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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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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천 전투는 1950년 7월 7일부터 11일까지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이 조선인민군 제2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진천 일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수도사단은 진천 북쪽 백곡천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인해 진천을 빼앗기고 청주로 후퇴했다. 이 전투는 국군이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이후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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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 이름진천 전투
전역한국 전쟁
색상 계획background:#ffccaa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7월 7일 - 11일
장소대한민국 충청북도 진천군
결과북한의 승리
결과 설명한국군이 인민군을 4일 저지
교전 세력
교전국 1국련군
지휘관
지휘관 1김석원 준장
지휘관 2최현 소장
병력 규모
병력 17,855명
병력 212,000명
사상자
사상자 1불명
사상자 2불명

2. 배경

1950년 7월 5일 수도사단은 국일명(육군) 제2호에 의해 제1군단에 편입되어 제1, 8, 18연대를 예하에 두게 되었다. 제1군단 작전명령 제1호에 따라 평택으로 집결하게 되었으나, 당시 사단은 사령부만 겨우 제 모습을 갖췄을 뿐 각 연대의 위치조차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3]

7월 5일 김홍일 소장은 이종찬 대령이 쇠약해진 점을 고려, 이준식 준장을 새 사단장으로 임명하고,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0호에 따라 안성-발안장(오산 서쪽 6km) 간 저지진지 점령을 위해 각 사단에서 1개 연대씩 차출하기로 했다.

수도사단은 제8연대를 용인 부근으로 진출시키고, 주력인 제1, 18연대는 평택에 집결하도록 했다. 그러나 같은 날 18시, 군단 작전명령 제2호에 따라 합정리(평택 동남쪽 2.5km)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현 전선을 육군본부 직할 부대 및 미군에게 맡기고, 수도사단을 군단 예하 부대로서 진천 부근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 명령 직후 군단장은 "사단은 진천으로 전진하라"는 구두 명령을 내렸고, 각 연대는 진천으로 향했다.

한편, 조선인민군 제2사단은 춘천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보충하여 병력 1만 2000여 명, T-34 전차 10량, SU-76 자주포 12문, 122mm 곡사포 26문 등으로 무장하고 7월 7일에는 선두 연대가 진천 북쪽 송림리까지 진출해 있었다.[2]

2. 1. 작전 계획

1950년 7월 6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3호 및 군단장의 구두명령에 따라 수도사단은 오창리(진천 남쪽 13km)로 집결하여 민병권 중령이 이끄는 제6사단 19연대의 엄호 하에 진천 북쪽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4][5] 그러나 같은 날 18시, 제19연대가 최현 소장이 이끄는 조선인민군 제2사단의 압박으로 중산리(진천 북쪽 5km)까지 후퇴하였다.[5]

이에 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군단 작전명령 제3호로 수도사단에 제6사단 9연대를 수용하고 총괄 지휘하여 북진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7월 5일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한 이준식 준장은 부대를 파악할 시간도 없이 진천으로 이동하여, 제1연대로 하여금 진천 북쪽으로 진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제8, 18연대는 조치원 방면에서 도보나 차량으로 이동 중이었고, 제18연대는 청주에서 해체되는 제7사단 제3연대를 흡수하여 재편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수도사단의 주력이 진천에 집결하기까지는 24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단장은 병력 집중, 병력과 화력, 지형 면에서 불리한 점을 고려해야 했다. 당시 수도사단은 주력 집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전력과 지형 모두 조선인민군에 비해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김홍일 소장은 진천을 일시 포기하고, 병력을 집중하고 사기를 회복한 뒤 반격하기로 결정했다.

3. 전투 부대

진천 전투에 참여한 부대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국군'''

1950년 7월 5일 국일명(육군) 제2호에 의하여 제1군단이 신설되었고, 김홍일 소장이 군단장을 맡았다.[1] 제1군단은 수도사단을 예하 부대로 편입시켰으며, 수도사단 예하에는 제1, 8, 18연대가 배속되었다.[1]

김홍일 소장은 수도사단장을 이준식 준장으로 교체했다.[1] 수도사단은 제8연대를 용인 부근으로 진출시키고, 주력인 제1, 18연대는 평택에 집결시켰다.[1] 이후 진천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 연대는 진천으로 이동하였다.[1]

제1연대는 연대장 이희권 중령이 병력을 수습하여 장태환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진천에 선발대로 보냈다.[1] 당시 연대 병력은 800명, 주요 장비는 81mm 박격포 4문이었다.[1]

제8연대는 용인으로 급파되었으며, 이후 철수하여 평택에서 재편성되었다.[1]

