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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인 용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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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탈루냐인 용병대는 13세기 레콩키스타 이후 등장한 알모가바르를 주축으로 결성된 용병 부대이다. 1302년 이후 비잔틴 제국에 고용되어 "카탈루냐 대군"으로 불렸으며,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제노바 공화국과 갈등을 겪었다. 아나톨리아와 트라키아에서 용병 활동을 펼치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로제 드 플로르 암살 이후 비잔틴인과의 갈등으로 인해 트라키아를 약탈했다. 이후 남부 그리스로 이동하여 아테네 공국 등을 건설했으나, 내부 분열과 나바라 용병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1456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네오파트라스 공국이 정복될 때까지 유지되다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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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인 용병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몬 문타네르 연대기
라몬 문타네르의 연대기 원고
존속 기간1302년 - 1390년
국가비잔티움 제국
유형자유 용병대
지휘부
주요 지휘관루게로 다 피오레
관련 정보
관련 용병대자유용병대
관련 전투퀴지코스 (1303년)
아프로스 (1305년)
할뮈로스 (1311년)

2. 기원

레콩키스타의 군사적 요구로 인해 13세기 이베리아 반도에서 알모가바르라고 불리는 정예 경보병이 나타났다. 알모가바르는 주로 아라곤 왕관령의 지중해 사업에서 활약했는데, 특히 시칠리아 만종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302년 칼타벨로타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알모가바르는 고용 기회를 잃게 되었다.

이후 아라곤의 하이메 2세와 시칠리아의 페데리코 3세는 알모가바르를 용병으로 고용하여 비잔틴 제국의 군대에 합류시켰다. 이 용병대는 "카탈루냐 대군"으로 불렸으며, 시칠리아 재무부는 이들을 "프랑크인"이라고 칭했다.

3. 콘스탄티노플 도착

1303년 1월, 카탈루냐 대군은 8,000여 명의 병력을 수송하는 36척의 배를 이끌고 이탈리아의 메시나를 출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당시 비잔틴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용병대 사령관 로제 드 플로르와 공주 마리아 아사니나의 결혼을 주선하고 그를 메가스 두크스(제국군 사령관)로 임명했다. 카탈루냐 군대의 도착은 비잔틴 제국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제노바 공화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1303년 10월, 로제 드 플로르가 이끄는 용병대는 키지쿠스 인근의 아르타케 곶에 상륙하여 카라시드 투르크 군과 전투를 벌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알모가바르'로 불린 이 용병들은 아르타케 곶에 있던 오구즈 투르크족의 야영지를 기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로제 드 플로르는 겨울을 아르타케 곶에서 보내기로 결정한 후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하여 황제에게 전투에 대한 보수를 요구하고 다음 작전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키지쿠스 지역은 알모가바르들의 약탈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다.

1304년 5월 초, 로제 드 플로르는 6,000명의 알모가바르와 1,000명의 알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 포위를 풀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다. 알모가바르들은 비잔틴 도시 아키라우스에 도착하여 카이코스 강 계곡을 따라 내려가 게르메에 도착했다. 게르메에 있던 투르크족은 도망치려 했지만, 후위대는 로제 드 플로르의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로제 드 플로르는 게르메 전투에서 승리한 후, 킬리아라와 티아티라를 거쳐 헤르모스강 계곡으로 진입하여 아울락스에서 투르크 군대와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로제 드 플로르는 필라델피아로 개선하여 입성했고,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투르크에게 넘어간 인근 요새들을 정복하며 필라델피아의 방어를 강화했다. 쿨라와 푸르네스 요새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처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로제 데 플로르는 지휘하는 카탈루냐 용병대는 1303년 터키 해안 지방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마그네시아를 점령하여 그곳을 본부로 삼았다. 로제 데 플로르는 아나톨리아 전체의 총독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이는 노스토고스 두카스 행정관과 마그네시아 지사 드메트리오스 아탈리오타 사이의 적대감을 불렀다.

1304년, 로제 드 플로르가 이끄는 카탈루냐 용병대는 니프에 도착하여 티레 주민들의 지원 요청을 받았다. 투르크 군대가 티레를 공격하고 있었고, 용병대는 즉시 도시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투르크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알레의 코르베란이 이끄는 군대가 도시에서 뛰쳐나와 투르크인들을 공격했지만, 코르베란은 전투 중 사망했다.

한편, 티레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에 베르나트 데 로카포르트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카탈루냐 용병대에 합류했다. 로제 드 플로르는 베르나트를 용병대의 새로운 세네찰로 임명하고, 그의 딸을 결혼 상대로 주었다.

