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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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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수문직은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막부 말기까지 쓰시마 번에서 조선과의 외교를 위해 파견한 승려를 지칭한다. 처음에는 임진왜란 이후 쓰시마 번의 외교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교토의 고산세키가쿠를 파견하는 형태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쇼군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으로 발전했다. 조선수문직은 외교 문서 작성, 조선 통신사 접대, 기타 외교 업무를 수행했으며, 1867년 에도 막부의 외교 체제 재검토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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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문직
조선 시대 수문직
직책 종류정직, 겸직
관할 부서병조, 훈련도감
정원20인 (훈련도감)
임무도성문 개폐 및 순찰
수문장
품계종6품
정원2인
임명무관
소속병조
임무궁궐 문 개폐 및 경비

2. 역사

조선수문직(朝鮮修文職)은 에도 막부 시기 쓰시마 번에서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했던 승려 직책이다. 센고쿠 시대 말, 쓰시마 번주 소 씨가 임제종 승려 게이테쓰 겐소를 초빙하여 조선 관련 문서 업무를 맡긴 것에서 유래했다. 이후 1635년, 담당 승려였던 규백현방이 야나가와 잇켄으로 유배되어 공백이 생기자, 에도 막부는 교토 오산의 학식 높은 승려인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 파견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조선수문직은 쓰시마 번의 대조선 외교 문서 작성 및 해독뿐만 아니라,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접대와 안내를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670년부터는 쇼군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으로 격상되었으며, 임명된 승려는 에도 성에 가서 직접 감사를 표해야 했다.

업무는 당번(当番), 가번(加番), 대번(代番)의 3인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실제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당번은 일정 기간마다 교체되는 윤번제로 운영되었다. 이 직책은 단순한 외교 실무자를 넘어 일본을 대표하는 학식과 교양을 갖춘 인물로 여겨졌으며, 임기를 마치면 소속 사찰의 주지 임명 등 여러 혜택이 주어지기도 했다.

조선수문직 제도는 1867년(게이오 3년) 에도 막부의 외교 체제 개편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2. 1. 설치 배경

센고쿠 시대( 戦国時代|센고쿠 시대일본어 ) 말기 쓰시마 번을 지배하던 소 씨( 宗氏|소 씨일본어 )는 임제종( 臨済宗|임제종일본어 ) 승려 게이테쓰 겐소( 景轍玄蘇|게이테쓰 겐소일본어 )를 초빙하여 조선과의 교섭에 필요한 문서 작성 및 해독 등을 맡겼다. 겐소는 게이초( 慶長|게이초일본어 ) 연간(1596년~1615년)에 쓰시마에 이테이 암자( 以酊庵|이테이 암자일본어 )를 짓고 거주하였다. 겐소가 사망한 뒤에는 규백현방( 規伯玄方|기하쿠 겐보일본어 )이 뒤를 이었으나, 간에이( 寛永|간에이일본어 ) 12년(1635년)에 일어난 야나가와 잇켄( 柳川一件|야나가와 잇켄일본어 )으로 겐보가 유배되면서 쓰시마 번은 후임자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에도 막부겐나( 元和|겐나일본어 ) 연간(1615년~1624년) 이후 교토 오산( 京都五山|교토 오산일본어 )의 학문 장려를 위해 임명했던 오산 석학( 五山碩学|고산세키가쿠일본어 ) 가운데서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 주석할 승려를 윤번제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조선수문직(朝鮮修文職)의 시작이다.

간에이 12년(1635년)에 교토 도후쿠지( 東福寺|도후쿠지일본어 )의 옥봉광린( 玉峰光璘|교쿠호 고린일본어 )과 당음현소( 棠蔭玄召|도인 겐소일본어 ), 덴류지( 天龍寺|덴류지일본어 )의 동숙수선( 洞叔寿仙|도슈쿠 주센일본어 ) 세 승려가 처음으로 조선수문직에 임명되었다. 옥봉광린이 먼저 이테이 암자에 파견되었고, 이후 당음현소와 동숙수선이 차례로 뒤를 이어 파견되어 교체되면서 쓰시마 번의 대(對)조선 외교를 보좌하였다.

