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모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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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모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시라쿠사이 출신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그는 시켈리아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에 맞서 시라쿠사이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젤라 회담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시켈리아 도시들을 반 아테네 진영으로 결집시켰고,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 당시에는 스파르타, 코린토스 등과 동맹을 맺어 아테네에 대항했다. 동지중해 해전에서도 활약했으나, 키지코스 해전 패배 후 추방당했다. 이후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조직하여 시칠리아로 돌아왔으나, 시라쿠사이에서 사망했다. 헤르모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등장하며, 그의 군사적, 외교적 능력은 당대에도 높이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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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모크라테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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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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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헤르모크라테스 |
원어 이름 | Ἑρμοκράτης (Hermokrátēs) |
직업 | 스트라테고스 나바르크 |
출생 시기 | 알 수 없음 |
사망 시기 | 기원전 407년경 |
소속 | 시라쿠사 |
군사 정보 | |
참전 전투 |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칠리아 원정 키지쿠스 전투 시칠리아 전쟁 |
2. 생애
헤르모크라테스는 헤르메스의 자손을 칭하는 시라쿠사이의 명문 귀족 헤르몬의 아들로 태어났다.[1] 젊은 시절부터 전쟁에 참가하여 군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기원전 424년 젤라 회담 이전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르모크라테스는 기원전 424년 겔라 회의에서 시칠리아 그리스인들이 분쟁을 멈추고 아테네에 대항하여 단결할 것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1][2] 당시 아테네는 시칠리아 도시들을 공격하여 코린토스를 지원하고 있었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가 시칠리아 정복을 위해 함대를 파견하자, 헤르모크라테스는 반 아테네 연합 확대를 주장하며, 스파르타, 코린토스, 카르타고, 이탈리아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구했다.[3] 아테네는 카타나에 기지를 구축하고 아나푸스 강에서 시라쿠사군을 격파했다. 헤르모크라테스는 도시 방어 시설 확장을 요구했고, 기존의 15명의 장군 체제를 폐지하고 세 명의 지도자가 전쟁을 이끌도록 했다. 그는 헤라클레이데스, 시카노스와 함께 시라쿠사의 세 명의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4] 또한 아테네 동맹인 카마리나에게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도록 설득했다.
전장에서의 실패로 장군직에서 해임되었지만, 이후 시칠리아에 도착한 스파르타 장군 길리푸스의 가장 중요한 고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시라쿠사 병사들을 지휘했고, 길리푸스와 함께 시라쿠사 포위 공격 동안 아테네에 승리했다. 아테네 군대가 패배한 후, 헤르모크라테스는 포로들을 친절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는 무시되었다.
기원전 412년, 시라쿠사는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스파르타 동맹을 지원하기 위해 동쪽으로 배를 보냈다. 헤르모크라테스는 제독이 되어 시라쿠사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 함대와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키지코스 해전에서 참패했다. 스파르타와 그 동맹군은 패주했고, 헤르모크라테스는 시라쿠사에서 정치적 경쟁자들에 의해 in absentia|부재 재판|la으로 추방되었으며, 패배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5]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시칠리아 도시 셀리누스와 아테네 동맹인 경쟁 도시 세게스타 사이의 긴장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세게스타는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게 되자, 대신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했고, 기원전 410년 한니발 마고가 시칠리아를 침공했다. 헤르모크라테스는 군대를 조직하여 카르타고군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시라쿠사에서는 헤르모크라테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를 비난하며 그의 궁극적인 목표가 독재라고 주장하는 세력 사이에서 정치적 갈등으로 폭동이 일어났다. 그는 기원전 407년 거리 싸움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젤라 회담 (기원전 424년)
헤르모크라테스는 헤르메스의 자손을 칭하는 시라쿠사이의 명문 귀족 헤르몬의 아들로 태어났다.[10] 젊은 시절부터 전쟁에 참가하여 군공을 세웠다는 말이 있지만, 기원전 424년 젤라 회담 이전까지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기원전 425년 아테네의 동맹 도시 레온티노이와 시라쿠사이가 싸울 때, 레온티노이의 요청에 의해 아테네는 에우리메돈과 소포클레스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원정 함대를 시켈리아에 파견하여 시켈리아의 도시에 아테네와의 동맹을 호소했다.
