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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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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코 전쟁은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서 벌어진 영토 분쟁으로, 볼리비아가 태평양 전쟁 패배 후 대서양 진출을 위해, 파라과이는 삼국 동맹 전쟁으로 잃은 영토 회복을 위해 시작되었다. 차코 지역의 석유 매장 가능성, 외국 석유 회사의 개입,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볼리비아는 병력과 장비에서 우위를 점했으나, 파라과이의 혁신적인 전술과 국민적 단결에 밀려 결국 패배했다. 전쟁 결과, 파라과이가 차코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회랑 지대와 푸에르토카사도 항구를 얻었으며, 양국 모두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이 전쟁은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이후 석유 개발과 관련된 갈등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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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코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차코 전쟁 지도. 주요 요새, 군사 전초 기지, 도시, 파라과이의 서쪽 진격 방향이 표시되어 있음.
차코 전쟁 지도. 주요 요새, 군사 전초 기지, 도시, 파라과이의 서쪽 진격 방향이 표시되어 있음.
시기1932년 9월 9일 – 1935년 6월 12일
장소차코 보레알, 남아메리카
결과파라과이의 승리
영토분쟁 지역의 대부분이 파라과이에 할양됨
교전 세력
교전국 1파라과이
지원 세력아르헨티나
파시스트 이탈리아
교전국 2볼리비아
지원 세력체코슬로바키아
지휘관
볼리비아 지휘관다니엘 살라망카
호세 루이스 테하다
한스 쿤트
엔리케 페냐란다
파라과이 지휘관에우세비오 아얄라
호세 에스티가리비아
병력 규모
볼리비아 병력210,000명
파라과이 병력150,000명
피해 규모
볼리비아 피해사망: 50,000–80,000명
부상: 40,000명
포로: 21,000명
파라과이 피해사망: 35,000–50,000명
포로: 2,556명

2. 배경

차코 전쟁의 기원은 오랫동안 지속된 영토 분쟁과 안데스 산맥 동부에서 석유 매장량이 발견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29년 리마 조약으로 볼리비아는 태평양으로 가는 육상 회랑을 회복하려는 희망을 잃게 되었다.[14][15][16]

볼리비아와 파라과이는 모두 내륙국이었다. 600,000 km2에 달하는 차코는 인구 밀도가 낮았지만, 이 지역을 관통하는 파라과이강을 장악하면 대서양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17] 1879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태평양 해안을 잃은 볼리비아에게 이는 특히 중요했다.[18] 파라과이는 1864년부터 1870년까지 이어진 파라과이 전쟁에서 브라질아르헨티나에 영토의 절반 가량을 잃었고, 경제적 생존을 위해 영토를 유지해야 했다.[19]

국제 중재에서 볼리비아는 이 지역이 원래 스페인 식민지였던 모호스주와 치키토스주의 일부였으며, 볼리비아가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반면 파라과이는 점유를 근거로 주장했다. 실제로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의 농장주들은 이미 이 지역에서 소를 기르고 퀘브라초 나무를 이용하고 있었다.[20]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소규모 유목 원주민은 파라과이의 과라니족 유산과 관련이 있었다. 1919년 기준으로 아르헨티나 은행은 동부 차코에 400,000 헥타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카사도 가문은 141,000 헥타르를 소유하고 있었다.[21]

로열 더치 쉘이 파라과이를, 스탠다드 오일이 볼리비아를 지원하는 등, 탐사 및 시추 권리를 놓고 경쟁하는 석유 회사 간의 갈등은 전쟁 발발을 더욱 악화시켰다.[23] 안데스 산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차코가 석유의 풍부한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이 일었고, 외국 석유 회사들이 탐사에 참여했다. 스탠다드 오일은 이미 비야 몬테스 주변 볼리비아 동부의 높은 언덕에서 석유를 생산하고 있었다.[24]

두 나라 간의 첫 번째 대립은 1885년 볼리비아 사업가 미겔 아라냐 수아레스가 바히아 네그라 남쪽, 파라과이강 상류에 푸에르토 파체코라는 항구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888년 파라과이 정부는 해군 부대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서 볼리비아인들을 강제로 몰아냈다.[29][30] 1894년과 1907년에 두 개의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양국 의회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31] 1905년 볼리비아는 차코에 발리비안과 과찰라라는 두 개의 새로운 전초 기지를 건설했다.[30]

1927년 2월 27일, 파라과이 육군 보병 순찰대가 볼리비아의 요새 포르틴 소르프레사에 억류되었고, 파라과이 소대 사령관 아돌포 로하스 실바 중위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했지만, 파라과이 여론은 이를 "살인"이라고 불렀다.[21]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 기병대가 볼리비아군 전초 기지인 포르틴 방가르디아를 점령하고, 볼리비아 병사 21명을 포획하고 오두막을 불태웠다.[32] 볼리비아는 12월 15일 포르틴 보케론을 점령하여 파라과이인 15명을 사살했다. 1929년 9월 12일 범아메리카 연맹의 압력으로 전쟁 이전의 현상 유지로 복귀가 합의되었지만, 군비 경쟁이 시작되어 양국은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33]

2. 1. 지정학적 요인

1879년의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여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잃었던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을 독점적으로 사용하여 대서양으로의 자유로운 접근을 원했다.[17][18] 반면, 파라과이는 1870년에 종결된 삼국 동맹 전쟁으로 인한 치명적인 피해에서 겨우 회복하고 있었고, 영토 확대를 원하게 되었다.[19]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모두 내륙국이었기에 파라과이강을 장악하는 것은 대서양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17]

국제 중재에서 볼리비아는 이 지역이 원래 스페인 식민지였던 모호스주와 치키토스주의 일부였으며, 볼리비아가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반면 파라과이는 점유를 근거로 주장했다. 실제로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의 농장주들은 이미 이 지역에서 소를 기르고 퀘브라초 나무를 이용하고 있었다.[20] 1920년대 파라과이 의회의 후원하에 정착한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존재 역시 파라과이의 주장에 유리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22]

안데스 산맥 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차코 지방에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가설이 세워졌다.[24] 이 권익은 양국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고, 파라과이는 메노나이트 등의 이민을 유치하여 영유권을 굳히려고 하는 한편, 볼리비아도 요새를 건설하는 등 실효 지배에 착수했다. 1931년 7월에는 국교를 단절하고, 1932년 6월 15일, 마침내 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파라과이 정부는 로열 더치 쉘 사와 결탁하고 있었고, 볼리비아 정부는 스탠다드 오일 사와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석유 메이저의 대리 전쟁이라고도 불렸다.[23]

2. 2. 영토 분쟁의 역사

1928년 필코마요강 북쪽과, 그란차코의 일부인 파라과이강 서쪽에 위치한 광활한 황야 지역인 차코보레알에서 두 나라의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 충돌은 칠레볼리비아를 격퇴하고 볼리비아의 모든 해안지방을 합병한 태평양 전쟁(1879년 ~ 1884년)에서 비롯되었다. 볼리비아는 해안이 봉쇄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라플라타강을 통해 대서양으로 나아가려 했고, 그란차코에 막대한 석유자원이 있다고 생각했다.[14][15][16]

파라과이 (1924, 1927, 1932) 및 볼리비아 (1928) 우표. 1924년 파라과이 우표에는 볼리비아와의 국경선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1927년에는 국경선이 그란 차코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1932년에는 논쟁 지역이 "파라과이 차코"로 불리면서 국경선이 더 북쪽으로 이동했으며, "과거, 현재, 미래에도 [우리의 것]"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볼리비아 우표에는 이 지역이 "볼리비아 차코"로 표시되어 있다.


전쟁의 기원은 오랫동안 지속된 영토 분쟁과 동부 안데스 산맥에서 석유 매장량 발견에 기인한다. 1929년 리마 조약으로 볼리비아는 태평양으로 가는 육상 회랑을 회복하려는 희망이 좌절되었다.[14][15][16]

볼리비아와 파라과이는 모두 내륙국이었다. 600,000 km2에 달하는 차코는 인구 밀도가 낮았지만, 파라과이강을 장악하면 대서양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17]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태평양 해안을 잃은 볼리비아에게 특히 중요했다.[18] 파라과이는 파라과이 전쟁에서 영토의 절반을 브라질아르헨티나에 잃었고, 경제적 생존력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19]

볼리비아는 이 지역이 원래 스페인 식민지였던 모호스주와 치키토스주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파라과이는 점유를 근거로 주장했다. 실제로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의 농장주들은 이미 이 지역에서 소를 기르고 퀘브라초 나무를 이용하고 있었다.[20]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소규모 유목 원주민은 파라과이의 과라니족 유산과 관련이 있었다. 1919년 기준으로 아르헨티나 은행은 동부 차코에 400,000 헥타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카사도 가문은 141,000 헥타르를 소유하고 있었다.[21] 1920년대 파라과이 의회의 후원하에 정착한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존재 역시 파라과이의 주장에 유리했다.[22]

전쟁은 탐사 및 시추 권리를 놓고 경쟁하는 석유 회사 간의 갈등으로 악화되었으며, 로열 더치 쉘은 파라과이를, 스탠다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했다.[23] 안데스 산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차코가 석유의 풍부한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이 일었고, 외국 석유 회사들이 탐사에 참여했다. 스탠다드 오일은 이미 비야 몬테스 주변 볼리비아 동부의 높은 언덕에서 석유를 생산하고 있었다.[24] 그러나 전쟁이 단순히 회사의 이익으로 인해 발생했는지, 아니면 차코에서 석유를 수입하려는 아르헨티나의 목표 때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25]

파라과이 지도(미국, 1935)


두 나라 간의 첫 번째 대립은 1885년 볼리비아 사업가 미겔 아라냐 수아레스가 바히아 네그라 남쪽, 상 파라과이 강에 푸에르토 파체코라는 항구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볼리비아는 바히아 네그라를 파라과이 영토로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파라과이 정부는 해군 부대를 파견하여 1888년 이 지역에서 볼리비아인들을 강제로 몰아냈다.[29][30] 1894년과 1907년에 두 개의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볼리비아 의회와 파라과이 의회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31] 1905년 볼리비아는 차코에 발리비안과 과찰라라는 두 개의 새로운 전초 기지를 건설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파라과이의 미온적인 공식 항의를 무시했다.[30]

1927년 차코 보레알에서 피가 처음 흘리기 전까지 볼리비아의 이 지역 침투는 아무런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다. 2월 27일, 파라과이 육군 보병 순찰대와 현지 안내인들이 필코마요 강 근처에서 포로로 잡혀 볼리비아의 요새 포르틴 소르프레사에 억류되었는데, 파라과이 소대 사령관 아돌포 로하스 실바 중위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로하스 실바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했지만, 파라과이 여론은 이를 "살인"이라고 불렀다.[21]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회담에서 어떤 합의도 도출되지 못하고 1928년 1월 결국 결렬되면서 분쟁은 격화되었다.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 기병대가 바히아 네그라 북서쪽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볼리비아군이 설치한 전초 기지인 포르틴 방가르디아를 점령했다.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 병사 21명을 포획하고 오두막을 불태웠다.[32]