처음에는 오산 석학 중에서 조선수문직을 뽑았으나, 간분( 寛文|간분일본어 ) 10년(1670년) 이후부터는 오산 석학과 조선수문직이 동시에 임명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쇼군( 将軍|쇼군일본어 )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이 되어, 임명된 승려는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에도 성( 江戸城|에도 성일본어 )으로 가야 했다. 조선수문직은 당시 일본의 대조선 외교 실무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통신사( 朝鮮通信使|조선 통신사일본어 )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접대(관반)와 안내(호행·찬도)를 맡는 중요한 역할도 수행했다. 이 때문에 일본을 대표할 만한 문재(文才)와 교양을 갖춘 선승으로 여겨지던 오산 석학 중에서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2. 2. 운영 및 변화

센고쿠 시대( 戦国時代일본어 ) 말기, 쓰시마 번을 지배하던 소 씨( 宗氏일본어 )는 조선과의 외교 문서 처리 능력을 갖춘 인물이 필요했다. 이에 임제종( 臨済宗일본어 ) 승려 게이테쓰 겐소( 景轍玄蘇일본어 )를 초빙하여 문서 작성과 해독을 맡겼다. 겐소는 임진왜란 시기인 게이초( 慶長일본어 ) 연간에 쓰시마에 이테이 암자( 以酊庵일본어 , 이정암)를 짓고 머물렀다.

겐소 사후에는 기하쿠 겐보( 規伯玄方일본어 )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으나, 1635년(간에이( 寛永일본어 ) 12년) 야나가와 잇켄( 柳川一件일본어 ) 사건으로 유배되면서 쓰시마 번은 외교 실무를 담당할 인재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도 막부겐나( 元和일본어 ) 연간부터 교토 5산( 京都五山일본어 )의 학문 장려를 위해 임명해 온 고산세키가쿠( 五山碩学일본어 , 오산 석학) 중에서 승려를 선발하여,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 순번제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조선수문직(朝鮮修文職) 제도의 시작이다.

같은 해인 1635년, 교토 도후쿠지( 東福寺일본어 )의 옥봉광린( 玉峰光璘일본어 )과 당음현소( 棠蔭玄召일본어 ), 그리고 덴류지( 天龍寺일본어 )의 동숙수선( 洞叔寿仙일본어 ) 세 승려가 최초의 조선수문직으로 임명되었다. 옥봉광린이 가장 먼저 이테이 암자에 파견되었고, 이후 당음현소와 동숙수선이 차례로 부임하여 쓰시마 번의 대조선 외교 업무를 보좌했다.

초기에는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조선수문직을 선발했으나, 1670년(간분( 寛文일본어 ) 10년)부터는 고산세키가쿠와 조선수문직이 동시에 임명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쇼군( 将軍일본어 )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이 되면서, 임명된 승려는 에도 성( 江戸城일본어 )에 가서 직접 감사의 인사를 해야 했다. 조선수문직은 당시 일본의 대조선 외교 실무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때 접대( 官伴일본어 , 관반)와 안내( 護行일본어 , 호행 또는 賛導일본어 , 찬도)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도 맡았다. 따라서 일본을 대표할 만한 학문적 소양과 교양을 갖춘 선승으로 평가받던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실제 직무를 수행하는 조선수문직은 당번( 当番일본어 ), 가번( 加番일본어 ), 대번( 代番일본어 )의 세 명으로 구성되었다.

  • 당번: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 상주하며 조선 관련 외교 실무를 총괄했다.
  • 가번: 조선 통신사 파견 등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당번을 도와 통신사의 접대와 안내를 담당했다.
  • 대번: 당번이나 가번에게 병이나 다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 직무를 대리했다.


당번은 정해진 기간마다 교대하는 윤번제로 운영되었는데, 처음에는 1년이었으나 1655년(메이레키( 明暦일본어 ) 원년) 이후에는 2년으로 임기가 늘어났다. 당번과 가번은 고산세키가쿠들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으며, 70세 이상의 고령자나 병이 있는 경우에는 쓰시마 파견이 면제되기도 했다.

조선수문직은 보수로 통상 고산세키가쿠에게 지급되는 '세키가쿠료'( 碩学料일본어 )라는 수당을 받았다. 또한 이테이 암자에 머무는 동안에는 쓰시마 번으로부터 매년 현미 100석을 별도로 지급받았고, 조선 통신사가 방문할 때에는 임시 수당이 추가로 주어졌다. 이 외에도 쓰시마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자신이 속한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는 데 유리한 점이 많아, 여러 차례 조선수문직을 맡는 승려도 있었다(재임 31명, 삼임 4명).

