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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피츠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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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피츠로이는 1805년 영국에서 태어난 해군 제독이자 기상학자, 뉴질랜드 총독이었다. 그는 비글호의 함장으로 찰스 다윈과 함께 남아메리카를 탐험했고, 기상 관측 시스템을 구축하여 일기예보를 도입하는 등 기상학 발전에 기여했다. 뉴질랜드 총독으로 재임하며 마오리족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을 겪었고, 이후 1865년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여러 지명과 생물 종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영국 기상청은 그의 이름을 따 "피츠로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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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피츠로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로버트 피츠로이
로마자 표기Robert FitzRoy
존칭해군 중장
국적잉글랜드
출생일1805년 7월 5일
출생지잉글랜드 서퍽주 앰프턴
사망일1865년 4월 30일
사망지잉글랜드 런던 어퍼 노우드
사망 원인자살
배우자메리 헨리에타 오브라이언
마리아 이사벨라 스미스
자녀5명
소속영국 왕립해군
분야기상학
지리학
관직
직책제2대 뉴질랜드 총독
재임 시작1843년 12월 26일
재임 종료1845년 11월 18일
전임자윌리엄 홉슨
후임자경 조지 그레이
군주빅토리아
기타
주요 업적남아메리카 해안 측량
지층 생성 연구
기상학 연구
업적HMS 비글
서훈
영국 왕립 학회 회원
이미지
로버트 피츠로이
외부 링크
뉴질랜드 역사로버트 피츠로이 전기 (뉴질랜드 정부 웹사이트)

2. 가계 및 초기 생애

로버트 피츠로이는 1805년 7월 5일 영국 서퍽주 앰프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찰스 피츠로이(Lord Charles FitzRoy)는 육군 장교이자 국회의원이었으며, 할아버지 오거스터스 헨리 피츠로이 그래프턴 공작 3세는 영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피츠로이 가문은 찰스 2세의 후손으로, 귀족 가문이었다. 그의 어머니 프랜시스 스튜어트 여사는 초대 런던데리 후작 로버트 스튜어트의 딸이자, 외무장관을 역임한 캐슬레이 자작 로버트 스튜어트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피츠로이는 4세 때부터 가족과 함께 노샘프턴셔에 있는 웨이크필드 로지에서 살았다.

피츠로이의 이복형제인 찰스 오거스터스 피츠로이 경은 뉴사우스웨일스주 주지사,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 주지사, 앤티가 바부다 주지사를 역임했다.

1818년 2월, 12세의 피츠로이는 포츠머스 왕립 해군 학교에 입학하여 해군 경력을 시작했다.

2. 1. 해군 입대

1818년 2월, 12세의 나이로 포츠머스 왕립 해군 학교(Royal Naval College, Portsmouth)에 입학한 피츠로이는 이듬해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3] 14세에는 프리깃함 HMS 오웬 글렌도워(HMS|Owen Glendower|1808|6)에 자원생도로 승선하여 1820년 남아메리카로 항해했고, 1822년 1월에 귀환했다.[3] 이 항해 중에 사관후보생(midshipman)으로 승진했다.[3] 이후 HMS হিন্ড(HMS Hind (1814)|HMS ''Hind'')에서 복무했다.[3]

1824년 9월 7일에는 "만점"(100%)으로 시험을 통과하여 소위(lieutenant)로 진급했는데, 이는 이러한 결과를 달성한 최초의 사례였다.[3] HMS 테티스(HMS|Thetis|1817|6)에서 복무한 후, 1828년 남아메리카 주둔지 사령관 로버트 월러 오트웨이(Robert Waller Otway) 제독의 기함 HMS 갱기스(HMS|Ganges|1821|6)에서 함장(flag lieutenant)으로 임명되었다.[3]

당시 프링글 스톡스(Pringle Stokes) 함장이 지휘하던 비글호는 HMS 어드벤처(HMS Aid (1809)|HMS ''Adventure'')의 필립 파커 킹(Phillip Parker King) 함장의 총지휘 아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의 수로 측량을 수행하고 있었다. 프링글 스톡스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자살했고, 스카이링(Skyring) 중위 지휘 아래 비글호는 리우데자네이루로 항해했다.[3] 1828년 12월 15일, 오트웨이는 피츠로이를 비글호의 임시 함장으로 임명했다.[3]

1830년 10월 14일, 비글호가 잉글랜드로 돌아올 때까지 피츠로이는 측량사이자 함장으로서 명성을 쌓았다. 측량 중 그의 부하 일부가 해안에 야영하고 있을 때, 푸에기아 원주민들이 보트를 훔쳐갔다. 배를 추격하고 실랑이를 벌인 끝에 범죄자의 가족들이 인질로 배에 태워졌다.[3] 피츠로이는 이들을 "야만인을 문명화"하기로 결정하고, "영어... 기독교의 더 명확한 진실... 그리고 일반 도구의 사용법"을 가르친 후 선교사로 돌려보내기로 했다.[3] 이들은 각각 푸에지아 바스켓(Fuegia Basket), 제미 버튼(Jemmy Button), 요크 민스터(York Minster)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보트 메모리(Boat Memory)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천연두 백신 접종 후 사망했다.[3]