볼리비아는 12월 15일 바히아 네그라에 대한 공습으로 보복했는데, 이는 사상자와 피해가 거의 없었다. 12월 14일, 볼리비아는 포르틴 보케론을 점령했고, 파라과이인 15명이 사망했다. 결국 전쟁 이전의 현상 유지로의 복귀가 1929년 9월 12일 범아메리카 연맹의 압력으로 워싱턴 D.C.에서 합의되었지만, 이미 군비 경쟁이 시작되었고 두 나라는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33] 1920년대에 국경 충돌이 있었다면 전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34]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모두 무기 산업이 없었고, 유럽과 미국에서 막대한 양의 무기를 수입해야 했다.[34] 1932년까지 전쟁 발발을 늦춘 것은 양측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느낄 때까지 충분한 무기를 수입해야 할 필요성이었다.[34]

2. 3. 경제적 요인

1928년 필코마요강 북쪽과, 그란차코의 일부를 이루는 파라과이강 서쪽에 위치한 광활한 황야 지역인 차코보레알에서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간의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 충돌은 칠레볼리비아를 격퇴하고 볼리비아의 모든 해안지방을 합병한 태평양 전쟁(1879년 ~ 1884년)의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볼리비아는 해안이 봉쇄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라플라타강을 통해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진로를 개척하려 했다. 이 진로를 가로질러 그란차코가 놓여 있었고, 볼리비아인들은 그란차코에 막대한 석유자원이 있다고 생각했다.[14][15][16]

전쟁의 기원은 오랫동안 지속된 영토 분쟁과 동부 안데스 산맥에서 석유 매장량 발견에 기인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1929년 리마 조약으로 볼리비아 정부가 추가 개발과 무역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태평양으로 가는 육상 회랑을 회복하려는 희망이 좌절되었다.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모두 내륙국이었다. 600,000 km2에 달하는 차코는 인구 밀도가 낮았지만, 그 지역을 관통하는 파라과이강을 장악하면 대서양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17] 이는 1879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태평양 해안을 잃은 볼리비아에게 특히 중요했다.[18] 파라과이는 1864년부터 1870년까지의 파라과이 전쟁에서 주장하던 영토의 거의 절반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잃었고, 경제적 생존력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19]

국제 중재에서 볼리비아는 이 지역이 원래 스페인 식민지였던 모호스주와 치키토스주의 일부였으며, 볼리비아가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반면 파라과이는 점유를 근거로 주장했다. 실제로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의 농장주들은 이미 이 지역에서 소를 기르고 퀘브라초 나무를 이용하고 있었다.[20] 또한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소규모 유목 원주민은 파라과이의 과라니족 유산과 관련이 있었다. 1919년 기준으로 아르헨티나 은행은 동부 차코에 400,000 헥타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과두정치의 강력한 일원이었던 카사도 가문은 141,000 헥타르를 소유하고 있었다.[21] 1920년대 파라과이 의회의 후원하에 정착한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존재 역시 파라과이의 주장에 유리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22]

탐사 및 시추 권리를 놓고 경쟁하는 석유 회사 간의 갈등은 전쟁 발발을 더욱 악화시켰다. 로열 더치 쉘은 파라과이를, 스탠다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했다.[23] 안데스 산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차코가 석유의 풍부한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이 일었고, 외국 석유 회사들이 탐사에 참여했다. 스탠다드 오일은 이미 비야 몬테스 주변 볼리비아 동부의 높은 언덕에서 석유를 생산하고 있었다.[24] 그러나 전쟁이 단순히 회사의 이익으로 인해 발생했는지, 아니면 차코에서 석유를 수입하려는 아르헨티나의 목표 때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25]

1879년의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여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잃었던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을 독점적으로 사용하여 대서양으로의 자유로운 접근을 원했다. 한편, 파라과이는 1870년에 종결된 삼국 동맹 전쟁으로 인한 치명적인 피해에서 겨우 회복하고 있었고, 영토 확대를 원하게 되었다.

안데스 산맥 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어 볼리비아 남동부의 차코 지방에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이 권익은 패전에서 회복하기 위해 양국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고, 파라과이는 메노나이트 등의 이민을 유치하여 영유권을 굳히려고 하는 한편, 볼리비아도 요새를 건설하는 등 실효 지배에 착수했다. 1931년 7월에는 국교를 단절하고, 1932년 6월 15일, 마침내 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파라과이 정부는 로열 더치 쉘 사와 결탁하고 있었고, 볼리비아 정부는 스탠다드 오일 사와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석유 메이저의 대리 전쟁이라고도 불렸다.

3. 경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인 한스 쿤트가 볼리비아군 총사령관을 맡았고, 파라과이군러시아 제국에서 망명한 백군 군인을 참모로 기용했다. 볼리비아군은 25만 명, 파라과이군은 15만 명으로 병력 수에서 볼리비아가 우세했다. 볼리비아는 전차를 도입하는 등 근대적인 군대를 보유했지만, 파라과이군은 게릴라전과 같은 전근대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1932년 6월 15일, 볼리비아군의 기습으로 전쟁이 시작되어 요충지인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요새를 빠르게 점령했다. 볼리비아군은 최신 병기와 병력 수를 믿었지만, 국민 통합 면에서는 메스티소가 인구의 약 90%를 차지하는 파라과이가 유리했다. 파라과이는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중령과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군과 정치가의 지도자들이 우수했고, 서로 이해하는 관계였던 것은 파라과이에게 행운이었다. 또한, 차코 지방에 예로부터 살고 있는 과라니족 사람들은 파라과이에 귀속되어 있는 사람이 많았고, 토지 감각 등의 면에서도 파라과이에 우위성이 있었다. 반면, 볼리비아군은 차코 지방과 기후가 다른 안데스 지역 출신 병사가 많아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전차병들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열어둔 채 주행하여 공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2년 7월 15일, 파라과이군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요새를 탈환하고, 두 달 후에는 보케론 요새를 탈환했다(보케론 전투, 1932년 9월 7일~29일). 11월에는 킬로미터 7 전투가 벌어졌다.

1933년에는 제1차 나나와 전투(1월), 캄포 호르단의 전투(2월), 제2차 나나와 전투 및 곤드라 전투(7월), 캄포 그란데 전투(8-9월)가 벌어졌다.

11월, 캄포 비아 전투에서 파라과이가 승리하면서 전선은 볼리비아 영내로 이동했다. 이 전투에서 파라과이군이 노획한 병기와 탄약의 양은 개전 당시 파라과이군의 보유량을 넘어섰다. 1933년 12월 19일, 20일간의 정전이 합의되었으나, 1934년 1월 6일 정전이 종료되면서 전투가 재개되었다.

1934년 5월, 카냐다 스트롱기스트 전투가 벌어졌다. 1935년 4월, 파라과이군은 처음으로 볼리비아 영토의 도시 차라구아를 점령했지만, 이것이 파라과이군의 한계였다.

개전 이후 계속 패배했던 볼리비아군이었지만, 파라과이군이 안데스 지방에 접근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파라과이의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안데스의 기후는 파라과이군에게 불리했으며, 볼리비아의 민족주의는 볼리비아군에게 영웅적인 전투를 하게 했다. 파라과이군은 공격에 어려움을 겪었고, 볼리비아 동부의 주요 도시인 산타 크루스에 도달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1935년 6월, 양측의 공격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아르헨티나의 중재로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실질적인 전투가 종료되었다.

3. 1. 전쟁의 발발 (1932년)

두 나라 간의 첫 번째 대립은 1885년 볼리비아 사업가 미겔 아라냐 수아레스가 바히아 네그라 남쪽, 상 파라과이 강에 푸에르토 파체코라는 항구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새로운 정착지가 볼리비아 영토 내에 있다고 추정했지만, 볼리비아는 바히아 네그라를 파라과이 영토로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파라과이 정부는 파라과이 전쟁 참전 용사 도밍고 안토니오 오르티스가 지휘하는 포병선 ''피라포''에 해군 부대를 파견하여 1888년 이 지역에서 볼리비아인들을 강제로 몰아냈다.[29][30] 1894년과 1907년에 두 개의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볼리비아 의회와 파라과이 의회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31] 한편, 1905년 볼리비아는 차코에 발리비안과 과찰라라는 두 개의 새로운 전초 기지를 건설했는데, 이번에는 필코마요 강을 따라 건설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파라과이의 미온적인 공식 항의를 무시했다.[30]

1927년 차코 보레알에서 피가 처음 흘리기 전까지 볼리비아의 이 지역 침투는 아무런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다. 2월 27일, 파라과이 육군 보병 순찰대와 현지 안내인들이 필코마요 강 근처에서 포로로 잡혀 볼리비아의 요새 포르틴 소르프레사에 억류되었는데, 파라과이 소대 사령관 아돌포 로하스 실바 중위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포르틴''(스페인어로 "작은 요새")은 차코의 작은 참호와 같은 수비 시설을 일컫는 이름이었지만, 병사들의 막사는 보통 몇 개의 진흙 오두막에 불과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로하스 실바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했지만, 파라과이 여론은 이를 "살인"이라고 불렀다.[21]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회담에서 어떤 합의도 도출되지 못하고 1928년 1월 결국 결렬되면서 분쟁은 격화되었다.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 기병대가 바히아 네그라 북서쪽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볼리비아군이 설치한 전초 기지인 포르틴 방가르디아를 점령했다.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 병사 21명을 포획하고 흩어져 있는 오두막을 불태웠다.[32]

볼리비아는 12월 15일 바히아 네그라에 대한 공습으로 보복했는데, 이는 사상자와 피해가 거의 없었다. 12월 14일, 볼리비아는 캠페인의 첫 번째 주요 전투가 벌어질 포르틴 보케론을 점령했고, 파라과이인 15명이 사망했다. 결국 전쟁 이전의 현상 유지로의 복귀가 1929년 9월 12일 범아메리카 연맹의 압력으로 워싱턴 D.C.에서 합의되었지만, 이미 군비 경쟁이 시작되었고 두 나라는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33] 1920년대에 정기적인 국경 충돌이 있었다면, 어느 한쪽이라도 서로에게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전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34] 현실은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모두 무기 산업이 없었고, 다가오는 분쟁을 위해 유럽과 미국에서 막대한 양의 무기를 수입해야 했다.[34] 1932년까지 전쟁 발발을 늦춘 것은 양측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느낄 때까지 충분한 무기를 수입해야 할 필요성이었다.[34]

볼리비아는 전쟁의 참모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인 장교를 기용하여, 독일군 출신의 한스 쿤트가 총사령관으로 전군을 지휘했다. 한편, 파라과이군러시아 제국에서 망명한 백군 군인이 참모가 되었다. 병력 수에서는 25만 명 대 15만 명으로 볼리비아군이 파라과이군을 훨씬 웃돌았다. 게다가 볼리비아는 전차를 도입하는 등, 근대적인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파라과이군의 싸움 방식은 게릴라전과 같은 전근대적인 점이 많았다.

전쟁은 1932년 6월 15일 볼리비아군이 기습하여 요충지인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요새를 공략하면서 시작되었다. 기후 풍토가 각각 전혀 다른 볼리비아 전역에서 병사가 징병되었고, 외국산 최신 병기를 손에 넣은 볼리비아군은 그란 차코로 침공하였다.

볼리비아군은 병기의 최신성과 수에 자신감을 가졌지만, 국민 통합이라는 점에서는 국민의 약 9할이 메스티소인 파라과이인 쪽에 유리함이 있었다. 이 국민 통합은 파라과이인의 놀라운 단결력을 낳았고,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중령과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군과 정치가의 지도자들이 우수했고, 서로 이해가 있는 콤비였던 것은 파라과이에게 행운이었다. 또한, 차코 지방에 옛날부터 살고 있는 과라니족 사람들은 파라과이에 귀속되어 있는 사람이 많았고, 토지 감각 등의 면에서도 파라과이에 우위성이 있었다. 한편, 볼리비아군에는 차코 지방과는 기후 풍토가 전혀 다른 안데스 지역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전차병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개폐부의 문을 열어둔 채 주행했기 때문에, 거기에 공격당하는 사태가 잇따랐다고 한다.

