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라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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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젤라 회의는 기원전 425년 시칠리아의 도시 젤라에서 열린 회의로, 당시 아테네와 시라쿠사이 간의 전쟁으로 촉발된 시켈리아 내 도시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통해 알려졌으며, 시라쿠사이 대표 헤르모크라테스의 연설을 통해 아테네의 위협을 강조하고 시켈리아 도시들의 단결을 호소하며, 현상 유지를 기반으로 한 평화 조약을 이끌어냈다. 회의 결과 시라쿠사이는 카마리나에게 모르가티나를 양도하고 아테네 함대가 철수하면서 일시적인 평화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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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가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쟁을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서술하여 서양 역사 서술과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 큰 영향을 미친 미완의 역사서이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 - 펠로폰네소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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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 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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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기원전 420년대 중반부터 몇 년간 시칠리아에서는 시라쿠사와 그 동맹 도시들이 아테네 및 그들의 시칠리아 동맹 도시들과 전쟁 상태에 있었다. 이 전쟁은 본래 시라쿠사와 레온티노이 사이의 지역 분쟁에서 시작되었으나, 아테네가 개입하면서 점차 시칠리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2. 1. 시칠리아 분쟁의 발발
기원전 420년대 중반, 시라쿠사와 그 동맹 도시들은 아테네 및 그 시칠리아 동맹 도시들과 전쟁 상태에 있었다. 이 분쟁은 기원전 427년 시라쿠사와 레온티노이(현재 렌티니) 사이의 충돌에서 시작되었다. 레온티노이는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고, 아테네는 이에 응하여 2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1]기원전 426년까지 분쟁은 시칠리아의 많은 그리스 도시들과 토착 시켈족까지 휘말리는 광범위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아테네는 레기온(현재 레조 디 칼라브리아), 레온티노이, 낙소스, 카마리나 및 여러 시켈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초기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다. 같은 해 아테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메세네(현재 메시나)를 점령하고 시라쿠사 측의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
이에 맞서 시라쿠사는 로크리, 젤라 등과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425년 시라쿠사 측은 반격을 시작하여 메세네를 되찾고 아테네 동맹 도시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2. 2. 전쟁의 확산
기원전 420년대 중반부터 몇 년 동안 시라쿠사이와 그 동맹 도시들은 아테네 및 그들의 시켈리아 동맹 도시들과 전쟁 상태에 있었다. 이 전쟁은 본래 시라쿠사이와 레온티노이(현재 렌티니) 사이의 충돌에서 시작되었으나, 기원전 427년 레온티노이가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분쟁이 확대되었다. 아테네는 이에 응하여 2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1]기원전 426년경에는 시켈리아의 많은 그리스 도시뿐만 아니라 원주민이었던 시켈족까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아테네와 동맹을 맺은 세력은 레기온(현재 레조 디 칼라브리아), 레온티노이, 낙소스, 카마리나와 여러 시켈 부족들이었다. 아테네 군대는 초기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며, 같은 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메세네(현재 메시나)를 점령하고 시라쿠사이 측의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
한편, 시라쿠사이는 로크리, 젤라 등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기원전 425년 시라쿠사이 측은 반격을 개시하여 메세네를 되찾았고, 아테네 동맹 도시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2. 3. 초기 전황
기원전 420년대 중반부터 수년간 시라쿠사이와 그 동맹 도시는 아테네 및 그 시켈리아 동맹 도시들과 전쟁 상태에 있었다. 이 전쟁은 시라쿠사이와 레온티노이(현재 렌티니)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되었으며, 기원전 427년 레온티노이가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분쟁이 확대되었다.[1] 아테네는 이에 응하여 함선 20척을 파견했다.[1]기원전 426년경에는 시켈리아의 많은 그리스 도시들과 원주민인 시켈인까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아테네는 레기온(현재 레조 디 칼라브리아), 레온티노이, 낙소스, 카마리나 및 여러 시켈인 부족과 동맹을 맺고 초반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아테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메시나(과거 메세네)를 점령하고 시라쿠사 측의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
