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페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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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페이푸는 청나라 말에서 중화민국 초기에 활동한 군벌로, 산둥성 출신이다.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나 군대에 들어가 북양무비학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러일전쟁 참관을 계기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신해혁명 이후 호국전쟁에서 활약했다. 안후이 군벌과의 안직전쟁에서 승리하며 북양군벌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지만, 제2차 직봉전쟁 패배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다. 국민당의 북벌로 인해 몰락한 뒤에도 일본의 협력 제안을 거부하다가 193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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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페이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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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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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옥새(玉帥)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74년 4월 22일 |
출생지 | 청나라 산둥성 펑라이 시 |
사망일 | 1939년 12월 4일 |
사망지 | 베이핑, 중화민국 (일본 점령 지역) |
군사 정보 | |
소속 | 청나라 중화민국 |
군종 | 북양군, 직예군벌 |
복무 기간 | 1898년–1927년 |
계급 | 원수 |
지휘 | 북양군 제3사단 |
주요 전투 | 직예-안휘 전쟁 제1차 직봉 전쟁 제2차 직봉 전쟁 북벌 (1926–1927) |
훈장 | 서훈장 보광가화장 문호장 욱일장 |
기타 정보 | |
추증 계급 | 중화민국 추증 육군 1급 상장 |
2. 생애
산둥성(山東省) 덩저우(登州, 현 펑라이 시)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했으나 군인의 길을 걸었다. 차오쿤(曹錕)에게 발탁되어 북양 군벌의 일원으로 성장했으며, 신해혁명 이후 호국전쟁, 장쉰 복벽 토벌 등에 참여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
1918년 남북전쟁 중 돌연 평화 협상을 주장하고, 1919년 5.4 운동을 지지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1920년 직환전쟁과 1922년 제1차 직봉 전쟁에서 승리하며 직계 군벌의 핵심 인물이자 북양 군벌 최강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1923년 징한 철로 노동자 파업을 무력 진압한 '2.7 참변'으로 비판을 받았다.
1924년 제2차 직봉전쟁에서 펑위샹(馮玉祥)의 배신으로 몰락했으나, 1925년 재기에 성공하여 1926년에는 봉천파와 연합해 펑위샹 군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당의 북벌 과정에서 국민혁명군에게 패배하고 쓰촨성으로 은퇴하며 정치 생명을 마감했다.
만년에는 베이핑(北平, 현 베이징)에 거주하며 만주국 수립을 비판하고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의 협력 요구를 거부했다. 1939년 치과 치료 후 패혈증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국민정부로부터 항일 의지를 인정받아 육군 일급상장으로 추증되었다.
2. 1. 청나라 말기 활동
산둥성(山東省) 덩저우(登州, 오늘날의 펑라이 시)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6] 6세부터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14세에는 덩저우 수사영(水師營)의 학생병이 되었다.[6] 1896년 (광서 22년) 22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수재(秀才)가 되면서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6] 그러나 이듬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수재 자격을 박탈당하고 지명 수배까지 받게 되었다.[6] 우페이푸는 베이징으로 도망쳐 점쟁이 노릇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6]1898년 (광서 24년), 녜스청(聶士成)이 이끄는 회군(淮軍)에 입대하였고, 같은 해 카이핑 무비 학당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6] 하지만 1900년 (광서 26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면서 학당 운영이 중단되자, 원래 부대로 복귀하여 포병대 대관(隊官)이 되었다.[6]
1902년 (광서 28년) 9월, 당시 즈리 총독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휘하로 들어가 바오딩 육군 속성 학당에 입학했다.[6] 이곳에서 측량과를 학습하고 1904년 (광서 30년) 1월에 졸업했다.[6]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페이푸는 노점상으로 위장하여 전쟁 상황을 관찰했는데, 이때 차오쿤(曹錕)의 눈에 띄게 되었다. 1906년, 위안스카이의 심복이었던 차오쿤이 지휘하는 북양육군(北洋陸軍) 제3진(鎭) 포병 제3표(標) 제1영(營)의 관대(管帶, 대대장급)로 임명되었다.
2. 2. 러일 전쟁 참전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우페이푸는 북양독련공소에서 일본군과 협력하기 위한 정찰대에 선발되었다. 이 시기에 오카노 마스지로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6]러일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군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1905년 10월에는 제11표 제1영 독대관으로, 1906년에는 제1영 관대로 임명되었다. 1907년에는 차오쿤이 지휘하는 제3진을 따라 창춘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차오쿤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는 훗날 신해혁명 발발 이후 차오쿤의 추천을 받아 제3표 표통으로 발탁되는 배경이 되었다.
