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컵 리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이컵 리틀은 1794년 매사추세츠주 뉴버리포트에서 태어난 미국의 투기꾼이었다. 그는 공매도와 매점매석을 활용하여 시세 조작을 통해 이익을 얻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증권 시장의 나폴레옹"으로 불렸다. 그는 1834년 모리스 운하 및 은행 회사, 1835년 할렘 철도 주식 매점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철도 건설에도 투자하여 "철도왕"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리틀은 1857년 공황으로 모든 것을 잃고 파산했으며, 이후 잊혀졌다. 그는 시장 변동 예측에 의존하여 투자 결정을 내린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으며, 오늘날 내부 정보로 간주되는 정보를 활용하지 않고도 성공한 선구적인 투기꾼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94년 출생 - 윌리엄 휴얼
영국의 박식한 학자이자 사상가인 윌리엄 휴얼은 수학, 과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고, "과학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귀납 추론 분석과 "통합" 개념으로 과학철학에 영향을 주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개혁과 건축에도 기여했다. - 1794년 출생 - 이이 나오아키
이이 나오아키는 히코네 번의 15대 번주로, 다이로에 임명되었으나 이에나리파 숙청 사건으로 사임 후 개명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서양식 군대 연성에 힘썼으며, 가악 연주와 악기 수집에도 조예가 깊었다. - 1865년 사망 -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은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무정부주의자로, 사유 재산 제도를 비판하고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자유로운 사회를 옹호했으며, 반유대주의와 여성 차별적인 견해로 비판받았다. - 1865년 사망 - 로버트 피츠로이
로버트 피츠로이는 영국의 해군 장교이자 과학자로, 비글호 함장으로서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하며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연구에 기여했고, 뉴질랜드 총독을 역임한 후 기상 예보 시스템의 기초를 마련했으나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 미국의 투자가 - 마이클 조던
마이클 조던은 1963년 뉴욕에서 태어나 시카고 불스에서 활약하며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으며 6번의 NBA 챔피언십 우승, 5번의 MVP 수상, 10번의 득점왕을 차지했고, 은퇴 후 야구 선수로 활동하거나 샬럿 호네츠의 구단주로 활동하기도 했다. - 미국의 투자가 - 재러드 쿠슈너
재러드 쿠슈너는 미국의 사업가, 투자자, 부동산 개발업자, 신문 발행인이자 도널드 트럼프의 사위이며 전 미국 대통령 수석 고문으로, 쿠슈너 컴퍼니즈 CEO로서 부동산 사업을 확장하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다양한 정책 분야에 관여했으며, 현재는 투자 회사 애피니티 파트너스를 설립하여 투자 활동을 하고 있다.
제이컵 리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제이콥 리틀 |
![]() | |
출생일 | 1794년 3월 17일 |
출생지 | 매사추세츠주 뉴베리포트 |
사망일 | 1865년 3월 28일 |
사망지 | 뉴욕주 뉴욕 |
직업 | 투자자, 주식 투기꾼 |
활동 기간 | 1835–1857 |
이사회 | 뉴욕 증권 거래소 |
2. 초기 생애 및 배경
제이콥 리틀은 1794년 3월 17일 매사추세츠주 뉴버리포트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지역 조선업자였으며,[2] 집안은 퀘이커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3] 리틀은 어린 시절부터 돈과 금융 시장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을 보였다.
