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4세 다르마냐크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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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4세 다르마냐크 백작은 1396년에 태어나 1418년 아버지 베르나르 7세가 사망한 후 아르마냐크 백작이 되었다. 그는 코맹 백작령을 둘러싼 분쟁에 휘말렸고, 1425년에는 카스티야 왕을 자신의 영주로 인정하여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와 갈등을 겪었다.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모색하며 1437년 헨리 6세와 조약을 체결했으나, 1440년 프라게리의 난에 가담했다가 실패했다. 1442년에는 딸과 헨리 6세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무산되었고, 1444년에는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3년 후 사면되었다. 장 4세는 두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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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4세 다르마냐크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장 4세 |
작위 | 아르마냐크 백작 |
가문 | 아르마냐크 가문 |
생애 | |
출생일 | 1396년 10월 15일 |
사망일 | 1450년 11월 5일 |
사망 당시 나이 | 54세 |
가계 | |
아버지 | 베르나르 7세 |
어머니 | 본느 드 베리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블랑슈 드 브르타뉴 이사벨 도 나바르 |
자녀 | 본느 마리 장 5세 엘레오노르 샤를 1세 이사벨 |
기타 | |
재임 기간 | 1418년 - 1450년 |
2. 생애
1396년 10월 15일에 태어난 장 4세는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와 본 드 베리의 아들이다. 1418년 6월 12일 폭도들에 의해 그의 아버지가 살해된 후, 장 4세는 아르마냐크 백작이 되었다.
장 4세의 아버지 베르나르 7세는 무력으로 코맹 백작령을 점령했지만, 장 4세는 1419년 마르그리트 드 코맹와 마티외 드 푸아의 재혼을 막을 수 없었다. 그 후, 그들은 코맹 백작령을 되찾았다.
1425년, 장 4세는 카스티야 왕을 아르마냐크의 영주로 인정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싸우느라 개입할 수 없었지만, 이 모욕을 간과하지 않았다. 샤를 7세와의 갈등은 그로 하여금 잉글랜드와의 접근을 모색하게 했다. 1437년 7월, 장 4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건 중 하나는 아르마냐크가 그의 신하들이 잉글랜드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장 4세는 프라게리의 난(1440년)에 남작들과 도팽 루이와 함께 참여했지만, 연합은 샤를 7세에 의해 제압되었고, 그는 반란자들을 사면했다.
1442년, 장 4세는 그의 딸 중 한 명과 잉글랜드의 헨리 6세의 결혼 협상을 시작했다. 장 4세는 샤를 7세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강력한 동맹을 간절히 원했고, 잉글랜드는 그의 영토를 프랑스의 공격에 대한 방어 완충 지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프랑스 남서부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그의 영토는 그를 잉글랜드 왕관보다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데 훨씬 더 유리하게 만들었다. 장은 잉글랜드와의 동맹과 샤를 7세와의 화해 시도 중 어느 것이 최선인지 평가하면서 협상을 지연시킨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의 영주로부터의 위협과 잉글랜드 측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혼 협상은 끝났다.
장 4세는 리르-주르댕 영지에서 도팽 루이에 의해 포위되었고, 1444년 카르카손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3년 후 사면되었지만 그의 백작령은 왕실 관리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2. 1. 초기 생애
1396년 10월 15일, 장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와 베리의 본의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 6월 12일, 아버지가 폭도들에게 살해되자 장은 아르마냐크 백작이 되었다.장의 아버지는 코맹 백작령을 무력으로 점령했지만, 장은 1419년 마르그리트와 마티외 드 푸아의 재혼을 막지 못했다. 이후 그들은 코맹 백작령을 되찾았다.