조선수문직 제도는 1867년(게이오( 慶応일본어 ) 3년)까지 이어졌다. 에도 막부가 외교 체제를 재검토하면서, 당시 126대(게이테쓰 겐소를 초대 기준으로 89번째) 조선수문직이었던 옥간수준( 玉澗守俊일본어 , 도후쿠지 소속)에게 귀환 명령을 내림으로써 제도는 폐지되었다.

2. 3. 폐지

게이오 3년(1867년)에 에도 막부의 외교 체제 재검토를 이유로 조선수문직은 폐지되었다. 초대 경철현소부터 계산하여 126대(89번째) 조선수문직이었던 옥간수준(도후쿠지)이 귀환 명령을 받으면서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3. 역할 및 임무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의 대조선 외교 실무를 담당했던 직책이다. 조선수문직은 주로 교토 5산의 학식 높은 승려들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이들은 쓰시마의 以酊庵|이테이안일본어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주요 임무는 조선과의 외교 문서 작성 및 해독, 그리고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들을 접대하고 안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할 때문에 조선수문직은 일본을 대표할 만한 문장 능력과 교양을 갖춘 인물로 여겨졌다. 실제 직무 수행은 当番|토반일본어(당번), 加番|카반일본어(가번), 代番|다이반일본어(대번)으로 역할을 분담하여 이루어졌다. 당번은 쓰시마에 상주하며 외교 실무를 총괄했고, 가번은 통신사 방문 시 접대와 안내를 지원했으며, 대번은 이들의 대리 역할을 맡았다.

3. 1. 외교 문서 작성 및 번역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말기, 쓰시마를 지배하던 소 씨(宗氏)는 임제종(臨済宗) 승려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를 초빙하여 조선과의 외교 문서 작성 및 해독을 맡겼다. 景轍玄蘇|게이테쓰 겐소일본어임진왜란이 벌어지던 게이초(慶長) 연간에 쓰시마에 이테이 암자(以酊庵|이테이안일본어)를 짓고 거주하였다. 겐소가 사망한 후에는 規伯玄方|기하쿠 겐보일본어가 뒤를 이었으나, 간에이(寛永) 12년(1635년)에 발생한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으로 겐보가 유배되면서 쓰시마 번은 후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에도 막부겐나(元和) 연간 이후 교토 5산(京都五山)의 학문 장려를 위해 임명했던 고산세키가쿠(五山碩学|고잔세키가쿠일본어) 중에서,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 머물 승려를 순번제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조선수문직(朝鮮修文職|조센슈분쇼쿠일본어) 제도의 시작이다.

1635년 교토 도후쿠지(東福寺)의 玉峰光璘|교쿠호 고린일본어과 棠蔭玄召|도인 겐소일본어, 그리고 덴류지(天龍寺)의 洞叔寿仙|도슈쿠 주센일본어 세 승려가 처음으로 조선수문직에 임명되었다. 고린이 이테이 암자에 처음 파견되었고, 이후 겐소와 주센이 차례로 뒤를 이어 파견되어 교체되며 쓰시마 번의 대조선 외교 업무를 보좌하였다.

초기에는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조선수문직을 임명했지만, 간분(寛文) 10년(1670년) 이후부터는 고산세키가쿠와 조선수문직이 동시에 임명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이 직책은 쇼군(将軍)이 직접 임명하는 자리가 되었으며, 임명된 승려는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에도 성(江戸城)을 방문해야 했다. 조선수문직은 당시 일본의 대조선 외교 실무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접대와 안내를 맡는 중요한 역할도 수행했다. 따라서 일본을 대표할 만한 문장 능력과 교양을 갖춘 선승으로 평가받던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직무는 당번(当番|토반일본어), 가번(加番|카반일본어), 대번(代番|다이반일본어) 세 명이 나누어 맡았다. 당번은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서 실제 외교 실무를 담당했고, 가번은 조선 통신사가 방문할 때 당번과 함께 접대 및 안내를 맡았다. 대번은 당번이나 가번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 대리 역할을 수행했다. 당번은 1년(메이레키 원년 이후에는 2년)마다 교대하는 윤번제였으며, 당번과 가번은 고산세키가쿠들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다만, 70세 이상의 고령자나 병이 있는 경우에는 쓰시마 파견이 면제되기도 했다. 조선수문직은 고산세키가쿠에게 주어지는 세키가쿠료(碩学料|세키가쿠료일본어)라는 수당을 받았으며, 이테이 암자에 머무는 동안에는 쓰시마 번에서 매년 현미 1백 석을 추가로 지급받았다. 조선 통신사가 방문할 때는 임시 수당이 더해졌다. 또한, 쓰시마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소속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는 등의 특전도 있었으며, 여러 차례 쓰시마 파견 임무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재임 31명, 삼임 4명).