1817년 그는 뉴욕 시로 이주하여 당시 성공한 금융인이자 상인이었던 제이콥 바커 밑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금융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4][5][6] 바커 밑에서 5년간 견습 생활을 한 후, 1822년 자신이 모은 700USD의 자본금으로 독립하여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2] 그는 월가 건물 지하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했고, 그곳에서 12년 동안 사업을 운영했다.[5] 이후 1834년에는 옛 거래소 건물 지하에 새로운 사무실을 열고 중개업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투자 경력을 시작했다.[4]
2. 1. 제이콥 바커와의 인연
1817년 뉴욕으로 이주한 리틀은 당시 성공한 금융업자이자 상인이었던 제이콥 바커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3. 시장 조작과 투기 활동
제이콥 리틀은 은행업과 주식 중개업이 성장하던 시기에 주식 시장에 진출했다. 당시 시장은 건전한 투자자보다 시세 조작을 통해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었다.[11] 리틀은 이러한 환경에서 공매도와 매점매석 같은 공격적인 투자 전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하여 막대한 부를 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2]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시세 조작 연구와 통화 투기에 쏟을 정도로 야심 차고 부지런했다.[5]
리틀은 모리스 운하 및 은행 회사나 할렘 철도 주식 거래와 같은 성공적인 투자를 통해 초기 명성을 얻었으며,[2] 이는 그에게 "증권 시장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5] 또한 1837년 공황을 예측하고 공매도를 통해 위기 속에서 큰 수익을 올려 "월스트리트의 위대한 베어(Great Bear of Wall Street)"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5] 그는 철도 산업에 대한 초기 대규모 투자를 통해 "철도왕"으로 불리기도 했으나,[5][8] 그의 투기적이고 때로는 비양심적인 거래 방식은 동료들 사이에서 비판과 불신을 사기도 했다.[7][2][3][10]
리틀은 이리 철도 회사 주식을 둘러싼 경쟁자들과의 대결에서 전환사채를 활용하여 위기를 넘기는 등[3]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의 공격적인 방식은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보이콧을 당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7][5] 그는 경력 동안 여러 차례 파산했지만,[14] 특유의 회복력으로 재기에 성공하며 신용을 유지했다.[2]
그러나 1857년 공황은 그의 예측을 벗어났고, 시장 상승에 베팅했던 그는 주가 폭락과 마진 콜로 인해 최종적으로 파산했다.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재기하지 못하고 월스트리트 거물로서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2]
3. 1. 공매도와 매점매석
리틀은 은행업과 주식 중개업이 단순한 보조 활동을 넘어 수익을 추구하는 독립적인 사업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주식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 시장 성장의 상당 부분은 건전한 투자자보다는 투기적인 "장사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자산이나 타인의 자산을 이용하여 시세 조작을 통해 이익을 추구했다. 미국 남북 전쟁 직전 월스트리트에는 수백 개의 투기적 중개 회사가 난립했다. 시장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리려는 강세 파벌과 내리려는 약세 파벌이 대립하며 종종 부정한 방법으로 시세를 조작하여 정당한 주식 중개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11]리틀은 이러한 시세 조작을 초기에 성공적으로 활용한 인물 중 하나로, 특히 공매도와 매점매석 전략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공매도는 특정 주식의 가격 하락을 예상하고 해당 주식을 빌려 매도한 뒤, 실제로 가격이 하락하면 싼값에 다시 사들여 빌린 주식을 갚고 차익을 얻는 방식이다(현재의 공매도 규정은 당시보다 복잡하다). 반대로 매점매석은 특정 회사나 부문의 주식 또는 채권을 대량으로 사들여 인위적으로 가격을 급등시키는 방법으로, 이를 통해 해당 자산을 공매도한 세력에게 손실을 입히거나 비싼 가격에 되팔아 이익을 얻었다.[2] 리틀은 매우 부지런하고 야심 찬 인물로, 사무실에서 하루 12시간을 이러한 시세 조작 연구에 몰두했으며, 저녁에는 추가로 6시간을 통화 투기에 할애했다고 알려져 있다.[5]
그의 첫 주요 성공은 1834년 모리스 운하 및 은행 회사(Morris Canal and Banking Company) 주식을 성공적으로 매점매석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주가는 1834년 12월 주당 10 USD에서 1835년 1월 주당 185 USD까지 치솟았다. 리틀은 이때 차익 실현을 결정했는데, 이론적으로는 회사를 완전히 장악했기에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시장 불안정과 잠재적 붕괴를 우려하여 무리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같은 해 9월에는 할렘 철도(Harlem Railroad) 주식을 대상으로 비슷한 매점매석을 성공시켰다. 당시 약 6만 주가 공매도 상태였으나 실제 발행된 주식은 7천 주에 불과했기 때문에, 리틀은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2]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리틀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으며, 공매도를 통해 수백만 달러 상당의 증권을 축적하여 "증권 시장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점잖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며, 국가 주요 경제계 인사들과 교류하고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의 독실한 신자였다고 전해진다.[5] 그러나 거래자로서 그는 때때로 비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보스턴의 거래자들에게 노리치 및 우스터 철도(Norwich and Worcester Railroad) 주식을 주당 90 USD 이하로는 팔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가격이 하락하자 약속을 어기고 매도하여 동료들의 비난과 분노를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판단력, 신속한 거래 능력, 탁월한 재정적 선견지명으로도 유명했다.[7] 리틀은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의 미국 제2 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 폐지 정책과 그로 인한 1837년 공황을 예측하고, 금융 붕괴 동안 자신의 보유 자산을 공매도하여 오히려 이익을 얻었다. 이 성공적인 작전으로 그는 "월스트리트의 위대한 베어(Great Bear of Wall Street)"라는 가장 유명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5] 리틀 자신도 종종 약세장 기조에 따라 "주식을 약세로 만들고 있다"고 공언하곤 했다.[7][5]