2. 3. 중화민국 초기 활동
1912년 (민국 원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중화민국의 대총통이 된 후 군이 개편되면서, 우페이푸(吳佩孚)는 제3사 포병 제3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민국 3년) 4월, 차오쿤(曹錕)이 창장(長江) 상류 경비 총사령으로 임명되어 웨양(岳陽)에 주둔하게 되자, 우페이푸는 부관장으로 임명되어 그를 따랐다. 1915년 (민국 4년), 제6여단 여단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12월,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반발하여 각지에서 호국전쟁(護國戰爭)이 발발하자, 차오쿤과 함께 쓰촨으로 파견되어 차이 어(蔡鍔)가 이끄는 호국군과 전투를 벌였다.1916년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제3사는 바오딩(保定)으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 군벌은 돤치루이(段祺瑞)의 안휘파(安徽派), 장쭤린(張作霖)의 봉천파(奉天派), 그리고 우페이푸가 속한 직예파(直隸派) 등 여러 파벌로 분열되어 대립하였다. 우페이푸는 차오쿤과 함께 펑궈장(馮國璋)이 이끄는 직예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17년 (민국 6년) 7월, 장쉰(張勳)이 푸이(溥儀)를 내세워 복벽을 시도하자(장쉰 복벽), 우페이푸는 토역군(討逆軍) 서로군(西路軍)의 선봉에 서서 장쉰 군대를 토벌하는 데 참여했다[7].
1918년 (민국 7년) 봄, 안휘파의 국무총리 돤치루이(段祺瑞)는 남방의 호법군(護法軍)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페이푸는 제3사를 이끌고 후난(湖南)으로 진격하여 웨양(岳陽)을 점령하는 등 군공을 세웠다. 그러나 돤치루이가 별다른 공이 없는 자신의 파벌 인물인 장징야오(張敬堯)를 후난 독군(督軍)으로 임명하자, 우페이푸를 비롯한 직예파 장령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1919년 (민국 8년) 4월, 우페이푸는 헝양(衡陽)을 점령했지만, 이후 호법군 토벌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해 5.4 운동이 일어나자, 우페이푸는 공개적으로 학생 운동을 지지하고 베르사유 조약 조인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8월에는 돤치루이가 추진하던 남북 무력 통일 노선에 반대한다는 통전을 전국에 발표하여 여론의 큰 호응을 얻었다. 11월에는 헝양에서 윈난(雲南)의 탕지야오(唐繼堯)와 광시(廣西)의 루룽팅(陸榮廷) 대표를 만나 반(反) 안휘파 동맹 결성을 논의하고 '구국동맹군 초고'(救国同盟军草约|구국동맹군 초약zho)라는 조약을 맺었다. 이는 장쭤린의 봉천파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반 안휘파 연합의 기초가 되었다. 12월 28일, 직예파의 지도자였던 펑궈장이 사망하면서,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직예파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8].
2. 4. 직환전쟁과 직봉전쟁
1919년 11월, 우페이푸는 헝양에서 탕지야오 (윈난)와 루룽팅 (광시)의 군벌 대표를 만나 반 안휘파 동맹 결성을 논의했다. 이 동맹에는 장쭤린의 강력한 봉천파도 포함되었다. 救国同盟军草约|구국동맹군초약중국어이라는 조약을 체결하여 반 안휘 군벌 동맹의 기반을 마련했다. 1920년(민국 9년) 5월, 우페이푸는 헝양에서 철수하여 징한 철도 연선인 정저우-보정 구간을 장악했다. 같은 해 7월, 차오쿤과 함께 돤치루이의 안휘파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하며 직환전쟁(안직 전쟁)을 일으켰다. 우페이푸는 반 안휘군 총사령관으로서 초기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과감한 기동 작전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봉천파와의 연합으로 안휘파 군대는 일주일 만에 격파되었고, 우페이푸와 차오쿤의 직예파는 봉천파와 함께 베이징 정부를 장악했다. 이 승리로 우페이푸는 뛰어난 전략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9월, 차오쿤이 직로예[9] 순열사에 임명되자 우페이푸도 동 순열 부사로 임명되어 낙양에 주둔했다.직예파와 봉천파의 연립 정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우페이푸의 강한 반일 성향은 만주에서 일본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던 봉천파 지도자 장쭤린에게 불안 요소였다. 양측은 총리직 임명을 놓고도 대립했다. 1921년(민국 10년) 7월, 직예군 소속 후베이 독군 왕잔위안의 실정으로 후베이 자치 운동이 일어나 남방 정부와 연계한 후베이 자치군에 의해 축출되자, 우페이푸는 휘하의 샤오야오난을 파견해 이를 진압했다. 다음 달 우페이푸는 량후 순열사로 승진했고, 샤오야오난은 후베이 독군이 되었다[10]. 이 무렵 영국, 미국과 가까운 직예파와 일본의 지원을 받는 봉천파 간의 주도권 다툼은 더욱 격화되었다. 1921년 말, 장쭤린이 지지하는 량스이(구 안휘파)가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1922년(민국 11년) 1월 우페이푸는 량스이를 "매국노"라고 맹비난하며 갈등을 증폭시켰다. 결국 4월, 제1차 직봉 전쟁이 발발했다. 우페이푸가 이끄는 직예군은 뛰어난 전투력으로 각지에서 봉천군을 격파하고 장쭤린을 산해관 밖으로 몰아냈다.

