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모리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지 모리슨은 로버트 모리슨의 아들로, 초대 나가사키 영사로 임명되어 영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나가사키에서 1859년부터 1863년까지 영사직을 수행했다. 영사로 재직하며 그는 영국인을 위한 규칙을 제정하고, 막부와 무역 및 거류지 정비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 1861년에는 에도 여행 중 도젠지 사건으로 부상을 입었고, 1863년 나마무기 사건의 영향으로 양이 운동이 격화되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모리슨은 1893년 니스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에 거주한 영국인 - 레지널드 블라이스
레지널드 블라이스는 영국 출신의 영문학자로,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며 선불교와 하이쿠 연구에 헌신했고, 서구 사회에 선불교와 하이쿠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 일본에 거주한 영국인 - 펠리체 베아토
펠리체 베아토는 19세기 주요 역사적 사건과 에도 시대 일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영국 국적의 사진작가로서, 그의 사진들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 막말의 외국인 - 펠리체 베아토
펠리체 베아토는 19세기 주요 역사적 사건과 에도 시대 일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영국 국적의 사진작가로서, 그의 사진들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 막말의 외국인 - 예프피미 푸탸틴
예프피미 푸탸틴은 러시아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외교관으로서 페르시아, 일본, 중국과의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며, 특히 시모다 조약 체결을 통해 러일 관계의 기초를 다지고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으나 강압적인 교육 정책으로 비판받았다. - 영국의 외교관 - 제1대 세실오브첼우드 자작 로버트 세실
제1대 세실오브첼우드 자작 로버트 세실은 영국의 변호사이자 정치인, 외교관으로 국제 연맹 창설에 기여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국제 연합을 지지하며 활동했다. - 영국의 외교관 - 앤서니 이든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보수당 하원의원, 외무부 차관,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국제연맹을 통한 평화 유지에 힘썼으나, 수에즈 위기의 실패로 총리직에서 사임한 후 에이번 백작 작위를 받았다.
조지 모리슨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1862년 2월 4일, 질롱 |
사망 | 1920년 5월 30일 (58세), 사이렌스터 |
묻힌 곳 | 사이렌스터 |
국적 | 영국 |
직업 | 저널리스트, 의사 |
배우자 | 제니 워프 (1912년 결혼) |
경력 | |
직책 | 《더 타임스》의 베이징 특파원 중국 정부의 정치 고문 |
고용주 | 《멜버른 에이지》 《더 타임스》 중국 정부 |
학력 | |
모교 | 멜버른 대학교 의과대학 |
서명 | |
![]() |
2. 생애
조지 스톤턴 모리슨은 마카오에서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의 아들로 태어나, 초대 나가사키 영사로 임명되어 일본과 서양의 관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영일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초대 나가사키 영사로 임명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부임이 늦어져 1859년 7월 1일 나가사키 개항 당시에는 크리스토퍼 호지슨이 임시 대리직을 맡았다. 모리슨은 한 달 뒤인 8월 6일에 도착하여 1863년 12월까지 영사직을 수행하며, 나가사키 거주 영국인들을 위한 규칙 제정, 에도 막부와의 무역 및 거류지 정비 협상 등을 담당했다.
1861년에는 러더퍼드 올콕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 육로 여행을 하던 중, 7월 5일 도젠지에서 미토번 출신 양이파 낭인들에게 습격당하는 제1차 도젠지 사건을 겪고 부상을 입었다. 이후 1863년 4월 나가사키로 돌아왔으나, 나마무기 사건의 여파로 양이 운동이 격화되자 영국 군함에 거류지 보호를 요청하고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영국으로 귀국, 다시는 나가사키로 돌아가지 않았다.