1425년, 장은 카스티야 왕을 아르마냐크의 영주로 인정했다.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싸우느라 개입할 수 없었지만, 이 모욕을 간과하지 않았다. 샤를 7세와의 갈등은 그로 하여금 잉글랜드와의 접근을 모색하게 했다. 1437년 7월, 장과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건 중 하나는 아르마냐크가 그의 신하들이 잉글랜드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 2. 아르마냐크 백작 계승과 코맹 백작령 분쟁
1396년 10월 15일에 태어난 장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와 베리의 본의 아들이었다. 1418년 6월 12일 폭도들에 의해 그의 아버지가 살해된 후, 장은 아르마냐크 백작이 되었다.장의 아버지는 무력으로 코맹 백작령을 점령했지만, 장은 1419년 마르그리트 드 코맹와 마티외 드 푸아의 재혼을 막을 수 없었다. 그 후, 그들은 코맹 백작령을 되찾았다.
1425년, 장은 카스티야 왕을 아르마냐크의 영주로 인정했다.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싸우느라 개입할 수 없었지만, 이 모욕을 간과하지 않았다. 샤를 7세와의 갈등은 그로 하여금 후자의 적, 즉 잉글랜드와의 접근을 모색하게 했다. 1437년 7월, 장과 헨리 6세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건 중 하나는 아르마냐크가 그의 신하들이 잉글랜드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장은 프라게리 (1440년)에 남작들과 프랑스 도팽에 참여했지만, 연합은 프랑스의 샤를 7세에 의해 제압되었고, 그는 반란자들을 사면했다.
장은 1442년에 그의 딸 중 한 명과 잉글랜드의 헨리 6세의 결혼 협상을 시작했다. 장은 샤를 7세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강력한 동맹을 간절히 원했고, 영국은 그의 영토를 프랑스의 공격에 대한 방어 완충 지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프랑스 남서부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그의 영토는 그를 잉글랜드 왕관보다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데 훨씬 더 유리하게 만들었다. "... 아르마냐크 백작은 가스코뉴의 국경을 방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돈, 토지, 사람을 엄청난 지참금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장은 영국과의 동맹과 샤를 7세와의 화해 시도 중 어느 것이 최선인지 평가하면서 협상을 지연시킨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의 영주로부터의 위협과 영국 측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혼 협상은 끝났다.
장은 리르-주르댕 영지에서 도팽 루이 11세에 의해 포위되었고, 1444년 카르카손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3년 후 사면되었지만 그의 백작령은 왕실 관리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2. 3. 프랑스 왕과의 갈등과 잉글랜드와의 관계
1396년 10월 15일에 태어난 장 4세는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와 본 드 베리의 아들이다. 1418년 6월 12일 폭도들에 의해 그의 아버지가 살해된 후, 장 4세는 아르마냐크 백작이 되었다.장 4세의 아버지 베르나르 7세는 무력으로 코맹 백작령을 점령했지만, 장 4세는 1419년 마르그리트와 마티외 드 푸아의 재혼을 막을 수 없었다. 그 후, 그들은 코맹 백작령을 되찾았다.
1425년, 장 4세는 카스티야 왕을 아르마냐크의 영주로 인정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싸우느라 개입할 수 없었지만, 이 모욕을 간과하지 않았다. 샤를 7세와의 갈등은 그로 하여금 잉글랜드와의 접근을 모색하게 했다. 1437년 7월, 장 4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건 중 하나는 아르마냐크가 그의 신하들이 잉글랜드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장 4세는 프라게리의 난(1440년)에 남작들과 도팽 루이와 함께 참여했지만, 연합은 샤를 7세에 의해 제압되었고, 그는 반란자들을 사면했다.
1442년, 장 4세는 그의 딸 중 한 명과 잉글랜드의 헨리 6세의 결혼 협상을 시작했다. 장 4세는 샤를 7세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강력한 동맹을 간절히 원했고, 잉글랜드는 그의 영토를 프랑스의 공격에 대한 방어 완충 지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프랑스 남서부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그의 영토는 그를 잉글랜드 왕관보다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데 훨씬 더 유리하게 만들었다. 장은 잉글랜드와의 동맹과 샤를 7세와의 화해 시도 중 어느 것이 최선인지 평가하면서 협상을 지연시킨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의 영주로부터의 위협과 잉글랜드 측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혼 협상은 끝났다.