제1차 직봉전쟁 승리로 직예파는 베이징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지만,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받은 직예파는 1922년 6월, 리위안훙을 다시 대총통으로 추대했다. 이 시기 우페이푸의 명성은 그의 옛 상관이자 직예파의 명목상 지도자인 차오쿤을 능가할 정도였다. 우페이푸는 육군 총장에 임명되었으나 8월에 사임하고 량후 순열사 직위에 머물렀다. 리위안훙을 내세워 통일을 추진하려던 우페이푸의 구상과 달리, 대총통 자리를 노리던 차오쿤은 리위안훙의 복귀에 불만을 품었다. 차오쿤은 노골적인 매수 선거를 통해 1923년 10월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페이푸는 차오쿤의 후임으로 직로예 순열사에 취임했다. 우페이푸는 매수 선거에 비판적이었지만 차오쿤과의 정면 대립은 피했다. 이로 인해 직예파 내부는 차오쿤 중심의 "바오딩파"와 우페이푸 중심의 "뤄양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게 되었다. 한편, 우페이푸는 낙양을 거점으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다지고 영미 차관을 통해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이때 일본의 오카노 마스지로가 우페이푸의 고문으로 기용되기도 했다[14].
1923년 2월, 우페이푸는 징한 철도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을 군대를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 사건은 '2.7 참변'으로 불리며 우페이푸의 국내 평판에 큰 타격을 주었다[13]. 반면, 외국 열강의 이익을 보호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에게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24년(민국 13년) 9월, 군사력을 재정비한 장쭤린이 다시 직예파에 도전하면서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다. 우페이푸는 토역군 총사령관으로서 산해관 전선에서 봉천군과 맞섰다. 그러나 직예파 내부의 펑위샹이 베이징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을 감금하고 수도를 장악했다. 후방이 차단되고 협공을 받게 된 우페이푸 군대는 급격히 무너졌고, 우페이푸는 후베이의 샤오야오난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샤오야오난은 오히려 우페이푸에게 하야를 권유하는 등 비호에 소극적이었다.

궁지에 몰린 우페이푸는 1925년(민국 14년) 봄 하야를 선언하고 후난 독군 자오헝티의 보호 아래 잠시 은거했다[15]. 그러나 같은 해 10월, 쑨촨팡이 반봉 전쟁을 일으키자, 우페이푸는 이 기회를 틈타 우한에서 "14성 토적 연합군 총사령"을 자칭하며 재기를 도모했다.
2. 5. 북벌과 몰락
1925년 10월, 절강독판 쑨촨팡(孫傳芳)이 봉천파에 대항하는 전쟁을 시작하자, 우페이푸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그는 우한의 샤오야오난(蕭耀南)에게 영입되어 '14성 토적 연합군 총사령'을 자칭하며 재기를 선언했다.[15] 1926년 초, 직계는 다시 봉천파와 손을 잡고 펑위샹(馮玉祥)의 국민군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이 기회를 틈타 우페이푸는 북상을 시작하여, 같은 해 3월에는 허난성을 탈환했다. 계속해서 진군하며 각지에서 국민군을 물리쳤고, 5월 8일에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베이징 위수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우페이푸가 국민군을 더 깊숙이 추격하려 하자, 펑위샹이 없는 국민군은 난커우에 자리를 잡고 거세게 저항했다. 이로 인해 우페이푸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그 사이 남쪽에서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개시하여 빠르게 북상하며 우한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1926년 8월, 우페이푸는 급히 후베이성 셴닝(함녕)으로 이동하여 딩쓰차오 전투에서 국민혁명군과 맞섰으나 격전 끝에 패배했다. 이후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10월에는 결국 거점인 우한마저 국민혁명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우페이푸는 남은 부대를 이끌고 쓰촨성으로 패주하여 은거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다시는 권력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몰락하였다.
