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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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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는 17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의 정치인으로, 아르헨티나 독립 운동에 참여하고 재무장관과 정부 장관을 역임했다. 1826년 아르헨티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시스플라티나 전쟁과 지방 세력의 반발에 직면하여 1827년 사임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설립 등 공공 사업을 추진했으나, 베어링 브라더스 은행으로부터 도입한 차관 문제와 중앙집권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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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국적아르헨티나인
직책초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임기 시작1826년 2월 8일
임기 종료1827년 6월 27일
이전 직책후안 그레고리오 데 라스 에라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후임비센테 로페스
출생일1780년 5월 20일
출생지부에노스아이레스,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
사망일1845년 9월 2일
사망지카디스, 스페인
배우자후아나 델 피노 이 베라 무히카
자녀호세 호아킨 (1810-1887)
콘스탄시아 (1812-1816)
베르나르디노 도나토 (1814-1881)
마르틴 (1823-1885)
정당단일당
직업변호사

2. 생애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는 1780년 5월 2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스페인 변호사였으며, 부모 모두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 출신이었다.[1][2][3][4][5] 1809년 12월 14일, 그는 당시 리오 데 라 플라타 총독 호아킨 델 피노의 딸이었던 후아나 델 피노 이 베라 무히카와 결혼했다.

2. 1. 초기 생애

리바다비아는 1780년 5월 2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스페인 변호사 베니토 베르나르디노 곤살레스 데 리바다비아였고, 어머니는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마리아 호세파 데 헤수스 로드리게스 데 리바데네이라였다. 부모는 모두 스페인 갈리시아의 몬포르테 데 레모스 출신이었으며, 리바다비아는 이들 사이에서 네 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두운 외모 때문에 아프리카계 혈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1][2][3][4][5]

1809년 12월 14일, 리바다비아는 후아나 델 피노 이 베라 무히카와 결혼했다. 그녀는 당시 리오 데 라 플라타의 총독이었던 호아킨 델 피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라파엘라 프란시스카 데 베라 무히카 이 로페스 핀타도 사이의 딸이었다. 한편, 그의 군사 임명은 마리아노 모레노에 의해 거부되었다.

2. 2. 정치 경력

리바다비아는 1806년 영국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침공에 맞선 크리오요 민병대 활동과 1810년 5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1811년에는 연합 지방의 제1차 삼두정부(First Triumvirate)에서 재무장관 겸 전쟁장관을 맡아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이 정부는 1812년 10월까지 강력한 중앙 정부 수립, 스페인과의 관계 조정, 군대 조직화에 힘썼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복위하여 절대주의 통치를 복원하자, 아메리카 대륙의 신생 독립 정부들은 위기에 처했다. 리바다비아는 마누엘 벨그라노와 함께 유럽으로 파견되어 스페인과 영국으로부터 연합 지방에 대한 지원을 얻고자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아들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를 연합 지방의 섭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그는 스페인 왕실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거부했다. 결국 스페인과 영국에서의 외교 임무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리바다비아는 프랑스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동료들의 요청으로 1821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6]

유럽, 특히 영국에 머무는 동안 리바다비아는 산업 혁명의 발전과 낭만주의의 부상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이러한 근대적인 발전을 이루고자 했으며, 여러 유럽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초청했다. 프랑스 식물학자 에메 보플랑을 설득하여 아르헨티나로 초청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초청은 대부분 성사되지 못했다.[7]

1821년 6월, 리바다비아는 마르틴 로드리게스 주지사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정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5년간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근대화에 집중했다. 그는 도시를 유럽처럼 만들기 위해 넓은 대로를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고, 도로를 포장했으며,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극장, 지질학 아카데미, 의학 아카데미, 그리고 남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자연과학 박물관(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자연과학 박물관)을 세우는 등 교육 및 문화 시설 확충에도 힘썼다.

리바다비아는 공공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의회를 설득하여 파운드 100만파운드 규모의 대출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해당 공공 사업은 실제로 진행되지 않았다. 주 정부 채권은 런던베어링 브라더스 은행을 통해 판매되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현지 및 영국 상인들이 금융 중개인 역할을 했다. 대출된 자금의 상당 부분은 이들 사업가들에게 다시 대출되었으나 회수되지 못했다.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가 실제로 받은 금액은 552700GBP에 불과했다. 이 부채는 1825년 주 정부에서 국가 부채로 이전되었으며, 최종 상환은 1904년에야 이루어졌다.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를 지지했던 리바다비아는 지방 자치를 주장하는 연방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6년, 그는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임기 동안 그는 여러 박물관을 설립하고 국립 도서관을 확장하는 등 문화 및 교육 분야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3. 대통령 재임 (1826-1827)

리바다비아 정부는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주요 문제로는 현재의 우루과이 영토를 둘러싼 브라질과의 시스플라티나 전쟁과 지방 세력의 강한 저항이 있었다. 연방주의 세력이 성장하고 여러 주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정치적 압박이 커졌고, 결국 리바다비아는 1827년 6월 27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임으로는 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가 임명되었다.