1893년 8월 20일 니스에서 62세(또는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조지 스톤턴 모리슨은 마카오에서 영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과 엘리자 모리슨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이름은 아버지와 마카오에서 오랫동안 친구였던 조지 스톤턴 경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2. 2. 나가사키 영사 부임 (1859-1863)
영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조지 모리슨은 초대 나가사키 영사로 임명되었다. 이는 총영사(이후 공사로 승격)였던 러더퍼드 올콕 다음 가는 중요한 자리였다.[1] 그러나 모리슨은 건강 문제로 수에즈 운하를 거치지 않고 희망봉을 통해 상하이로 가는 바람에 부임이 늦어졌다.[2] 이 때문에 1859년 7월 1일 나가사키 개항에 맞춰 크리스토퍼 호지슨이 임시로 나가사키 영사 대리직을 맡았다.[4] 모리슨은 한 달 늦은 8월 6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1863년 12월까지 영사직을 수행했다.[1][2]모리슨은 영사 부임 초기 2년 동안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위한 규칙을 만들고, 에도 막부와 무역 및 거류지 정비에 관한 협상을 진행했다.[1]
1861년, 러더퍼드 올콕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 육로 여행을 계획했고, 모리슨도 여기에 동행했다. 이들은 6월 1일 나가사키를 출발해 34일 만인 7월 4일 에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7월 5일, 미토번 출신 양이파 낭인들이 도젠지에 있는 영국 공사관을 습격하는 제1차 도젠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모리슨은 부상을 입었고, 로렌스 올리펀트도 함께 부상을 당해 그 해 가을 영국으로 돌아갔다.[1]
모리슨은 1863년 4월 나가사키로 돌아왔지만, 나마무기 사건의 영향으로 양이 운동이 격화되어 영국과 일본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모리슨은 영국 군함에 거류지 보호를 요청했고,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영국으로 귀국했으며, 다시는 나가사키로 돌아오지 않았다.[1] 도젠지 사건이 그의 사직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3]
2. 3. 에도(도쿄) 여행과 도젠지 사건 (1861)
러더퍼드 올콕을 비롯한 일행은 일본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 육로 여행을 계획했고, 모리슨도 이에 동행했다. 이 외에 네덜란드 총영사 드위트, 공사관원 에이벨 가우어 (후에 나가사키·하코다테 영사),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특파원 찰스 워그먼이 여행에 참여했다. 1861년 6월 1일(분큐 원년) 일행은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34일간의 여행 끝에 7월 4일 에도에 도착했다.[4]에도에 도착한 다음 날인 7월 5일 오후 10시경, 미토번 출신의 양이파 낭인 14명이 도젠지에 설치된 영국 공사관을 습격했다. (제1차 도젠지 사건|제1차 도젠지 사건일본어) 이 습격으로 모리슨은 부상을 입었고, 며칠 전 에도에 도착했던 장관 로렌스 올리펀트도 부상을 입었다.[4] 이 사건은 찰스 워그먼이 그린

2. 4. 나가사키 복귀와 양이 운동 (1863)
모리슨은 1863년 4월에 나가사키로 돌아왔다.[1] 그러나 전년도에 발생한 나마무기 사건으로 양이 운동이 나가사키까지 확산되어, 영국과 일본 간의 전투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 관리들은 ''바쿠후''에 도전하고 조약 항구에서 외국인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모리슨은 거류민 보호를 위해 영국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3] 결국 모리슨은 건강을 이유로 영국으로 귀국했지만, 다시는 나가사키로 돌아오지 않았다. 도젠지 사건이 사직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2. 5. 영국 귀국과 사망
모리슨은 1863년 4월 나가사키로 돌아왔지만, 전년의 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해 양이 운동이 나가사키까지 확산되어 영국과 일본 간의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영국 군함에 거류지 보호를 요청했다. 결국 모리슨은 건강상의 이유로 영국으로 귀국하기로 결정했고, 다시는 나가사키로 돌아오지 않았다. 도젠지 사건이 그의 사직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3]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대한 의혹 또한 그가 떠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1893년 8월 20일, 모리슨은 니스에서 62세(또는 63세[3])의 나이로 사망했다.[1]
참조
[1]
문서
UK, Foreign and Overseas Registers of British Subjects, 1628-1969
[2]
뉴스
The London Gazette
http://www.london-ga[...]
1859-02-25
[3]
뉴스
Deaths
https://www.britishn[...]
2018-07-23
[4]
간행물
函館領事ホヂスン帰国に関する英国外務省記録
https://doi.org/10.1[...]
日本国際政治学会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