기원전 424년, 헤르모크라테스는 시라쿠사이 외교관으로 젤라 회담에서 연설을 통해[10] 시켈리아 평화를 실현함과 동시에 시켈리아 전역을 반 아테네 진영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11] 아테네 함대가 도착했을 때, 시켈리아 어떤 국가도 협력하지 않았고, 결국 함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르모크라테스는 겔라 회의에 참석하여 시칠리아 그리스인들이 분쟁을 멈추고 아테네에 대항하여 단결할 것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1][2] 당시 아테네는 시칠리아 도시들을 공격하여 코린토스를 지원하고 있었다.
2. 2.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 (기원전 415년 ~ 413년)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동맹국인 에게스타(현재의 세제스타)와 레온티노이를 지원하기 위해 알키비아데스, 니키아스, 라마코스 세 명을 총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함대를 시켈리아로 파견했다.[3] 시켈리아에 아테네 군이 파병된다는 소문이 돌자, 헤르모크라테스는 방위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테네 군이 이탈리아 남단의 레기온(현재의 레조디칼라브리아)에 집결하자, 헤르모크라테스는 시켈리아의 여러 도시에 공동으로 맞서 싸울 것을 제안했다.아테네 군이 무력을 앞세워 시켈리아의 카타네(현재의 카타니아)를 거점으로 삼은 직후, 헤르메스 신의 돌기둥 동상 파괴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본국으로 소환 명령을 받고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가을이 되어 니키아스가 이끄는 아테네 군과 시라쿠사이 군은 시라쿠사이 근처 올림페이온에서 첫 전투를 벌였고, 시라쿠사이 군은 패배했다. 헤르모크라테스는 시라쿠사이 군 지휘 체계를 효율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고, 헤라클레이데스, 시카노스와 함께 시라쿠사이의 최고 사령관(스트라테고스)으로 선출되어 군사 지휘를 맡게 되었다.[4] 아테네 군이 멧세네(현 메시나)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시라쿠사이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건축했고, 헤르모크라테스는 시켈리아 도시 카마리나에 가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기원전 414년, 니키아스는 시라쿠사이 근처에 아테네 함대를 몰래 집결시켜 단번에 시라쿠사이 북쪽에 있는 에피폴라이 고원을 점령했다. 이어서 시라쿠사이를 포위하는 벽을 쌓아 시라쿠사이를 항복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 당시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에 따라 길리푸스를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원군이 시켈리아에 파견되었다. 길리푸스는 히메라에 상륙하여 군대를 정비하고 시라쿠사이 군과 함께 시라쿠사이를 포위하고 있던 아테네 군을 격파했고, 라마코스는 전사했다. 에피폴라이 고원은 시라쿠사이의 차지가 되었고,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다시 활기를 찾자, 니키아스는 아테네에 원군을 요청했다.
기원전 413년, 아테네는 데모스테네스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추가 원정 함대를 시라쿠사이에 파견하여 시라쿠사이를 다시 포위했다. 그러나 대군 도착 후 첫 아테네 측의 에피폴라이 야간 기습은 헤르모크라테스의 활약으로 실패했고, 이후에도 첫 전투에서 헤르모크라테스와 길리푸스 측이 승리했다. 아테네 진영은 월식(기원전 413년 8월 27일)으로 인해 철수 시기를 놓쳐 함대가 전멸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포로가 된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 두 사람은 헤르모크라테스와 길리포스의 구명 탄원에도 불구하고 민중파 디오클레스의 주장에 의해 처형되었다.[1][2]
2. 3. 키지코스 해전과 추방 (기원전 410년)
기원전 412년, 헤르모크라테스는 스파르타와의 동맹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시라쿠사이 함대를 이끌고 스파르타의 아스튀오코스 휘하에 들어갔다. 이후 동에게 해에서 아테네와 맞서 싸웠으나, 본국에서는 함대장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디오클레스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5]기원전 411년, 키노스세마 해전에서 헤르모크라테스가 이끄는 시라쿠사이 함대는 스파르타 함대의 우익을 맡아 트라실로스가 이끄는 아테네 좌익 전대와 격돌했다. 헤르모크라테스의 시라쿠사이 함대는 분전했지만, 트라시불로스가 이끄는 아테네 우익 전대에 민다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본대는 패배했다. 시라쿠사이 함대는 삼단노선 한 척만을 잃었을 뿐이었다.[5]