리틀은 당시 금융가들 사이에서 아직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했던 철도 건설 산업에 대한 대규모 초기 투자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1845년 프로비던스 및 우스터 철도(Providence and Worcester Railroad)에 대한 그의 10만달러 투자는 회사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 이러한 철도 투자는 성공을 거두어 그에게 "철도왕"이라는 또 다른 별명을 안겨주었다.[5] 그러나 그의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료들은 그의 투기적이고 다른 거래자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의 재산 축적 방식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개인적인 정직성이 부족하다고 여겼다.[2][3][10] 리틀은 "하루에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많은 증서를 먹고 소화한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대규모 거래를 일삼았다.[9] 다른 투자자들은 그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며 그를 "잡기에는 너무 영리하고, 망하기에는 너무 부자"라고 칭했고, 그의 시장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다.[10]
하지만 매점매석의 달인인 리틀 자신도 역으로 매점매석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12] 그는 특히 이리 철도 회사(Erie Railroad Company) 주식을 공매도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한번은 "해피 패밀리(Happy Family)"라고 불리는 경쟁 주식 중개인 신디케이트가 이리 철도 주식을 매점매석하여 리틀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약속된 결제일에 중개인들은 리틀이 궁지에 몰릴 것을 예상하며 이리 철도 회사 사무실에 모였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사실은 리틀이 몇 년 전 런던에서 열린 회사 채권 매각 당시 전환사채를 미리 확보해 두었다는 것이다. 리틀은 태연하게 사무실에 나타나 가방에서 전환사채를 꺼내 주식으로 전환했고, 이를 통해 신디케이트의 매점매석 시도를 무력화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수십만 달러의 이익을 거두었다.[3] 이 사건 이후로는 누구도 리틀을 상대로 비슷한 시도를 하지 못했다.[10]
그러나 이러한 공격적인 거래 방식은 다른 투자자들에게 큰 반감을 샀고, 그는 뉴욕 증권 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에서 여러 차례 보이콧을 당하기도 했다. 이리 철도 사건 이후에는 옵션 계약의 만기를 60일로 제한하는 규칙이 만들어져 공매도 세력이 비슷한 방식으로 기습당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조치가 취해졌다.[7][5][13] 몇 차례의 부침 끝에 리틀은 1846년까지 다시 200만달러 상당의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같은 해 노리치 및 우스터 철도(Norwich and Worcester Railroad) 주식을 매점매석하려다 실패하여 부풀려진 가격에 대량의 주식을 떠안게 되면서 약 10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다.[2]
주식 시장에서의 부침은 흔한 일이었고, 리틀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의 경력 동안 여러 차례(세 번 또는 아홉 번으로 기록됨) 파산을 겪었다.[14] 한번은 파산 후 친구와 함께 당시 뉴욕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유니언 스퀘어를 걷다가 "오늘 이 광장 전체를 살 만큼의 돈을 잃었네. 그래, 저기 있는 사람들의 절반까지도 살 수 있었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틀은 파산할 때마다 놀라운 회복력으로 재기에 성공했고, 심지어 과거의 채무까지 모두 변제하여 "제이콥 리틀의 부도 처리된 어음이 다른 사람들의 수표보다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틀의 예측 능력은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1857년 공황이 발생했을 때, 그는 시장 상승에 베팅하는 "롱(long)" 포지션 상태로 막대한 양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부분은 대출을 받아 "마진(margin)"으로 구매한 상태였다. 주가가 폭락하자 그는 대출 기관으로부터 마진 콜(추가 증거금 요구)을 받게 되었고, 결국 파산했다.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재기하지 못했다. 리틀은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고, 월스트리트 동료들의 신뢰와 지원을 다시 얻지 못하면서 한 시대의 거물로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2]
3. 2. 모리스 운하 및 은행 회사, 할렘 철도 인수
