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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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는 아르헨티나의 법학자, 정치인, 외교관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라플라타 국립대학교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노동법 분야의 권위자였으며, 국제 노동 기구 설립에 기여하고 국제 문제 해결에 힘썼다.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외무 장관을 역임하며 차코 전쟁 중재를 통해 국제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193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국제 연맹 총회 의장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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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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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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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
출생일 | 1878년 11월 1일 |
출생지 |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사망일 | 1959년 5월 5일 |
사망지 |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직업 | 정치가, 학자 |
학력 |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
종교 | 도미니코회 제3회 |
정당 | 국가 자치당(1916년까지) 국가 민주당(1931년–1959년) |
수상 | |
상훈 | 노벨 평화상(193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
경력 | |
국가 하원 의원 | 1908년 10월 12일 – 1915년 8월 25일 |
선거구 | 부에노스아이레스(1912년–191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1908년–1912년) |
법무 공공 교육부 장관 | 1915년 8월 20일 – 1916년 10월 12일 |
대통령 | 빅토리노 데 라 플라사 |
전임 | 토마스 R. 쿨렌 |
후임 | 호세 산토스 살리나스 |
외무 종교부 장관 | 1932년 2월 20일 – 1938년 2월 30일 |
대통령 | 아구스틴 P. 후스토 |
전임 | 아돌포 비오이 |
후임 | 호세 마리아 칸틸로 |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총장 | 1941년 10월 17일 – 1943년 7월 30일 |
전임 | 코리올라노 알베리니 |
후임 | 알프레도 라부글 |
2. 생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는 초기 아르헨티나 애국자의 후손이며, 로케 사엔스 페냐 대통령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국제 협정 초안 작성 및 국제 중재 수행과 더불어 노동법 및 국제법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아 아르헨티나 외무 장관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1959년, 80세의 나이로 뇌출혈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2014년 3월, 그의 금으로 된 노벨 평화상 메달이 남미 전당포에서 발견되어 경매에 부쳐졌다. 같은 해 8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메달을 되찾기 위한 프로젝트를 아르헨티나 의회에 제출했다. 이후 메달은 낙찰되어 현재 아시아의 개인 수집가가 소유하고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학문적 경력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사베드라 라마스는 초기 아르헨티나 애국자의 후손이었다. 그는 로케 사엔스 페냐 대통령의 딸과 결혼했다. 라코르데르 칼리지와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교 법학부에서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1903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최우등''으로 받았다. 파리에서 유학하고 해외 여행을 한 후,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 및 헌법사 교수를 맡아 40년 이상 지속될 교직 경력을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사회학 강좌를 개설하고, 대학교 법학부에서 정치 경제학과 헌법을 가르쳤으며, 결국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사베드라 라마스는 아르헨티나의 두 분야에서 선도적인 학자였다. 노동법 분야의 선구자로서 그는 아르헨티나의 노동법에 관한 여러 논문을 편집했으며, 《사회 및 노동법 센터》(Centro de legislación social y del trabajo, 1927), 《사회 유형의 국제 조약》(Traités internationaux de type social, 1924), 《국가 노동법》(Código nacional del trabajo, 3권, 1933)과 같이 노동 처우에 대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원칙의 필요성에 대해 논했다. 실무적인 측면에서 사베드라 라마스는 아르헨티나의 노동에 영향을 미치는 법률을 초안했고, 1919년 국제 노동 기구의 설립을 지원했으며, 아르헨티나 대표단의 수장으로 동시에 활동하면서 제네바에서 열린 1928년 ILO 회의를 주재했다.
그의 또 다른 주요 학문적 관심 분야인 국제법에서 그는 《국제법 법전화의 위기와 아르헨티나의 독트린》(La Crise de la codification et de la doctrine Argentine de droit international, 1931)을 출판했으며, 망명, 식민지화, 이민, 중재, 국제 평화 등 국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많은 주제에 대해 연설하고 글을 쓰고 법률을 초안했다.
