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직계군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직계군벌은 중화민국 북양군벌의 한 파벌로, 위안스카이 사후 펑궈장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19년 펑궈장 사망 후 차오쿤과 오패부로 분열되었으며, 주요 인물로는 리춘, 왕뎬위안 등이 있었다. 안휘군벌과의 권력 투쟁에서 펑궈장이 대총통 대리, 이후 실각하는 과정을 거쳤다. 1920년 직환전쟁, 1922년 제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하며 북양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23년 차오쿤이 뇌물로 대총통에 당선되었으나,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패배하며 붕괴되었다. 이후 국민당의 북벌로 인해 완전히 몰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직계 군벌 - 펑궈장
    펑궈장은 청나라 군대에서 시작하여 위안스카이 밑에서 경력을 쌓고 신해혁명 진압에 기여, 직례총독을 거쳐 위안스카이 사후 부총통 및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역임했으나, 군벌 간 권력 다툼과 정치적 혼란 속에 퇴임 후 사망한 중국 북양군벌의 지휘관이자 정치인이다.
  • 직계 군벌 - 우페이푸
    우페이푸는 청나라 말에서 중화민국 초기에 활동한 산둥성 출신의 군벌로, 북양무비학당에서 교육을 받고 안직전쟁 승리로 북양군벌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으나 북벌 이후 몰락하여 1939년에 사망했다.
  • 북양군벌 - 장쉰
    장쉰은 청나라 말기 및 중화민국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청나라 복벽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은퇴하여 사업가로 활동했다.
  • 북양군벌 - 베이징 정변
    1924년 펑위샹이 봉천파와 결탁하여 일으킨 베이징 정변은 직예파 수장 차오쿤 축출과 선통제 폐위 등 중국 정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군벌 간 권력 다툼을 심화시켰다.
  • 중국의 군사사 - 화창
    화창은 화약을 사용하여 불꽃이나 폭발을 일으키는 무기로, 흑색화약의 낮은 폭발력으로 위협용으로 사용되다가 금속 화약총통의 등장으로 소총의 전신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최무선에 의해 개발되어 화차와 신기전으로 개량되었다.
  • 중국의 군사사 - 무경총요
    북송 인종의 명으로 1040년부터 1044년까지 편찬된 《무경총요》는 당시의 군사 지식을 집대성한 방대한 군사서로, 군사 제도, 전략, 전술, 무기 기술, 해상 전투 기술, 음양오행설, 점술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중국 군사사와 과학기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직계군벌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직예 군벌
중화민국 오색기에서 유래된 북양성
중화민국 오색기에서 유래된 북양성
존속 기간1920년 – 1928년
국가중화민국
소속북양 정부
유형군벌 파벌
전투직예-안휘 전쟁
제1차 직예-봉천 전쟁
제2차 직예-봉천 전쟁
북벌
사령관 1펑궈장, 차오쿤
사령관 1 직책총통

2. 직예파의 성립 (1916년 - 1918년)

채악과 손문의 호국전쟁 이후 사망한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은 여러 계파로 분열됐는데, 그중 펑궈장의 직계파로 시작됐다. 처음 우두머리는 펑궈장(馮國璋)이었으나, 1919년 이후 차오쿤(曹錕)과 오패부(吳佩孚)로 바뀌었다. 주요장군으로는 리춘(李純)·왕뎬위안(王占元)·쑨촨팡(孫傳芳)·지셰위안(齊燮元)·샤오야오난(蕭耀南) 등이 있다. 1917년 3번째 중화민국 총통 리위안훙과 안휘군벌 수장이자 총리인 돤치루이가 세계대전 참전을 두고 논쟁할 때 발생한 장쉰복벽으로 리위안훙은 사임하고 권한대행인 펑궈장이 총통이 됐다. 이후 펑궈장이 하야하고 사망한 후, 1919년 돤치루이와 서세창이 권력을 얻은 후 참전군을 유지하려했다.