리틀의 첫 번째 큰 성공은 1834년 모리스 운하 및 은행 회사(Morris Canal and Banking Company)를 성공적으로 인수했을 때 찾아왔다. 그는 매점매석을 통해 이 회사의 주가를 조작했는데,[2] 이로 인해 주식 가격은 1834년 12월 주당 10USD에서 1835년 1월 주당 185USD로 폭등했다. 리틀은 이때 부채를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론적으로는 회사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시장의 불안정과 잠재적 붕괴를 우려하여 더 이상 압박하지 않았다.[2]같은 해 9월, 리틀은 할렘 철도(Harlem Railroad) 주식에서도 비슷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할렘 철도 주식은 발행된 주식이 7천 주에 불과했으나, 약 6만 주가 공매도된 상태였다. 리틀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주식을 매점매석했고, 이를 통해 다시 한번 막대한 부를 쌓았다.[2]
이러한 성공적인 시세 조작들을 통해 리틀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증권 시장에서의 막대한 영향력으로 인해 "증권 시장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5]
3. 3. 이리 철도 회사와의 대결
리틀은 특히 이리 철도 회사(Erie Railroad Company)의 주식을 공매도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 때문에 '해피 패밀리'라고 불리는 경쟁 관계의 주식 중개인 신디케이트에게 매점매석 함정에 빠지기도 했다.[12] 이는 리틀이 과거 다른 수많은 거래자들에게 했던 방식과 거의 동일했다. 당시에는 매수 약속을 이행하려면 해당 회사 사무실에서 직접 거래해야 했다. 약속 당일, 중개인들은 이리 철도 회사 사무실에 모여 리틀을 그의 방식대로 이겼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사실은 리틀이 몇 년 전 런던에서 열린 회사 매각 과정에서 전환사채를 미리 사두었다는 점이었다. 리틀은 서두르지 않고 사무실에 나타나, 해당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이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모두가 놀랍게도 리틀은 신디케이트의 허를 찔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십만 달러의 이익을 거두었다.[3] 이러한 방식의 조작은 이후 다시 시도되지 않았다.[10]그러나 리틀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투자자들 사이에서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그는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여러 차례 보이콧을 당한 후에야 다시 거래소 출입을 허가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옵션 계약의 기간을 60일로 제한하는 규정이 만들어졌는데,[7][5] 이는 공매도 세력이 유사한 방식으로 기습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13]
4. 몰락과 유산
투기에 능통했음에도, 제이컵 리틀은 번 돈을 미래에 대비해 모으기보다 즉시 시장에 재투자하는 경향이 있었다.[10] 이 습관은 1857년 공황 때 그를 파산으로 이끌었다. 말년에는 후원자 데이비드 그로스벡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으며, 시장에서의 영향력도 미미해져 과거 동료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는 결국 1865년 3월 28일 어려움 속에서 사망했고,[2][15] 3월 31일 뉴욕 그레이스 교회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리틀은 내부자 거래 정보 대신 시장 변동 예측에 기반한 투자를 시도한 선구적인 투기꾼이자 월스트리트 최초의 주요 약세론자(bear)로 평가받는다.[2][4] 그의 성공과 실패는 투기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었으며, 이리 철도 회사 주식 매점(corner)과 같은 그의 전략은 이후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등 다른 투자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9][4] 그러나 그의 혁신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불명예스러운 말년 때문에 빠르게 잊혀,[13] 오늘날에는 주식 시장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5]
4. 1. 평가와 유산
리틀은 주식 시장에서 재산을 얻고 잃은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선구적인 투기꾼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오늘날 내부 정보로 간주될 수 있는 정보에 의존하기보다는, 시장 변동을 예측하는 능력에 기반하여 투자를 결정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2] 그는 최초의 주요한 약세론자(bear)였는데, 그의 급격한 부상 이전에는 투기와 시장 조작이 주식 시장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만큼 위험한 시도에서 이익을 얻는 데 필요한 냉철함과 재정적 예지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4] 이러한 이유로 많은 시장 역사가들은 그를 최초의 현대 주식 시장 거물로 간주한다.[2]리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헨리 클루스는 1908년 저서 ''월 스트리트 50년''에서 리틀이 "불운을 겪은 동료 투기꾼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고 너그러웠으며... 뛰어난 기억력으로 메모 없이도 하루의 모든 거래를 기억할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묘사했다.[15] 주식 시장 역사가 레너드 루이스 레빈슨 역시 그를 "신경질적인 완벽주의자였지만... 친절하고, 관대하며, 고결하고, 시장 조작의 천재였다"고 평가했다.[2] 실제로 여러 번 파산했던 경험 때문에 리틀은 채무 문제에 민감했으며,[10]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이들의 빚을 자주 탕감해주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망했을 때 타인에게 받을 돈이 수백만 달러에 달했지만, 친구와 가족이 회수한 금액은 고작 15만달러에 불과했다.[16]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1882년 ''뉴욕 타임스''는 이리 철도 회사 관련 기사에서 그를 거의 강탈 재벌처럼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3]
"그는 마치 젊은 시절에 고집스러운 소를 복종시키듯이 월 스트리트를 몰아냈다. 야곱 리틀에게는 어떤 방법도 너무 심하지 않았다. 누군가 방해하면 그 사람은 해를 입었다. 당연히, 모든 월 스트리트는 그에게 맞섰다. 그의 곤경을 위한 수많은 계획이 세워졌지만, 실패로 끝났다. 리틀의 채찍질에 의해 신속하게 해체될 조합이 결성되었다."