'''조선인민군'''

7월 10일부터 무정 중장이 김광협 중장이 이끌던 제2군단을 지휘했으며,[1] 제2사단장은 최현 소장이었다.[2]

3. 1. 대한민국 국군

1950년 7월 5일 국일명(육군) 제2호에 의하여 제1군단이 신설되었고, 김홍일 소장이 군단장을 맡았다.[1] 제1군단은 수도사단을 예하 부대로 편입시켰으며, 수도사단 예하에는 제1, 8, 18연대가 배속되었다.[1]

당시 수도사단은 사령부만 겨우 형태를 갖춘 상태였고, 각 연대의 위치나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1] 김홍일 소장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 수도사단장을 이준식 준장으로 교체했다.[1] 또한 7월 5일 육군본부 작명 제20호에 따라 안성-발안장(오산 서쪽 6km) 간 저지진지 점령을 위해 각 사단에서 1개 연대씩 차출하여 투입하기로 했다.[1]

이에 따라 수도사단은 제8연대를 용인 부근으로 진출시키고, 주력인 제1, 18연대는 평택에 집결시켰다.[1] 그러나 곧이어 군단 작명 제2호에 따라 합정리(평택 동남쪽 2.5km)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후 군단장으로부터 진천으로 전진하라는 구두 명령을 받고 각 연대는 진천으로 이동하였다.[1]

제1연대는 한강선이 무너지면서 분산된 상태에서 퇴각하였으나, 연대장 이희권 중령이 병력을 수습하여 장태환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중심으로 병력과 장비를 보충한 후 차량 20대로 진천에 선발대로 보냈다.[1] 잔여 병력은 부연대장 김황목 소령이 열차편으로 후속시켰으며, 당시 연대 병력은 800명, 주요 장비는 81mm 박격포 4문이었다.[1]

제8연대는 육군본부 직할로 잠시 있다가 수도사단으로 복귀하면서 동측방으로 설입하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용인으로 급파되었으며, 이후 철수하여 평택에서 재편성되었다.[1]

3. 2. 조선인민군

김광협 중장이 이끌던 제2군단은 7월 10일부터 무정 중장이 지휘했으며,[1] 제2사단장은 최현 소장이었다.[2]

4. 전투 과정

7월 7일, 조선인민군 제2사단은 진천에 먼저 투입된 제1연대 제2중대(중대장: 옥창호 중위)를 압도하고 진천 남쪽 4km 지점인 소을산 일대에 진출했다.[6][7] 이준식 준장과 교대하여 사단장에 취임한 김석원 준장은 즉시 사단 주력을 이끌고 북상했다.[7]

7월 8일 아침, 수도사단은 문안산을 확보했다.[8] 제1연대가 차현에서 정비하는 동안 제8연대와 제18연대가 도착했고, 제2사단의 제20연대, 제16연대, 제17연대, 기갑연대, 제1포병단 1개 중대(M-2 곡사포 4문)가 배속되어 전력이 증강되었다.[2] 김석원 준장은 제20연대에 원덕리 고지 탈환을 명령했고, 제16연대는 구곡리에 배치하여 사단의 우익을 엄호하게 했다.[8] 제20연대는 완전 점령에 이르지 못하고, 다음날 오전 4시경부터 시작된 조선인민군의 역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소을산 동쪽으로 후퇴했다.[8]

7월 9일, 조선인민군 제2사단 주력은 남하하여 수도사단의 진지에 접근했다.[8] 김석원 준장은 전 부대에 공격을 개시하게 했다. 좌익의 제17연대는 명령받은 고지를 탈취했고, 우익의 제16연대는 진천 동북 교외까지 진출했다.[8] 중앙의 제1연대는 포병의 지원을 받아 봉화산을 탈취했으나, 조선인민군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겼다.[9] 조선인민군은 문안산의 제18연대에 공격을 가했다.[10]

7월 10일 오전 2시경,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좌익의 제17연대는 산 정상을 두고 격전을 벌였다.[10] 우익의 제16연대도 포위되어 붕괴 직전에 놓였고, 수도사단은 중앙의 문안산과 소을산을 간신히 확보하고 있었다.[10]

7월 11일 새벽, 조선인민군 주력이 박곡천 강변을 돌파하여 수도사단의 우측 배후에 접근했다.[10] 김석원 준장은 제18연대에 문안산 정면 공격을 명령했지만, 병력 차이로 실패했다.[10] 전차 5대가 소을산을 확보 중인 제1연대의 배후로 돌아갔고, 김석원 준장은 청주로 후퇴를 명령했다.[11] 수도사단은 미호천 다리를 폭파하고 청주 북쪽에서 대오를 정비했다.[11] 조선인민군은 후퇴하는 한국군을 추격하려 했지만 B-29와 B-26 편대에 폭격당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11][12]

4. 1. 7월 6일

10:00에 진천에 진입한 제1연대장 이희권 중령은 예하 제1대대장 장태환 소령에게 1개 중대를 진천 북쪽으로 약진시켜 지연전을 하고 있는 제19연대의 중대와 합세하여 급편진지를 점령해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 격파하라고 명령했으며, 대대장은 곧 윤흥정 중위가 이끄는 제1중대를 급파하였다.