2. 2. 티에라델푸에고 원주민과의 만남

로버트 피츠로이는 티에라델푸에고 측량 중 원주민들과 갈등을 겪었다.[3] 측량 중 그의 부하 일부가 해안에 야영했을 때, 푸에기아 원주민들이 보트를 훔쳐갔다.[3] 피츠로이의 배가 추격했고, 실랑이 끝에 범죄자의 가족들이 인질로 배에 태워졌다.[3] 결국 피츠로이는 이 과정에서 원주민 몇 명을 인질로 잡아 영국으로 데려갔다.[3]

피츠로이는 이들을 "문명화"하기 위해 영어와 기독교의 진리, 일반 도구 사용법을 가르친 후 선교사로 돌려보내려 했다.[3] 선원들은 이들에게 푸에기아 바스켓, 제미 버튼, 요크 민스터, 보트 메모리 등의 이름을 지어주었다.[3] 피츠로이는 이들 중 보트 메모리를 제외한 세 명을 잉글랜드로 데려왔으며, 보트 메모리는 천연두 예방 접종 후 사망했다.[3] 나머지 세 명은 수련 선교사인 리처드 매튜스의 보살핌과 교육을 받았고, 1831년 여름에는 윌리엄 4세 국왕과 아델라이드 왕비 앞에 소개될 정도로 문명화되었다고 여겨졌다.[3]

3. HMS 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 (1831-1836)

1831년 5월, 피츠로이는 입스위치 선거구에서 토리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새로운 지위를 얻어 선교 활동을 꾸리려는 그의 희망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고, 그는 자비를 들여 배를 빌려서, 매튜스를 데리고 티에라델푸에고에서 데려왔던 원주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다만 친구이자 해군성 수로 조사관이었던 프랜시스 뷰포트와 "친절한 아저씨" 그라프톤 공작이 해군 본부와 교섭하여, 1831년 6월 비글호의 함장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피츠로이는 배의 장비를 갖추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피츠로이는 스트레스가 많은 고독한 함장의 입장과 전임 스톡스, 삼촌 카스루리 자작이 자살한 것을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1831년에 뷰포트에게 가서 항해를 같이 할 적절한 신사 동료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그 동료는 과학적인 관심을 공유하고, 자연 탐사 연구 기회를 살릴 수 있어야 하며, 함장과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정상적인 사교를 제공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그 인물은 결국 찰스 다윈으로 정해졌다.

영국을 출발하기 전에 피츠로이는 다윈에게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초판 사본을 선사했다. 그 책은 지구의 특징을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피츠로이도 읽은 적이 있는 책이었다. 또한 피츠로이 자신이 라이엘 빙하에 의한 표석같은 지질학적인 관측을 기록하도록 요청하고 있었다. 피츠로이와 다윈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5년의 항해를 하는 사이에 피츠로이는 심한 성미를 폭발시켜 (사관에서 "핫 커피"라는 별명을 붙였다), 논쟁하기도 했다. 다윈은 나중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고 회상 했다.

1832년 3월에 브라질 바이야의 기억은 인상적이었다. 다윈은 노예들을 취급한 이야기에 질렸지만, 피츠로이는 잔인한 행위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농장주가 노예에게 해방시켜 줄까라고 물었을 때에 노예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고 이야기했다. 다윈은 솔직하게, "노예가 주인의 앞에서 그런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할까요?"라고 피츠로이에게 물었다. 피츠로이는 발끈하며, 만약 자신의 말을 의심한다면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다고 화를 냈다. 피츠로이는 다윈을 함장의 테이블에서 쫓아냈지만, 이후 다윈에게 발끈한 것을 솔직하게 사죄했다. 그 이후 노예 문제에 대한 주제는 서로 회피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이념적 다툼은 끝나지 않았고, 그러한 불화는 항해가 끝난 후 닥쳐오게 된다.

티에라델푸에고에 있는 버튼 섬에서 그들은 포교의 거점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그들이 섬을 떠나 9일 후로 되돌아 왔을 때 거점은 약탈을 당했다. 매튜는 포교를 포기하고, 항해에 다시 참여했으며, 세 명의 서구화된 원주민들도 함께 섬을 떠났다. 포클랜드 제도에서 조사를 효율적으로 실시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출로(후에 해군이 부담해 줄 것을 바라고) 스쿠너를 구입하여, 수리해 〈어드벤쳐호〉라고 이름 붙였다. 다시 포교 거점으로 돌아오면서 현지의 습관으로 돌아온 제이미 버튼만이 내려 잉글랜드로 함께 가는 것을 거부했다.

1834년발파라이소에서 다윈이 안데스산맥을 탐험하면서 멀리 있는 동안, 해군 본부는 어드벤쳐호를 구입한 것을 비난 했다. 피츠로이는 몹시 분개하며, 스쿠너를 팔면서 조사를 재확인하기 위해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광기와 부채로 인해 함장을 사직했다. 사관은 사임을 철회하도록 설득하며, 피츠로이에게 계획된 탐사를 재개하도록 했고, 갈라파고스 제도,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그리고 다시 한번 바이야로 돌아와 경도 측정을 체크한 후, 영국으로 귀국했다. 항해에는 스톰글래스를 가지고 와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3. 1. 찰스 다윈과의 만남과 관계

1831년 찰스 다윈로버트 피츠로이 함장이 이끄는 비글호에 동승하여 과학적 탐사를 함께 했다. 피츠로이는 다윈에게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초판 사본을 선물했고, 다윈은 항해 중 지질학적 관찰을 기록했다. 두 사람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피츠로이의 격렬한 성격으로 인해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윈은 나중에 피츠로이가 "광기의 직전"이었다고 회상했다.