장 4세는 리르-주르댕 영지에서 도팽 루이에 의해 포위되었고, 1444년 카르카손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3년 후 사면되었지만 그의 백작령은 왕실 관리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2. 4. 프라게리 반란 가담과 투옥
1418년 아버지 베르나르 7세가 살해된 후, 장 4세는 아르마냐크 백작이 되었다. 아버지 베르나르 7세는 무력으로 코망주 백작 영지를 점령했으나, 장 4세는 1419년에 코망주 여백작 마르그리트와 마티외 드 푸아와의 재혼을 막을 수 없었다. 이후 마르그리트 등은 코망주 백작 영지를 되찾았다.1425년, 장 4세는 카스티야 왕을 아르마냐크의 군주로 인정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전념하고 있었기에 개입할 수 없었지만, 이를 간과하지 않고, 장 4세는 프랑스 왕과 대립하게 되었다. 장 4세는 더 나아가 샤를 7세와 대립하는 잉글랜드와의 접근을 모색하게 되었다. 1437년 7월, 장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6세는 조약에 서명했는데, 그 조건 중 하나는 아르마냐크 백작의 신하가 잉글랜드에 대해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아르마냐크 백작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440년, 장 4세는 남작과 프랑스 왕세자 루이가 일으킨 프라게리의 난에 가담했지만, 이 연합군은 샤를 7세에 의해 격파되었고, 샤를 7세는 반란자들을 사면했다.
1442년에 자신의 딸과 잉글랜드 왕 헨리 6세와의 결혼 교섭을 시작했다. 장 4세는 샤를 7세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강력한 동맹을 갈망했지만, 한편 잉글랜드 측은 장 4세의 영토를 프랑스의 공격에 대한 방어 완충 지대로 이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장 4세의 영토는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해 있었으며, 가스코뉴를 지키는 데 있어서 영국 왕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아르마냐크 백작은 가스코뉴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막대한 돈, 영지, 인원을 지참금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장은 잉글랜드와 동맹할지, 아니면 샤를 7세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최선일지 검토하고 있었기에, 교섭을 지연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프랑스 왕의 협박과 잉글랜드 측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혼 교섭은 종지부를 찍었다.
장 4세는 프랑스 왕세자 루이에 의해 남프랑스의 에서 포위되었다. 1444년, 결국 체포되어 카르카손에 유폐되었다. 장 4세는 3년 후에 사면되었지만, 백작 영지는 왕가의 관리인에 의해 관리되었다.
2. 5. 잉글랜드와의 결혼 협상 시도
1437년 7월, 장 4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와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건 중 하나는 아르마냐크 백작의 신하가 잉글랜드에 대해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아르마냐크 백작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1442년에는 그의 딸 중 한 명과 잉글랜드의 헨리 6세의 결혼 협상을 시작했다. 장 4세는 샤를 7세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강력한 동맹을 간절히 원했고, 잉글랜드는 그의 영토를 프랑스의 공격에 대한 방어 완충 지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프랑스 남서부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그의 영토는 그를 잉글랜드 왕관보다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데 훨씬 더 유리하게 만들었다. 장은 잉글랜드와의 동맹과 샤를 7세와의 화해 시도 중 어느 것이 최선인지 평가하면서 협상을 지연시킨 것으로 보이며, 결국 프랑스 왕의 협박과 잉글랜드 측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혼 협상은 결렬되었다.
2. 6. 체포와 사망
1418년 부르고뉴 파 폭도에 의해 아버지 베르나르 7세가 살해되자, 장 4세는 아르마냐크 백작이 되었다. 아버지 베르나르 7세는 무력으로 코망주 백작 영지를 점령했으나, 장 4세는 1419년에 코망주 여백작 마르그리트와 마티외 드 푸아와의 재혼을 막을 수 없었다.1425년, 장 4세는 카스티야 왕을 아르마냐크의 군주로 인정했다. 프랑스 국왕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전념하고 있었기에 개입할 수 없었지만, 이를 간과하지 않고, 장 4세는 프랑스 왕과 대립하게 되었다.
1437년 7월, 장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6세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건 중 하나는 아르마냐크 백작의 신하가 잉글랜드에 대해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아르마냐크 백작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442년에는 자신의 딸과 헨리 6세와의 결혼 교섭을 시작했지만, 프랑스 왕의 협박과 잉글랜드 측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혼 교섭은 종지부를 찍었다.