2. 2. 정치 경력
사베드라 라마스는 1906년 공공 신용 국장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190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1908년에는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어 두 번 연임하였다. 그는 해안 수역 권리, 관개, 설탕 생산, 정부 재정, 식민지화, 이민에 관한 법률 제정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외교 문제였다. 1907-1908년에 거의 무산될 뻔했던 이탈리아와의 아르헨티나 중재 조약을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외교 조약 분석 및 영향에 대해 입법부와 외무부의 비공식 고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에게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특히 철도 건설에 있어 영국의 개입을 선호하는 엘리트 계층으로 비춰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1915년 법무 및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그는 공교육의 여러 부서를 통합하고, 개발도상국의 산업 인력 양성을 위한 직업 및 기술 훈련 중심의 중등 교육 과정을 개발하는 등 교육 개혁을 단행했다.
1932년 아구스틴 P. 후스토 대통령은 사베드라 라마스를 외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6년간 외무 장관직을 수행하며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1930년대 중반 남아메리카의 모든 외교 문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13년간 탈퇴했던 국제 연맹에 아르헨티나가 다시 가입하도록 이끌었으며, 사실상 모든 주요 국제 회의에서 아르헨티나를 대표했다.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간의 차코 전쟁(1932–1935)을 종식시킨 그의 노력은 지역적, 국제적으로 큰 의미를 가졌다. 외무 장관 취임 직후, 그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외교적 기반 마련에 착수했다. 1932년 워싱턴에서 8월 3일 선언을 주도하여 미주 국가들이 무력에 의한 영토 변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어 1933년 10월에는 6개 남미 국가가 서명하고, 2개월 후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제7차 범미 회의에서 모든 미주 국가가 서명한 불가침 및 화해 조약을 성안했다. 1935년에는 6개 중립 미주 국가의 중재를 조직하여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간의 적대 행위를 중단시켰다. 1934년에는 남아메리카 반전 조약을 국제 연맹에 제출하여 11개국이 서명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공로로 1936년 국제 연맹 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38년 외무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사베드라 라마스는 학계로 돌아갔다.
2. 3. 외무 장관 및 노벨 평화상 수상
1932년 아구스틴 페드로 후스토 대통령은 사베드라 라마스를 외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 직책에서 6년간 활동하며 아르헨티나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30년대 중반 남아메리카 외교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아르헨티나가 13년간의 공백을 깨고 국제 연맹에 다시 가입하도록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사실상 모든 중요한 국제 회의에서 아르헨티나를 대표했다.차코 전쟁(1932–1935)을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사이에서 종식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지역적, 국제적 중요성을 지녔다. 외무 장관 취임 직후, 그는 분쟁의 협상 해결을 위한 외교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시작했다. 1932년 워싱턴에서 8월 3일 선언을 시작하여, 미주 국가들이 무력에 의한 영토 변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33년 10월에는 6개 남미 국가가 서명하고, 2개월 후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제7차 범미 회의에서 모든 미주 국가가 서명한 불가침 및 화해 조약을 작성했다. 1935년에는 6개 중립 미주 국가의 중재를 조직하여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간의 적대 행위 중단을 이끌어냈다. 1934년, 남아메리카 반전 조약을 국제 연맹에 제출하여 11개국이 서명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36년 국제 연맹 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3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노벨 평화상 외에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와 다른 10개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2. 4. 퇴임 이후
1938년 외무부에서 퇴임한 후, 사베드라 라마스는 학계로 돌아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교 총장으로 2년(1941–1943)을 역임하고, 3년(1943–1946) 더 교수로 재직했다.사베드라 라마스는 사무실에서는 엄격한 규율을 중시했고, 회의 석상에서는 논리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자택이나 미술관에서는 매력적인 주최자였다. 또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높은 칼라를 착용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복장에 있어서도 우아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노벨 평화상 외에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와 다른 10개국으로부터 유사한 훈장을 수여받았다.