게이오(慶応) 3년(1867년), 에도 막부가 외교 체제를 재검토하면서 조선수문직은 폐지되었다. 마지막 조선수문직이었던 126대(게이테쓰 겐소를 기준으로 89번째) 玉澗守俊|교쿠간 스이슌일본어(도후쿠지 소속)이 귀환 명령을 받으면서 제도는 완전히 사라졌다.

3. 2. 조선 통신사 접대

조선수문직은 당시 일본의 대조선 외교 실무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통신사의 접대와 왕래하는 길의 안내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임무의 중요성 때문에, 조선수문직은 일본을 대표할 만한 문재(文才)와 교양을 갖춘 선승으로 평가받던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 직무는 당번(当番), 가번(加番), 대번(代番) 세 명의 승려가 나누어 맡았다. 당번은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以酊庵)에서 조선 관련 외교 실무를 총괄했고, 가번은 특히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때 당번과 함께 통신사의 접대와 안내 등을 직접 수행했다. 대번은 당번이나 가번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 직무를 대리했다. 조선수문직에게는 통상 고산세키가쿠에게 주어지는 세키가쿠료(碩学料) 외에도, 이테이 암자에 머무는 동안 쓰시마 번에서 해마다 현미 1백 석을 지급했으며,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때에는 임시 수당이 추가로 지급되었다.

게이오 3년(1867년), 에도 막부가 외교 체제를 재검토하면서 조선수문직은 폐지되었다.

3. 3. 기타 외교 업무

센고쿠 시대 戦国時代|일본어 말기 쓰시마를 지배하던 소 씨 宗氏|일본어임제종 臨済宗|일본어 승려 게이테쓰 겐소 景轍玄蘇|일본어를 초빙하여 조선과의 교섭에 필요한 문서 작성 및 해독 등을 맡겼다. 겐소는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게이초 慶長|일본어 연간에 쓰시마에 이테이 암자를 짓고 거주하였다. 겐소 사망 후에는 기하쿠 겐보 規伯玄方|일본어가 뒤를 이었으나, 간에이 寛永|일본어 12년(1635년)에 발생한 야나가와 잇켄 柳川一件|일본어으로 겐보가 유배되면서 쓰시마 번은 후임자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에도 막부겐나 元和|일본어 시대 이후 교토 5산 京都五山|일본어의 학문 장려를 위해 임명했던 고산세키가쿠 五山碩学|일본어 중에서 쓰시마 이테이 암자에 주석할 승려를 순번제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이 조선수문직의 시작이 되었다.

1635년 교토 도후쿠지 東福寺|일본어의 교쿠호 고린 玉峰光璘|일본어과 도인 겐소 棠蔭玄召|일본어, 덴류지 天龍寺|일본어의 도슈쿠 주센 洞叔寿仙|일본어 세 승려가 처음으로 조선수문직에 임명되었다. 고린이 이테이 암자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겐소와 주센이 차례로 부임하여 교체되었으며, 쓰시마 번의 대(對)조선 외교 업무를 보좌하였다.

초기에는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조선수문직을 임명했으나, 간분 寛文|일본어 10년(1670년) 이후부터는 고산세키가쿠와 조선수문직이 동시에 임명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쇼군 将軍|일본어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이 되면서 임명된 승려는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에도 성 江戸城|일본어으로 직접 찾아가야 했다. 조선수문직은 당시 일본의 대조선 외교 실무 책임자였으며,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접대와 안내를 담당했기 때문에, 일본을 대표할 만한 문재 文才|일본어와 교양을 갖춘 선승으로 평가받던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수문직의 실제 직무는 당번 当番|일본어, 가번 加番|일본어, 대번 代番|일본어 세 명의 승려가 분담하였다.