1832년 브라질 바이야에서 노예 제도에 대한 의견 대립은 두 사람의 관계에 긴장을 더했다. 다윈이 노예 제도의 잔혹함에 혐오감을 느낀 반면, 피츠로이는 노예 제도를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노예가 주인에게 해방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윈은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피츠로이는 격분하여 다윈을 함장 테이블에서 쫓아냈다. 이후 피츠로이는 사과했지만, 노예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항해 동안 피츠로이는 티에라델푸에고에 선교 거점을 세웠으나 약탈당했고, 포클랜드 제도 조사를 위해 사비로 스쿠너를 구입했다가 해군 본부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피츠로이는 한때 함장직을 사임하려 했으나, 사관들의 설득으로 탐사를 계속하여 갈라파고스 제도,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를 거쳐 영국으로 귀국했다. 피츠로이는 항해중에 스톰글래스를 가지고 와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3. 2. 주요 탐사 지역

1831년 피츠로이는 비글호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탐사 과정에서 찰스 다윈과 동행하였고, 이들의 탐사는 과학적 발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에 영향을 받은 피츠로이는 지질학적 관찰을 기록하였으며, 다윈은 노예 제도에 대한 피츠로이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티에라델푸에고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려 했으나 원주민에 의해 약탈당하는 등 실패를 겪었다.

피츠로이는 탐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사비로 스쿠너를 구입하여 '어드벤처호'로 명명했으나, 해군 본부의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에 분개하여 사임을 표명하기도 했지만, 결국 탐사를 계속하여 갈라파고스 제도,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를 거쳐 영국으로 귀환했다.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에서의 관찰은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3. 항해의 과학적 성과

피츠로이는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를 읽고 지질학적 관찰을 기록했으며, 이는 라이엘의 이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찰스 다윈은 항해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진화론을 발전시켰다. 피츠로이는 항해 중 스톰글래스를 지참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4. 영국으로의 귀환과 정치 활동 (1836-1843)

1836년 10월 2일, 비글호가 귀국하자마자 피츠로이는 오랫동안 약혼했던 젊은 여성과 결혼했다. 찰스 다윈은 5년 동안의 항해에서 피츠로이가 약혼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놀랐다. 1837년 왕립지리학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1837년 3월, 학회에서 그의 항해 일지가 낭독되었다.

: “파도에 마모되어 둥글게 된 돌과, 퇴적물이 쌓여 이 평원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파타고니아 사막에 묻힌 조약돌을 둥글게 만든 물의 엄청난 작용에는 엄청난 시간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피츠로이는 필립 파커 킹 함장의 기록과 찰스 다윈의 기록을 함께 묶어 1839년 《영국 군함 어드벤처호와 비글호의 조사 항해 기록》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피츠로이는 "성서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지질학자"들의 주장을 언급하며, 40일간의 홍수로는 광대한 대지가 퇴적될 수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생각이 젊은 선원들에게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성서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자신의 새로운 신념을 설명하고, 산 정상 부근의 조개껍데기 등을 노아의 홍수의 증거로 제시했다. 이를 통해 피츠로이는 항해 중에 받아들였던 찰스 라이엘의 새로운 지질학적 사상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국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독실한 아내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41년 더럼에서 토리당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42년에는 머지 강의 관리 감독 대리로 임명되었다.

4. 1. 항해 기록 출판

1836년 10월 2일, 비글호가 귀국하자마자 피츠로이는 오랫동안 약혼했던 젊은 여성과 결혼했다. 찰스 다윈은 5년 동안의 항해에서 피츠로이가 약혼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놀랐다.[6] 1837년 왕립지리학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7] 1837년 3월, 학회에서 그의 항해 일지가 낭독되었다.

: “파도에 마모되어 둥글게 된 돌과, 퇴적물이 쌓여 이 평원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파타고니아 사막에 묻힌 조약돌을 둥글게 만든 물의 엄청난 작용에는 엄청난 시간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7]

피츠로이는 필립 파커 킹 함장의 기록과 찰스 다윈의 기록을 함께 묶어 1839년 《영국 군함 어드벤처호와 비글호의 조사 항해 기록》을 출판했다.[8][9] 이 책에서 피츠로이는 "성서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지질학자"들의 주장을 언급하며, 40일간의 홍수로는 광대한 대지가 퇴적될 수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생각이 젊은 선원들에게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성서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자신의 새로운 신념을 설명하고, 산 정상 부근의 조개껍데기 등을 노아의 홍수의 증거로 제시했다.[8][9] 이를 통해 피츠로이는 항해 중에 받아들였던 찰스 라이엘의 새로운 지질학적 사상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국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독실한 아내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1841년 더럼에서 토리당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42년에는 머지 강의 관리 감독 대리로 임명되었다.