제1중대는 진천읍을 빠져나갔는데, 이때 인적도 없는 읍내 우체국의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중대장 윤흥정 중위는 잠시 행군 대열에서 벗어나 수화기를 들었더니 "우리는 진천을 해방하러 곧 들어갈 터이니 환영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놈아,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어, 두말 말고 귀순이나 하라"고 욕을 퍼붓고 전화를 끊었다.

급행군으로 중산리(진천 북쪽 4.5km)에 이른 중대는 제19연대 후위 중대와 합세한 다음 585번 도로(진천-청주 간)를 중심으로 하여 같은 곳 바로 북쪽에 동은 116고지로부터 서는 90m 전선에 이르기까지 급편진지를 마련하고 개인호를 파기 시작하였다.

이때 북한군은 마치 양 중대의 고착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포격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위력은 세차지 못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들의 수색대로 보이는 1개 소대 규모가 전방 진지까지 침투하여 산발적으로 사격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은 양 중대의 잠복조에 의하여 격퇴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중대장 윤흥정 중위는 북한군의 거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116고지로 올라가 먼지가 자욱이 일고 있는 송림리 쪽을 쌍안경으로 조망한 바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결집 중에 있음을 목격하고 대대에 이 상황을 보고하는 한편, 양 중대에 북한군의 상황을 알리고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하였다.

4. 2. 7월 7일

김연 대좌가 이끄는 조선인민군 제2사단 예하 제6연대는 송림리(진천 북쪽 8km)에 집결하여 14시에 포병 지원과 함께 585번 도로 양측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6][7]

중산리 북쪽 전선을 지키던 국군 제1연대 1중대와 제19연대 후위중대는 조선인민군의 포격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116고지에서 이를 지켜보던 1중대장 윤흥정 중위는 조선인민군 선두가 가까이 오자 사격을 명령하여 기습 공격을 가했고, 조선인민군은 중산리 북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조선인민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일부는 도로를 따라 직접 공격하고, 다른 일부는 미호천 상류의 되마루(송림리 동남 2km)에서 전개하여 국군 중대의 동측방을 강타하였다. 양 중대장은 이러한 상황을 예측했지만, 박격포 하나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소화기 사격으로 접근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125고지(진천 북쪽 3km)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대대장 장태환 소령은 연대장 이희권 중령의 사전 승인 하에 중대장 판단으로 조선인민군과 접촉을 유지하며 지연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양 중대는 20시 30분에 조선인민군 우회 부대가 청용리(△116 동남쪽 1km)에 이르러 배후를 위협하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윤흥정 중위는 자레-94.4고지로 후퇴하여 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이날 항공정찰 보고에 따르면 장호원(진천 동북쪽 30km)에는 1개 사단 규모의 조선인민군(후에 조선인민군 제15사단으로 확인)과 전차 36대, 포 5문, 차량 40대가 집결 중이었고, 2개 연대 규모의 조선인민군(후에 조선인민군 제2사단의 주력으로 확인)은 광혜원리(진천 북쪽 15km)에 집결하고 있었다.

4. 3. 7월 8일

이날 08:00, 조선인민군은 대구경포로 공격준비사격을 퍼붓고 전차를 앞세워 자레-94.4고지선을 공격했다. 조선인민군은 585번 도로를 따라 직충하고, 일부는 도로 좌측의 동성리와 좌측의 사곡리로 우회하여 남하했으나, 국군의 저항으로 혼란 속에 분산되어 진천으로 철수했다.

이에 연대장 이희권 중령은 진천 앞에서 동서로 흐르는 백곡천 남안 제방에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조선인민군 1개 사단과 대치했다. 백곡천은 도섭이 가능하고 하상이 견고하여 진천교 폭파의 효과가 미미하며, 반격 시 불리하다는 김석원 준장의 반대로 진천교 폭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인민군은 30분간 도섭점에 대한 공격준비사격과 연막탄을 사용한 후 도섭을 시작했다. 백곡천 북안의 성석리(진천 동쪽 1.5km), 사미(진천 서북쪽 1.5km), 장관리(진천 서쪽 3km)에서 제파를 이루며 도섭했다. 국군은 제방 후면에서 81mm 박격포와 소화기로 저항했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와 포병 화력에 밀려 16:50에 방어선이 무너졌다.