}) || 쓰시마 이테이 암자에 상주하며 조선 외교 실무 담당

|-

| 가번 (加番|일본어) || 조선 통신사 방일 시 당번과 함께 접대 및 안내 담당

|-

| 대번 (代番|일본어) || 당번 또는 가번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 대리 역할 수행

|}

당번은 처음에는 1년마다 교대하였으나 메이레키 원년(1655년) 이후에는 2년마다 교대하는 윤번제로 운영되었다. 당번과 가번은 고산세키가쿠의 평의를 통해 결정되었으며, 70세 이상의 고령자나 병이 있는 경우에는 쓰시마 파견이 면제되기도 하였다. 조선수문직은 통상 고산세키가쿠에게 지급되는 세키가쿠료 碩学料|일본어라는 수당을 받았으며, 이테이 암자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쓰시마 번에서 매년 현미 1백 석을 추가로 지급받았다. 또한 조선 통신사가 방문할 때에는 임시 수당이 지급되었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소속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는 등의 특전도 있었다. 여러 차례 조선수문직을 맡는 경우도 있었는데, 재임한 승려는 31명, 삼임한 승려는 4명이었다.

게이오 慶応|일본어 3년(1867년), 에도 막부의 외교 체제 재검토 과정에서 마지막 조선수문직이었던 교쿠간 스이슌 玉澗守俊|일본어(도후쿠지 소속, 126대)이 귀환 명령을 받으면서 조선수문직은 폐지되었다.

4. 역대 조선수문직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일본어 말기, 쓰시마를 지배하던 소 씨宗氏일본어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위해 임제종臨済宗일본어 승려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일본어를 초빙하여 외교 문서의 작성과 해독 등을 맡겼다. 겐소는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게이초慶長일본어 연간에 쓰시마에 이테이 암자를 짓고 거주하였다. 겐소 사후에는 기하쿠 겐보規伯玄方일본어가 뒤를 이었으나, 간에이寛永일본어 12년(1635년)에 발생한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일본어으로 겐보가 유배되면서 쓰시마 번은 그의 후임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에도 막부겐나元和일본어 시대 이후 교토 5산京都五山일본어의 학문 장려를 위해 임명해 온 고산세키가쿠五山碩学일본어 중에서 쓰시마 이테이 암자에 주석할 승려를 순번제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수문직(朝鮮修文職)의 시작이다.

간에이寛永일본어 12년(1635년), 교토 도후쿠지東福寺일본어의 교쿠호 고린玉峰光璘일본어과 도인 겐소棠蔭玄召일본어, 그리고 덴류지天龍寺일본어의 도슈쿠 주센洞叔寿仙일본어 세 승려가 처음으로 조선수문직에 임명되었다. 고린이 먼저 이테이 암자에 파견되었고, 이후 겐소와 주센이 차례로 부임하여 쓰시마 번의 대(對)조선 외교 실무를 보좌하였다.

초기에는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조선수문직을 임명하였으나, 간분寛文일본어 10년(1670년) 이후부터는 고산세키가쿠와 조선수문직이 동시에 임명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조선수문직은 쇼군将軍일본어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이 되어, 임명된 승려는 감사의 인사를 위해 에도 성江戸城일본어을 방문해야 했다. 조선수문직은 당시 일본의 대조선 외교 실무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접대와 안내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도 맡았다. 이 때문에 일본을 대표할 만한 문재(文才)와 교양을 갖춘 선승으로 평가받던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수문직의 실제 직무는 당번(当番), 가번(加番), 대번(代番)의 세 명으로 구성되어 운영되었다. 당번은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서 실제 조선 외교 실무를 담당했고, 가번은 조선 통신사 방문 시 당번과 함께 접대 및 안내 업무를 수행했다. 대번은 당번이나 가번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 대리 임무를 맡았다. 당번은 처음에는 1년마다, 메이레키明暦일본어 원년 이후에는 2년마다 교대하는 윤번제였으며, 당번과 가번은 고산세키가쿠들의 평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다만, 70세 이상의 고령자나 병이 있는 경우에는 쓰시마 파견이 면제되기도 했다. 조선수문직은 기본적으로 고산세키가쿠에게 지급되는 세키가쿠료碩学料일본어라는 수당을 받았으며, 이테이 암자에 머무는 동안에는 쓰시마 번으로부터 매년 현미 100석을 추가로 지급받았다. 조선 통신사가 방문할 때에는 임시 수당이 더해졌다. 또한, 쓰시마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소속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는 등의 특전이 있었으며, 여러 차례 조선수문직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재임 31명, 삼임 4명).