한편, 시라쿠사이는 로크리, 젤라 등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기원전 425년 시라쿠사 측은 반격을 시작하여 메시나를 되찾았고, 아테네 동맹 도시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3. 젤라 회의
기원전 424년 시칠리아의 젤라에서 열린 평화 회의이다. 오랫동안 동맹 관계였으나 전쟁으로 적대하게 된 카마리나와 젤라는 기원전 425년 여름 휴전에 합의한 후, 시칠리아 전체의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모든 교전 도시를 초청하여 이 회의를 개최했다.[14][2][9][15][3][10] 이 회의에 대한 기록은 주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통해 알려져 있다.[16][4]
회의 초반에는 각 도시 대표들이 전쟁 중 겪었던 피해와 부당함을 토로하며 서로를 비난하는 양상이었으나,[17][5] 시라쿠사 대표 헤르모크라테스의 연설이 전환점이 되었다. 헤르모크라테스는 외부 세력, 특히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이던 아테네의 위협을 강조하며 시칠리아 도시들의 단결과 평화 공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18][6] 그의 주장은 민족 자결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제안 당사자인 강대국의 이익을 우선시했던 후대의 먼로 독트린과 비교되기도 한다.[19][7] 당시 시칠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던 시라쿠사는 외부 간섭이 배제될 경우 섬 전체의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19][7]
결과적으로 헤르모크라테스의 설득력 있는 연설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전쟁 피로감 등이 작용하여, 회의 참가자들은 현상 유지를 기반으로 한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 이 조약의 일환으로 시라쿠사는 카마리나에게 모르간티나를 넘겨주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기로 합의했다.[20][8] 당시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의 지휘관들 역시 이 조약을 수용하고 그리스 본토로 철수함으로써, 시칠리아 지역의 전쟁은 종식되었다.[20][8]
3. 1. 평화 협상의 시작
카마리나와 젤라는 오랫동안 동맹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이 전쟁에서는 서로 적대하는 입장이 되었다. 젤라는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은 반면, 카마리나는 시라쿠사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기원전 425년 여름, 카마리나와 젤라는 휴전에 합의했다.[14][2][9] 하지만 시칠리아의 다른 도시들이 여전히 전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두 도시만의 평화는 지속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카마리나와 젤라는 모든 교전 도시들을 초청하여 평화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각 도시는 회의에 대사를 파견했으며, 이들에게는 평소보다 더 큰 외교적 권한이 부여되었다.[15][3][10]3. 2. 회의 진행 과정
젤라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주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통해 알려져 있다. 투키디데스가 당시 시켈리아(시칠리아)에 직접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기록된 연설 내용은 그의 창작으로 여겨진다. 현대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가 회의의 전반적인 흐름과 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평가한다.[16][4]회의는 초기에 여러 도시 국가들이 전쟁 중 겪었던 부당함과 피해를 서로 비난하며 시작되었다.[17][5] 그러나 시라쿠사의 대표 헤르모크라테스가 연설에 나서면서 분위기는 전환점을 맞았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헤르모크라테스는 시켈리아 도시들의 단결을 호소하며 외부 세력인 아테네 '제국'의 잠재적 위협을 경고했다.[18][6] 그는 외세의 간섭에 맞서 시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공동으로 대응하고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헤르모크라테스의 제안은 후대의 먼로 독트린과 비교되기도 한다. 이는 자결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제안자인 강력한 시라쿠사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24년 당시 시라쿠사는 시켈리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도시 국가였으며, 아테네와 같은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한다면 섬 전체의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19][7]
헤르모크라테스의 설득력 있는 제안과 전쟁 피로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회의 참가자들은 현상 유지를 기반으로 한 평화 조약을 맺는 데 동의했다. 이 조약에는 시라쿠사가 카마리나에게 모르칸티나(모르가티나)를 넘겨주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20][8] 당시 시켈리아에 주둔하던 아테네 함대의 장군들 역시 이 조약을 받아들여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리스 본토로 철수했으며, 이로써 지역 내 분쟁은 종식되었다.