3. 2. 주요 전투

; 피샨츄라 호 사건

볼리비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인 장교 한스 쿤트를 총사령관으로 기용했다. 반면, 파라과이군러시아 제국에서 망명한 백군 군인이 참모가 되었다. 볼리비아군은 25만 명, 파라과이군은 15만 명으로 병력 수에서 볼리비아가 우세했다. 볼리비아는 전차를 도입하는 등 근대적인 군대를 보유했지만, 파라과이군은 게릴라전과 같은 전근대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전쟁은 볼리비아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1932년 6월 15일, 볼리비아군은 요충지인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요새를 빠르게 점령했다.

볼리비아군은 최신 병기와 병력 수를 믿었지만, 국민 통합 면에서는 메스티소가 인구의 약 90%를 차지하는 파라과이가 유리했다. 파라과이는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중령과 대통령의 훌륭한 지도력과 과라니족의 협력으로 우위를 점했다. 반면, 볼리비아군은 차코 지방과 기후가 다른 안데스 지역 출신 병사가 많아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전차병들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열어둔 채 주행하여 공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 제1차 파라과이 공세

1932년 7월 15일, 파라과이군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요새를 탈환하고, 두 달 후에는 보케론 요새를 탈환했다(보케론 전투, 1932년 9월 7일~29일). 11월에는 킬로미터 7 전투가 벌어졌다.

; 볼리비아 공세

1933년 1월, 제1차 나나와 전투. 2월, 캄포 호르단의 전투. 7월, 제2차 나나와 전투 및 곤드라 전투. 8-9월, 캄포 그란데 전투.

; 제2차 파라과이 공세

11월, 캄포 비아 전투에서 파라과이가 승리하면서 전선은 볼리비아 영내로 이동했다. 이 전투에서 파라과이군이 노획한 병기와 탄약의 양은 개전 당시 파라과이군의 보유량을 넘어섰다.

; 정전

1933년 12월 19일, 20일간의 정전이 합의되었으나, 1934년 1월 6일 정전이 종료되면서 전투가 재개되었다.

; 제3차 파라과이 공세

1934년 5월, 카냐다 스트롱기스트 전투.

; 전쟁 후기의 전투

1935년 4월, 파라과이군은 처음으로 볼리비아 영토의 도시 차라구아를 점령했지만, 이것이 파라과이군의 한계였다.

개전 이후 계속 패배했던 볼리비아군이었지만, 파라과이군이 안데스 지방에 접근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파라과이의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안데스의 기후는 파라과이군에게 불리했으며, 볼리비아의 민족주의는 볼리비아군에게 영웅적인 전투를 하게 했다. 파라과이군은 공격에 어려움을 겪었고, 볼리비아 동부의 주요 도시인 산타 크루스에 도달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1935년 6월, 양측의 공격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아르헨티나의 중재로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실질적인 전투가 종료되었다.

3. 3. 전쟁의 종식 (1935년)

1935년 6월 12일, 볼리비아군의 반격으로 파라과이군이 수세에 몰리게 된 뒤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 전쟁으로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두 나라는 많은 희생을 치렀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우루과이, 미국이 참가한 차코 평화회의에서 평화 조약이 마련되어 1938년 7월 21일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인되었다. 파라과이는 분쟁 지역 대부분(그란차코 지방 전체 면적의 2/3)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강 회랑 지대와 푸에르토카사도 항구를 얻었다.[1] 이 강화에 힘쓴 아르헨티나의 정치인 카를로스 사아베드라 라마스는 1936년에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1]

1938년 7월 21일,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페루, 미국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강화를 중재했다.[1] 이 강화 조약으로 광대한 차코 지방은 파라과이에 귀속하기로 결정되었지만, 차코 지방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기에 잃은 것에 비하면 파라과이가 얻은 것은 적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

국경선은 거의 파라과이의 주장대로 결정되었지만,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영토(푸에르토 부쉬)를 획득했다. 볼리비아 지도에서 동쪽에 작게 튀어나온 부분이 바로 이 영토이다. 이 영토와 파라과이 강을 통해 볼리비아는 대서양으로 나아가는 수로를 얻었지만, 현재 이 수로를 통한 유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1]

4. 군사적 측면

차코 전쟁은 양측 모두 상당한 규모의 군사력을 투입한 전쟁이었다. 볼리비아군은 Maxim M1904 및 M1911 기관총, 체코슬로바키아제 ZB vz. 26 및 Vickers-Berthier 경기관총, Vz. 24 7.65mm 소총, Schmeisser MP-28 II 9mm 기관단총 등 최신 외국 무기로 무장했다.[112] 반면 파라과이군은 초기에 독일제 Maxim, 영국제 Vickers, 브라우닝 MG38 수랭식 기관총, 덴마크제 Madsen 경기관총 등 다양한 종류의 소화기를 사용했다.[112] 주력 소총은 스페인 오비에도 조병창에서 제조된 M1909 아르헨티나 롱 라이플을 기반으로 설계된 M1927 7.65mm 파라과이 롱 라이플이었다.[112][35]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볼리비아군으로부터 노획한 VZ-24 소총 및 MP 28 기관단총(''piripipi'')을 주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36][112]

GAZ-AA 트럭, 양측 군대가 병력 보급에 사용한 Ford Model AA의 소련 버전


파라과이는 볼리비아보다 인구가 1/3에 불과했지만(88만 명 대 2,150,000명), 신속한 행군과 측면 포위에 초점을 맞춘 혁신적인 전투 방식으로 우위를 점했다. 1932년 6월 기준, 파라과이 육군은 약 4,026명(장교 355명, 외과 의사 및 비전투 장교 146명, 사관 후보생 200명, 부사관 690명, 병사 2,653명)으로 구성되었다. 파라과이 육군은 거의 모든 병사가 유럽계-과라니 메스티소였던 반면, 볼리비아 육군은 대부분 안데스 산맥 원주민인 케추아족 또는 아이마라족 출신(보병 병력의 90%)이었고, 하위 장교는 스페인 또는 기타 유럽 혈통이었다. 볼리비아 육군 사령관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독일인 한스 쿤트였다. 볼리비아 육군은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60,000명 이상을 동원한 적은 없으며, 육군의 2/3 이상이 차코에 배치된 적도 없었다. 반면 파라과이는 전체 군대를 동원했다.[37]

많은 파라과이 육군 사령관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육군에서 자원 봉사자로 복무하며 전투 경험을 쌓았다.[39] 육군 사령관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대령(이후 장군, 원수)은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39] 에스티가리비아는 군사 작전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숲에 대한 토착 과라니족의 지식과 생존 능력을 적극 활용했다.[39]

파라과이의 전쟁 수행은 총력전이었다. 버스는 병력 수송에 동원되었고, 결혼반지는 무기 구매를 위해 기증되었으며, 1935년까지 징집 대상이 17세 청소년과 경찰관까지 확대되었다. 파라과이는 파라과이강의 항구에서 차코까지 총 266km에 달하는 5개의 협궤 철도를 갖춘 철도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어 병력과 물자를 전선으로 훨씬 효과적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 이는 볼리비아가 가지지 못한 이점이었다.[40] 반면 볼리비아의 철도는 차코까지 연결되지 않았고, 모든 물자와 병력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흙길을 통해 전선까지 이동해야 했다.[38] 안데스 산맥의 약 3657.60m에서 차코의 약 152.40m로 고도가 낮아지는 것은 차코에 있는 병사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려는 볼리비아의 노력에 큰 부담을 주었다.

양측 군대는 상당수의 기병 연대를 배치했지만, 건조한 차코 지역의 특성상 말에게 충분한 물과 사료를 제공할 수 없어 대부분 보병으로 활용되었다. 비교적 소수의 기병 중대만이 사단급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41]

차코 전쟁의 전차전에서 볼리비아는 한스 쿤트 장군의 요청에 따라 보병 부대 지원을 위해 다수의 경전차와 전차를 구매했다. 독일인 교관들이 주로 볼리비아인으로 구성된 승무원들에게 8주간의 훈련을 제공했다. 볼리비아가 구매한 비커스 경전차는 비커스 A형과 B형이었으며, 1932년 12월 볼리비아 육군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란 차코의 험난한 지형, 부족한 수자원, 열악한 물류 준비 등의 요인으로 인해 차량(수냉식), 전차, 견인포에서 우위를 점했던 볼리비아는 결국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수천 대의 트럭과 차량 엔진이 차코의 짙은 먼지로 인해 고장났으며, 이는 양측에서 사용된 중(重) 수냉식 기관총의 작동에도 문제를 일으켰다.[112] 자체 포병이 비교적 적었던 파라과이는 다량의 스토크스-브란트 1931년형 박격포를 구매했다. 휴대성이 뛰어나고 정확하며 사거리가 3,000야드인 ''angu'as''(과라니어로 "옥수수 분쇄기" 또는 "박격포")는 볼리비아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112] 파라과이 공장들은 자체적으로 파이로테크닉 점화 장치인 수류탄, 파인애플 모양의 ''카룸베이''(과라니어로 "작은 거북이")[42][43]를 개발했으며, 트레일러, 박격포 튜브, 포병 수류탄, 항공 폭탄을 생산했다. 파라과이의 전시 노력은 국영 조선소에서 중앙 집중적으로 관리되었으며, 호세 보자노가 이를 감독했다.[44][45] 파라과이군은 1933년 1월에 첫 번째 ''카룸베이'' 수류탄을 받았다.[46]

파라과이군은 일반 볼리비아군이 사용하지 않는 과라니어로 라디오 통신을 할 수 있는 이점을 활용했다. 또한 파라과이는 파라과이 강을 따라 대형 바지선과 무장 보트를 이용하여 군대를 푸에르토 카사도까지 수송하고, 거기에서 철도를 통해 직접 전선으로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반면 대부분의 볼리비아군은 서부 고지대에서 약 800km나 떨어진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제대로 된 군수 지원도 받지 못했다. 실제로 볼리비아 병사는 이 거리를 건너는 데 14일이 걸린 반면, 파라과이 병사는 4일밖에 걸리지 않았다.[37] 볼리비아 육군이 사용한 중장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열악한 물 공급과 이 지역의 건조한 기후는 분쟁 기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다.[47] 탈수증으로 인한 비전투 사망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48]

4. 1. 양국의 군사력 비교

볼리비아는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3배나 많았고, 독일의 장군 한스 폰 쿤트에 의해 훈련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미국 은행의 차관으로 구입한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디언 징병으로 구성된 볼리비아군의 사기는 낮았고, 파라과이군들은 저지대 늪지와 정글에서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많은 볼리비아군들은 총격전뿐만 아니라 질병과 독사에 물려 사망했다.