3. 1. 문제점

리바다비아 정부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는데, 가장 큰 것은 현 우루과이 영토를 둘러싼 브라질과의 시스플라티나 전쟁과 지방 세력의 강한 저항이었다. 특히 연방주의자들이 세력을 키우고 여러 주에서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리바다비아는 1827년 6월 27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가 그의 뒤를 이었다.

사임 후 처음에는 은퇴하여 조용히 지냈으나, 1829년 유럽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834년에는 정적들과 맞서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지만, 도착 즉시 다시 망명 선고를 받았다. 그는 먼저 브라질로 갔다가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갔고, 1845년 9월 2일 스페인 카디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1857년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어 총독으로서 예우를 받았으며,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라사 미세레레에 있는 묘소에 안치되어 있다. 이 묘소는 그의 이름을 딴 리바다비아 거리와 가깝다.

3. 2. 사임

리바다비아 정부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는데, 특히 현 우루과이 영토를 둘러싸고 브라질과 벌인 시스플라티나 전쟁과 지방 세력의 저항이 주요 문제였다. 연방당 세력이 커지고 여러 주에서 공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리바다비아는 결국 1827년 6월 27일에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의 뒤를 이어 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사임 후 처음에는 은퇴하여 조용히 지냈으나, 1829년 유럽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834년, 리바다비아는 자신의 정적들과 맞서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지만, 도착하자마자 다시 망명 선고를 받았다. 그는 먼저 브라질로 갔다가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갔고, 1845년 9월 2일 스페인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1857년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었고, 총독으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현재 그의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라사 미세레레에 있는 묘소에 안치되어 있으며, 이 묘소는 그의 이름을 딴 리바다비아 거리와 가깝다.

4. 퇴임 이후

1827년 6월 27일 사임한 리바다비아는 처음에는 은퇴하여 조용히 지냈으나, 1829년 유럽으로 망명했다.

1834년, 그는 정적들과 맞서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지만, 즉시 다시 망명 선고를 받았다. 그는 먼저 브라질로 갔다가 이후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1845년 9월 2일 스페인에서 사망했으며, 자신의 유해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유언과는 달리, 유해는 1857년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어 총독의 예우를 받았다. 현재 그의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라사 미세레레에 있는 묘소에 안치되어 있으며, 이 광장은 그의 이름을 딴 리바다비아 거리와 인접해 있다.

5. 유산과 평가

1864년부터 아르헨티나 우표에 리바다비아가 등장했다.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는 아르헨티나의 초대 대통령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의 통치 기간과 정당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역사적 평가 역시 엇갈린다.[8]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교육, 문화 발전 및 정교분리 추진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9]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그의 친영 성향, 관세 정책, 그리고 아르헨티나 외채 문제의 시초가 된 차관 도입 등을 비판적으로 본다.[9]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의장은 상징적으로 "리바다비아의 의장"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정작 리바다비아 본인은 퇴임 시 의자를 가져가 버렸고 이는 회수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8]

5. 1. 긍정적 평가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리바다비아를 교육, 문화, 그리고 정교분리 개선에 대한 그의 업적을 들어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칭찬한다.[9]

5. 2. 부정적 평가

리바다비아는 아르헨티나의 초대 대통령으로 여겨지지만, 그의 통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인정되었고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다. 또한 통치 기간 중 절반 이상은 헌법 없이 통치했으며, 대통령직 계승 체계도 마련하지 못하는 등 여러 한계를 지녔다.[8] 심지어 퇴임 시 대통령의 상징인 의자를 포함한 모든 집기를 가져가 버렸고, 이는 끝내 회수되지 못했다.[8]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리바다비아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특히 그의 노골적인 친영 성향과 영국 상품의 대규모 수입을 용인한 느슨한 관세 정책은 당시 취약했던 아르헨티나 경제에 부담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영국 배링 브라더스로부터 빌린 차관은 아르헨티나 외채 문제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9]

대한민국의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리바다비아의 중앙집권적 통치 방식과 친외세 정책이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6. 역대 선거 결과

wikitext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826년 선거아르헨티나의 대통령1대통일당92.11%35표1위
아르헨티나 대통령기


참조

[1] 논문 La negritud. Pasado y presente en Argentina https://www.revistas[...] Universidad Nacional de México 2022-12-06
[2] 뉴스 "El sur negro", crónicas de un tema silenciado https://www.telam.co[...] 2022-12-06
[3] 논문 Mapping Constructions of Blackness in Argentina https://www.redalyc.[...] 2023-09-21
[4] 논문 América Latina como una sociedad de colonización blanca http://bibliotecavir[...] 2023-09-21
[5] 논문 Argentina y negritud: desde la otredad radicalizada hacia discursos más igualitarios https://www.redalyc.[...] 2023-09-21
[6] 문서 Luna
[7] 문서 Luna
[8] 문서 Mendelevich
[9] 문서 Mendele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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