4. 2. 정치 활동

5. 뉴질랜드 총독 재임 (1843-1845)

1842년 뉴질랜드 초대 총독 윌리엄 홉슨이 사망한 후, 선교회의 추천으로 1843년 12월 로버트 피츠로이가 뉴질랜드 총독으로 부임했다. 피츠로이는 질서를 유지하고 마오리족의 권익을 보호하면서 영국 이주민들의 토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피츠로이는 1843년에 발생한 와이라우 학살 사건을 조사하면서 영국 이주민들의 행동이 불법이라고 판단했지만, 군사력 부족으로 인해 마오리족 지도자 테 라우파라하와의 직접적인 대립은 피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뉴질랜드 회사와 이주민들로부터 배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피츠로이는 지역 통제를 위해 관리관을 설치하고, 뉴질랜드 회사가 마오리족에게서 매입했다고 주장하는 토지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가격을 지불하도록 요구하여 그의 평판은 더욱 악화되었다.

와이탕이 조약에 따라 토지 매매는 정부 중개로만 가능했기에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피츠로이는 정착민들이 마오리족에게 직접 토지를 구매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에이커당 10실링의 세금을 부과했으나, 토지 매매는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관세, 재산세, 소득세를 도입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식민지 정부는 파산 위기에 직면하여 어음 부도를 내기에 이르렀다.

한편, 뉴질랜드 북부의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변화에 불만을 품고 영국 국기를 훼손하는 등 저항했다. 피츠로이는 깃대를 다시 세웠지만, 호네 헤케는 이를 네 번이나 베어 넘겼고, 결국 깃대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뉴질랜드 전쟁이 발발했다.

1844년 5월 11일 오클랜드 레무에라에서 열린 마오리 회의 및 연회를 방문한 로버트 피츠로이 총독과 수행원


피츠로이는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킬 전력이 부족했고, 뉴질랜드 회사는 영국에서 피츠로이의 총독직에 반대하는 로비를 벌였다. 결국 피츠로이는 소환되었고, 조지 그레이가 후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5. 1. 마오리족과의 관계

1842년 뉴질랜드 초대 총독 윌리엄 홉슨이 사망한 후, 선교회의 추천으로 1843년 12월 로버트 피츠로이가 뉴질랜드 총독으로 부임했다. 피츠로이는 질서를 유지하고 마오리족의 권익을 보호하면서 영국 이주민들의 토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피츠로이는 1843년에 발생한 와이라우 학살 사건을 조사하면서 영국 이주민들의 행동이 불법이라고 판단했지만, 군사력 부족으로 인해 마오리족 지도자 테 라우파라하와의 직접적인 대립은 피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뉴질랜드 회사와 이주민들로부터 배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피츠로이는 지역 통제를 위해 관리관을 설치하고, 뉴질랜드 회사가 마오리족에게서 매입했다고 주장하는 토지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가격을 지불하도록 요구하여 그의 평판은 더욱 악화되었다.

1844년 5월 11일 오클랜드 레무에라에서 열린 마오리 회의 및 연회에 피츠로이 총독과 수행원이 방문한 모습이 담긴 이미지가 있다.

5. 2. 토지 문제와 정책

1843년 12월 뉴질랜드 총독으로 부임한 로버트 피츠로이는 토지 매매 문제와 마오리족과의 관계 악화라는 난제에 직면했다. 그는 질서를 유지하고 마오리족을 보호하는 동시에, 몰려드는 이민자들의 토지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피츠로이는 우선 와이라우 대학살(Wairau Massacre) 상황을 조사하고, 정착민들의 행동이 불법이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군사력이 부족하여 마오리족 지도자 테 라우파라하(Te Rauparaha)와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했다. 뉴질랜드 회사와 정착민들은 이에 배신감을 느꼈고, 피츠로이는 지역 통제를 위해 관리관을 임명해야 했다.

와이탕이 조약에 따라 토지 매매는 정부 중개로만 가능했기에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피츠로이는 정착민들이 마오리족에게 직접 토지를 구매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에이커당 10실링의 세금을 부과했으나, 토지 매매는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관세, 재산세, 소득세를 도입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식민지 정부는 파산 위기에 직면하여 어음 부도를 내기에 이르렀다.

한편, 뉴질랜드 북부의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변화에 불만을 품고 영국 국기를 훼손하는 등 저항했다. 피츠로이는 깃대를 다시 세웠지만, 호네 헤케(Hōne Heke)는 이를 네 번이나 베어 넘겼고, 결국 제1차 뉴질랜드 전쟁(때로는 깃대 전쟁 또는 북부 전쟁)이 발발했다.

피츠로이는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킬 전력이 부족했고, 뉴질랜드 회사는 영국에서 피츠로이의 총독직에 반대하는 로비를 벌였다. 결국 피츠로이는 소환되었고, 조지 그레이가 후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5. 3. 재정 문제와 정책 실패

1842년 뉴질랜드 초대 총독 윌리엄 홉슨이 사망하자 선교회의 추천으로 1843년 12월 로버트 피츠로이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질서 유지, 마오리족 보호, 이민자들의 토지 요구 충족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가용 군사력은 미미했고, 총독부 수입은 관세에 의존하여 매우 부족했다.

피츠로이는 와이라우 대학살 조사를 통해 정착민들의 행동이 불법임을 확인하고, 군사력 부족으로 마오리 지도자 테 라우파라하와의 대립을 피했다. 하지만 이는 뉴질랜드 회사와 이민자들의 반발을 샀고, 그는 지역 통제를 위해 관리관을 임명해야 했다. 또한 뉴질랜드 회사가 매입했다고 주장하는 토지에 대해 더 현실적인 대가를 지불하도록 요구하여 평판이 더욱 악화되었다.