두 나라는 분쟁지역에 군사기지를 세웠고,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는 전면전으로 치달은 일련의 제한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양측 군대는 더 많은 병력을 차코에 배치했으며 1932년이 되자 전쟁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파라과이는 볼리비아보다 인구가 3분의 1에 불과했지만(880,000명 대 2,150,000명), 신속한 행군과 측면 포위에 초점을 맞춘 혁신적인 전투 스타일로 우위를 점했다. 1932년 6월, 파라과이 육군은 약 4,026명(장교 355명, 외과 의사 및 비전투 장교 146명, 사관 후보생 200명, 부사관 690명, 병사 2,653명)이었다. 파라과이 육군은 거의 모든 병사가 유럽계-과라니 ''mestizos''였다. 그러나 볼리비아 육군은 대부분 안데스 산맥의 원주민케추아족 또는 아이마라족의 후손(보병 병력의 90%)이었고, 하위 장교는 스페인 또는 기타 유럽 혈통이었으며, 육군 사령관은 독일인이었던 한스 쿤트였다. 볼리비아 육군은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60,000명 이상을 동원한 적이 없으며, 육군의 3분의 2 이상이 차코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반면에 파라과이는 전체 군대를 동원했다.[37]

많은 파라과이 육군 사령관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 육군과 함께 자원 봉사자로 참전하여 전투 경험을 쌓았다.[39] 육군 사령관인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대령(나중에 장군, 원수)은 곧 전투 지휘에서 최고가 되었다.[39] 에스티가리비아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숲에 대한 토착 과라니의 지식과 땅에서 살아가는 능력을 활용했다.[39]

파라과이의 전쟁 노력은 총체적이었다. 버스는 병력 수송에 동원되었고, 결혼 반지는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기증되었으며, 파라과이는 1935년까지 징집 범위를 17세 청소년과 경찰관까지 확대했다. 파라과이가 누린 가장 중요한 이점은 파라과이가 파라과이강의 항구에서 차코까지 266km에 달하는 5개의 협궤 철도를 갖춘 차코로 이어지는 철도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 볼리비아가 결코 성공하지 못했던 것보다 파라과이 육군이 병력과 물자를 전선으로 훨씬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40] 또한, 안데스 산맥의 약 3657.60m에서 차코의 약 152.40m로 고도가 떨어지는 것은 차코에 있는 병사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려는 볼리비아의 노력에 더 큰 부담을 주었다.[38]

양측 군대는 상당한 수의 기병 연대를 배치했지만, 건조한 차코 지역은 말에게 충분한 물과 사료를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밝혀지면서 실제로는 보병으로 활용되었다. 비교적 소수의 기병 중대가 사단 수준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41]

볼리비아는 DWM Maxim M1904 및 M1911 기관총, 체코슬로바키아 ZB vz. 26 및 Vickers-Berthier 경기관총, 마우저식 체코슬로바키아 Vz. 24 7.65 mm 소총 (''mosquetones'') 및 Schmeisser MP-28 II 9 mm 기관단총을 포함한 최신 외국 무기로 무장했다.[112] 처음에 파라과이군은 독일의 Maxim, 영국의 Vickers, 브라우닝 MG38 수랭식 기관총, 덴마크의 Madsen 경기관총 등 다양한 소화기를 사용했다.[112] 주력 소총은 M1927 7.65 mm 파라과이 롱 라이플이었다.[112][35] 파라과이는 볼리비아 VZ-24 소총 및 MP 28 기관단총을 노획했다.[36][112]

볼리비아는 비커스 경전차를 배치했다. GAZ-AA 트럭은 양측 군대가 병력 보급에 사용한 Ford Model AA의 소련 버전이다.

비커스 6톤 전차와 유사

4. 2. 주요 전술 및 전략

볼리비아는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3배나 많았고, 독일의 한스 폰 쿤트 장군이 이끄는 잘 훈련된 군대와 충분한 무기를 보유하여 전쟁 초기 유리한 듯 보였다. 그러나 볼리비아군은 인디언 징병으로 사기가 낮았고, 저지대 늪지와 정글 환경에 익숙하지 않아 질병과 독사에 의한 피해가 컸다.[112] 반면 파라과이군은 이러한 환경에 더 잘 적응했다.

두 나라는 분쟁 지역에 군사 기지를 구축했고, 1928년부터 제한적인 공격이 시작되어 1932년에는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볼리비아는 그란차코 북부 지역의 파라과이 기지를 점령하고 포르틴 보케론을 공격했으나,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이 이끄는 파라과이군의 반격으로 9월 말에 함락되었다. 이후 볼리비아는 포르틴 나나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933년 5월 10일, 파라과이는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공세를 펼쳐 볼리비아 대통령이 쿤트를 엔리케 페냐란다 장군으로 교체할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34년 1월 9일,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발리비안 기지를 공격하여 11월 17일 함락시켰고, 볼리비아 대통령은 사임했다. 파라과이군은 1935년 1월 볼리비아 영내까지 진격했다.

볼리비아군은 Maxim M1904 및 M1911 기관총, ZB vz. 26 및 Vickers-Berthier 경기관총, Vz. 24 소총, Schmeisser MP-28 II 기관단총 등 최신 무기로 무장했다.[112] 파라과이군은 독일 Maxim, 영국 Vickers, 브라우닝 MG38 기관총, 덴마크 Madsen 경기관총, M1927 소총 등을 사용했다.[112][35] 파라과이는 볼리비아군으로부터 노획한 VZ-24 소총과 MP 28 기관단총을 사용하기도 했다.[36][112]

파라과이는 인구가 적었지만(88만 명 대 215만 명), 신속한 행군과 측면 포위 전술로 우위를 점했다. 파라과이군은 대부분 유럽계-과라니 ''mestizos''로 구성되어 동질성이 높았던 반면, 볼리비아군은 케추아족 또는 아이마라족 원주민이 대다수(90%)였고, 지휘관은 독일인 한스 쿤트였다.[37] 볼리비아군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지만, 차코 지역에는 전체 병력의 3분의 2 이상을 투입하지 않았다. 반면 파라과이는 전체 군대를 동원했다.[37]

파라과이군은 참호 요새, 철조망, 박격포, 기관총, 지뢰를 활용한 방어 전술을 사용했다.[39]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숲에 대한 토착 과라니족의 지식을 활용하고, 볼리비아 수비대를 우회하는 전술을 선호했다.[39] 파라과이는 전쟁 기간 동안 21,000명 이상의 포로를 잡았지만, 볼리비아는 약 2,500명에 불과했다.[39]

파라과이는 버스를 병력 수송에 동원하고, 결혼반지를 기증받아 무기를 구매하는 등 총력전을 펼쳤다.[40] 파라과이는 차코까지 이어지는 철도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병력과 물자를 효과적으로 수송했지만, 볼리비아는 철도가 연결되지 않아 흙길을 통해 물자를 수송해야 했다.[38] 볼리비아군은 고도 차이로 인해 물자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다.

차코 전쟁의 전차전도 참조

볼리비아는 비커스 경전차를 도입했지만, 차코의 지형과 부족한 수자원, 열악한 물류 환경으로 인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112] 파라과이는 스토크스-브란트 1931년형 박격포와 자체 개발한 수류탄 ''카룸베이''(작은 거북이)를 활용하여 볼리비아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42][43][112]

피티안투타 호수에서 파라과이의 반격을 보여주는 스케치


1932년 6월 15일, 볼리비아군은 피티안투타 호수의 포르틴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를 점령했지만, 7월 16일 파라과이군이 탈환했다.[69] 이후 볼리비아는 코랄레스, 톨레도, 포르틴 보케론을 점령했지만, 파라과이는 이 요새들을 되찾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파라과이군은 포르틴 보케론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아 9월 9일부터 9월 29일까지 포위 공격을 펼쳐 함락시켰다. 이후 파라과이군은 포르틴 아르세로 진격했으나, 볼리비아군은 이미 후퇴한 상태였다.

1932년 12월, 볼리비아는 한스 쿤트 장군을 불러 반격을 지휘했다. 쿤트는 나나와 요새를 주요 목표로 삼고, 1933년 1월 제1차 나나와 전투를 개시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코랄레스 요새와 플라타니요스 요새를 점령했지만, 페르난데스 요새와 톨레도 요새 점령에는 실패했다.

1932년 알리우아타 요새의 파라과이군


쿤트는 알리우아타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파라과이 제1사단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는 캄포 호르단 전투로 이어졌고, 파라과이 제1사단은 곤드라로 후퇴했다.

1933년 7월, 쿤트는 제2차 나나와 전투를 개시했지만, 파라과이군의 강화된 방어에 막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패배로 쿤트의 명성은 실추되었고, 파라과이는 전략적 주도권을 되찾았다.[70]

막심 기관총을 다루는 파라과이 군인


9월, 파라과이는 알리우아타 지역에서 세 차례의 포위 작전을 펼쳐 볼리비아군 연대들을 항복시켰다. 파라과이 대통령 에우세비오 아얄라는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를 장군으로 진급시키고 새로운 공세 계획을 승인했다.

파라과이군은 캄포 비아 전투에서 볼리비아군 제9사단과 제4사단을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파라과이는 다량의 무기를 노획했고, 볼리비아는 자체 장갑차를 방어하기 위해 대전차 소총을 구매해야 했다.[112] 볼리비아군은 무뇨스로 후퇴했고, 쿤트는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했다.

1935년 1월 파라과이 공세. 파란색: 파라과이 진격. 빨간색: 볼리비아 반격.


볼리비아군은 비야 몬테스 방어에 집중했고, 파라과이군은 이비보보를 공격하여 필코마요 강에 있는 볼리비아군을 고립시켰다. 이 전투로 볼리비아군은 200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항복했다.

볼리비아군은 비야 몬테스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했고, 베르나르디노 빌바오 리오하 대령과 오스카 모스코소가 방어를 책임졌다. 1935년 1월 11일, 파라과이군은 두 개의 볼리비아 연대를 포위했지만, 비야 몬테스와 산타크루스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는 데는 실패했다.

에스티가리비아는 비야 몬테스에 대한 최종 공격을 결정했지만, 난카라인자의 유전을 점령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3월 6일, 파라과이군은 카미리를 공격했지만, 볼리비아군의 반격으로 퇴각했다.

4월 15일, 파라과이군은 파라페티 강에서 볼리비아 방어선을 돌파하고 차라구아를 점령했지만, 볼리비아군의 반격으로 물러났다. 6월 4일, 파라과이군은 잉가비에서 패배하여 항복했다. 6월 12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파라과이군은 코르디예라 주의 볼리비아 유전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참호를 구축했다.

