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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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함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임자를 통해 낭이 되었으며, 권신들을 탄핵하다 좌천되었다. 원제 때 어사중승이 되었으나 석현과 갈등을 겪고 파면되었다. 성제 즉위 후 장사, 자사 등을 거쳐 지방관으로 활동했으며, 소부까지 올랐으나 적방진과의 불화로 면직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고향에서 사망했다.
진함(陳咸)은 아버지 진만년(陳萬年)의 임자로 관직에 진출하여, 뛰어난 재능과 강직함으로 여러 권신들을 탄핵하며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이로 인해 미움을 사 좌천되기도 하였다. 아버지 진만년은 아들 진함에게 아첨하는 법을 가르치려 했지만, 진함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함은 뛰어난 재능과 강직한 성품으로 젊은 나이에 관직에 올랐다. 아버지 진만년의 훈계에 "아첨하는 법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냐"라고 반문할 정도로 소신이 뚜렷했다. 원제는 진함을 어사중승으로 발탁하여 권력을 감시하게 했고, 진함은 권신 석현을 비판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석현의 모함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2. 생애
원제 시기에는 어사중승에 임명되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중서령 석현과의 갈등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성제 즉위 후에는 대장군 왕봉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기주자사, 간대부를 거쳐 초 내사, 북해태수, 동해태수 등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며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가혹한 통치 방식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거기장군 왕음에게 줄을 대어 소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적방진과의 불화로 인해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고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임자로 낭(郞)이 되었다. 재주가 있고 강직하여 여러 권신들을 탄핵하였는데, 상주문이 수십 통이나 되었다. 결국 미움을 사 좌조(左曹)로 좌천되었다.
아버지 진만년이 병이 들었을 때, 진만년은 진함을 불러 병상에서 훈계를 했다. 하지만 밤중까지 이어지자 진함은 졸았다. 진만년은 "내가 너에게 훈계를 하는데 너는 졸아서 내 말을 듣지 않다니 무슨 짓이냐"라며 화를 내며 진함을 매질하려 했다. 하지만 진함은 "요약하면 저에게 아첨하는 법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겠지요"라고 말했고, 진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 2. 어사중승 시절과 석현과의 갈등
원제는 진함을 어사중승에 임명하여 주와 군에서 올라오는 상주문을 총괄하게 하였다.
중서령 석현이 권세를 휘둘렀는데, 진함은 원제에게 석현의 잘못을 자주 일러바쳤기 때문에 석현은 이를 원망하였다. 이때 괴리령 주운이 무고한 이를 죽인 죄로 하옥되었는데, 담당관이 원제에게 사건에 관하여 상주문을 올렸다. 원제는 아직 답을 내리지 않았는데, 평소 주운과 친했던 진함은 주운에게 조정에서의 회의 내용을 알려주고는 주운에게 자기 자신을 해명하는 상주문을 올리라고 도움을 주었다. 진함의 수작을 알아차린 석현은 진함이 궁중의 기밀을 누설하였다고 탄핵하였고, 진함은 하옥되었다가 곤형·성단에 처해지고 파면되었다.
2. 3. 성제 즉위 후 지방관 생활
성제가 즉위하고 석현은 실각하였다. 대장군 왕봉은 진함의 충절을 이야기하며 그를 추천하였고, 곧 진함은 장사에 임명되었다가 기주자사로 발령되었다. 임지에서 일을 잘 처리하여 조정의 부름을 받아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가 다시 초 내사·북해태수·동해태수 등 지방관을 전전하였다. 이후 경조윤 왕장의 죄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남양태수가 되었다.
진함은 임지에서 수없이 죄인을 죽여 위엄을 보였고, 처벌이 워낙 극악하여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는 이가 해마다 수백·수천 명은 되었다. 죽은 지 오래되어 시체에서 벌레가 들끓어도 유족들은 시체를 거둘 수조차 없었다. 진함은 엄연년처럼 임지를 다스렸지만, 청렴함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속현에서 바친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식사는 사치스러웠다. 하지만 아전들은 검소하게 살았고 법을 어기지도 못하였다.