아니아가 아이딘 토후국의 생존 병력이 재집결한 장소가 되자, 알모가바르들은 즉시 돌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지휘관들은 동부 지방으로 돌아가 아나톨리아 내륙에서 터키군과의 대규모 대결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1304년 7월, 카탈루냐 용병대는 카리아와 리카오니아 지역을 행군하여 킬리키아 관문에 도착했다. 용병대는 키비스트라에서 대규모의 투르크군과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로제 드 플로르는 전장을 조사하고 자신의 승리의 규모에 놀랐다.

4. 아나톨리아 원정

바페우스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황제는 로제 드 플로르에게 아나톨리아 전선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1304년 5월 초, 로제 드 플로르는 6,000명의 알모가바르와 1,000명의 알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 포위를 풀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다. 알모가바르들은 비잔틴 도시 아키라우스에 도착하여 카이코스 강 계곡을 따라 내려가 게르메에 도착했다. 게르메에 있던 투르크족은 도망치려 했지만, 후위대는 로제 드 플로르의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게르메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카탈루냐인 용병대는 킬리아라와 티아티라를 거쳐 헤르모스강 계곡으로 진입했다. 로제 드 플로르는 필라델피아 포위를 풀기 위해 나섰고, 아울락스에서 투르크 군대와 마주쳐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카탈루냐 용병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 이후 드 플로르는 필라델피아로 개선하여 입성했고,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투르크에게 넘어간 인근 요새들을 정복하며 필라델피아의 방어를 강화했다. 쿨라와 푸르네스 요새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처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로제 데 플로르는 지휘하는 카탈루냐 용병대는 1303년 터키 해안 지방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마그네시아를 점령하여 그곳을 본부로 삼았다. 로제 데 플로르는 아나톨리아 전체의 총독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이는 노스토고스 두카스 행정관과 마그네시아 지사 드메트리오스 아탈리오타 사이의 적대감을 불렀다.

로제 드 플로르가 이끄는 카탈루냐 용병대는 1304년 니프에 도착하여 티레의 주민들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다. 투르크 군대가 티레를 공격하고 있었고, 용병대는 즉시 도시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투르크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알레의 코르베란이 이끄는 군대가 도시에서 뛰쳐나와 투르크인들을 공격했지만, 코르베란은 전투 중 사망했다.

티레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 베르나트 데 로카포르트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카탈루냐 용병대에 합류했다. 로제 드 플로르는 베르나트를 용병대의 새로운 세네찰로 임명하고, 그의 딸을 결혼 상대로 주었다.

아니아가 아이딘 토후국의 생존 병력이 재집결한 장소가 되자, 알모가바르들은 즉시 돌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지휘관들은 동부 지방으로 돌아가 아나톨리아 내륙에서 터키군과의 대규모 대결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1304년 7월, 카탈루냐 용병대는 카리아와 리카오니아 지역을 행군하여 킬리키아 관문에 도착했다. 용병대는 키비스트라에서 대규모의 투르크군과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로제 드 플로르는 전장을 조사하고 자신의 승리의 규모에 놀랐다.

4. 1. 키지쿠스 전투 (1303)

1303년 10월, 로제 드 플로르가 이끄는 용병대는 키지쿠스 인근의 아르타케 곶에 상륙했다. 이곳에서 용병대는 카라시드 투르크 군과 맞붙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알모가바르'로 불린 이 용병들은 아르타케 곶에 있던 오구즈 투르크족의 야영지를 기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로제 드 플로르는 겨울을 아르타케 곶에서 보내기로 결정한 후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하여 황제에게 전투에 대한 보수를 요구하고 다음 작전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키지쿠스 지역은 알모가바르들의 약탈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다.

4. 2. 게르메 전투

1304년 5월 초, 로제 드 플로르는 6,000명의 알모가바르와 1,000명의 알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 포위를 풀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다. 알모가바르들은 비잔틴 도시 아키라우스에 도착하여 카이코스 강 계곡을 따라 내려가 게르메에 도착했다. 게르메에 있던 투르크족은 도망치려 했지만, 후위대는 로제 드 플로르의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4. 3. 아울락스 전투 및 필라델피아 해방

게르메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카탈루냐인 용병대는 킬리아라와 티아티라를 거쳐 헤르모스강 계곡으로 진입했다. 로제 드 플로르는 필라델피아 포위를 풀기 위해 나섰고, 아울락스에서 투르크 군대와 마주쳐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카탈루냐 용병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 이후 드 플로르는 필라델피아로 개선하여 입성했고,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투르크에게 넘어간 인근 요새들을 정복하며 필라델피아의 방어를 강화했다. 쿨라와 푸르네스 요새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처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4. 4. 마그네시아 점령

로제 데 플로르는 지휘하는 카탈루냐 용병대는 1303년 터키 해안 지방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마그네시아를 점령하여 그곳을 본부로 삼았다. 로제 데 플로르는 아나톨리아 전체의 총독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이는 노스토고스 두카스 행정관과 마그네시아 지사 드메트리오스 아탈리오타 사이의 적대감을 불렀다.