리틀의 성공과 실패는 투기의 가능성과 불안정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10] 특히 이리 철도 계획과 같은 그의 시장 독점 시도는 이후 여러 유사한 시도를 촉발했다. 예를 들어, 1863년 산업가 코넬리우스 밴더빌트는 리틀이 약 30년 전에 사용했던 방식과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할렘 철도 주식을 성공적으로 매점(corner)했다.[9] 또한 리틀이 다니엘 드루 등과 벌인 경쟁은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전환사채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4]
하지만 리틀은 투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도, 번 돈을 미래의 어려운 시기에 대비해 쌓아두기보다는 즉시 시장에 재투자하는 경향이 있었다.[10] 결국 1857년 공황으로 큰 손실을 입고 무일푼이 되었으며, 마지막 후원자인 데이비드 그로스벡의 도움으로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시장에서 소규모 거래로 근근이 수익을 내는 정도였고, 그의 몰락은 옛 동료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는 1865년 3월 28일 비참하게 사망했다.[2][15]
그의 모든 부와 혁신에도 불구하고, 리틀의 불명예스러운 최후는 그가 빠르게 잊히는 결과를 낳았다. 에드윈 르페브르가 1923년 그의 고전 ''어느 주식 시장의 회상''을 출판할 당시, 뉴욕 증권 거래소의 경험 많은 회원 아홉 명 중 단 세 명만이 리틀의 이름을 들어봤을 뿐, 그가 누구인지나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르페브르는 이에 대해 "야곱에게 일어난 일은 매년 수천 명에게 일어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가 기억할 만한 가치를 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13] 한때 "거래소에서 그의 발걸음은 왕과 같았다"고 묘사되었지만,[5] 오늘날 리틀은 대부분 잊혀 주식 시장 역사에서 단지 각주 정도로만 남아 있다.
4. 2. 사후
투기의 본질을 꿰뚫어 본 리틀은 어려운 시기를 대비해 재산을 모으지 않고, 주식 시장에서 번 돈을 즉시 재투자했다.[10] 이로 인해 1857년 공황 당시 투자가 실패하자 리틀은 파산했다. 그는 마지막 후원자인 데이비드 그로스벡의 도움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 리틀은 시장에서 소규모 거래로 약간의 수익만 낼 수 있었고, 그의 몰락은 옛 동료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는 결국 빈곤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2][15]리틀은 1865년 3월 28일에 사망했으며, 장례식은 3월 31일 뉴욕의 그레이스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상여 운반자로는 제시 호이트와 에드워드 프라임 등이 참여했고, 토마스 하우스 테일러 목사가 장례식을 집전했다.
