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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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석원은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중일 전쟁 등에 참전했으며,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한국 전쟁에도 참전했다. 그는 친일 행적으로 인해 여러 친일 관련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해방 이후 성남고등학교 교장과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김석원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반성하는 내용을 남겼다.

김석원 (군인)
기본 정보
이름김석원
한자 표기金錫源
로마자 표기Gim Seogwon
일본어 표기 (한자)金山錫源
일본어 표기 (로마자)Kaneyama Sakugen
출생일1893년 9월 29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978년 8월 6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별명옥전(沃田)
본관경주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1955년 촬영
군사 경력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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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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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15년 ~ 1945년 (일본 제국 육군)
1948년 ~ 1956년 (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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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육군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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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소장
주요 지휘 경력일본 제국 제20사단 제78연대 기관총대
일본 제국 제20사단 제78연대 대대
대한민국 제1사단
대한민국 수도사단
대한민국 제3사단
주요 참전 전투/전쟁만주사변
중일 전쟁
한국 전쟁
수상일본 훈5등 서보장
일본 공3급 금치훈장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가족
자녀슬하 3남
차남김영규(金榮奎, 예 육군 소령)
삼남김영국(金榮國, 前 육군 대위)
기타 경력
학교 교장서울 성남중학교
국회의원제5대 민의원(국회의원)
학교 이사장원석학원 이사장
대학교 초빙교수동국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정당 활동민주당 국제외교행정특보위원
기타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C121209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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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력

* 일본 육군사관학교 27기
* 육군사관학교 특3기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 육사 27기로 졸업하였다.

3. 생애

김석원은 한성부에서 태어나 1909년 일본으로 유학,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15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1917년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31년 만주사변1937년 중일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진급했다. 태평양 전쟁 때는 학병 참전을 독려하는 강연에 참여했다.

1945년 광복 당시 평양에서 근무 중이었으며, 광복 후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 후, 1949년 1월 제1여단장에 임명되었고, 4월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1사단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북한군이 점령한 경계 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10명으로 구성된 특공대(육탄십용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1949년 7월에는 송악산 정상의 488고지를 기습적으로 점령하였다.

1949년 10월 '북어 사건'으로 채병덕 장군을 거론하였다가 강제 예편 당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수도사단장, 제3사단장 등을 역임하며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부산 교두보 전투 중에는 장사동 철수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한 명의 병사도 남기지 않고 철수를 완료했다. 1950년 9월 제3사단장에서 해임되었고, 1951년 육군본부에 배속되었으나, 1956년 예비역 편입될 때까지 무보직으로 있었다.

1956년 예편 후 성남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김석원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한국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과 관련된 논란은 계속되고 있으며, 친일파 708인 명단 등 친일 관련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3.1. 일제 강점기 활동

김석원은 한성부에서 태어나 1909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27기로 졸업하고, 1917년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31년 만주사변 때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일본군에서 대좌(대령)까지 진급하여, 홍사익 중장에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두 번째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김석원은 일본군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훈장을 받았다. 그의 전공은 대부분 중국군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그의 활약상을 〈김부대장 분전기〉, 〈김석원 부대 격전기〉, 〈전진여담(戰塵餘談)〉 등으로 보도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이응준 등과 함께 학병 참전을 독려하는 강연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당시 평양에서 대좌 계급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광복 후 상경하여 계림회가 주도한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김석원의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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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내용
1909년 9월대일본제국 육군중앙소년학교 예과 입교
1913년 5월육군소년학교 졸업
1915년 5월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1915년 12월 25일육군 보병 소위 임관, 보병 제61연대 부
1919년 4월육군 보병 중위 진급
1919년 8월보병 제78연대 부
1925년 8월 7일육군 보병 대위 진급
1927년 7월 26일보병 제78연대 중대장
1929년 3월 16일보병 제78연대 기관총대장
1932년 5월 1일보병 제78연대 부
1934년 3월 1일육군 보병 소좌 진급
1936년 8월 1일보병 제78연대 제3대대장
1939년 3월육군 보병 중좌 진급, 보병 제78연대 보충대 부
1939년 12월보병 제41연대 보충대 부
1941년 3월독립혼성 제16여단 사령부 부
1943년 8월평양병사부 과장
1944년 8월 1일육군 대좌 진급
1945년 9월예비역 편입

3.2. 해방 이후 활동

1945년 광복 당시 김석원은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1949년 1월 대령으로 입대하여 제1여단장에 임명되었고, 4월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1사단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5월 3일, 제1사단 제11연대의 경계 진지를 북한군이 점령하자, 김석원은 10명으로 구성된 특공대(육탄십용사)에게 81mm 박격포탄을 안고 돌격하여 진지를 회복하도록 하였다. 1949년 7월에는 북한군의 반복적인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송악산 정상의 488고지를 기습적으로 점령하기도 하였다.

1949년 10월, 한국군이 북한 상인과 북한산 북어를 밀무역하여 이익을 챙긴 '북어 사건'이 일어나자, 김석원은 이를 두고 국방부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을 거론하였다가 강제 예편 당하였다. 그는 강직하고 굽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군 수뇌부와 대립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것도 서슴지 않아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채병덕과 함께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사단장으로 현역 복귀하여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1950년 7월 초 한국 전쟁 발발로 소환되어 소장으로 진급했고 1956년 다시 은퇴했다.

