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헌공 (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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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헌공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군주로, 아버지 진 무공의 진나라 재통일 전쟁에서 활약했다. 즉위 후에는 사위의 헌책에 따라 종가 세력을 위협하던 공족을 제거하여 종가의 권위를 확립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정복 전쟁을 통해 주변 국가들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넓혔으나, 만년에 여희의 참언으로 태자 신생을 죽이고 다른 아들들을 멀리하여 '여희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진나라는 혼란에 빠졌으며, 그의 사후에는 후계 다툼으로 정국이 불안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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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헌공 (21대)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공 |
휘 | 기 궤저 (姬詭諸) |
시호 | 헌공 (獻公) |
성 | 기 (姬) |
이름 | 궤저 (詭諸) |
시대 | 진 |
재위 기간 | |
즉위 | 기원전 676년 |
퇴위 | 기원전 651년 |
통치 | 기원전 676년 – 기원전 651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무공 |
배우자 | 제강 호계 여희 소희 |
자녀 | 목희 (진 목공의 부인) 신생 문공 혜공 해제 탁자 |
기타 정보 | |
사망 | 기원전 651년 |
계승자 | 기 해제 |
2. 생애
태자로서 아버지 무공의 진나라 재통일 전쟁에서 활약했다. 즉위 후에는 모신이자 대부인 사위의 헌책에 따라 종가의 위세를 위협하기 시작한 환숙, 장백을 조상으로 하는 공족[2]을 멸망시켜 종가의 권위를 확립하고 진나라를 융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공로로 사위를 대사공에 임명했다.
헌공 9년, 서괵이 공격해 왔다. 이는 멸망시킨 진나라의 본가 공자들이 서괵으로 망명하여 호소한 것에 의한 것이었다. 헌공은 서괵을 공격하려 했으나 사위의 간언을 받아들여 중단했다.
헌공 16년, 군대를 증강하여 이군으로 나누고, 헌공 자신이 상군의 장수가 되고, 태자 신생(공태자)을 하군의 장수로, 헌공의 아들에게 조숙을, 차우를 필만에게 임명하여 주변 제후국 소국 곽, 위, 경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경나라를 조숙에게, 위나라를 필만에게 주었다. 헌공 17년, 신생에게 명하여 동산씨를 쳤다. 이로써 인근의 평정을 끝냈다고 본 헌공은 헌공 19년, 서괵을 토벌하기 위해 순식을 우나라에 보내 길을 빌렸다(가도멸괵). 이 서괵 공략에는 3년이 걸렸지만, 마침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귀환하는 길에 우나라도 멸망시켜 병탄하고 영토를 확대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애첩인 여희(이민족 여융의 딸)의 참언을 믿고, 태자 신생을 죽이고, 공자 중이(후의 문공)·공자 이오(후의 혜공) 등을 멀리했기 때문에, 진나라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이를 '여희의 난'이라고 부르며, 이 이후, 진나라는 태자 이외의 공자를 국외로 내보내는 전통을 지켜, 이 때문에 공족의 힘이 매우 약해져 갔다.
2. 1. 환숙·장백의 후손 제거와 권력 강화
헌공은 즉위 후 모신이자 대부인 사위의 헌책에 따라 종가의 위세를 위협하기 시작한 환숙, 장백을 조상으로 하는 공족[2]을 멸망시켜 종가의 권위를 확립하고 진나라를 융성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7] 이 공로로 사위를 대사공에 임명했다.[4]《사기》에서는 헌공 8년(기원전 669년) 사위의 설득으로 여러 공자(군공자)를 죽이고 취(聚)에 성을 쌓아 서울로 삼고 이름을 강(絳)이라 했다고 간략하게 기록했다.[7]
《좌전》에 따르면 헌공이 환숙 · 장백의 종족을 제거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헌공 6년(기원전 671년)부터이며, 그 이유는 환숙 · 장백의 자손들이 강성하여 공실을 핍박했기 때문이다. 헌공은 사위에게 이 일을 맡겼고, 사위는 환숙 · 장백의 종족을 이간질하여 먼저 그 중 가장 강한 부자(富子)를 군공자들과 함께 제거하고, 헌공 7년(기원전 670년)에는 유씨의 두 아들[游氏之子]도 제거했다. 헌공 8년(기원전 669년) 사위는 취읍에 성을 쌓아 군공자를 거기 거주하게 해 겉으로 우대했으나, 이해 겨울 진헌공이 여기를 공격하여 공자들을 모두 죽였다.[3] 헌공 9년(기원전 668년), 헌공은 사위의 공을 치하하여 대사공(大司空)으로 삼았다.[4]
헌공이 즉위했을 때, 주 혜왕을 방문하여 보상을 받았고, 이는 제후국 전반에서 그의 인기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신의 신하인 사위가 제안한 전략을 채택했는데, 이는 진나라 왕실 가족 거의 모두를 학살하고 추방하여 진나라의 왕위가 그의 후손 중 한 명에게 영원히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공작의 권력이 강화되었지만, 씨족은 거의 전멸했기 때문에 공작 씨족의 정치적 권력은 상실되었다.