1908년 금융 초창기를 다룬 ''월 스트리트 50년''에서 리틀을 개인적으로 알았던 헨리 클루스는 그를 "불운을 겪은 동료 투기꾼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고 너그러웠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메모나 실수 없이 하루 동안의 모든 거래를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5] 주식 시장 역사가 레너드 루이스 레빈슨은 그를 "신경질적인 완벽주의자로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챙겼으며... 친절하고, 관대하며, 고결하고, 시장 조작의 천재였다"고 묘사했다.[2] 여러 차례 파산을 경험했던 리틀은 채무 문제에 민감했으며,[10] 어려움을 겪는 다른 이들의 빚을 자주 탕감해주었다. 이 때문에 리틀이 사망했을 당시 그는 다른 이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지만, 친구와 가족이 회수한 금액은 15만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그의 전성기 재산 규모에 비하면 매우 적은 액수였다.[16]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882년 ''뉴욕 타임스''는 이리 철도 회사 주가 조작 사건에 대한 회고 기사에서 그를 강탈 재벌에 가깝다고 비판했다.[3]
"그는 마치 젊은 시절 고집 센 소를 다루듯 월 스트리트를 몰아붙였다. 제이컵 리틀에게는 어떤 수단도 지나치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길을 막으면 해를 입었다. 당연히 월 스트리트 전체가 그에게 맞섰다. 그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수많은 계획이 세워졌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리틀의 채찍 아래 연합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리틀은 주식 시장에서 재산을 얻고 잃은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선구적인 투기꾼이었다. 그는 오늘날 내부 정보로 간주될 정보에 의존하기보다 시장 변동을 예측하는 능력으로 투자 결정을 내린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2] 그는 대표적인 약세론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부상하기 전까지 투기와 시장 조작은 주식 시장에서 흔치 않았는데, 이는 그와 같이 위험을 감수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냉철함과 재정적 통찰력을 갖춘 인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4] 많은 시장 역사가들은 그를 최초의 현대적 주식 시장 거물로 평가한다.[2] 그의 재산이 급격하게 변동하는 모습은 투기의 막대한 가능성과 내재된 불안정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의 사후는 물론 생전에도 많은 투자자들이 그의 성공을 모방하려 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10] 이리 철도 계획을 비롯한 시장 독점 시도에서의 그의 성공은 이후 몇 년간 유사한 투기 전략을 유행시켰다. 1863년 산업가 코넬리우스 밴더빌트는 약 30년 전 리틀이 했던 방식과 거의 동일하게 할렘 철도 주식을 성공적으로 독점했으며,[9] 이후 다니엘 드루 등과 함께 전환사채를 활용한 독점 시도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금융 상품이었던 전환사채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막대한 부와 혁신에도 불구하고 리틀의 불명예스러운 말년은 그가 빠르게 잊히는 결과를 낳았다. 에드윈 르페브르가 1923년 그의 고전 ''어느 주식 투자자의 회상''을 출판할 무렵에는 리틀은 사실상 무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르페브르는 뉴욕 증권거래소의 경험 많은 회원 아홉 명에게 제이컵 리틀에 대해 물었을 때, 단 세 명만이 이름을 들어봤을 뿐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르페브르는 이에 대해 "제이컵에게 일어난 일은 매년 수천 명에게 일어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가 기억할 만한 가치를 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13] 한때 "거래소에서 왕처럼 군림했던"[5] 리틀은 오늘날 거의 잊혔으며, 주식 시장 역사에서 단지 각주 정도로만 언급될 뿐이다.
참조
[1]
뉴스
Funeral of Mr. Jacob Little
1865-04-01
[2]
웹사이트
Jacob Little, Wall Street's First Tycoon
http://technical.tra[...]
Working Money
2013-02-09
[3]
웹사이트
The Convertible Bonds: How Jacob Little Maniputed Matters Years Ago
http://lib.store.yah[...]
2013-02-09
[4]
간행물
Jacob Little, Pioneer Speculator
https://books.google[...]
A. W. Ferrin
2013-02-09
[5]
서적
Sunshine and Shadow in New York
http://thehistorybox[...]
J.B. Burr and Company
2013-02-08
[6]
웹사이트
Inventory of the Jacob Barker Papers, 1813–1863
http://www.oac.cdlib[...]
University of California
2013-02-08
[7]
서적
A Financial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From Christopher Columbus to the Robber Barons
M. E. Sharpe
[8]
뉴스
Providence and Worcester Railroad
https://books.google[...]
2022-10-22
[9]
웹사이트
Stock Price Manipulation
http://finance.whart[...]
Wharton School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90
[10]
서적
Twenty years among the bulls and bears of Wall Street
American Book Company
[11]
서적
New York: An Illustrated History
Alfred A. Knopf
[12]
문서
[13]
서적
Reminiscences of a Stock Operator
John Wiley & Sons
[14]
문서
[15]
웹사이트
Jacob Little signed Certificate – Original Great Bear of Wall Street – 1838
http://scripophily.n[...]
2013-02-09
[16]
웹사이트
Looking Back at Wall Street
http://www.glabarre.[...]
George H. LaBarre Galleries
2013-02-09
[17]
뉴스
공매도와 제이콥 리틀
http://www.mt.co.kr/[...]
머니투데이
2012-10-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