3. 3. 헤르모크라테스의 연설
젤라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주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통해 알려져 있다. 투키디데스는 당시 시켈리아에 직접 머물고 있지는 않았기에, 그가 기록한 개별 연설 내용은 그의 창작물일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그의 주관적인 생각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대체로 회의의 전반적인 흐름과 요지에 대해서는 투키디데스가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평가한다.[16][4]회의는 초기에 많은 도시 대표들이 전쟁 중에 겪었던 부당함과 피해를 서로 비난하며 시작되었다.[17][5] 그러나 시라쿠사의 대표로 참석한 헤르모크라테스가 연설에 나서면서 회의의 분위기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헤르모크라테스는 연설을 통해 시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게 아테네라는 외부 '제국'의 잠재적 위협을 경고하며, 시켈리아인들의 단결을 강력히 호소했다.[18][6] 그는 외세의 간섭에 맞서 시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공동으로 대응하고, 상호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헤르모크라테스의 이러한 제안은 후대의 먼로 독트린과 비교되기도 한다. 이는 민족 자결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제안 당사자인 강력한 국가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기원전 424년 당시 시라쿠사는 시켈리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도시 국가였으며, 만약 아테네와 같은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차단한다면 섬 전체의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19][7]
헤르모크라테스의 설득력 있는 연설과 더불어, 오랜 전쟁으로 인한 전쟁 피로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결국 현상 유지를 기반으로 한 평화 조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의 일환으로 시라쿠사는 카마리나에게 모르간티나를 넘겨주는 대신, 그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20][8] 당시 시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의 지휘관들 역시 이 조약을 받아들였고,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리스 본토로 철수함으로써 시켈리아 지역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3. 4. 평화 조약 체결
젤라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주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다.[16][4] 투키디데스가 당시 시켈리아에 직접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개별 연설 내용은 그의 창작으로 여겨지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회의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그가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평가한다.[16][4]회의는 처음에 여러 도시 국가 대표들이 전쟁 중 겪었던 피해와 부당함을 서로 비난하며 시작되었다.[17][5] 그러나 시라쿠사의 대표로 나선 헤르모크라테스가 연설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17][6]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헤르모크라테스는 시켈리아 도시들의 단결을 호소하며 외부 세력, 특히 제국주의적 야심을 가진 아테네의 위협을 경고했다.[18][6] 그는 외세의 간섭에 맞서 시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공동으로 대응하고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6]
헤르모크라테스의 제안은 민족 자결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제안 당사국의 이익을 추구했던 먼로 독트린과 비교되기도 한다.[19][7] 기원전 424년 당시 시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던 시라쿠사는 아테네와 같은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한다면 섬 전체의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19][7]
헤르모크라테스의 설득력 있는 주장과 길어진 전쟁으로 인한 피로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회의 참가자들은 결국 현상 유지를 바탕으로 한 평화 조약을 맺기로 합의했다.[19][8] 이 조약에는 시라쿠사가 카마리나에게 모르간티나를 넘겨주는 대신 금전적 대가를 받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20][8] 당시 시켈리아에 주둔하던 아테네 함대의 지휘관들도 이 조약을 받아들여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리스 본토로 철수했다.[20][8]
4. 젤라 회의의 의의와 영향
젤라 회의는 기원전 424년 시켈리아(오늘날의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 국가들이 모여 외세의 간섭, 특히 아테네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내부적인 평화를 모색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18][19] 시라쿠사의 대표 헤르모크라테스의 주도로 시켈리아인들의 민족 자결 의식이 강조되었으며, 이는 외부 세력 없이 시켈리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졌다.[18]
회의 결과, 참가 도시들은 현상 유지를 바탕으로 한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 합의했다.[20] 이 합의에 따라 시켈리아에 개입했던 아테네 함대는 철수했으며, 결과적으로 시라쿠사는 시켈리아 내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19][20] 젤라 회의의 논의 과정과 결과는 주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16]
4. 1. 시칠리아의 자결권 추구
이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에 관해서는 주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저서를 통해 알려져 있다. 투키디데스가 그 시기에 시켈리아(오늘날의 시칠리아)에 직접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기록된 연설 내용 자체는 그의 창작으로 볼 수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그의 주관적인 생각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회의의 전반적인 개요에 대해서는 투키디데스가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평가한다.[16]회의는 초기에 많은 도시 대표들이 전쟁 중 겪었던 피해와 상대방의 잘못을 서로 비난하며 시작되었다.[17] 그러나 시라쿠사의 대표로 참석한 헤르모크라테스가 연설에 나서면서 분위기는 전환점을 맞았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헤르모크라테스는 시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게 아테네 '제국'이 가하는 위협을 강조하며, 외부 세력의 간섭에 맞서 시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공동으로 대응하고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8] 이는 시켈리아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자는 민족 자결의 주장과 맞닿아 있었다.
