버지는 수나라의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덕림으로, 북제의 역사서를 편찬하다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백약은 어린 시절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며, 수나라에서 태자통사사인(太子通事舍人),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등을 역임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 양제와의 악연으로 좌천되는 등 부침을 겪기도 했다.
수나라 말기의 혼란기에는 강남 지방을 떠돌며 여러 군벌 세력 아래에 머물렀고, 당나라 건국 과정에서는 두복위를 설득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이후 보공석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당 태종 치세에 들어 다시 중용되어 중서사인(中書舍人), 예부시랑(禮部侍郞),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 등을 지냈다. 이 시기 그는 〈봉건론(封建論)〉을 올려 황족과 공신에 대한 토지 분배에 반대했고, 태자 이승건에게는 〈찬도부(贊道賦)〉를 지어 간언하는 등 소신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아버지 이덕림의 유업을 계승하여 북제의 역사를 기록한 《제서(齊書)》를 636년 완성한 것이다. 이 책은 훗날 《북제서》로 불리게 되었다.
648년 84세로 생을 마감했으며, 사후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이안기는 당 고종 때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2. 1. 초기 생애와 북제, 수나라에서의 활동
564년 정주(定州) 박릉군 안평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북제에서 벼슬을 하다가 수나라에서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덕림이다. 아버지 이덕림은 북제의 역사서를 편찬하던 중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이백약은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할머니 조씨(趙氏)가 그의 건강을 기원하며 '백약(百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7세 때 이미 문장에 능했으며, 아버지의 친구인 육예(陸乂)와 서릉이 지은 글 중 어려운 구절을 해독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음서 제도를 통해 삼위장(三衛長)으로 북주의 조정에 처음 출사하였다.
수나라 개황 원년(581년)에는 태자통사사인(太子通事舍人)과 동궁학사(東宮學士)에 임명되었다. 599년(개황 19년)에는 인수궁(仁壽宮)으로 불려가 아버지의 작위인 안평현공을 계승했다. 양소와 우홍 등은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삼았다. 수문제의 명을 받아 오례, 율령, 음양 관련 서적 편찬과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전에 이백약이 병으로 사인(舍人) 직책을 사임했을 때, 당시 양주에 있던 양광(훗날의 수 양제)이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양광이 황제로 즉위한 후, 이백약은 작위를 박탈당하고 계주(桂州, 현재 광서성 계림시)의 사마로 좌천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613년(대업 9년) 회계군에서 관숭(管崇)의 반란이 일어나자 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워 건안군의 군승(郡丞, 군의 보좌관)에 임명되었다.
수나라 말기 강남(江南) 지방은 전란이 계속되면서 심법흥, 이자통, 두복위 등 여러 군벌들이 할거하였다. 이 시기 이백약은 이들의 휘하를 전전하며 지냈다.
2. 2.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당나라 건국
수나라 말기 강남 지방은 반란이 계속되면서 심법흥, 이자통, 두복위 등 군벌들이 할거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백약은 이 시기 그들의 휘하를 전전하였다. 613년에는 회계군에서 일어난 관숭(管崇)의 반란에 직면하여 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우고 건안군의 군승(郡丞)에 임명되기도 했다.당 고조 이연이 두복위를 회유하려 했을 때, 이백약은 두복위를 설득하여 장안으로 향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두복위는 도중에 이를 후회하고 이백약을 죽이려 했으나, 그의 부하 장수인 왕웅탄(王雄誕)의 보호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보공석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의 밑에서 이부시랑에 임명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 고조는 이백약 역시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오해하여 분노했으나, 두복위가 보공석에게 이백약을 죽이라고 보낸 편지가 발견되면서 이백약은 목숨을 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공석의 난이 당나라 군대에 의해 평정된 후 이백약은 경주(涇州) 사마로 좌천되었다.
2. 3. 당나라에서의 활동과 《북제서》 편찬
수나라 말기 강남 지방의 혼란 속에서 이백약은 심법흥, 이자통, 두복위 등 여러 세력 아래를 전전했다. 당 고조 이연이 두복위를 회유하려 할 때, 이백약은 두복위를 설득하여 장안으로 향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두복위는 도중에 마음이 변해 이백약을 죽이려 했으나, 부하 장수 왕웅탄(王雄誕)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보공석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의 밑에서 이부시랑에 임명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 고조는 이백약마저 반란에 가담했다며 분노했지만, 두복위가 보공석에게 이백약을 죽이라고 보낸 편지가 발견되면서 누명을 벗고 목숨을 구했다. 당나라 군대가 보공석의 난을 평정한 후, 이백약은 경주(涇州)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정관 원년(627년),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되고 안평현개국남에 봉해졌으며, 이후 개국자로 진급하였다. 정관 2년(628년)에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황족과 공신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백약은 〈봉건론(封建論)〉을 올려 이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당 태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토지 분배 계획을 중단했다. 정관 4년(630년)에는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에 임명되었다. 당시 태자였던 이승건의 품행에 문제가 있자, 이백약은 〈찬도부(贊道賦)〉를 지어 간언하기도 했다.
이백약은 아버지 이덕림이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북제의 역사서 편찬 작업을 이어받았다. 정관 10년(636년), 마침내 《제서(齊書)》라는 이름으로 역사서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훗날 북송 시대에 소자현(蕭子玄)이 편찬한 《남제서》와 구분하기 위해 《북제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관 22년(648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강(康)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이안기는 당 고종 때 잠시 재상을 지냈다.
참조
[1]
논문
The Halberd at Red Cliff: Jian'an and the Three Kingdoms
2021-11
[2]
서적
The Halberd at Red Cliff
2018
[3]
논문
Representations of Liang Emperor Wu as a Buddhist Ruler in Sixth-and Seventh-century Texts
2011
[4]
간행물
In search of jade: Studies of Early Tang poetry
1999
[5]
논문
The Sengchou Cave and Early Imagery of Sukhāvatī
20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