2. 2.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
진 헌공은 활발한 정복 전쟁을 통해 진나라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헌공 5년(기원전 672년) 여융(驪戎)을 정벌하고 여희를 첩으로 얻었다.[5][6][7] 헌공 9년(기원전 668년)에는 군공자가 괵(虢)나라로 도망가 괵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7] 헌공은 괵나라를 치려 했으나 사위의 만류로 중단했다.[7] 이후 극숙호(郤叔虎)의 활약으로 적사(翟柤)나라를 정복했다.[6]헌공 16년(기원전 661년)에는 군대를 상군과 하군으로 나누어 곽(藿) · 위(魏) · 경(耿) 세 나라를 멸망시켰다.[7] 옛 경나라 땅은 조숙에게, 옛 위나라 땅은 필만에게 주었다.[7] 가뭄이 들자 곽태산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망한 곽나라의 임금 곽공 구(霍公求)를 불러 곽나라의 종묘를 복구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8] 헌공 17년(기원전 660년)에는 신생에게 명하여 동산(東山)에 사는 고락씨(皐落氏)를 치게 하고,[7][9] 신생은 직상(稷桑)에서 적(狄)을 격파했다.[6]
헌공 19년(기원전 658년), 순식(荀息)의 계책에 따라 우(虞)나라에 뇌물을 주어 길을 빌려 괵나라를 공격했다.[7] 우공은 기뻐하며 먼저 괵나라를 치기를 청했고, 이극과 순식은 우나라와 연합하여 괵의 하양(下陽)을 점령했다.[7][10] 헌공 26년(기원전 653년)에는 우나라와 연합하여 괵나라의 서울 상양(上陽)을 포위하고 괵나라를 멸망시켰다.[7][11] 괵공 추는 경사로 달아났고, 헌공은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7][11]
헌공 25년(기원전 652년), 적(翟)을 공격했으나 중이를 보호하고 있던 적이 채상에서 반격하여 물러났다.[7] 거듭된 정복으로 진나라는 서쪽으로는 하서, 북쪽으로는 적(翟), 동쪽으로는 하예(河內)에 이르는 강대한 국가가 되었다.[7]
헌공은 사위의 헌책에 따라 종가의 위세를 위협하기 시작한 환숙・장백을 조상으로 하는 공족[2]을 멸망시켜 종가의 권위를 확립하고 진을 융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3. 여희의 난과 후계 문제
기원전 665년, 헌공은 여융 정벌에서 얻은 애첩 여희가 아들 해제를 낳자, 해제를 사랑하여 태자 신생을 폐하고자 했다. 선조의 종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신생을 곡옥으로, 진나라와 북적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공자 중이와 이오를 포와 굴로 내보냈다. 다른 공자들은 변방으로 보내고, 여희와 그 동생의 아들만을 서울에 남겨두었다.[7][12]헌공은 신생을 하군 장수로 삼고 곡옥성을 쌓아 주었으며, 기원전 660년에는 동산고락씨 토벌을 맡겼다. 대부 이극은 태자가 국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출전하여 스스로 명령을 내리면 불효가 되며, 헌공에게 물어 명령을 내리면 위엄이 서지 않으므로 군대를 거느릴 수 없게 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헌공은 누가 태자가 될지 모른다는 말로 이극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공이 법도에 어긋나게 신생을 중용하는 것을 보고 사위는 장차 신생이 군위를 잇지 못하리라고 여겼다.[13][14] 신생이 전투에서 계속 공을 세우자 신생에 대한 참언이 더욱 심해졌다.[6]