결론적으로, 차코 전쟁은 파라과이의 승리로 끝났지만,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볼리비아는 원주민 병사들을 강제 징집했지만, 이들은 국가와의 유대감이 약했다. 파라과이는 혼혈 인구 사이에서 민족주의적 열정을 고취시켰다. 양측 군인들은 물 부족과 가혹한 환경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특히 볼리비아군은 고도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85]

4. 3. 항공전 및 해상 전력

차코 전쟁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대규모 항공전이 벌어진 전쟁으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양측은 구식 단발 복엽기 전투 폭격기를 사용했다. 파라과이는 14대의 Potez 25기를 배치했고, 볼리비아는 최소 20대의 CW-14 오스프리를 사용했다.[49] 볼리비아는 4대의 Junkers Ju 52기를 구입하여 주로 의료 후송 및 공중 보급에 사용했으며, Ju 52기만으로 최전선에 4,400톤 이상의 화물을 전달했다.[52]

파라과이의 주력함 중 하나인 포함 ''Humaitá''


파라과이 해군은 파라과이 강을 통해 수천 명의 병력과 수십 톤의 보급품을 최전선으로 수송하고, 수송선과 항만 시설에 대공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53] ''Humaitá''와 ''Paraguay''는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두 척의 포함으로, 병력을 푸에르토 카사도로 수송했다. 1932년 12월 22일, 볼리비아 Vickers Vespa기 3대가 파라과이 강에 있는 파라과이 강변 전초 기지인 바히아 네그라를 공격하여 육군 대령을 살해했지만, 그중 한 대가 포함 ''타쿠아리''에 의해 격추되었다. 나머지 두 대의 베스파는 강 하류로 비행하던 중 다른 포함인 ''Humaitá''와 마주쳤다. 파라과이 측은 그중 한 대가 손상되었다고 주장한다.[54][55] 1933년 3월 29일 직전, 볼리비아 오스프리가 파라과이 강 위에서 격추되었고,[58] 1934년 11월 26일, 브라질 증기선 ''Paraguay''는 푸에르토 미아노비치 근처 파라과이 강을 항해하던 중 볼리비아 항공기에 의해 오인 사격을 당하고 폭격을 받았다.[60][61][62]

파라과이 해군 항공 부대는 비행정을 사용하여 북부 전선을 따라 배치된 볼리비아군을 괴롭혔다. 이 항공기는 바히아 네그라 해군 항공 기지에 정박했으며, 두 대의 Macchi M.18기로 구성되었다.[63] 이 수상기는 1934년 12월 22일 볼리비아 전초 기지인 비트리오네스와 산 후안을 습격하면서 남아메리카 최초의 야간 공습을 감행했다.[64]

볼리비아 육군은 분쟁 중에 최소 10척의 자체 제작 순찰정 및 수송선을 배치했는데,[66] 주로 Mamoré-Madeira 수계를 통해 북부 차코로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서였다.[67] 50톤 무장 발사선 ''Tahuamanu''는 Laguna Cáceres로 잠시 이전되어 푸에르토 수아레스에서 강 하류로 병력을 수송했고, 바히아 네그라에서 8개월 동안 파라과이 해군에 도전했다. 이 배는 볼리비아 항공 정찰을 통해 이 지역의 파라과이 해군의 실제 전력이 드러난 후, 볼리비아 북부의 이테네스 강으로 철수했다.[66][68]

4. 4. 보급 및 정보전

볼리비아는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3배나 많았고, 독일의 한스 폰 쿤트 장군에 의해 잘 훈련된 군대와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볼리비아군은 사기가 낮았고, 파라과이군은 저지대 늪지와 정글에서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많은 볼리비아군이 질병과 독사에 물려 죽었다.

두 나라는 분쟁 지역에 군사 기지를 세웠고,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가 공격을 시작하면서 양측 군대는 더 많은 병력을 차코에 배치했다. 1932년 6월,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기지를 점령하고 포르틴 보케론을 공격했다. 8월, 파라과이는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보내 포르틴 보케론을 공격했고, 9월 말에 함락시켰다. 볼리비아는 쿤트 장군을 소환하고 포르틴 나나와를 공격하기 위해 남부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파라과이는 1933년 5월 10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10월 말,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볼리비아의 다니엘 살라망카 대통령이 쿤트를 엔리케 페냐란다 장군으로 교체할 정도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34년 1월 9일, 휴전이 끝난 뒤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볼리비아의 발리비안 기지를 공격했고, 11월 17일 함락되면서 살라망카 대통령은 사임했다. 파라과이군은 1935년 1월 볼리비아 영내까지 쳐들어갔다.

볼리비아군은 DWM Maxim M1904 및 M1911 기관총, 체코슬로바키아 ZB vz. 26 및 Vickers-Berthier 경기관총, Vz. 24 소총, Schmeisser MP-28 II 기관단총 등으로 무장했다.[112] 파라과이군은 독일 Maxim, 영국 Vickers, 브라우닝 MG38 수랭식 기관총, 덴마크 Madsen 경기관총 등을 사용했다.[112] 주력 소총은 M1927 7.65 mm 파라과이 롱 라이플이었다.[112][35] 파라과이는 볼리비아 VZ-24 소총 및 MP 28 기관단총을 노획했다.[36][112]

파라과이는 인구가 적었지만(880,000명 대 2,150,000명), 혁신적인 전투 스타일로 우위를 점했다. 파라과이 육군은 실질적으로 동질적이었던 반면, 볼리비아 육군은 대부분 케추아족 또는 아이마라족의 후손이었고, 하위 장교는 스페인 또는 기타 유럽 혈통이었으며, 육군 사령관은 독일인 한스 쿤트였다. 볼리비아 육군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지만, 파라과이는 전체 군대를 동원했다.[37]

많은 파라과이 육군 사령관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이 있었다.[39] 에스티가리비아는 군사 작전에 귀중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숲에 대한 토착 과라니족의 지식을 활용했다.[39] 그의 부하들은 볼리비아 요새를 포위하여 적진에 침투하는 데 능숙했다.[39] 양측 모두 참호 요새에 의존했다.[39]

파라과이의 전쟁 노력은 총체적이었다. 버스는 병력 수송에 동원되었고, 결혼 반지는 무기 구매를 위해 기증되었으며, 징집 범위가 확대되었다. 파라과이는 철도 네트워크를 통해 병력과 물자를 전선으로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40] 볼리비아의 철도는 차코까지 연결되지 않았고, 모든 물자와 병력은 흙길을 통해 이동해야 했다.[38]

양측 군대는 상당한 수의 기병 연대를 배치했지만, 건조한 차코 지역은 말에게 충분한 물과 사료를 제공할 수 없었다. 비교적 소수의 기병 중대가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41]

볼리비아는 비커스 경전차를 구매했다. 그란 차코의 지형과 험난한 지형, 부족한 수자원, 부적절한 물류 준비 등의 요인으로 인해 차량, 전차, 견인포에서 우위를 점했던 볼리비아는 결국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수천 대의 트럭과 차량 엔진이 차코의 먼지에 의해 망가졌다.[112] 파라과이는 스토크스-브란트 1931년형 박격포를 구매했다.[112] 파라과이 공장들은 자체적으로 수류탄, ''카룸베이''(과라니어로 "작은 거북이")[42][43]를 개발했으며, 트레일러, 박격포 튜브, 포병 수류탄, 항공 폭탄을 생산했다. 파라과이의 전시 노력은 호세 보자노가 관리했다.[44][45] 파라과이군은 1933년 1월에 첫 번째 ''카룸베이'' 수류탄을 받았다.[46]

파라과이군은 과라니어로 라디오 통신을 할 수 있는 이점을 활용했다. 파라과이는 파라과이 강을 따라 대형 바지선과 무장 보트를 이용하여 군대를 수송했다. 반면 대부분의 볼리비아군은 서부 고지대에서 와야 했고, 제대로 된 군수 지원도 받지 못했다. 볼리비아 병사는 이 거리를 건너는 데 14일이 걸린 반면, 파라과이 병사는 4일밖에 걸리지 않았다.[37] 열악한 물 공급과 건조한 기후는 분쟁 기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다.[47] 탈수증으로 인한 비전투 사망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48]

차코 전쟁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규모 항공전이 최초로 발생한 사건이다. 양측 모두 구식 단발 복엽기 전투 폭격기를 사용했다. 파라과이는 14대의 Potez 25기를 배치했고, 볼리비아는 최소 20대의 CW-14 오스프리를 사용했다. 국제 연맹의 무기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볼리비아는 Curtiss T-32 Condor II 쌍발 폭격기를 수입하려 했지만, 페루에서 저지되었다.[49]

볼리비아의 우수한 공군이 파라과이군의 포위 공격에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서 얻은 귀중한 항공 정찰 정보는 무시되었다.[39][50][51]

볼리비아는 4대의 Junkers Ju 52기를 구입하여 의료 후송 및 공중 보급에 사용했다. Ju 52기만으로 최전선에 4,400톤 이상의 화물을 전달했다.[52]

파라과이 해군은 파라과이 강을 통해 수천 명의 병력과 수십 톤의 보급품을 최전선으로 수송하고, 수송선과 항만 시설에 대공 지원을 제공했다.[53]

''Humaitá''와 ''Paraguay''는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두 척의 포함으로, 병력을 푸에르토 카사도로 수송했다. 1932년 12월 22일, 볼리비아의 Vickers Vespa기 3대가 파라과이 강변 전초 기지인 바히아 네그라를 공격했지만, 항공기 중 한 대가 포함 ''타쿠아리''에 의해 격추되었다. 파라과이 해군은 ''Humaitá''가 항공기에서 발사된 기관총 사격을 받았지만 장갑 방패가 피해를 막았다고 인정했다.[57]

1933년 3월 29일 직전에, 볼리비아 오스프리가 파라과이 강 위에서 격추되었고,[58] 4월 27일에는 6대의 오스프리 타격대가 무뇨스 기지에서 출격하여 푸에르토 카사도를 공격했지만, 아르헨티나의 외교적 반발로 인해 추가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59] 1934년 11월 26일, 브라질 증기선 ''Paraguay''는 볼리비아 항공기에 의해 오사격을 당하고 실수로 폭격을 받았다. 브라질 정부는 해군 항공기 11대를 해당 지역에 파견했고, 해군은 강에서 선박 호송을 시작했다.[60][61][62]

파라과이 해군 항공 부대는 비행정을 사용하여 북부 전선을 따라 배치된 볼리비아군을 괴롭혔다. 이 항공기는 바히아 네그라 해군 항공 기지에 정박했으며, 두 대의 Macchi M.18기로 구성되었다.[63] 이 수상기는 1934년 12월 22일 볼리비아 전초 기지인 비트리오네스와 산 후안을 습격하면서 남아메리카 최초의 야간 공습을 감행했다.[64]

볼리비아 육군은 분쟁 중에 최소 10척의 자체 제작 순찰정 및 수송선을 배치했는데,[66] 주로 Mamoré-Madeira 시스템을 통해 북부 차코로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서였다.[67] 50톤 무장 발사선 ''Tahuamanu''는 Laguna Cáceres로 잠시 이전되어 푸에르토 수아레스에서 강 하류로 병력을 수송했고, 바히아 네그라에서 8개월 동안 파라과이 해군에 도전했다. 그녀는 볼리비아 항공 정찰을 통해 이 지역의 파라과이 해군의 실제 전력이 드러난 후, 볼리비아 북부의 이테네스 강으로 철수했다.[66][68]

5. 국제 관계 및 외교적 노력

차코 전쟁은 여러 국가와 국제기구가 복잡하게 얽힌 분쟁이었다. 전쟁의 기원은 1929년 리마 조약으로 볼리비아의 태평양 진출 희망이 좌절되면서, 파라과이강을 통한 대서양 접근이 가능한 차코 지역의 중요성이 커진 데 있었다.[14][15][16]

로열 더치 쉘과 스탠다드 오일 간의 석유 이권 다툼은 전쟁 발발의 또 다른 주요 원인이었다.[23] 안데스 산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차코 지역은 석유 매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주목받았고, 두 회사는 각각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를 지원하며 경쟁했다.[24] 그러나 전쟁이 단순히 석유 회사의 이익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차코 지역 석유 수입을 노린 아르헨티나의 개입 때문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5]

칠레 대통령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는 칠레인의 볼리비아군 입대를 눈감아 주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전쟁 기간 동안, 국제 연맹은 중재 노력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주변국들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에 개입했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에 군수 물자와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고, 군사 정보를 제공하는 등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3][4] 반면, 칠레는 볼리비아군에 자국민 참전을 묵인했다는 의혹을 받았다.[98]

결국 1938년 7월 21일,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페루, 미국 등의 중재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조약으로 차코 지역의 대부분은 파라과이에 귀속되었지만, 볼리비아도 파라과이 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영토(푸에르토 부쉬)를 얻어 대서양으로의 수로를 확보했다. 이 강화에 기여한 아르헨티나의 정치인 카를로스 사아베드라 라마스는 193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편, 미국의 상원의원 휴이 롱은 스탠다드 오일이 볼리비아를 지원한다고 믿고 파라과이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스탠다드 오일을 "국제 음모자", "약탈적 강도" 등으로 맹렬히 비난했으며,[107] 그의 이러한 활동은 파라과이에서 그를 국민 영웅으로 만들었다.[108]