헤르모크라테스의 제안은 후일 미국의 먼로 독트린이 미 대륙의 자결권을 주장했던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동시에 이 제안은 당시 시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던 시라쿠사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기원전 424년 당시 시라쿠사는 아테네와 같은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배제한다면 시켈리아 전체의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19] 헤르모크라테스의 설득력 있는 주장과 전쟁으로 인한 피로감이 맞물리면서, 회의 참가자들은 결국 현 상태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는 데 동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시라쿠사는 카마리나에게 모르간티나 영토를 넘겨주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20] 시켈리아에 파견되었던 아테네 함대의 지휘관들 역시 이 합의를 받아들여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리스 본토로 철수했다.
4. 2. 시라쿠사의 부상
젤라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주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통해 알려져 있다.[16] 투키디데스가 당시 시켈리아(오늘날의 시칠리아)에 직접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기록된 연설 내용 등은 그의 창작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의 주관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대체로 회의의 전반적인 흐름은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평가한다.[16]회의 초기에는 여러 도시 대표들이 전쟁 중 겪었던 피해와 상대방의 잘못을 서로 비난하며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17] 그러나 시라쿠사의 대표로 참석한 헤르모크라테스가 연설에 나서면서 분위기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헤르모크라테스는 시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게 외부 세력인 아테네 '제국'의 잠재적 위협을 강조하며 경각심을 일깨웠다.[18] 그는 외세의 간섭에 맞서 시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며, 내부적으로는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헤르모크라테스의 주장은 후대의 먼로 독트린이 미 대륙의 민족 자결을 내세운 것과 유사한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시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던 시라쿠사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기원전 424년 시점에서 시라쿠사는 시켈리아 내 최대, 최강의 세력이었으므로, 아테네와 같은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차단한다면 시켈리아 전체의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19] 헤르모크라테스의 설득력 있는 제안과 더불어 전쟁에 대한 피로감이 작용한 결과, 회의 참가자들은 현상 유지를 바탕으로 한 평화 조약을 맺는 데 동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시라쿠사는 카마리나에게 모르간티나 지역을 넘겨주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20] 시켈리아에 파견되었던 아테네 함대의 지휘관들 역시 이 합의를 수용하여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리스 본토로 철수했다. 결과적으로 젤라 회의는 시라쿠사가 외세의 개입을 물리치고 시켈리아 내에서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5. 젤라 회의에 대한 평가
(작성할 내용 없음)
5. 1. 투키디데스의 기록
이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에 관해서는 주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통해 알려져 있다. 투키디데스가 그 시기에 시칠리아에 직접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록된 연설 내용은 그의 창작일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기록에 투키디데스의 주관적인 생각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기도 했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투키디데스가 회의의 전반적인 개요와 취지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하였다고 평가한다.[16][4]회의는 초기에 많은 도시 국가 대표들이 전쟁 중에 겪었던 부당함과 피해를 서로에게 토로하며 비난하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17][5] 그러나 시라쿠사의 대표로 참석한 헤르모크라테스가 연설을 시작하면서 회의의 분위기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르모크라테스는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당시 세력을 확장하던 아테네 '제국'이 가하는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18][6] 그는 외부 세력의 간섭에 대해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공동으로 대응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미래를 제시했다.
헤르모크라테스의 이러한 제안은 민족 자결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이를 제안한 강력한 도시 국가인 시라쿠사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후대의 먼로 독트린과 비교되기도 한다. 기원전 424년 당시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도시 국가였으며, 만약 아테네와 같은 외부 세력의 영향을 성공적으로 차단한다면 섬 전체의 정치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19][7]
결과적으로 헤르모크라테스의 설득력 있는 주장과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전쟁 피로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회의 참가자들은 현상 유지를 기반으로 한 평화 조약을 맺는 데 동의했다.[20][8] 이 합의에 따라 시라쿠사는 카마리나에게 모르칸티나 지역을 넘겨주는 대신, 그 대가로 금전을 받기로 했다.[20][8] 당시 시칠리아에 파견되어 있던 아테네 함대를 이끌던 장군들 역시 이 조약을 받아들여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리스 본토로 철수하였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Book 3:86
[2]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3]
서적
The Archidamian War
[4]
서적
The Archidamian War
[5]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6]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7]
서적
The Archidamian War
[8]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9]
서적
3.58
[10]
서적
p266
[11]
서적
p. 267
[12]
서적
3.59-64
[13]
서적
267-268
[14]
서적
3.58
[15]
서적
p266
[16]
서적
p. 267
[17]
서적
3.58
[18]
서적
3.59-64
[19]
서적
267-268
[20]
서적
3.5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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