설선, 주박, 적방진, 공광 등은 모두 경력을 진함보다 늦게 쌓았으나 환관에게 빌붙어 공경의 지위에 이르렀고, 진함만은 계속 태수에 머물렀다.
2. 4. 소부 임명과 적방진과의 갈등
진함(陳咸)은 소부가 된 후, 조정에서 적방진과 사이가 나빴다. 승상이 된 적방진은 예전에 진함이 태수 시절에 저지른 잘못들을 들춰 탄핵하였고, 결국 진함은 면직되었다. 나중에 홍양후(紅陽侯) 왕립이 방정(方正)으로 천거하여 진함은 다시 벼슬자리에 올라 광록대부급사중이 되었으나, 적방진이 다시 탄핵하여 결국 면직되었다. 몇 년 후 왕립이 죄를 지어 봉국으로 쫓겨났고, 또 다시 적방진의 탄핵을 받은 진함 또한 고향으로 쫓겨나 근심 속에서 죽었다.
2. 5. 말년
진함(陳咸|진함중국어)은 아버지 진만년이 죽은 후, 원제에 의해 어사중승으로 발탁되어 주군(州郡)의 상소와 자사의 평가, 전중의 치안을 관장하게 되어 대신 이하가 두려워했다. 진함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중서령 석현을 비난했기 때문에 석현은 진함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함의 친구였던 괴리 현령 주운이 죄에 연루되었을 때, 진함이 그에게 자신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지시한 것을 알게 되자, 석현은 진함을 기밀 누설에 해당된다고 탄핵하여 옥에 가두었다. 진함은 고문을 받았고, 사형은 면했지만 삭발형을 당해 강제 노동에 종사했다.
성제가 즉위하자, 대장군 왕봉은 진함이 석현을 탄핵했던 충절의 인물이라고 상소를 올려 진함을 장사로 삼았다. 그 후, 기주 자사, 간대부가 되었고, 초국 내사, 북해 태수, 동군 태수가 되었다. 그러나 경조윤 왕장에게 추천받았기 때문에, 왕장이 대장군 왕봉을 제거하려다 실각하고 처형되자 진함도 파면되었다. 그 후 다시 남양 태수가 되었다.
진함은 태수로서 살벌함으로 위신을 유지했고,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했으며, 호족들도 그에게 복종했지만, 살벌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쓰이지 못하고, 설선, 주박, 적방진, 공광 등 후배들에게 추월당했다.
거기장군 왕음 시대에, 왕음은 진탕을 신임했기 때문에, 진함은 진탕에게 선물을 보내고 "자공(진탕의 자)의 힘으로 제성(帝城)에 들어갈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후, 영시 원년(기원전 16년)에 진함은 소부가 되었다. 소부가 되자 오염을 적발하여 모두 진함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적방진과 사이가 좋지 않아, 적방진이 승상이 되자 진함의 태수 시절의 잔혹한 행위와 진탕에게 뇌물을 보낸 것을 고발당해 파면되었다. 그 후, 외척인 홍양후 왕립이 진함을 방정(方正)으로 추천하여 광록대부 급사중이 되었지만, 후에 왕립에게 죄가 있다는 이유로 적방진은 진함의 일도 상소했다. 진함은 향리에 있는 군으로 돌아가 우울하게 죽었다.
3. 평가
성제 즉위 후 대장군 왕봉의 추천으로 복직하여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다. 그는 엄격한 통치로 명성을 얻었지만, 지나치게 가혹하여 중앙 관직으로 중용되지 못하고 후배들에게 추월당했다. 거기장군 왕음 시대에, 진함은 진탕에게 뇌물을 보내 복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소부가 된 후에도 비리를 척결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승상 적방진과의 불화로 다시 파면되었다. 외척 왕립의 추천으로 재등용되었으나, 적방진의 탄핵으로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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