5. 1. 주변국의 개입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모두 내륙국이었기 때문에, 파라과이강을 통한 대서양 접근은 양국 모두에게 중요했다. 특히 볼리비아는 1879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게 태평양 해안을 잃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했다.[17][18] 파라과이는 1864년부터 1870년까지의 파라과이 전쟁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게 영토를 잃었기 때문에 경제적 생존을 위해 차코 지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19]

국제 중재에서 볼리비아는 이 지역이 원래 스페인 식민지였던 모호스주와 치키토스주의 일부라고 주장했고, 파라과이는 점유를 근거로 주장했다. 실제로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농장주들은 이미 이 지역에서 소를 기르고 퀘브라초 나무를 이용하고 있었다.[20] 1919년 기준으로 아르헨티나 은행은 동부 차코에 400,000 헥타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과두정치의 강력한 일원이었던 카사도 가문은 141,000 헥타르를 소유하고 있었다.[21] 1920년대 파라과이 의회의 후원하에 정착한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존재 역시 파라과이의 주장에 유리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22]

전쟁의 발발은 탐사 및 시추 권리를 놓고 경쟁하는 석유 회사 간의 갈등으로 더욱 악화되었으며, 로열 더치 쉘은 파라과이를, 스탠다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했다.[23] 안데스 산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차코가 석유의 풍부한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이 일었고, 외국 석유 회사들이 탐사에 참여했다. 스탠다드 오일은 이미 비야 몬테스 주변 볼리비아 동부의 높은 언덕에서 석유를 생산하고 있었다.[24] 그러나 전쟁이 단순히 회사의 이익으로 인해 발생했는지, 아니면 차코에서 석유를 수입하려는 아르헨티나의 목표 때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25]

아르헨티나 육군은 1932년 9월 포르모사 주에 볼리비아 및 파라과이와의 국경을 따라 '데스타카멘토 믹스토 포르모사'(Destacamento Mixto Formosa)라는 특별 부대를 설치하여, 아르헨티나 영토로 넘어가려는 양측의 탈영병을 처리하고 교전 중인 군대의 국경 침범을 막았다.[87] 그러나 볼리비아 군대와의 국경 간 교류는 파라과이 정부의 공식 항의 이후인 1934년 초에야 금지되었다.[88] 전쟁이 끝날 무렵 15,000명의 볼리비아 군인이 아르헨티나로 탈영했다.[89] 위치족과 토바족과 같은 필코마요 강의 아르헨티나 강변에 사는 일부 원주민들은 종종 국경 반대편에서 사격을 받거나 볼리비아 항공기의 공격을 받았으며,[90] 탈영병들이 이끄는 파라과이의 마카족 구성원들은 국경의 한 농가를 약탈하고 그곳 거주민을 살해하여 1933년 아르헨티나군과 교전했다.[91] 캄포 비아에서 볼리비아군이 패배한 후, 1933년 12월 아르헨티나군은 적어도 하나의 전 볼리비아 국경 전초 기지인 포르틴 소르프레사 비에호(Fortin Sorpresa Viejo)를 점령했고, 이로 인해 파라과이군과의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다.[93][94]

양측 모두 전쟁에 다양한 국적의 자원병과 고용된 인력이 참여했다. 볼리비아에서는 독일 출신 한스 쿤트 장군이 전쟁 시작부터 1933년 12월까지 지휘를 맡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 임무단의 조언을 받았다.[95] 파라과이는 80명의 전 백군 장교들[97]의 지원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두 명의 장군, 니콜라이 에른과 이반 벨라예프가 포함되었다. 전쟁 후반에는 파라과이가 대규모 이탈리아 군사 임무단의 훈련을 받았다.[6]

볼리비아에는 107명 이상의 칠레인이 참전했다. 칠레 전투원들은 대공황과 1930년대 초 칠레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실업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98] 칠레 대통령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가 군대의 잠재적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이 관행을 은밀히 승인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98]

파라과이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공개적인 지원은 많은 아르헨티나 시민, 주로 코리엔테스 주와 엔트레 리오스 주 출신이 파라과이군에 자원했을 때 전장에서 반영되었다.[103]

파라과이의 주요 지지자는 미국 상원의원 휴이 롱이었다. 1934년 5월 30일 상원 연설에서 롱은 전쟁은 "제국주의적 금융 세력"의 작품이라고 주장했고, 차코는 파라과이의 정당한 소유였지만 스탠다드 오일이 파라과이가 석유 양보를 거부했기 때문에 볼리비아 정부를 "매수"하고 전쟁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106] 롱은 스탠다드 오일이 볼리비아를 지원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파라과이를 크게 지지했으며, 1934년 6월 7일 상원 연설에서 스탠다드 오일을 "국내 살인자", "외국 살인자", "국제 음모자", "약탈적 강도"라고 불렀다.[107]

5. 2. 국제 연맹의 역할

1938년 7월 21일,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페루, 미국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강화를 중재했다. 이 강화 조약으로 광대한 차코 지방은 파라과이에 귀속하기로 결정되었지만, 차코 지방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기에 잃은 것에 비하면 파라과이가 얻은 것은 적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경선은 거의 파라과이의 주장대로 결정되었지만,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영토(푸에르토 부쉬)를 획득했다. 볼리비아 지도를 자세히 보면 동쪽에 작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그 영토이다. 이 영토와 파라과이 강을 사용하여 볼리비아는 대서양으로의 수로를 얻었지만, 현재는 이 수로를 통한 유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 강화에 힘쓴 아르헨티나의 정치인 카를로스 사아베드라 라마스는 1936년에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5. 3. 외국의 지원 및 참전

볼리비아는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3배나 많았고, 독일의 장군 한스 폰 쿤트에 의해 잘 훈련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미국 은행의 차관으로 구입한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 전쟁에서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디언 징병으로 구성된 볼리비아군의 사기는 낮았고, 파라과이군들은 저지대 늪지와 정글에서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많은 볼리비아군들은 총격전 뿐만 아니라 질병과 독사에 물려 사망했다.[14][15][16]

전쟁의 발발은 탐사 및 시추 권리를 놓고 경쟁하는 석유 회사 간의 갈등으로 더욱 악화되었으며, 로열 더치 쉘은 파라과이를, 스탠다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했다.[23] 안데스 산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차코가 석유의 풍부한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이 일었고, 외국 석유 회사들이 탐사에 참여했다. 스탠다드 오일은 이미 비야 몬테스 주변 볼리비아 동부의 높은 언덕에서 석유를 생산하고 있었다.[24] 그러나 전쟁이 단순히 회사의 이익으로 인해 발생했는지, 아니면 차코에서 석유를 수입하려는 아르헨티나의 목표 때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25] 영국의 역사가 매튜 휴스는 전쟁의 기원에 대한 "종속 이론"에 반대하며,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정부가 각각 스탠다드 오일과 로열 더치 쉘의 "꼭두각시"라는 주장에 대해 "회사와 정부 기록에는 석유 회사가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 중 어느 한쪽을 돕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실질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고 썼다.[26] 반면, 역사가 브렛 구스타프슨은 "은행과 석유 산업 간의 모호한 경계는 [스탠다드 오일]이 실제로 볼리비아의 군비 확장을 자금 지원했음을 보여주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볼리비아 장군들에게 맡겨졌다"고 주장한다.[27]

차코 전쟁의 항공 작전도 참조하십시오.

차코 전쟁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규모 항공전이 최초로 발생한 사건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양측 모두 구식 단발 복엽기 전투 폭격기를 사용했다. 파라과이는 14대의 Potez 25기를 배치했고, 볼리비아는 최소 20대의 CW-14 오스프리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국제 연맹에 의해 부과된 국제 무기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특히 볼리비아는 민간 수송기로 위장하여 소수의 Curtiss T-32 Condor II 쌍발 폭격기를 수입하려 했지만, 페루에서 배송 전에 저지되었다.[49]

볼리비아는 4대의 Junkers Ju 52기를 구입하여 주로 독일 수송기를 의료 후송 및 공중 보급에 사용했다. Ju 52기만으로 최전선에 4,400톤 이상의 화물을 전달했다.[52]

파라과이 해군은 파라과이 강을 통해 수천 명의 병력과 수십 톤의 보급품을 최전선으로 수송하고, 수송선과 항만 시설에 대공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53]

''Humaitá''와 ''Paraguay''는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두 척의 포함으로, 병력을 푸에르토 카사도로 수송했다. 1932년 12월 22일, 볼리비아의 Vickers Vespa기 3대가 파라과이 강에 있는 파라과이 강변 전초 기지인 바히아 네그라를 공격하여 육군 대령을 살해했지만, 항공기 중 한 대가 포함 ''타쿠아리''에 의해 격추되었다. 나머지 두 대의 베스파는 강 하류로 비행하는 동안 다른 포함인 ''Humaitá''를 만났다. 파라과이 측은 그 중 한 대가 손상되었다고 주장한다.[54][55] 반대로, 볼리비아군은 ''Humaitá''가 심각하게 손상된 채 아순시온으로 절뚝거리며 돌아갔다고 보고했다.[56] 파라과이 해군은 ''Humaitá''가 항공기에서 발사된 기관총 사격을 받았지만 장갑 방패가 피해를 막았다고 인정했다.[57]

1933년 3월 29일 직전에, 볼리비아 오스프리가 파라과이 강 위에서 격추되었고,[58] 4월 27일에는 6대의 오스프리 타격대가 무뇨스 기지에서 출격하여 물류 강변 기지이자 도시인 푸에르토 카사도를 성공적으로 공격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강력한 외교적 반발로 인해 파라과이 강을 따라 표적에 대한 추가적인 전략적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59] 1934년 11월 26일, 브라질 증기선 ''Paraguay''는 푸에르토 미아노비치 근처 파라과이 강을 항해하던 중 볼리비아 항공기에 의해 오사격을 당하고 실수로 폭격을 받았다. 브라질 정부는 해군 항공기 11대를 해당 지역에 파견했고, 해군은 강에서 선박 호송을 시작했다.[60][61][62]

파라과이 해군 항공 부대는 비행정을 사용하여 북부 전선을 따라 배치된 볼리비아군을 괴롭히면서 분쟁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항공기는 바히아 네그라 해군 항공 기지에 정박했으며, 두 대의 Macchi M.18기로 구성되었다.[63] 이 수상기는 1934년 12월 22일 볼리비아 전초 기지인 비트리오네스와 산 후안을 습격하면서 남아메리카 최초의 야간 공습을 감행했다.[64] 파라과이 해군은 그 이후로 이 작전의 기념일에 매년 "해군 항공 부대의 날"을 기념해 왔다.[65]

볼리비아 육군은 분쟁 중에 최소 10척의 자체 제작 순찰정 및 수송선을 배치했는데,[66] 주로 Mamoré-Madeira 시스템을 통해 북부 차코로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서였다.[67] 수송선 ''Presidente Saavedra''와 ''Presidente Siles''는 1927년부터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파라과이 강에서 운항했으며, 두 유닛은 모두 민간 회사에 매각되었다.[66] Mamoré-Madeira 수계에 기반을 둔 50톤 무장 발사선 ''Tahuamanu''는 Laguna Cáceres로 잠시 이전되어 푸에르토 수아레스에서 강 하류로 병력을 수송했고, 바히아 네그라에서 8개월 동안 파라과이 해군에 도전했다. 그녀는 볼리비아 항공 정찰을 통해 이 지역의 파라과이 해군의 실제 전력이 드러난 후, 볼리비아 북부의 이테네스 강으로 철수했다.[66][68]