펑궈장


1916년 6월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그가 이끌던 베이양 군벌은 구심력을 잃고 분열된다. 우선 국무총리로서 이미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돤치루이가 이끄는 안후이 파 (완계)가 정권을 담당하지만, 위안스카이의 후계로 대총통에 취임한 리위안훙과 부원(府院)의 다툼이라고 불리는 권력 투쟁을 시작한다. 이 시기, 즈리 파의 펑궈장은 난징의 류서우(留守) 역할로 중앙 정치에서 멀어져 있었지만, 리위안훙이 돤치루이를 견제하기 위해 1916년 10월 30일에 펑궈장을 부대총통으로 임명한다. 이 인사를 통해 표면으로 나선 그는 갑자기 권력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1917년 7월 리위안훙이 실각하자 펑궈장이 대총통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쑨원이 광둥 군정부를 조직하고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그 대응으로 국론이 양분된다. 국무총리 돤치루이는 무력 정벌을 주장했고, 대총통 대리 펑궈장은 무력 행사에 반대했다. 이것이 "화전(和戰)의 다툼"이다. 결국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 사후 동북 지방을 정리한 장쭤린이 이끄는 펑톈 파 (펑계)와 연합하여 남정을 강행, 게다가 1918년의 신국회(안푸 국회)에서의 다수파 공작에도 성공하여, 펑궈장을 대총통의 지위에서 끌어내렸다.

2. 1. 돤치루이와의 권력 투쟁

1916년 6월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베이양 군벌은 분열되었다. 돤치루이가 이끄는 안후이 파가 정권을 담당했지만, 대총통에 취임한 리위안훙과 권력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즈리 파펑궈장난징에 머물며 중앙 정치에서 멀어져 있었지만, 리위안훙이 돤치루이를 견제하기 위해 1916년 10월 30일에 펑궈장을 부대총통으로 임명하면서 권력을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1917년 7월 리위안훙이 실각하자 펑궈장이 대총통 대리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쑨원이 광둥 군정부를 조직하고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국론이 양분되었다. 국무총리 돤치루이는 무력 정벌을 주장했고, 대총통 대리 펑궈장은 무력 행사에 반대했다. 결국 돤치루이는 장쭤린이 이끄는 펑톈 파와 연합하여 남정을 강행하고, 1918년의 신국회(안푸 국회)에서 다수파 공작에 성공하여 펑궈장을 대총통 지위에서 끌어내렸다.

3. 직예파 정권의 확립 (1920년 - 1924년)

1919년 펑궈장이 사망한 후, 직계군벌차오쿤의 바오딩파와 우페이푸의 뤄양파로 나뉘었다. 이들은 펑궈장보다 권력욕이 강했고, 다른 군벌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직환전쟁 이후 오패부는 미국인 폴 S. 라인쉬를 고문으로 초빙하여 미국영국의 정계·재계와 연계함으로써 지지를 얻었다.

1920년 직환전쟁에서 안휘군벌을, 1922년 제1차 직봉전쟁에서 봉천군벌을 차례로 격파하고 북양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23년 차오쿤은 국회의원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3. 1. 직환전쟁 (1920년)

1919년에 직예파의 펑궈장이 병사하자, 직예파는 다시 바오딩파(차오쿤파)와 뤄양파(우페이푸파)로 갈라졌다. 그들은 펑궈장보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더 컸으며, 타 파벌과의 항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다. 1918년에 직예파가 정권에서 물러난 이후 정권을 담당했던 돤치루이였지만, 지나치게 친일 정책을 펼친 탓에 5.4 운동 등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그의 명성은 하락했다. 이에 주목한 차오쿤 등 직예파는 영국·미국의 지원을 받아 봉천파의 장쭤린과 동맹하여 1920년 7월 직환 전쟁(안직 전쟁)에서 돤치루이가 이끄는 안휘파를 격파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3. 2. 제1차 직봉전쟁 (1922년)

1919년에 직예파의 펑궈장이 병사하자, 직예파는 바오딩파(차오쿤파)와 뤄양파(우페이푸파)로 나뉘었다. 그들은 펑궈장보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더 컸으며, 타 파벌과의 항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다. 정권은 펑톈파와의 연립 정권(전기)과 단독 정권(후기)으로 나뉜다.

1918년 직예파가 정권에서 물러난 후, 돤치루이가 정권을 담당했지만 친일 정책으로 5.4 운동 등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명성이 하락했다. 차오쿤 등 직예파는 영국·미국의 지원을 받아 장쭤린의 봉천파와 동맹, 1920년 7월 직완 전쟁(안직 전쟁)에서 돤치루이의 안휘파를 격파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직예파(차오쿤·우페이푸)와 봉천파(장쭤린)는 모두 권력욕이 강해 연립 정권 수립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정권 주도권을 두고 대립, 1922년 4월 제1차 봉직 전쟁에서 직예파가 봉천파를 격파하고 직예파 단독 정권을 수립했다.