기원전 410년, 키지코스 해전에서 알키비아데스, 테라메네스, 트라시불로스가 이끄는 아테네 군에 스파르타 연합 함대는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때 헤르모크라테스는 함선을 모두 불태우고 후퇴하여 시라쿠사이 군이 포로가 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이 패배의 책임을 물어 기원전 409년 시라쿠사이 함대장에서 해임됨과 동시에 국외 추방을 선고받았다. 헤르모크라테스는 스파르타를 거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으로 망명하여, 페르시아의 원조를 받아 함대와 군대를 재건했다.[5]
2. 4. 시칠리아 내전과 죽음 (기원전 409년 ~ 407년)
기원전 409년, 기스코의 아들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이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셀리누스(현재 마리네라 디 셀리눈테), 히메라, 아크라가스(현 아그리젠토) 마을을 유린하였다. 디오클레스는 시라쿠사이를 포함한 시켈리아 연합군을 지휘했지만 히메라를 되찾지 못하고 주민을 데리고 철수하였다. 헤르모크라테스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멧사나에 도착하여 세리누스 마을을 재건하고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떨어진 일부 지역의 해방에 성공하였다.기원전 408년, 헤르모크라테스는 히메라 땅으로 가서 그곳에서 수습한 시라쿠사이 사람의 유골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 결과 디오클레스는 실각했다. 기원전 408년에서 기원전 407년 사이의 겨울, 헤르모크라테스는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시라쿠사이에 입국을 강행하려고 했다. 그때 헤르모크라테스 군의 대부분을 아르카디네에 두고 친구들과 시라쿠사이 마을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시라쿠사이 군과 충돌을 일으켜 전사했다. 이후 헤르모크라테스의 사병을 묶어두는 데 성공한 디오니시오스 1세는 헤르모크라테스의 딸과 결혼하고,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시라쿠사이의 참주로 시켈리아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다. 디오니시오스 1세의 다른 아내 아리스토마케의 동생 디온은 플라톤이 기원전 388년 시라쿠사이를 방문했을 때 플라톤의 제자가 된다.
3. 플라톤의 대화편 등장
헤르모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인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플라톤은 ''헤르모크라테스''라는 제목의 세 번째 대화편을 계획했을 수도 있지만, 이를 완성하지 못했다.[6] F. M. 콘퍼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그의 이름을 딴 대화편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플라톤이 그를 선택한 이유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크리티아스가 9천 년 전 선사 시대 아테네가 아틀란티스의 침략을 격퇴하고 지중해 민족을 노예 상태에서 구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면, 헤르모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에게 그들의 가장 큰 제국주의적 팽창 시도를 격퇴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6]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에 따르면, 헤르모크라테스는 크리티아스의 손님으로서, 티마이오스, 철학자소크라테스 등과 함께 초대되었다. 당시 시라쿠사와 로크리는 모두 아테나이의 적국이었으며, 이 대화가 현실적인 것이라면, 니키아스 화약이 성립된 기원전 421/420년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서 헤르모크라테스는 별로 발언을 하지 않지만, 『크리티아스』에서는 헤르모크라테스를 "세 번째 화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군인·외교관으로서의 헤르모크라테스에게 아테나이와 아틀란티스 사이의 전쟁을 논하게 하는, 『티마이오스』·『크리티아스』의 속편인 『헤르모크라테스』의 집필을 구상했을 것이라는 설이 플라톤의 대화집 영문 번역으로 알려진 영국의 고전학자 벤저민 조위트 등에 의해 제창되고 있다. 칼키디우스의 『티마이오스 주해』에서도 『국가』의 속편으로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헤르모크라테스』라는 연작이 만들어졌다고 언급하고 있다(Calcidius,In Tim.6).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열전』에 따르면, 『크리티아스』는 미완으로 끝났으며, 『헤르모크라테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Diog.Laert.iii.61–62(s.37)).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
간행물
1933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1937
[7]
서적
Hellenika
[8]
서적
Nicias
[9]
서적
[10]
서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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