볼리비아군은 아르헨티나에서 야쿠이바를 통해 볼리비아 남동부로 들어오는 식량 공급에 의존했다.[86]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모두 전쟁 물자를 자국 항구를 통과시키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볼리비아군은 비커스에서 구입한 무기를 수입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페루의 몰렌도 항구와 브라질 국경의 푸에르토 수아레스였다.[86] 결국 볼리비아는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는데, 비커스가 영국 정부를 설득하여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볼리비아에 대한 수입 제한을 완화해 줄 것을 요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페루,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인접국들은 분쟁에 연료를 공급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모두에 대한 무기 수입을 제한했지만, 아르헨티나는 중립적인 외관 뒤에서 파라과이를 지원했다. 파라과이는 전쟁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로부터 군사 물자, 경제 지원, 그리고 매일의 정보를 받았다.[3][4]

아르헨티나 육군은 1932년 9월 포르모사 주에 볼리비아 및 파라과이와의 국경을 따라 '데스타카멘토 믹스토 포르모사'(Destacamento Mixto Formosa)라는 특별 부대를 설치하여, 아르헨티나 영토로 넘어가려는 양측의 탈영병을 처리하고 교전 중인 군대의 국경 침범을 막았다.[87] 그러나 볼리비아 군대와의 국경 간 교류는 파라과이 정부의 공식 항의 이후인 1934년 초에야 금지되었다.[88] 전쟁이 끝날 무렵 15,000명의 볼리비아 군인이 아르헨티나로 탈영했다.[89] 위치족과 토바족과 같은 필코마요 강의 아르헨티나 강변에 사는 일부 원주민들은 종종 국경 반대편에서 사격을 받거나 볼리비아 항공기의 공격을 받았으며,[90] 탈영병들이 이끄는 파라과이의 마카족 구성원들은 국경의 한 농가를 약탈하고 그곳 거주민을 살해하여 1933년 아르헨티나군과 교전했다.[91] 마카족은 파라과이군에 의해 정찰 임무를 위해 훈련을 받고 무장했다.[92] 캄포 비아에서 볼리비아군이 패배한 후, 1933년 12월 아르헨티나군은 적어도 하나의 전 볼리비아 국경 전초 기지인 포르틴 소르프레사 비에호(Fortin Sorpresa Viejo)를 점령했고, 이로 인해 파라과이군과의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다.[93][94]

양측 모두 전쟁에 다양한 국적의 자원병과 고용된 인력이 참여했다. 양국의 고위 지휘부는 때때로 유럽인들이 주도했다. 볼리비아에서는 독일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 참전 용사인 한스 쿤트 장군이 전쟁 시작부터 1933년 12월까지 지휘를 맡았는데, 군사적 실패가 잇따르면서 해임되었다. 쿤트 외에도 볼리비아는 전쟁 말기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로 구성된 군사 임무단의 조언을 받았다.[95] 체코슬로바키아 군사 임무단은 캄포 비아 전투에서 패배한 후 볼리비아 군을 지원했다.[96] 파라과이는 80명의 전 백군 장교들[97]의 지원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두 명의 장군, 니콜라이 에른과 이반 벨라예프가 포함되었으며, 후자는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랑겔 장군의 러시아 내전 당시 참모였다. 전쟁 후반에는 파라과이가 대규모 이탈리아 군사 임무단의 훈련을 받았다.[6]

볼리비아에는 107명 이상의 칠레인이 참전했다. 분쟁 마지막 해에 세 명이 다양한 원인으로 사망했다. 전쟁에 참여한 칠레인들은 개인적으로 입대했으며, 대부분 군인과 경찰관이었다. 그들은 대공황과 1930년대 초 칠레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실업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차코 전쟁이 끝난 후, 일부 칠레 장교는 스페인 내전 동안 국제 여단에서 싸우기 위해 갔다).[98] 칠레 전투원 첫 그룹이 라파스에 도착하자 파라과이의 항의가 잇따랐고, 1934년 9월 7일 칠레 의회는 전쟁 중인 국가의 군대에 합류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98] 그러나 그것은 칠레인의 볼리비아군 입대를 막지 못했고, 칠레 대통령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가 군대의 잠재적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이 관행을 은밀히 승인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98]

칠레 군인이 볼리비아군에 입대하는 것은 파라과이에서 놀라움을 자아냈는데, 1928년 칠레 전 대통령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장군이 볼리비아가 포르틴 방가르디아 파괴에 대한 보복을 한 후 파라과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파라과이 언론은 칠레 정부가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고, 칠레 군인들이 용병이라고 주장했다.[98] 1934년 8월 12일, 아순시온 주재 칠레 대사는 언론에서 칠레 정부에 대한 비난에 대한 파라과이의 공식적인 지지에 대한 대응으로 산티아고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 몇 명의 칠레 장교가 파라과이군에 합류했었다.[98]

최소한 두 명의 우루과이 군 조종사, 베니토 산체스 레이톤과 루이스 투야는 카냐다 스트롱게스트 전투 중 포위된 군대에 대한 보급과 1934년 7월 8일 볼리비아의 요새 발리비안에 대한 대규모 공습과 같은 파라과이 공군 Potez 25s가 수행한 가장 과감한 임무에 자원했다. 카냐다 스트롱게스트 구호 작전 중 레이톤의 Potez nº 7은 거의 200발의 총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귀환에 성공했다.[99]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다. 아순시온 주재 아르헨티나 육군 무관인 슈바이처 대령은 적대 행위가 시작된 후에도 파라과이 지휘부에 계속 조언했다. 그러나 파라과이 측에 더 가치 있는 기여는 스테반 바카레이자 대령이 이끄는 아르헨티나 군사 정보부(G2)에서 나왔는데, 이곳은 아르헨티나 국경을 따라 볼리비아의 이동과 보급로에 대한 야간 보고서를 제공했다.[100] G2는 볼리비아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파라과이 참모 본부의 이익을 위해 거의 모든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했다.[101] 아르헨티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인 비센테 알만도스 알몬시드 조종사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파라과이 정부에 의해 군사 항공 국장으로 임명되었다.[102]

파라과이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공개적인 지원은 또한 많은 아르헨티나 시민, 주로 코리엔테스 주와 엔트레 리오스 주 출신이 파라과이군에 자원했을 때 전장에서 반영되었다.[103] 그들 대부분은 제7 기병 연대 "호세 데 산 마르틴"에서 보병으로 복무했다. 그들은 1933년 1월 1일 코랄레스 전초 기지에서 볼리비아 연대 "잉가비"와 "와르네스"와 싸웠고, 볼리비아군에 의해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후 간신히 탈출했다. "와르네스" 연대 사령관인 산체스 중령은 후퇴하는 군대가 설치한 매복에서 사망했으며, 아르헨티나 자원병은 7대의 트럭을 잃었다.[104] "산 마르틴"의 가장 큰 업적은 1933년 12월 10일에 일어났는데, 하비에르 구스타보 슈라이버 소위가 이끄는 제1 비행대가 캄포 비아 전투 중 알리우아타-사베드라 도로에서 살아남은 두 대의 볼리비아 비커스 6톤 전차를 매복하여 포획했다.[105]

파라과이의 주요 지지자는 미국 상원의원 휴이 롱이었다. 1934년 5월 30일 상원 연설에서 롱은 급진적인 포퓰리스트로서, 전쟁은 "제국주의적 금융 세력"의 작품이라고 주장했고, 차코는 파라과이의 정당한 소유였지만 롱이 "중앙 아메리카, 남미 및 멕시코의 혁명 촉진자"라고 불렀던 스탠다드 오일이 파라과이가 석유 양보를 거부했기 때문에 볼리비아 정부를 "매수"하고 전쟁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106] 롱은 스탠다드 오일이 볼리비아를 지원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파라과이를 크게 지지했으며, 1934년 6월 7일 상원 연설에서 스탠다드 오일을 "국내 살인자", "외국 살인자", "국제 음모자", "약탈적 강도"라고 불렀다.[107] 그 결과 롱은 파라과이의 국민 영웅이 되었고, 1934년 여름 파라과이군이 볼리비아 요새를 점령했을 때, 그의 이름을 따서 포트 롱으로 개명했다.[108]

6. 전쟁의 결과 및 영향

차코 전쟁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양국에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왔다. 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영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인명 및 경제적 피해 부분에서 이미 상세히 다루어졌듯이, 차코 전쟁으로 인해 양측 합쳐 약 10만 명이 사망했다. 볼리비아는 인구의 2%가 목숨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14] 전쟁은 양국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전후에도 오랫동안 정정 불안이 이어졌다.

차코 지역은 덥고 물이 부족하여 전투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양국 군인들은 적군뿐만 아니라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과도 싸워야 했다.

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차코 지역의 석유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볼리비아가 지켜낸 안데스 산맥 인근 카미리(Camiri|카미리영어) 지역에서 소량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생산되고 있을 뿐이다.

전쟁 이후, 원래 가난했던 양국은 더욱 피폐해졌다. 전쟁에서 활약한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또는 국가 사회주의적인 정치가 이루어졌다. 파라과이에서는 혁명 2월당의 라파엘 프랑코 대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농지 개혁, 노동자 보호 등의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또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의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는 등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볼리비아에서는 패전의 원인을 국민 의식 부족으로 보고, 스탠다드 오일사 국유화 등 외국 자본 통제 강화와 볼리비아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볼리비아에서는 1952년 볼리비아 혁명으로, 파라과이에서는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의 장기 독재로 이어졌다.

6. 1. 인명 및 경제적 피해

1935년 6월 12일 볼리비아군의 반격으로 파라과이군이 수세에 몰리면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 전쟁으로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등 두 나라는 큰 희생을 치렀다.[14]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우루과이, 미국이 참가한 차코 평화회의에서 평화 조약이 마련되어 1938년 7월 21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체결되었다.[14] 파라과이는 분쟁 지역 대부분(그란차코 지방 전체 면적의 2/3)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강 회랑 지대와 푸에르토카사도 항구를 얻었다.[14]

193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평화 조약 조인자들이 모였다: 에우헤니오 마르티네스 테디(우루과이), 루이스 A. 리아르트(파라과이), 토마스 M. 엘리오(볼리비아),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아르헨티나).


이 전쟁은 볼리비아 경제를 붕괴시켰고, 볼리비아 일반 대중 사이에 개혁 요구를 불러일으켰다.[14] 평화 조약 체결은 주로 아르헨티나의 공으로 돌려졌으며, 아르헨티나 투자가들은 파라과이가 영토를 획득함에 따라 큰 이득을 얻었다.[14]

1935년 6월 10일 정오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파라과이는 해당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했다.[83][84] 193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체결되고 파라과이 국민투표에서 승인된 휴전 협정에 따라 파라과이는 차코 보레알의 4분의 3(약 51799.50km2)을 얻었다.[83][84] 볼리비아는 푸에르토 부쉬와 접한 나머지 영토를 유지했다.[83][84]

차코 전쟁은 양국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특히 볼리비아는 전체 인구의 2%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차코 전쟁 인명 피해
구분볼리비아파라과이
사망56,000 ~ 65,000명36,000명
포로21,000명 (군인) + 10,000명 (민간인)-



차코 지역은 고온에 물이 부족한 지역이었고, 전투는 가혹했다. 양군은 적과의 싸움과 더불어 말라리아 등의 질병과도 싸워야 했다. 당시 볼리비아의 인구는 약 300만 명으로 추정되므로, 국민 50명 중 1명이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원래 남미에서 손꼽힐 정도로 가난했던 양국은 전쟁으로 인해 더욱 피폐해졌고, 종전 후 정정 불안이 지속되었다.