와이탕이 조약에 따라 토지 매매는 정부 중개로만 가능했기에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피츠로이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착민들이 마오리족에게 직접 토지를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에이커당 10실링의 세금을 부과하는 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토지 매매는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관세를 인상하고 재산세와 소득세를 도입했지만, 이 모든 정책은 실패했다. 결국 식민지 정부는 파산 위기에 직면했고, 피츠로이는 약속어음을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뉴질랜드 북부의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변화에 불만을 품고 영국 국기를 훼손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깃대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뉴질랜드 전쟁으로 이어졌다. 피츠로이는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킬 전력이 부족했고, 뉴질랜드 회사의 대변인들은 영국에서 피츠로이의 지도력 부재를 증언하며 그를 압박했다. 결국 피츠로이는 소환되었고, 조지 그레이가 후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5. 4. 깃대 전쟁과 해임

뉴질랜드 초대 총독 윌리엄 홉슨이 1842년에 사망하자, 선교회의 추천으로 로버트 피츠로이가 후임 총독으로 임명되어 1843년 12월에 부임했다. 피츠로이는 질서 유지, 마오리 보호, 이민자들의 토지 요구 충족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가용 군사력과 총독부 수입은 모두 부족했다.

피츠로이는 부임 직후 와이라우 대학살을 조사하고 정착민들의 행동이 불법이라고 판단했지만, 군사력 부족으로 마오리 지도자 테 라우파라하와 대립하지 않았다. 뉴질랜드 회사와 정착민들은 이에 배신감을 느꼈고, 피츠로이는 지역 통제를 위해 관리관을 임명하고 뉴질랜드 회사가 매입했다고 주장하는 토지에 대해 더 현실적인 대가를 지불하도록 요구했다.

와이탕이 조약에 따라 토지 매매는 정부 중개로만 가능했기에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피츠로이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관세 인상, 재산세 및 소득세 도입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어음 부도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뉴질랜드 북부 마오리족은 변화에 불만을 품고 영국 국기를 훼손하는 저항 운동을 벌였다. 피츠로이가 깃대를 다시 세우자 호네 헤케는 이를 네 번이나 베어 넘겼고, 이는 깃대 전쟁으로 이어졌다.

피츠로이는 전쟁을 조기에 진압할 능력이 부족했고, 뉴질랜드 회사의 로비 활동으로 인해 영국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다. 후임으로는 당시 남호주 총독이었던 조지 그레이가 임명되었으며, 그레이는 피츠로이가 받지 못했던 지원과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6. 기상학 연구와 영국 기상청 설립 (1854-1865)

1854년 피츠로이는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장의 추천으로 해상 기상 데이터 수집을 담당하는 새로운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직함은 "무역위원회 기상 통계관"이었으며, 3명의 직원을 두었다. 이 부서는 현대의 기상청(Met Office)의 전신이었다.[12] 그는 선장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고, 이를 위해 검증된 기기를 대여하며, 수집된 데이터를 계산하도록 했다.[12]

1859년의 폭풍으로 로열 차터호가 침몰하자, 피츠로이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해도를 개발하여 "일기예보(weather forecast)"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2] 새로운 전신(telegraph)을 이용하여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상 보고를 전송하기 위해 15개의 육상 관측소가 설립되었다.[18] 최초의 일일 일기예보는 1861년 ''타임스(The Times)''에 발표되었다.[18]

피츠로이는 1859년 대폭풍으로 로열 차터(Royal Charter)호가 침몰하자 폭풍 경보(storm warning)의 필요성을 느꼈다.[50] 영국 학술협회의 의뢰로 그는 1860년 6월 6일 정부의 허가를 받아 폭풍 경보 센터를 설치했다.[50] 그는 국내 13곳의 기상 관측 결과를 전보로 수집하여 그 현황을 분석하고 폭풍 경보 발표를 시작했다. 이는 현재의 나우캐스트(nowcast)이며, 엄밀히 말하면 기상 예보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1961년 8월 1일부터 기상 예보도 독단적으로 대중에게 발표하기 시작했다.[50] 그는 기상 이론에 관해서는 독일의 기상학자 하인리히 도베(Heinrich Dove)의 신봉자였으며, 서로 다른 성질의 기류의 충돌을 중요시했다.[50]

피츠로이는 기상 예보를 과학적인 예측(prediction)과 구별하기 위해 "포어캐스트(forecast)"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으며, 현재는 이 단어가 기상 예보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50] 또한 기상 예보를 체계화하기 위해 1863년 "Weather Book"을 출판했다. 이것은 당시 과학적인 견해로부터 상당히 앞서 있었다.[50] 그의 사후 통계학자 프랜시스 골턴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권고에 따라 일반 대중을 위한 기상 예보는 1866년 5월 28일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중단되었던 폭풍 경보는 요구에 따라 재개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한편, 기상 예보는 그 후 13년 동안 영국에서는 발표되지 않았다.[50]

6. 1. 기상 관측 시스템 구축

피츠로이는 1854년 왕립학회 회장의 추천으로 해상 기상 데이터 수집을 담당하는 새로운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그의 직함은 "무역위원회 기상 통계관"이었다.[12] 이 부서는 3명의 직원을 두었으며, 현대 영국 기상청의 전신이었다.[12] 그는 선장들에게 기상 정보를 제공하고, 검증된 기기를 대여하며, 수집된 데이터를 계산하도록 했다.[12]