1959년 80세의 나이에 뇌출혈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2014년 3월, 그의 금으로 된 노벨 메달은 남미 전당포에서 발견된 후 경매에 부쳐졌다.
2014년 8월, 아르헨티나 정부가 그의 노벨 메달을 되찾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르헨티나 의회에 제출되었다. 그의 경매 메달은 이후 낙찰되었으며 현재는 아시아의 개인 수집가가 소유하고 있다.
3. 유산 및 평가
사베드라 라마스는 학문 및 외교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노동법 분야의 선구자로서 아르헨티나 노동법에 관한 여러 논문을 편집했으며, 《사회 및 노동법 센터》(1927), 《사회 유형의 국제 조약》(1924), 《국가 노동법》(3권, 1933)과 같이 노동 처우에 대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원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실무적인 측면에서 아르헨티나 노동 관련 법률을 초안하고, 1919년 국제 노동 기구 설립을 지원했으며, 1928년 제네바에서 열린 ILO 회의를 주재했다.
국제법 분야에서는 《법전화의 위기와 국제법의 아르헨티나 독트린》(1931)을 출판하고, 망명, 식민지화, 이민, 중재, 국제 평화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연구했다. 70세에 쓴 《국제 생활》은 그의 연구와 경험을 집약한 저서이다.
외무 장관으로서 1930년대 중반 남아메리카 외교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아르헨티나가 국제 연맹에 다시 가입하도록 이끌었다. 차코 전쟁 종식을 위한 노력으로 193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국제 연맹 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노벨 평화상 외에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 등 10개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38년 외무부에서 퇴임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총장(1941–1943) 및 교수(1943–1946)를 역임했다.
2014년 그의 노벨상 메달이 경매에 부쳐졌고, 아르헨티나 정부가 메달 환수를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나, 현재는 아시아의 개인 수집가가 소유하고 있다.
4. 수상
사베드라 라마스는 193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차코 전쟁 (1932–1935)을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사이에서 종식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1933년 10월에 6개 남미 국가가 서명하고, 2개월 후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제7차 범미 회의에서 모든 미주 국가가 서명한 불가침 및 화해 조약을 작성했다. 1935년에는 6개 중립 미주 국가의 중재를 조직하여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간의 적대 행위 중단을 가져왔다.
노벨 평화상 외에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와 다른 10개국으로부터 유사한 훈장을 수여받았다.
2014년 3월, 그의 금으로 된 노벨 메달은 남미 전당포에서 발견된 후 경매에 부쳐졌다. 2014년 8월에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그의 노벨 메달을 되사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르헨티나 의회에 제출되었다. 그의 경매 메달은 나중에 낙찰되었으며 현재는 아시아의 개인 수집가가 소유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Nobel lectures in peace 1926-1950
World Scientific
1999
[2]
서적
British-Owned Railways in Argentina: Their Effect on the Growth of Economic Nationalism, 1854-1948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4
[3]
웹사이트
Carlos Saavedra Lamas Biographical
https://www.nobelpri[...]
2020-10-10
[4]
논문
The Saavedra Lamas Anti-War Draft Treaty
https://www.cambridg[...]
1933
[5]
뉴스
1936 Nobel Peace Prize medal to sell at auction after appearing in South American pawn shop
https://www.independ[...]
2014-03-13
[6]
웹사이트
Project for rebuying Carlos Saavedra Lamas Nobel Medal by congressman Alberto Asseff
http://www.unirargen[...]
Frente Renovador Argentina-Argentine Congress
2014-08-15
[7]
웹사이트
Gold Nobel Peace Prize brings $1,116,250 at Baltimore auction
https://www.coinworl[...]
2020-10-12
[8]
뉴스
Nobel Peace Prize medal sells for $1.38 million at auction
https://www.straitst[...]
201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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