게이오慶応일본어 3년(1867년), 에도 막부가 외교 체제를 재검토하면서 마지막 조선수문직이었던 제126대 교쿠간 스이슌玉澗守俊일본어(도후쿠지東福寺일본어 소속,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일본어를 기준으로 센다)에게 귀환 명령이 내려졌고, 이로써 조선수문직 제도는 폐지되었다.

5. 의의 및 평가

조선수문직은 에도 막부 시기 일본의 대(對)조선 외교를 상징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1635년부터 1867년까지 약 230년간 운영되었으며, 주로 교토 5산의 학식 높은 승려인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임명되어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以酊庵)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조선과의 외교 문서 처리, 조선 통신사 접대 및 안내 등 양국 간 교류의 실무를 책임졌다. 쇼군이 직접 임명할 정도로 중시되었으며, 당대 일본 최고의 문재(文才)와 교양을 갖춘 인물로 여겨져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선발되었다. 따라서 조선수문직은 단순한 외교 실무자를 넘어, 당시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고 조선과의 문화 및 학술 교류에서 핵심적인 매개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5. 1. 조선-일본 관계에서의 역할

센고쿠 시대( 戦国時代일본어 ) 말기 쓰시마 번을 지배하던 소 씨는 조선과의 교섭에 필요한 문서 처리 등을 위해 임제종( 臨済宗일본어 ) 승려 게이테쓰 겐소( 景轍玄蘇일본어 )를 초빙하였다. 겐소는 임진왜란 시기인 게이초( 慶長일본어 ) 연간에 쓰시마에 이테이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겐소 사후 기하쿠 겐보( 規伯玄方일본어 )가 뒤를 이었으나, 간에이( 寛永일본어 ) 12년(1635년) 야나가와 잇켄( 柳川一件일본어 )으로 겐보가 유배되면서 쓰시마 번은 후임자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에도 막부겐나( 元和일본어 ) 연간 이후 교토 5산( 京都五山일본어 )의 학문 장려를 위해 임명했던 고산세키가쿠( 五山碩学일본어 ) 가운데서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 주석할 승려를 순번제로 파견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조선수문직의 시작이다.

같은 해 교토 도후쿠지( 東福寺일본어 )의 교쿠호 고린( 玉峰光璘일본어 ), 도인 겐소( 棠蔭玄召일본어 )와 덴류지( 天龍寺일본어 )의 도슈쿠 주센( 洞叔寿仙일본어 ) 세 승려가 처음 조선수문직으로 임명되어 차례로 이테이 암자에 파견되었고, 쓰시마 번의 대조선 외교 실무를 보좌하였다. 초기에는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임명했지만, 간분( 寛文일본어 ) 10년(1670년) 이후에는 고산세키가쿠와 조선수문직이 동시에 임명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쇼군( 将軍일본어 )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이 되어, 임명된 승려는 에도 성( 江戸城일본어 )에 직접 가서 감사를 표해야 했다.

조선수문직은 당시 일본의 대조선 외교 실무 책임자였으며, 특히 조선 통신사( 朝鮮通信使일본어 )가 일본에 파견될 경우 통신사의 접대와 여정 안내를 맡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일본을 대표할 만한 문재(文才)와 교양을 지닌 선승으로 평가받던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임명되었다.

실제 직무는 당번( 当番일본어 ), 가번( 加番일본어 ), 대번( 代番일본어 ) 세 명이 나누어 맡았다. 당번은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서 조선 관련 외교 실무를 직접 담당했고, 가번은 조선 통신사 방문 시 당번과 함께 접대와 안내를 맡았다. 대번은 당번이나 가번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대리하는 역할이었다. 당번은 1년(메이레키( 明暦일본어 ) 원년 이후 2년)마다 교대하는 윤번제였으며, 당번과 가번은 고산세키가쿠들의 협의로 결정되었다. 다만 70세 이상 고령이거나 병이 있는 경우 쓰시마 파견이 면제되기도 했다. 조선수문직은 고산세키가쿠에게 주어지는 세키가쿠료( 碩学料일본어 ) 외에도, 이테이 암자 체류 기간 동안 쓰시마 번에서 매년 현미 1백 석을 지급받았고, 조선 통신사 방문 시에는 임시 수당이 추가로 지급되었다. 또한 쓰시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소속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는 등의 특전도 있었으며, 여러 차례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재임 31명, 삼임 4명).