4. 5. 티레 전투

로제 드 플로르가 이끄는 카탈루냐 용병대는 1304년 니프에 도착하여 티레의 주민들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다. 투르크 군대가 티레를 공격하고 있었고, 용병대는 즉시 도시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투르크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알레의 코르베란이 이끄는 군대가 도시에서 뛰쳐나와 투르크인들을 공격했지만, 코르베란은 전투 중 사망했다.

4. 6. 베르나트 데 로카포르트의 도착

티레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 베르나트 데 로카포르트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카탈루냐 용병대에 합류했다. 로제 드 플로르는 베르나트를 용병대의 새로운 세네찰로 임명하고, 그의 딸을 결혼 상대로 주었다.

4. 7. 아니아 전투

아니아가 아이딘 토후국의 생존 병력이 재집결한 장소가 되자, 알모가바르들은 즉시 돌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지휘관들은 동부 지방으로 돌아가 아나톨리아 내륙에서 터키군과의 대규모 대결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4. 8. 키비스트라 전투

1304년 7월, 카탈루냐 용병대는 카리아와 리카오니아 지역을 행군하여 킬리키아 관문에 도착했다. 용병대는 키비스트라에서 대규모의 투르크군과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로제 드 플로르는 전장을 조사하고 자신의 승리의 규모에 놀랐다.

5. 드 플로르의 암살과 카탈루냐의 복수

튀르크족과의 승리 이후, 용병대 내의 규율 부재는 위험으로 간주되었다. 1305년 4월 30일, 비잔틴 제국 황제의 아들은 알라니족 용병들에게 로제 드 플로르를 암살하고 카탈루냐인 용병대를 전멸시키라고 명령했다. 로제 드 플로르가 암살된 후,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인들은 카탈루냐인들을 공격하여 다수를 살해했다.

비잔틴 제국은 갈리폴리를 포위했고, 카탈루냐 용병대의 새로운 지도자인 베렝게르 데 엔텐차는 시칠리아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엔텐차는 콘스탄티노플 기습을 계획하고 먼저 마르마라 해의 섬들을 점령하여 약탈한 후 레크레아로 향했다. 갈리폴리에 남겨진 소규모 병력은 비잔틴 군대에 맞서 승리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트라키아로 진군하여 아프로스 근처에서 황제의 아들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 황자 휘하의 비잔틴 군대와 마주쳤다. 카탈루냐 군대는 비잔틴 군대에 승리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비잔틴의 반격을 대비하여 무기를 든 채 잠을 잤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1307년부터 1309년까지 2년 동안 트라키아 지역을 약탈했다.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카탈루냐 용병대의 폭력은 트라키아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페란 에이시메니스 다르노스는 용병대의 도움을 받아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카탈루냐 용병대의 트라키아 지배는 비잔틴 제국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하에무스 산 인근에 거주하며 로제 드 플로르를 살해한 마가세타스 부족과의 대결을 결정했다. 카탈루냐 용병대의 기병대는 매우 우수했고, 보병대 역시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적을 쉽게 압도했고, 마가세타스 부족의 장군 그레고리오를 살해했다.

5. 1. 마그네시아 포위

마그네시아에 도착한 카탈루냐 용병대는 도시 주민들이 주둔군을 참수하고 보물을 강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로제 데 플로르는 즉시 도시를 포위했지만, 안드로니코스 2세의 명령에 따라 포위는 곧 해제되었다.

5. 2. 로제 드 플로르의 암살과 아드리아노폴리스 학살

튀르크족과의 승리 이후, 이방인 군대의 규율 부족과 특성은 점점 더 커지는 위험으로 간주되었다. 1305년 4월 30일, 비잔틴 제국의 황제의 아들은 용병 알라니족에게 로제 드 플로르를 암살하고 카탈루냐인 용병대를 전멸시키라고 명령했다. 로제 드 플로르의 암살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현지 비잔틴인들은 카탈루냐인에게 들고 일어나 그들 중 다수를 살해했다.