피츠로이는 선박과 어부들의 안전을 위해 기상 정보를 더 널리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연구했다.[13] 그는 그의 권고에 따라 모든 항구에 기압계(barometer)를 설치하여 선원들이 출항 전에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13] 이러한 기압계를 위한 돌로 만든 보호 장치는 많은 어항에서 아직도 볼 수 있다.[13] 여러 종류의 기압계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기압계들은 인기를 얻어 20세기까지 생산되었고, "해군 제독 피츠로이의 특별한 설명"이라는 해석이 새겨져 있었다.[14]

1859년의 폭풍으로 로열 차터 호가 침몰하자,[12] 피츠로이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해도를 개발하여 "일기예보(weather forecast)"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2] 그는 전신(telegraph)을 이용하여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상 보고를 전송하기 위해 15개의 육상 관측소를 설립했다.[18] 최초의 일일 일기예보는 1861년 ''타임스(The Times)''에 발표되었다.[18] 1859년 폭풍으로 인해 왕실은 당시 "피츠로이의 폭풍 기압계"로 알려진 폭풍 유리(storm glass)를 영국 제도 전역의 많은 작은 어촌 공동체에 배포했다.[15]

1860년, 피츠로이는 강풍이 예상될 때 주요 항구에 폭풍 경보 콘을 게양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16] 그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함대가 항구에 머물도록 명령했다.[16] 그가 1863년에 출판한 ''기상 서적(Weather Book)''은 당시 과학적 견해를 훨씬 앞섰다.[17]

많은 어선 선주들은 강풍 경고 게시에 반대했는데, 이는 어선이 항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압력 하에 피츠로이의 시스템은 그의 사후 잠시 동안 폐지되었다. 어선 선주들은 피츠로이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었던 덕분에 어부들의 압력을 간과했다. 이 시스템은 결국 1874년 간소화된 형태로 부활했다.[16]

6. 2. 일기예보 도입

1854년,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장의 추천으로 피츠로이는 해상 기상 데이터 수집을 담당하는 새로운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직함은 "무역위원회 기상 통계관(Meteorological Statist to the Board of Trade)"이었으며, 3명의 직원을 두었다. 이 부서는 현대의 영국 기상청의 전신이었다.[12] 그는 선장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고, 이를 위해 검증된 기기를 대여하며, 수집된 데이터를 계산하도록 했다.[12]

1859년의 폭풍으로 로열 차터호가 침몰하자, 피츠로이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해도를 개발하여 "일기예보(weather forecast)"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2] 새로운 전신(telegraph)을 이용하여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상 보고를 전송하기 위해 15개의 육상 관측소가 설립되었다.[18] 최초의 일일 일기예보는 1861년 ''타임스(The Times)''에 발표되었다.[18]

피츠로이는 1859년 대폭풍으로 로열 차터(Royal Charter)호가 침몰하자 폭풍 경보(storm warning)의 필요성을 느꼈다.[50] 영국 학술협회의 의뢰로 그는 1860년 6월 6일 정부의 허가를 받아 폭풍 경보 센터를 설치했다.[50] 그는 국내 13곳의 기상 관측 결과를 전보로 수집하여 그 현황을 분석하고 폭풍 경보 발표를 시작했다. 이는 현재의 나우캐스트(nowcast)이며, 엄밀히 말하면 기상 예보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1961년 8월 1일부터 기상 예보도 독단적으로 대중에게 발표하기 시작했다.[50] 그는 기상 이론에 관해서는 독일의 기상학자 하인리히 도베(Heinrich Dove)의 신봉자였으며, 서로 다른 성질의 기류의 충돌을 중요시했다.[50]

피츠로이는 기상 예보를 과학적인 예측(prediction)과 구별하기 위해 "포어캐스트(forecast)"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으며, 현재는 이 단어가 기상 예보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50] 또한 기상 예보를 체계화하기 위해 1863년 "Weather Book"을 출판했다. 이것은 당시 과학적인 견해로부터 상당히 앞서 있었다.[50] 그의 사후 통계학자 프랜시스 골턴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권고에 따라 일반 대중을 위한 기상 예보는 1866년 5월 28일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중단되었던 폭풍 경보는 요구에 따라 재개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한편, 기상 예보는 그 후 13년 동안 영국에서는 발표되지 않았다.[50]

6. 3. "Weather Book" 출판

1863년 피츠로이는 자신의 기상학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기상 서적(Weather Book)''을 출판했다.[17] 이 책은 당시 과학적 견해를 훨씬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17] 피츠로이는 1859년의 폭풍으로 로열 차터 호가 침몰하자,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해도를 개발하여 "일기예보(weather forecast)"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2] 그는 기상 예보를 과학적인 예측(prediction)과 구별하기 위해 "포어캐스트(forecast)"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으며, 이 단어는 현재 기상 예보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피츠로이는 기압계(barometer)를 설계하고 배포하여 각 항구에 설치하도록 하였고, 선원들이 출항 전에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13] 이러한 기압계는 20세기까지 생산되었으며, "해군 제독 피츠로이의 특별한 설명"이라는 해석이 새겨져 있었다.[14]