여희는 신생과 헌공 사이를 계속 이간하여 신생이 임금 자리를 노린다고 모함하였으며, 헌공도 신생을 폐하고자 했으나 치죄할 구실이 없었다. 여희는 이극을 회유하여 중립을 지킨다는 말을 받아냈다. 기원전 656년, 여희는 신생에게 친모 제강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 제육을 헌공에게 바치게 했으며, 헌공이 사냥 나간 사이에 독을 쳤다. 신생이 준 제육에 독이 든 것을 안 헌공은 분노하여 태부 두원관을 주살했고, 신생은 곡옥 신성으로 달아나 12월 무신일에 자결했다. 여희는 공자 중이와 이오가 신생과 공모했다고 참언하니, 당시 조정에 있던 이 둘은 각각 봉읍인 포와 굴로 달아났다.[7][15][16]
기원전 655년, 헌공은 시인 피에게 포를 치고 중이를 죽이게 하니 중이는 적(狄)나라로 달아났다. 기원전 654년, 헌공은 가화에게 굴을 치고 이오를 죽이게 하니 이오는 양나라로 달아났다. 헌공은 여러 공자들을 다 내쫓고, 해제를 태자로 세우고, 처음으로 법령을 만들어 국내에 공족을 남겨두지 못하게 했다.[7] 이 사건을 '여희의 난'이라고 부른다.
2. 4. 죽음과 유산
헌공 26년(기원전 651년), 헌공은 제 환공이 규구에서 연 회맹에 참석하려다 중도에 돌아오는 주왕의 사자 재공의 만류와 병으로 귀국했다. 병이 심해지자 순식에게 어린 태자 해제를 맡기고 9월에 죽었다. 해제는 즉위하고 순식이 재상이 되어 국정을 주관했다.[7][17]헌공은 여섯 명의 부인을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가나라 출신의 가군(賈君)이었다. 진 무공의 첩이었던 제강(齊姜)은 백희 공주와 신생을 낳았다. 북쪽 융족(戎) 출신의 호희(狐姬)는 공자 중이를 낳았고, 호희의 여동생은 공자 이오를 낳았다. 융족 출신의 이희는 공자 희기를, 이희의 여동생인 소희는 공자 탁을 낳았다.
헌공의 사후, 이희는 15세의 태자 희기를 진나라 왕위에 앉히고 순식을 희기의 재상으로 삼아 정사를 돕게 했다. 그러나 651년 10월, 이극(里克)은 즉위한 지 약 한 달 만에 희기를 살해했다. 당시 진 헌공은 아직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순식은 탁자(卓子)를 진나라 왕위에 앉히고 진 헌공의 장례를 마쳤으나, 651년 11월, 이극은 탁자와 이희를 살해했다. 순식은 그 후 목을 매 자결했고, 소희(少姬)는 투옥되었다.
이극은 제나라에 있던 공자 중이를 진나라로 초청하여 군주로 삼으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양나라에 있던 공자 이오를 초청하여 진 혜공이 되었다.
태자 시절, 헌공은 아버지 무공의 진 재통일 전쟁에서 활약했다. 즉위 후에는 사위의 헌책에 따라 종가의 위세를 위협하기 시작한 환숙・장백을 조상으로 하는 공족[2]을 멸망시켜 종가의 권위를 확립하고 진나라를 융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위는 이 공로로 대사공에 임명되었다. 주변 제후국 소국 곽・위・경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순식을 우에 보내 길을 빌려(가도멸괵) 서괵을 정벌하고 우나라도 병합하여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만년에 애첩인 여희 (이민족 여융의 딸)의 참언을 믿고, 태자 신생을 죽이고, 공자 중이 (후의 문공)・공자 이오 (후의 혜공) 등을 멀리했기 때문에, 진나라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이를 '여희의 난'이라고 부르며, 이 이후, 진나라는 태자 이외의 공자를 국외로 내보내는 전통을 지켜 공족의 힘이 매우 약해져 갔다.