6. 2. 영토 변화

1935년 6월 12일 볼리비아군의 반격으로 파라과이군이 수세에 몰리면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 전쟁으로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등 두 나라는 큰 희생을 치렀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우루과이, 미국이 참여한 차코 평화회의에서 평화조약이 마련되어 1938년 7월 21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인되었다.[14] 파라과이는 분쟁 지역 대부분(그란차코 지방 전체 면적의 2/3)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강 회랑 지대와 푸에르토카사도 항구를 얻었다.[15][16]

1938년 7월 21일,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페루, 미국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강화를 중재했다. 이 강화 조약으로 광대한 차코 지방은 파라과이에 귀속하기로 결정되었지만, 차코 지방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기에 잃은 것에 비하면 파라과이가 얻은 것은 적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경선은 거의 파라과이의 주장대로 결정되었지만,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영토(푸에르토 부쉬)를 획득했다. 볼리비아 지도를 자세히 보면 동쪽에 작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그 영토이다. 이 영토와 파라과이 강을 사용하여 볼리비아는 대서양으로의 수로를 얻었지만, 현재는 이 수로를 통한 유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 강화에 힘쓴 아르헨티나의 정치인 카를로스 사아베드라 라마스는 1936년에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6. 3. 정치적 변화

1935년 6월 12일 휴전 이후, 차코 전쟁은 양국에 깊은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으로 인해 양국은 극심한 경제난과 사회 불안에 직면했고, 이는 기존 정치 질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파라과이에서는 1936년 쿠데타로 혁명 2월당의 라파엘 프랑코 대령이 정권을 잡았다. 프랑코 대령과 파라과이 군부는 농지 개혁을 통해 빈농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국가 노동국을 설립하여 노동자를 보호하는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의 명예 회복을 추진하는 등 민족주의적 움직임도 나타났다.

볼리비아에서는 패전의 원인을 국민 의식 부재로 보고, 스탠다드 오일사 국유화와 같은 외국 자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볼리비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52년 볼리비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차코 전쟁은 파라과이에서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의 장기 독재, 볼리비아에서 혁명으로 이어지는 등 양국 모두에게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적, 또는 국가 사회주의적인 정치 변화를 가져왔다.

6. 4. 전후 처리 및 역사적 평가

1935년 6월 12일, 볼리비아군의 반격으로 파라과이군 수세에 몰린 뒤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 전쟁으로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등 두 나라는 큰 희생을 치렀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우루과이, 미국이 참여한 차코 평화회의에서 평화 조약이 마련되어 1938년 7월 21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인되었다. 파라과이는 분쟁 지역 대부분(그란차코 지방 전체 면적의 2/3)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강 회랑 지대와 푸에르토카사도 항구를 얻었다.[14][15][16] 이 전쟁은 볼리비아 경제를 붕괴시켰고, 볼리비아 일반 대중 사이에 개혁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평화 조약 체결은 주로 아르헨티나의 공으로 돌려졌으며, 아르헨티나 투자가들은 파라과이가 영토를 획득함에 따라 큰 이득을 얻었다.

차코 전쟁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볼리비아에서는 전쟁에 대한 대중적 기억이 "외국 침략자로부터 '석유를 방어'"하기 위해 동원된 "차코의 영웅"이라는 내용으로 강하게 남아있다.[119] 다른 이야기에서는 스탠다드 오일 또는 아르헨티나가 볼리비아의 석유 매장지를 빼앗기 위해 분쟁을 유발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분쟁 당시 차코에는 알려진 석유 매장지가 없었고, 대신 내륙 국가인 볼리비아가 대서양으로 항해가 가능한 강 항구를 확보하길 바랐다는 주장도 있다.[120]

영어권에서는 차코 전쟁이 널리 무시되었지만, 스페인어로는 방대한 역사 문헌이 존재한다. 이 분쟁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모두에서 활발한 관심을 받고 있다.[122] 두 국가의 역사 연구는 대부분 "영웅적" 해석이 지배적이며, 전쟁은 의지의 문제로 제시된다. 볼리비아 및 파라과이 역사학자들은 물류와 같은 다른 요인을 결정적인 요인으로 간주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었다.[122]

차코 지역은 고온에 물이 부족한 지역이었고, 전투는 가혹했다. 양군은 적과의 싸움과 더불어 말라리아 등의 질병과도 싸워야 했다. 볼리비아 측에서는 5만 명에서 6만 명, 파라과이 측에서는 4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볼리비아 인구는 약 300만 명으로 추정되므로, 국민 50명 중 1명이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결국 차코 지역에서는 현재까지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다. 볼리비아가 사수했던 안데스 산맥에 가까운 카미리에서는 약간의 석유·천연가스 채굴이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다.

원래 남미에서 가난했던 양국은 전쟁으로 더욱 피폐해졌고, 종전 후 정정 불안이 지속되었다. 양국 모두 이 전쟁에서 활약한 청년 장교가 주역이 되어 사회주의적, 또는 국가 사회주의적인 정치가 진행되었다. 193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혁명 2월당의 라파엘 프랑코 대령을 비롯한 파라과이 군인은 농지 개혁을 실시하여 빈농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국가 노동국을 설립하여 노동자를 보호하려 했다. 또한, 민족주의 관점에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의 명예 회복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한편 볼리비아의 군인과 지식인들은 패전의 이유를 국민 의식이 확립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외국 자본(스탠다드 오일사)의 국유화와 볼리비아의 정체성 모색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볼리비아에서는 1952년의 볼리비아 혁명으로, 파라과이에서는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의 장기 독재로 이어졌다.

6. 5. 석유 개발

전쟁의 기원은 오랫동안 지속된 영토 분쟁과 동부 안데스 산맥에서 석유 매장량이 발견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진다.[14][15][16] 1929년 리마 조약으로 볼리비아 정부는 추가 개발과 무역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태평양으로 가는 육상 회랑을 회복하려는 희망을 잃었다.

로열 더치 쉘은 파라과이를, 스탠다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하며 탐사 및 시추 권리를 놓고 경쟁하는 석유 회사 간의 갈등으로 전쟁 발발이 더욱 악화되었다.[23] 안데스 산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차코가 석유의 풍부한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이 일었고, 외국 석유 회사들이 탐사에 참여했다. 스탠다드 오일은 이미 비야 몬테스 주변 볼리비아 동부의 높은 언덕에서 석유를 생산하고 있었다.[24] 그러나 전쟁이 단순히 회사의 이익으로 인해 발생했는지, 아니면 차코에서 석유를 수입하려는 아르헨티나의 목표 때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25]

영국의 역사가 매튜 휴스는 전쟁의 기원에 대한 "종속 이론"에 반대하여,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정부가 각각 스탠다드 오일과 로열 더치 쉘의 "꼭두각시"라는 주장에 반대하며 "회사와 정부 기록에는 석유 회사가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 중 어느 한쪽을 돕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실질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라고 썼다.[26] 반면, 역사가 브렛 구스타프슨은 "은행과 석유 산업 간의 모호한 경계는 [스탠다드 오일]이 실제로 볼리비아의 군비 확장을 자금 지원했음을 보여주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볼리비아 장군들에게 맡겨졌다"고 주장한다.[27]

결국, 차코 지역에서는 현재까지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다. 볼리비아가 사수했던 안데스 산맥에 가까운 카미리(Camiri|카미리영어)에서는 약간의 석유·천연가스 채굴이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다.

볼리비아의 군인과 지식인들은 패전의 이유를 국민 의식이 확립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외국 자본(스탠다드 오일사)의 국유화와 볼리비아의 정체성 모색을 시작했다.

7. 문화적 영향

아우구스토 세스페데스는 유네스코 주재 볼리비아 대사이자 20세기 볼리비아의 주요 작가 중 한 명으로, 차코 전쟁의 여러 측면을 묘사하는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신문 ''엘 우니버설''의 종군 기자였던 세스페데스는 전쟁의 고통을 직접 목격했고, 이를 ''바보 전쟁의 영웅적 연대기''에서 묘사했다. 그의 소설 작품 중 여러 편은 이 장르의 걸작으로 여겨지며, 차코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123] 아돌포 코스타 듀 렐스도 이 분쟁에 대해 글을 썼으며, 1938년에 출판된 그의 소설 ''라구나 H3''도 차코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123]

파라과이 작가 아우구스토 로아 바스토스의 걸작 중 하나인 1960년 소설 ''인간의 아들''은 그 한 장에서 보케론 포위전 동안의 학살과 혹독한 전쟁 상황을 묘사했다. 작가 본인도 17세의 나이로 수송선 ''홀란다''에 탑승하여 파라과이 해군의 의료 서비스에 합류하여 이 분쟁에 참여했다.[124][125] 1961년 루카스 데마레가 감독한 아르헨티나 영화 ''인간의 아들'' 또는 ''갈증''은 이 소설의 해당 부분을 기반으로 했다.[126]

파블로 네루다의 시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에서 그는 석유 회사가 전쟁에서 했던 역할이라는 맥락에서 차코 전쟁을 언급했다.[127]

차코 전쟁, 특히 잔혹했던 나나와 전투는 R. N. 빅의 모험 소설 ''분노의 날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28]

파라과이 폴카 "제13 투유티 연대"는 라몬 바르가스 콜만이 작곡하고 에밀리아노 R. 페르난데스가 과라니어(Guarani)로 쓴 것으로, 페르난데스가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던 나나와 인근 전투에서 파라과이 제5사단의 활약을 기렸다.[129] 반면에, 보케론 포위전은 1982년 볼리비아 민요 가수이자 정치인 술마 유가르가 녹음한 볼리비아 ''토나다'' "버려진 보케론"에 영감을 주었다.[130]

벨기에 작가 에르제(조르주 레미)의 만화 시리즈 ''땡땡의 모험'' 중 하나인 ''깨진 귀''는 산 테오도로스와 누에보 리코라는 가상의 국가 간의 전쟁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볼리비아 소설가 오스카르 세루토의 ''불의 세례''는 젊은 주인공의 경험을 통해 전쟁 중 볼리비아의 잔혹한 현실을 이야기했다.[131]

레스터 덴트는 케네스 로베슨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닥 세비지 펄프 픽션 소설 중 하나인 ''죽음의 먼지''(1935)를 썼다. 이 소설에서 닥 세비지는 볼리비아와 파라과이라는 두 남미 공화국 사이에 놓이게 된다.

디에고 몬다카가 감독한 영화 ''차코''(2020)는 1934년 차코 전쟁 중 덤불 속을 방황하는 볼리비아 군인 중대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란 차코 지역은 물이 부족한 지역이었고, 지역의 유일한 샘이 진흙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마테차로 걸러낸 테레레를 마신 파라과이 군인들은 몸 상태가 나빠지지 않고 계속 싸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파라과이에서는 승리는 마테차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2015년, 파라과이의 퇴역 군인 아나클레토 에스코바르(Anacleto Escobar)는 100세 생일에 파라과이 정부로부터 집을 선물받았다.[132] 이는 차코 전쟁에서의 에스코바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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