1860년에는 강풍이 예상될 때 주요 항구에 폭풍 경보 콘을 게양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16] 그러나 많은 어선 선주들은 강풍 경고 게시에 반대했고, 피츠로이의 시스템은 그의 사후 잠시 동안 폐지되었다가 1874년 간소화된 형태로 부활했다.[16]

피츠로이 어업용 기압계 98호, 스트롬네스(Stromness), 오크니 제도(Orkney)

7. 종의 기원 논쟁과 자살 (1860-1865)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 출판되었을 때, 피츠로이는 당황했고, 《진화론》의 발전에 자신이 기여한 역할을 생각하고 분명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1860년 6월 30일 열린 옥스포드 영국학술회의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성공회 주교인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가 다윈을 비난하는 것을 들었다. 면담을 하는 동안(헉슬리와 후커가 반론을 시작하기 전에), 피츠로이는 일어나 성서를 들고 관중에게 "사람보다 하느님을 믿자"라고 호소했다. 《종의 기원》은 그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었다고 말하고, 관중은 가만히 앉아서 같이 저주했다.

1863년 오랜 공적에 의해 해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그의 기상학 사무소에 어려움이 생기고, 재정적인 문제와 건강 악화로 점점 우울증에 시달렸다. 1865년면도기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 올 세인트 교회 앞 묘소에 묻혔다.

이후 다윈은 자서전에서 피츠로이의 성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의무에 충실하고 실패에 관대하고, 용감하고, 의지가 강하고, 불굴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지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열성적인 친구였다 ... 큰 단점으로는 욱하는 성질이 있었지만 그의 성격의 일부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훌륭했다.

7. 1. 종의 기원에 대한 입장

종의 기원》이 출판되었을 때, 피츠로이는 진화론 발전에 자신이 기여한 역할을 생각하며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1860년 6월 30일 옥스포드 영국학술회의에서 성공회 주교인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가 다윈을 비난하는 것을 들었다. 면담 도중 피츠로이는 일어나 성서를 들고 "사람보다 하느님을 믿자"라고 호소했다. 그는 《종의 기원》이 자신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었다고 말했다.

7. 2. 옥스퍼드 논쟁

종의 기원》이 출판되었을 때, 피츠로이는 당황했고, 진화론의 발전에 자신이 기여한 역할을 생각하고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1860년 6월 30일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 학술회의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성공회 주교인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가 다윈을 비난하는 것을 들었다. 면담을 하는 동안, 피츠로이는 일어나 성서를 들고 관중에게 "사람보다 하느님을 믿자"라고 호소했다. 《종의 기원》은 그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었다고 말했다.

7. 3. 우울증과 자살

로버트 피츠로이는 1857년 예비 명단에서 소장으로 승진했고,[21] 1863년에는 오랜 공적에 의해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22] 그러나 기상청 운영과 관련된 재정적인 문제와 건강 악화,[23] 그리고 우울증으로 어려움을 겪었다.[23] 1865년 4월 30일, 피츠로이는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했다.[24] [25] 그는 런던 남부 어퍼 노르우드의 올 세인츠 교회 앞 묘지에 묻혔으며, 그의 묘비는 1981년 기상청에 의해 복원되었다.[1]

피츠로이가 사망한 후, 그의 친구 바솔로뮤 술리반은 피츠로이 중장 기념 기금을 조성하여 그의 미망인과 딸의 빈곤을 막고자 했다. 이 기금은 정부로부터 3,000 파운드를 지원받았고,[26] 찰스 다윈도 100 파운드를 기부했다.[27]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미망인과 딸에게 햄프턴 코트 궁전의 아파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내렸다.[28]

찰스 다윈자서전에서 피츠로이의 성격에 대해 "의무에 충실하고 실패에 관대하고, 용감하고, 의지가 강하고, 불굴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지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열성적인 친구였다 ... 큰 단점으로는 욱하는 성질이 있었지만 그의 성격의 일부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훌륭했다."라고 묘사했다.

8. 유산 및 평가

피츠로이는 6000파운드, 현재 4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전 재산을 모두 공공을 위해 탕진하고 사망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궁핍한 아내와 딸을 돕기 위해 친구이자 동료(옛 비글호 부하) 버솔로뮤 설리반이 기부를 호소하여 정부로부터 3000파운드를 지원받는 데 성공했다(다윈은 100파운드를 기부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내와 딸에게 각각 사망할 때까지 햄튼 코트 궁전의 거처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피츠로이 산(Mount Fitz Roy)은 아르헨티나의 과학자 프란시스코 모레노에 의해 명명되었다. 서호주 북부의 피츠로이 강은 옛 부하 존 로트 스톡스에 의해 명명되었다. 남미의 침엽수 파타고니아 사이프러스(Fitzroya cupressoidesla)와 회색돌고래의 아종 Lagenorhynchus obscurus fitzroyila(이명: Delphinus fitzroyila)는 비글호 항해 중 다윈에 의해 발견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의 피츠로이 또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2002년 BBC 라디오의 일기예보 프로그램이 스페인의 같은 이름의 곶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피니스테레 해역의 이름을 변경했을 때, 영국 기상청은 창설자의 이름을 따서 "피츠로이"를 선택했다.