조선수문직 제도는 게이오( 慶応일본어 ) 3년(1867년), 에도 막부의 외교 체제 재검토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마지막 조선수문직은 126대 교쿠간 스이슌( 玉澗守俊일본어 , 도후쿠지 소속)이었다.

5. 2. 학문 및 문화 교류에 대한 기여

조선수문직은 단순한 외교 실무를 넘어, 조선과의 학문 및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에도 막부1635년(간에이 12년)부터 교토 5산(京都五山)의 학식 높은 승려들인 고산세키가쿠(五山碩学) 중에서 조선수문직을 임명하여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以酊庵)에 파견했다. 이는 센고쿠 시대쓰시마를 지배하던 소 씨(宗氏)가 임제종 승려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를 초빙하여 조선과의 외교 문서를 다루게 한 것에서 유래했다. 임진왜란게이초 연간에 겐소가 쓰시마에 이테이 암자를 짓고 거주했으며, 그의 사후 기하쿠 겐보(規伯玄方)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1635년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으로 겐보가 유배되자, 막부는 겐나 연간 이후 교토 5산의 학문 장려를 위해 임명했던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순번제로 이테이 암자에 주석할 승려를 파견하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수문직의 시작이었다. 최초로 임명된 승려는 교토 도후쿠지(東福寺)의 교쿠호 고린(玉峰光璘)·도인 겐소(棠蔭玄召)와 덴류지(天龍寺)의 도슈쿠 주센(洞叔寿仙) 세 명이었다.

초기에는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조선수문직을 임명했지만, 간분 10년(1670년) 이후에는 고산세키가쿠와 조선수문직이 동시에 임명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조선수문직은 쇼군(將軍)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이 되었고, 임명된 자는 감사의 인사를 위해 에도 성(江戸城)으로 직접 가야 했다. 조선수문직은 당시 일본의 대(對)조선 외교 실무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가 일본에 오면 접대와 안내를 맡았기 때문에, 일본을 대표할 만한 문재(文才)와 교양을 갖춘 선승(禪僧)으로 여겨지던 고산세키가쿠 중에서 임명되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과의 만남은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조선의 선진 학문과 문화를 접하는 중요한 기회였고, 조선수문직은 그 중심에서 통역, 필담, 시문 교환 등을 통해 양국 간 지적·문화적 소통을 촉진하는 핵심적인 매개자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수문직은 통상 당번(当番), 가번(加番), 대번(代番)의 세 명으로 구성되어 운영되었다. 당번은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서 실제 외교 실무를 담당했고, 가번은 조선 통신사 방문 시 당번과 함께 접대 및 안내를 맡았으며, 대번은 비상시 대리 역할을 수행했다. 당번은 초기에는 1년, 메이레키 원년 이후에는 2년마다 교대하는 윤번제로 운영되었으며, 당번과 가번은 고산세키가쿠의 평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70세 이상의 고령자나 병이 있는 경우 쓰시마 도항이 면제되기도 했다. 조선수문직은 통상 고산세키가쿠에게 주어지는 세키가쿠료(碩学料)라는 수당을 받았으며, 쓰시마의 이테이 암자에 머무는 동안에는 쓰시마 번에서 매년 현미 1백 석을 추가로 지급받았다. 또한 조선 통신사가 방문할 때는 임시 수당이 더해졌고, 쓰시마에서 돌아온 뒤 소속 사원의 주지로 임명되는 등의 특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조선수문직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재임 31명, 삼임 4명).

그러나 1867년(게이오 3년), 에도 막부의 외교 체제 재검토 과정에서 126대 조선수문직인 교쿠간 스이슌(玉澗守俊, 도후쿠지 소속)에게 귀환 명령이 내려지면서 조선수문직은 폐지되었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 간의 공식적인 학문 및 문화 교류 채널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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