5. 3. 갈리폴리 포위

비잔틴 제국은 갈리폴리를 포위했고, 카탈루냐 용병대의 새로운 지도자인 베렝게르 데 엔텐차는 시칠리아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엔텐차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기습을 계획하고 먼저 마르마라 해의 섬들을 점령하여 약탈한 후 레크레아로 향했다. 갈리폴리에 남겨진 소규모 병력은 비잔틴 군대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

5. 4. 아프로스 전투

카탈루냐 용병대는 트라키아로 진군하여 아프로스 근처에서 황제의 아들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 황자 휘하의 비잔틴 군대와 마주쳤다. 카탈루냐 군대는 비잔틴 군대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비잔틴의 반격을 대비하여 무기를 든 채 잠을 잤다.

5. 5. 트라키아 지배

카탈루냐 용병대는 1307년부터 1309년까지 2년 동안 트라키아 지역을 약탈했다. 그들은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카탈루냐 용병대의 폭력은 트라키아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페란 에이시메니스 다르노스는 용병대의 도움을 받아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카탈루냐 용병대의 트라키아 지배는 비잔틴 제국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5. 6. 하에무스 산 전투

하에무스 산 인근에 거주하며 로제 드 플로르를 살해한 마가세타스 부족과의 대결을 카탈루냐 용병대는 결정했다. 카탈루냐 용병대의 기병대는 매우 우수했고, 보병대 역시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적을 쉽게 압도했고, 마가세타스 부족의 장군 그레고리오를 살해했다.

6. 내부 갈등과 용병대의 종말

1308년, 카탈루냐 용병대는 갈리폴리 반도의 자원 고갈로 인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토스 산 수도원을 포함한 남부 그리스 지역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1310년에는 용병대의 새로운 지도자 로제 데스라는 아테네 공작 발터 5세에게 용병 서비스를 제공했으나, 공작이 용역에 대한 합의된 금액을 지불하지 않자 전쟁을 선포했다. 1311년 3월 15일, 용병대는 할미로스 전투에서 발터 5세와 그의 기사단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후 용병대는 아테네 공국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테베와 테살리아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하여 테살리아를 네오파트라스 공국으로 만들었다. 1312년, 그들은 아라곤 왕국시칠리아 왕위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성 조지의 머리를 새긴 새로운 인장을 채택했다. 1388년부터 1390년까지 두 공국은 아라곤 왕국의 봉신으로서 대 카탈루냐 용병대의 수중에 있었으나, 나바라 용병대에게 패배했다. 이후 네오파트라스 공국은 1456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카탈루냐 용병대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무렵 카탈루냐 용병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6. 1. 내부 분열

시칠리아의 왕 페데리코 3세는 왕세자 마요르카의 페르난도를 카탈루냐 용병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베르나트 데 로카포르트는 이에 반발하며 내분이 발생했다. 이 갈등은 결국 페란과 왕세자의 용병대 이탈, 그리고 엔텐사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후 베르나트 데 로카포르트가 카탈루냐 용병대의 새로운 수장이 되었다.

6. 2. 남부 그리스로 이동

1308년, 카탈루냐 용병대는 갈리폴리 반도의 자원 고갈로 인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남부 그리스 지역으로 향했고, 아토스 산 수도원을 포함한 여러 지역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6. 3. 할미로스 전투

1310년, 카탈루냐인 용병대의 새로운 지도자 로제 데스라는 아테네 공작 발터 5세에게 용병 서비스를 제공했다. 공작은 용역에 대해 합의된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에 용병대는 공작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1311년 3월 15일, 용병대는 할미로스 전투에서 발터 5세와 그의 기사단을 맞이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6. 4. 아테네 및 네오파트라스 공국

카탈루냐 용병대는 1311년 아테네 공국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테베와 테살리아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하여 테살리아를 네오파트라스 공국으로 만들었다. 1312년, 그들은 아라곤 왕국시칠리아 왕위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성 조지의 머리를 새긴 새로운 인장을 채택했다. 1388년부터 1390년까지 두 공국은 아라곤 왕국의 봉신으로서 대 카탈루냐 용병대의 수중에 있었지만, 나바라 용병대에게 패배했다. 이후 네오파트라스 공국은 1456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카탈루냐 용병대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무렵 카탈루냐 용병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참조

[1] 서적 Los Almogavares. Desde sus origenes a su disgregación Filá Almogávares de Alcoy
[2] 서적 Diplomatari de l'Orient català (1301–1409): col·lecció de documents per a la història de l'expedició catalana a Orient i dels ducats d'Atenes i Neopàtria https://books.google[...] Institut d'Estudis Catalans
[3] 웹사이트 Muntaner's Chronicle-p.435, L.Goodenough-Hakluyt-London-1921 http://www.yorku.ca/[...] 201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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