3. 3. 차오쿤의 대총통 취임 (1923년)

1919년에 직예파의 펑궈장이 병사하자, 직예파는 다시 바오딩파(차오쿤파)와 뤄양파(우페이푸파)로 갈라졌다. 차오쿤은 "대총통"이라는 자리를 원했으나, 우페이푸는 지지층이 적어 단독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시 직예파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으로는 중앙의 쉬스창 대총통, 남부·서부의 국민당 및 지방 군벌, 동북 지방의 봉천 계열 장쭤린 등이 있었다.

우페이푸는 "모두가 납득할 방책"으로 1917년 7월 이후 안휘파 주도의 정치 체제·국회 운영을 부정하고, 그 이전으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이는 국민당의 주장에 부합하며, 쉬스창 대총통을 실각시킬 수 있었다. 쉬스창1922년 6월 2일에 대총통을 사임했고, 직예파는 1917년 7월까지 대총통이었던 리위안훙을 다시 대총통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차오쿤1923년에 리위안훙을 사임시키고 자신이 대총통에 취임했다. 차오쿤의 이러한 행보에 여러 파벌은 "반직동맹"을 결성하여 대항했고, 1924년에 제2차 봉직 전쟁에서 직예파의 펑위샹이 배신하면서 직예파는 패배했다. 차오쿤은 북경에서 연금되었고, 북경 정부의 실권은 봉천파로 넘어갔다.

4. 직예파 정권의 몰락 (1924년 - 1928년)

1924년 봉천군벌과의 2차 직봉전쟁이 발발했고 서북군벌 펑위샹은 북경정변으로 차오쿤 정부를 몰락시킨 후, 돤치루이를 집정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시켰다. 오패부는 패배하여 잔여부대를 이끌고 후베이(湖北)로 도주한 후 영향력을 유지했다. 직예파의 또 다른 실력자인 쑨촨팡은 절강, 복건, 강서를 규합하여 오성연군을 조직한다. 그러나 장개석과 국민당의 북벌로 1926년 12월 오패부와 쑨촨팡은 차례로 국민혁명군에게 패배한 후 장쭤린에 의탁하여 모든 북양군 잔여 군벌들이 연합하여 안국군을 조직하여 연합하여 북벌에 대항하지만, 1928년 국민혁명군과 국민군, 산서군벌의 베이징 입성 후 완전히 몰락한다.

1925년 중국. 황록색과 연두색이 직례파의 지배 지역

4. 1. 돤치루이 집정부 정권 수립 (1924년)



직례파 정권이 붕괴된 후, 돤치루이의 집정부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 합작에 들어가 국민 혁명을 노리고 1926년에 광주에서 북벌을 시작하자, 정권의 주역인 펑위샹과 봉천파의 장쭤린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회로 본 우페이푸는 '반공·반국민당'으로 장쭤린과 결속하여 중앙 정계 복귀를 목표로 베이징으로 진격, 1926년 4월에 돤치루이의 정권도 붕괴되었다.

우페이푸와 장쭤린은 다시 연합하여 정권을 수립했지만, 정책적인 이견으로 양측의 보조는 맞지 않았다. 1928년, 북벌이 '베이징 점령'이라는 형태로 완료되고 베이징 정부가 소멸되면서 직례파는 사실상 소멸한다.

4. 2. 국민당의 북벌과 직예파의 소멸 (1926년 - 1928년)



직례파 정권이 붕괴된 후, 돤치루이의 집정부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 합작을 통해 국민 혁명을 목표로 1926년 광주에서 북벌을 시작하자, 펑위샹과 장쭤린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회로 본 우페이푸는 '반공·반국민당'을 내세워 장쭤린과 연합하여 중앙 정계 복귀를 시도, 1926년 4월에 돤치루이 정권을 붕괴시켰다.

우페이푸와 장쭤린은 연합 정권을 수립했으나, 정책적 이견으로 인해 협력은 원활하지 않았다. 1926년 7월, 북벌로 인해 화중 지역 기반을 상실한 우페이푸는 같은 해 말에 세력을 잃었다. 1928년, 북벌이 베이징 점령으로 완료되고 베이징 정부가 소멸되면서 직례파는 사실상 소멸했다.

5. 한국과의 관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