8. 1. 과학적 업적

피츠로이는 비글호 항해를 통해 남아메리카, 갈라파고스 제도 등지의 지질학적, 생물학적 다양성을 탐구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기상 관측 시스템을 구축하고 일기예보를 도입하여 현대 기상학의 기초를 닦았다.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피츠로이 산(Mount Fitz Roy)은 아르헨티나의 과학자 프란시스코 모레노에 의해 명명되었다. 서호주 북부의 피츠로이 강은 옛 부하 존 로트 스톡스에 의해 명명되었다. 남미의 침엽수 파타고니아 사이프러스()와 회색돌고래의 아종 (이명: )는 비글호 항해 중 다윈에 의해 발견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의 피츠로이 또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2002년 BBC 라디오의 일기예보 프로그램이 스페인의 같은 이름의 곶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피니스테레 해역의 이름을 변경했을 때, 영국 기상청은 창설자의 이름을 따서 "피츠로이"를 선택했다.

8. 2. 뉴질랜드 총독으로서의 평가

피츠로이는 뉴질랜드 총독으로 재임하며 마오리족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으나, 영국 이주민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해임되었다.

8. 3. 개인적 비극과 역사적 평가

피츠로이는 전 재산 6000파운드(현재 가치 40만 파운드)를 공공을 위해 사용하고 사망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친구이자 동료였던 버솔로뮤 설리반은 궁핍한 그의 아내와 딸을 돕기 위해 기부를 호소했고, 정부로부터 3000파운드를 지원받도록 도왔다.(이때 다윈은 100파운드를 기부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아내와 딸에게 햄튼 코트 궁전의 거처를 사망할 때까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피츠로이 산(Mount Fitz Roy)은 아르헨티나의 과학자 프란시스코 모레노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서호주 북부의 피츠로이 강은 옛 부하 존 로트 스톡스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남미의 침엽수 파타고니아 사이프러스(Fitzroya cupressoidesla)와 회색돌고래의 아종 Lagenorhynchus obscurus fitzroyila(이명: Delphinus fitzroyila)는 비글호 항해 중 다윈에 의해 발견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의 피츠로이 또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2002년 BBC 라디오의 일기예보 프로그램이 스페인의 같은 이름의 곶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피니스테레 해역의 이름을 변경했을 때, 영국 기상청은 창설자의 이름을 따서 "피츠로이"를 선택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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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Robert FitzRoy biography https://nzhistory.go[...]
[3] 서적 The Reinvention of Primitive Society: Transformations of a Myth Taylor & Francis
[4] 서적 Charles Darwin: Voyaging Pimlico 2003-08-07
[5] 서적 Voyage of the Beagle Penguin Books 1989
[6] 서적 Darwin Michael Joseph, Penguin Group
[7] 논문 Extracts from the Diary of an Attempt to Ascend the River Santa Cruz, in Patagonia, with the boats of his Majesty's sloop Beagle http://darwin-online[...]
[8] 서적 Narrative of the Surveying Voyages of His Majesty's Ships Adventure and Beagle between the years 1826 and 1836, describing their examination of the southern shores of South America, and the Beagle's circumnavigation of the globe. Proceedings of the second expedition, 1831–36, under the command of Captain Robert Fitz-Roy, R.N. Henry Colburn 1839
[9] 서적 Charles Darwin's Beagle Diary http://darwin-onlin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0] 논문 Robert Fitzroy and the Myth of the 'Marsden Square': Transatlantic Rivalries in Early Marine Meteorology The Royal Society 2004-01-01
[11] 웹사이트 List of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1660–2007 https://royalsociety[...] 2016-09-21
[12] 서적 FitzRoy of the Beagle Hart-Davis
[13] 웹사이트 Scottish Harbour Barometers http://www.webhistor[...] 20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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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사이트 Storm Glass http://www.weatherno[...] Mount Washington Observatory 2004-05-07
[16] 서적 Climates of the British Isles: Present, Past and Future Routledge 1997
[17] 웹사이트 The Royal Charter Gale and the world's first National Forecasting Service https://www.metoffic[...]
[18] 뉴스 The birth of the weather forecast https://www.bbc.co.u[...] 2015-04-30
[19] 서적 Darwin Michael Joseph 1991
[20] 서적 Saxby Weather System https://archive.org/[...] 1864
[21] 간행물 London Gazette 1857-02-17
[22] 간행물 London Gazette 1863-09-18
[23] 서적 FitzRoy
[24] 백과사전 Robert Fitzroy http://www.britannic[...] 2009-06-15
[25] 서적 Charles Darwin: The Power of Place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2
[26] 서적 The Correspondence of Charles Darwin:, Volume 13; Volume 1865, page 259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12-19
[27] 웹사이트 Letter no. 4908 – Charles Shaw to Charles Darwin http://www.darwinpro[...] 1865-10-03
[28] 서적 'The Voyage of the Beagle' by James Taylor, page 182 https://books.google[...] Bloomsbury USA 2016-05-17
[29] 서적 A history of the Chilean boundaries The Iowa State University Press
[30] 논문 Francisco Hudson, un destacado marino poco conocido en nuestra historia http://revistamarina[...]
[31] 서적 Esploraciones hechas por la Corbeta Chacabuco al mando del capitán de fragata don Enrique M. Simpson en los Archipiélagos de Guaitecas, Chonos i Taitao Imprenta Nac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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