장 4세는 남작과 프랑스 왕세자 루이가 일으킨 프라게리의 난 (1440년)에 가담했지만, 이 연합군은 샤를 7세에 의해 격파되었고, 샤를 7세는 반란자들을 사면했다.
1444년, 장 4세는 프랑스 왕세자 루이에 의해 남프랑스의 에서 포위되었고, 결국 체포되어 카르카손에 유폐되었다. 1447년 사면되었지만, 백작 영지는 왕가의 관리인에 의해 관리되었다.
3. 혼인과 자녀
장 4세와 나바라의 후아나의 딸인 블랑슈 드 브르타뉴와 1407년 6월 16일에 혼인하여, 딸 본느(1416년 ~1448년)를 두었다.[2]
첫 번째 아내 블랑슈가 죽은 직후, 1419년 5월 10일에 나바라의 카를로 3세와 레오노르 데 트라스타마라의 딸인 이사벨라 데 나바라와 재혼했다.[1]
그들 사이에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 마리 다르마냐크 (1420년 ~ 1473년) : 1437년 알랑송 공작인 장 2세 달랑송과 혼인함. 앙리 4세의 모계쪽 조부모이다.
- 장 5세 다르마냐크 (1420년 ~ 1473년) : 로마뉴(Lomagne) 자작이며, 이후 아르마냐크와 페젠사크, 로데스의 백작이 된다.
- 엘레오노르(Eléonore, 1423년 ~ 1456년) :1446년에 도랑주(d'Orange) 대공이자 알레와 아르겔(Arguel)의 군주 루이 2세 드 샬로날레와 혼임함.
- 샤를 1세 다르마냐크 (1425년 ~ 1497년) : 페젠사게(Fézensaguet) 자작이며, 이후 아르마냐크와 페젠사크, 로데스 백작이 된다.
- 이자벨 (Isabelle, 1430년 ~ 1476년) : 푸르(Four) 계곡의 여공
3. 1. 첫 번째 결혼
장 4세 다르마냐크 백작은 1407년 6월 16일 장 4세 드 브르타뉴와 후아나 데 나바라의 딸인 블랑슈 드 브르타뉴와 혼인했다.[2] 이 결혼을 통해 그는 딸 본느(Bonne, 1416년 ~1448년)를 얻었다.[2]3. 2. 두 번째 결혼
장 4세 다르마냐크 백작은 1407년 6월 16일 장 4세 드 브르타뉴와 후아나 데 나바라의 딸인 블랑슈 드 브르타뉴와 혼인했다.[2] 이 결혼을 통해 본느(Bonne, 1416년 ~1448년)라는 딸 한 명을 두었다.1419년 5월 10일, 그는 첫 번째 아내 블랑슈가 사망한 후 카를로 3세 데 나바라와 레오노르 데 트라스타마라의 딸인 이사벨라 데 나바라와 재혼했다.[1] 이 두 번째 결혼을 통해 그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 마리 다르마냐크 (1420년 ~ 1473년) : 1437년 알랑송 공작인 장 2세 달랑송과 혼인했으며, 앙리 4세의 모계쪽 조부모이다.
- 장 5세 다르마냐크 (1420년 ~ 1473년) : 로마뉴 자작, 이후 아르마냐크와 페젠사크, 로데스의 백작이 되었다.
- 엘레오노르(Eléonore, 1423년 ~ 1456년) : 1446년에 도랑주 대공이자 알레와 아르겔의 군주 루이 2세 드 샬로날레와 혼인했다.
- 샤를 1세 다르마냐크 (1425년 ~ 1497년) : 페젠사게 자작, 이후 아르마냐크와 페젠사크, 로데스 백작이 되었다.
- 이자벨 (Isabelle, 1430년 ~ 1476년) : 푸르 계곡의 여공
참조
[1]
서적
Joan of Arc: Her Story
St. Martin's Press
1999
[2]
서적
Histoire de Bretagne
H. Vatar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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