그 사이에도 북한의 불안한 정세를 감지하고 "목표 38선"을 외치며 대전에서 의용군을 조직하여 훈련을 계속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신성모로부터 현역 복귀를 요청받았으나, 김석원은 남북교역사건으로 군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심사숙고 끝에 참모장과 연대장은 자신이 지명하는 자라는 조건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7월 6일 수도사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김석원 휘하에는 전국의 일본군 출신 한국인들이 모였다.

8월 8일, 부산 교두보 전투 중 제3사단에 부임하였다. 제3사단은 7월 17일 이후 영덕을 두고 북한군 제5사단과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8월 16일 밤부터 17일 아침에 걸쳐 장병 9000명(부상자 125명), 경찰대 1200명, 지방 공무원과 노무자, 피난민 등 1000여 명, 그리고 모든 차량과 물자를 싣고, 송아지까지 선적하여 출항하였다(장사동 철수 작전). 김석원은 한 명의 병사도 남기지 않고 어려운 해상 철수를 성공시켰다.

8월 19일, 민지대와 교대하여 다시 북한군 제5사단과 교전하였으나, 9월 1일 전시 특명 검열부장이 되었다. 1951년 육군본부에 배속되었으나, 방도 책상도 준비되지 않은 채 1956년 예비역 편입될 때까지 무보직으로 있었다.

1956년 예편한 뒤 동업자 원윤수와 함께 설립한 성남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참전했다가 필리핀에서 전사한 그의 차남 김영수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2003년에 성남고등학교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3.3. 논란과 비판

김석원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훈장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전공은 중국군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태평양 전쟁 때는 학병 참전을 권유하는 강연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 및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1949년에는 '북어 사건'으로 채병덕 장군을 비판하다가 강제 예편당했으나, 한국 전쟁 발발 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브루스 커밍스 박사는 김석원이 김일성의 아내 김혜순의 죽음과 관련 있다는 루머를 언급했으나,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김혜순은 1940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전향 후 선무 공작에 나섰으며, 1980년대까지 북한에 생존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김석원이 김혜순을 만날 일도 없었으므로 커밍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북한은 한국 전쟁의 원인을 미군 주도의 북침으로 보고 있으며, 김석원을 북침 계획 참가자로 언급한다. 또한 김일성의 항일 투쟁 경력과 김석원의 독립 운동 탄압 경력을 대비시키며, 보천보 사건 이후 김석원이 김일성 부대 토벌에 실패했다는 일화를 인용한다. 그러나 당시 김석원의 복무 기록에는 함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북한이 주장하는 "간삼봉 전투" 날짜 직후 김석원은 서울에서 시국 강연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간삼봉 전투의 실제 지휘관은 김석원이 아닌 김인욱(金仁旭) 소좌였다.

1956년 예편 후 성남고등학교 교장과 제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그의 차남 김영수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며, 2003년 성남고등학교에 있던 김석원의 동상은 철거되었다.

김석원은 회고록 《노병의 한(恨)》(1977)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일제 식민지 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고 반성했다.

그의 일본식 이름은 가네야마 샤쿠겐(金山韶根)이었다.

산케이신문의 노구치 히로유키는 한국 전쟁에서의 전공을 바탕으로 김석원을 한국의 “구국의 사(士)”라고 평가했다.

미국에서는 김석원을 북진론의 급선봉으로 보았으며, 1949년 이승만이 그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려 하자 무치오가 반대했다.

주한미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는 1949년 김석원에 대해 "정치적으로 임명된 준장", "나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미국인 고문이 그를 다소 억제하지 않으면, 그는 군벌(warlord)이 될 것이다."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950년 9월 김석원은 제3사단장에서 해임되었는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김석원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해임되었다고 주장했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월커 제8군 사령관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밝혔다. 정일권은 병과 피로가 이유였다고 주장하며, 한국 공관 전사는 김석원의 독선적인 성격과 현대전에 적응하기 어려운 전술을 이유로 들었다. 미군 고문과의 불화가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김석원은 제3사단 최고 고문관 에메리히 중령이 자신을 높이 평가했다고 주장했다.

4. 사망 이후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김석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서 활동했고, 이후 대한민국 육군에 합류하여 준장 계급을 달았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김석원을 남한 국경 부대 책임자 및 대한민국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그의 배경을 불신한 미군 제8군의 월턴 워커 장군 때문에 무산되었다.

김석원은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1950년 7월 초 한국 전쟁 발발로 다시 소환되었다.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1956년에 다시 은퇴했다. 1977년에는 회고록을 출판했다. 1978년 사망 후, 자신이 설립자 중 한 명이었던 성남고 옆에 묻혔다. 그의 동상이 학교 운동장에 남아 있었으나, 2002년 시위대가 철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5.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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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58년총선무소속11,477표 (28.05%)3위낙선
1960년총선무소속24,898표 (46.30%)1위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