3. 가족 관계
진 무공은 진 헌공의 아버지이다.
진 헌공은 여섯 명의 부인을 두었다.
- 가군(賈君): 가나라 출신이다.
- 제강: 진 무공의 첩이었으며, 백희 공주와 신생을 낳았다.
- 호희(狐姬): 북쪽 융족(戎) 출신이며, 공자 중이를 낳았다.
- 소융자(少戎子): 호희의 여동생이며, 공자 이오를 낳았다.
- 여희: 융족 출신이며, 공자 희기를 낳았다.
- 소희(少姬): 여희의 여동생이며, 공자 탁을 낳았다.
진 헌공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진 헌공은 한만이라는 형제가 있었다.
4. 평가
5. 현대적 의의
5. 1. 가도멸괵과 현대 외교
인접한 곽나라는 빈번하게 진나라 국경을 공격했다. 헌공은 곽나라를 멸망시키고 싶었지만, 곽나라와 동맹 관계에 있던 우나라를 통과해야 했다. 헌공은 신하 순식의 조언에 따라 곽나라 군주에게는 미녀를, 우나라 군주에게는 미남자를 보내 군주들이 정사를 멀리하도록 했다.[1] 동시에 북쪽 국경에서 문제를 일으키도록 사람을 보냈다. 곽나라 관리들은 북쪽 국경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헌공을 탓했고, 헌공은 모욕을 가장하여 순식을 우나라에 보내 통과를 요청했다. 순식은 옥과 말을 선물로 가져가 우나라에 통행을 요청했다. 우나라 군주는 궁지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행에 동의했다. 궁지기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Chún Wáng Chǐ Hán/唇亡齿寒중국어)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곽나라가 정복되면 우나라도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우나라 군주는 이를 무시하고 궁지기는 우나라를 떠났다.기원전 658년, 헌공은 이극과 순식을 보내 곽나라를 공격했다. 우나라는 진나라에 협력하여 흉노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하양관(下陽關)을 점령하도록 도왔다. 기원전 655년 겨울, 곽나라는 진나라에 정복되었다. 이극은 진나라 군대가 우나라 수도 밖에 주둔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며칠 후, 우나라 군주는 진 헌공이 우나라 수도 성벽 밖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맞이하러 나갔고, 헌공은 우나라 군주를 기산(箕山)으로 사냥에 초대했다. 우나라 군주는 수도에 주둔한 모든 군대를 사냥에 데려갔다. 사냥 중, 우나라 신하 백리해는 우나라 군주에게 수도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고했다. 우나라 군주가 성 외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도는 진나라 군대에 점령된 상태였다. 우나라 군주와 백리해는 포로로 잡혔고, 백리해는 나중에 진나라로 보내졌다. 우나라를 이용하여 곽나라를 공격한 것은 삼십육계 중 하나였다.
5. 2. 권력 남용과 리더십의 중요성
참조
[1]
서적
Passions of the Cut Sleev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2]
문서
辺境の食邑から動かなかった[[韓 (戦国)|韓氏]]を除く。
[3]
서적
역주 춘추좌씨전
전통문화연구회
[4]
문서
위와 같음
[5]
문서
사기에 붙인 위소의 주석에 따르면, 여산에 사는 서융의 별종이다.
[6]
웹사이트
《국어》 권7 진어 1
http://zh.wikisource[...]
[7]
서적
사기 권39 진세가
[8]
서적
사기, 상게서, 조세가
[9]
서적
전게서
[10]
서적
역주 춘추좌씨전
전통문화연구회
[11]
문서
위와 같음
[12]
문서
위와 같음
[13]
문서
위와 같음
[14]
문서
위와 같음
[15]
문서
위와 같음
[16]
웹사이트
《국어》 권8 진어 2
http://zh.wikisource[...]
[17]
서적
상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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