2. 6. 국민정부 시기 활동과 최후
국민당의 북벌이 진행되면서 우페이푸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북벌군이 우한을 점령한 후, 1927년 (민국 16년) 5월 우페이푸는 결국 실권을 잃고 잔여 부대를 이끌고 쓰촨성으로 피신하여 군벌 양썬(楊森)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17] 그는 은거하며 재기를 도모했으나 다시 권력을 잡지는 못했다.이후 중원대전 등 여러 차례 재기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32년 (민국 21년) 1월부터는 베이징(당시 베이핑)으로 거처를 옮겨 장쉐량(張學良)의 비호 아래 생활했다. 이 시기 그는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 정부임을 비판하였다.
1935년 (민국 24년) 화북 자치 운동 무렵부터 일본은 우페이푸를 친일 정권의 수장으로 내세우려 시도했다. 일본 측의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岡野增次郎|오카노 마스지로일본어와 중국 측의 장옌칭(張燕卿), 천중푸(陳中孚) 등이 이 공작에 관여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우페이푸는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외국 조계지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로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다.[5]
1938년 (민국 27년) 1월, 중화민국 임시 정부는 우페이푸와 차오루린(曹汝霖)을 최고 고문으로 임명했으나[18], 이는 실권 없는 명목상의 직책에 불과했다.[19] 당시 우페이푸는 루종위(陸宗輿)와 함께 홍만자회 활동에 더 관심을 두는 등[22], 정치적 재기에 큰 의지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23]
1939년 (민국 28년) 1월, 우페이푸가 "평화 구국 선언"을 발표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24], 이는 장옌칭 등이 조작한 사실무근의 내용이라는 주장도 있다.[25][26] 같은 해, 충칭을 탈출한 왕징웨이(汪精衛)와 서신을 교환하며 제휴를 모색했으나, 우페이푸는 일본군의 중국 철수를 자신의 협력 조건으로 내거는 등[28] 입장의 차이로 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8] 그는 왕징웨이에 대한 개인적인 불신감만 키운 것으로 보인다.[28]
우페이푸는 끝까지 일본 측의 회유에 응하지 않았으며[29], 친일 괴뢰 정권 참여를 거부했다. 1939년 (민국 28년) 12월 초, 그는 물만두를 먹다 치통을 느껴 지나 파견군 총사령부 소속 川本芳太郎|가와모토 요시타로일본어가 소개한 일본인 치과의사에게 발치 치료를 받았다.[30] 치료 후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12월 4일 사망했다(향년 66세).[30] 사인은 공식적으로 패혈증으로 알려졌으나, 치료 과정과 일본 측과의 관계 때문에 일본군에 의한 암살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진상은 불명확하다.[30]
사후 1940년, 과거 그를 토벌했던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그의 항일 의지와 비협력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하여 육군 일급상장(一級上將) 계급을 추증했다.[30]
3. 평가
우페이푸는 군사적 능력과 전통적인 유교 소양을 함께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슈차이(秀才)에 올랐으나, 이후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북양무비학당과 바오딩육군속성학당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제1차 직봉 전쟁에서 봉계 군벌을 격파하며 북양군벌 내 최강자의 지위에 오르는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진보적인 면모도 보여, 1919년에는 5.4운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3년 징한 철도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을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한 2.7 참변을 일으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사건으로 중국 내에서 그의 평판은 크게 나빠졌지만,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구 열강의 사업가들에게는 긍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했다.
우페이푸는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걸어두었으며,[4] 중국의 조계지를 국가적 모욕으로 여겨,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외국 조계지에 발을 들이는 것을 거부했다.[5] 이러한 신념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일본이 그에게 화북 지역 괴뢰 정부의 수장 자리를 제안했을 때, 그는 중국 땅에서 모든 일본군이 철수해야 협력할 수 있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1939년 12월, 우페이푸는 치통으로 일본인 치과의사에게 치료를 받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일본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를 군벌로서 토벌했던 장제스의 국민정부조차도 그가 끝까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하여 사후에 일급상장(一級上將) 계급을 추증하였다.
우페이푸는 군벌 시대의 혼란 속에서 군사적 성공과 실패, 진보적 지지와 노동자 탄압, 외세에 대한 강경한 민족주의 등 복잡하고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특히 외세, 구체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군벌로서 권력 투쟁에 깊이 관여하고 민중을 탄압했던 행적은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의 삶은 격동의 근대 중국사를 반영하는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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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七事件 - Yahoo!百科事典
http://100.yaho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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