제1중대 1소대장 김익규 중위는 칼빈 소총 대신 M-1 소총으로 조선인민군을 저격하다가 전사했다.

결국 연대는 각개별로 탈출하여 149고지(진천 서남쪽 1km) 서쪽에서 병력을 수습한 후 잣고개(봉화산 서쪽)로 철수하여 사단 주력에 합세했다.

4. 4. 7월 9일

이날 새벽부터 쏟아지는 폭우와 함께 오전 9시에 조선인민군의 집중적인 포격을 신호로 보병, 전차, 포병의 일제 공격이 봉화산 및 문안산으로 밀려들었다.[8]

개인호와 교통호는 작렬하는 포탄으로 뒤범벅이 된 데다가 사상자가 속출하자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했다.

당시 거듭된 철수와 계속된 행군, 참호 구축으로 병사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고, 행군 도중에 틈틈이 재편한 탓으로 서로 간의 소외감이 엉켜 기회만 있으면 대열에서 벗어나려는 심리가 생겨 전투 의지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병력과 장비 면에서 월등히 우세한 조선인민군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주 저항선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12시에 조선인민군은 진천을 중심으로 남쪽 2.5km에 이르는 반월형의 거점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6][7]

4. 5. 7월 10일

이날은 맑고 무더운 날씨였는데, 소규모 전투에서 국군이 북한군의 허를 찔러 지연전 이래 처음으로 큰 전과를 올렸고, 대대적인 공중 폭격으로 사단의 사기도 크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우세에 밀려 사단의 우익이 공격당하면서 주 저항선도 무너지기 시작했다.[10]

7월 10일 오전 2시경, 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좌익의 제17연대는 산 정상을 두고 격전을 벌였다.[10] 우익의 제16연대에서도 격전이 벌어졌지만, 우세한 인민군에 포위되어 붕괴 직전에 놓였고, 수도사단은 중앙의 문안산과 소을산을 간신히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10]

인민군 주력이 7월 11일 새벽 박곡천(柏谷川) 강변을 돌파하여 수도사단의 우측 배후에 접근했다.[10] 김석원 준장은 제18연대에 문안산 정면을 공격하게 했지만, 병력 차이로 인해 실패했다.[10] 이윽고 전차 5대가 본도로 남하하여 소을산을 확보 중인 제1연대의 배후로 돌아갔다.[11]

4. 6. 7월 11일

7월 11일 새벽, 조선인민군 주력이 박곡천(柏谷川) 강변을 돌파하여 수도사단의 우측 배후에 접근했다.[10] 김석원 준장은 제18연대에 문안산 정면을 공격하게 했지만, 병력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10] 이윽고 전차 5량이 본도로 남하하여 소을산을 확보 중인 제1연대의 배후로 들어갔다.[11] 김석원 준장은 어쩔 수 없이 청주로 후퇴를 명령했다.[11] 수도사단은 미호천 다리를 폭파하고 청주 북쪽에서 대오를 정비했다.[11] 조선인민군은 후퇴하는 한국군을 추격하려 했지만 B-29와 B-26 편대에 폭격당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11][12]

5. 결과 및 영향

수도사단은 12일 동안 저항하여 조선인민군 제2사단의 진천-청주 점령 및 대전 직충 계획을 좌절시키고, 황간으로 목표를 변경하게 만들었다.[1]

국군의 저항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했다.[1]


  • 군단장 김홍일 소장의 작전 지도
  • 사단장 김석원 준장의 진두지휘
  • 장병들의 사기 진작
  • 미국의 참전


진천-청주 전투 이후 국군은 "싸울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조선인민군은 전술적 문제점을 노출했다.[1]

7월 18일, 김석원 준장은 군장검사를 실시하고 부대 정비에 박차를 가했으며, 훈시를 통해 전공을 치하했다.[1]

수도사단은 7월 18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51호에 따라 입석리로 이동, 괴산 방면으로 침입하는 조선인민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

참조

[1] 서적 韓国戦争第1巻
[2] 서적 韓国戦争第1巻
[3]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4]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5] 서적 韓国戦争第1巻
[6]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7]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8]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9]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10]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11]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12] 서적 韓国戦争第1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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