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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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1422년 이탈리아의 구비오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우르비노 공작이 되었다. 그는 용병 대장으로 활동하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고, 피렌체, 밀라노 등 여러 도시의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또한,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여 '이탈리아의 빛'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우르비노 궁전을 건축하고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했다. 그는 1474년 우르비노 공작이 되었으며, 1482년 페라라 전쟁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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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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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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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우르비노 공작 |
통치 기간 | 1444년 7월 22일 – 1482년 9월 10일 |
선임자 | 오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 |
후임자 |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
출생일 | 1422년 6월 7일 |
출생지 | 구비오, 페트로이아 성, 교황령 |
사망일 | 1482년 9월 10일 |
사망지 | 페라라, 페라라 공국 |
배우자 | 젠틸레 브란칼레오니(1437년 결혼, 1457년 이혼) 바티스타 스포르차(1460년 결혼, 1472년 사망) |
아버지 |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 또는 베르나르디노 우발디니 델라 카르다 |
가문 | 몬테펠트로 가문 |
자녀 | 코스탄차 디 몬테펠트로 (1460년 12월 – 1461년 2월) 조반나 디 몬테펠트로(1462년–1514년) 이사베타 디 몬테펠트로(1464년경 – 1521년) 코스탄차 디 몬테펠트로 (1466년–1518년) 비올란타 디 몬테펠트로 아녜세 디 몬테펠트로(1470년–1522년)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1472년–1508년) |
명예 칭호 | KG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Federico da Montefeltro |
2. 생애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1422년 구비오의 페트로이아 성에서 스폴레토의 공작이자 우르비노, 구비오, 카스텔두란테의 군주인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1] 2년 뒤,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자신의 조카딸 카테리나 콜론나를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아내로 인정하면서, 페데리코는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받게 되었다.[1] 그러나 페데리코가 귀단토니오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는 교황 피우스 2세를 포함하여 페데리코 생전에 여러 해설가들에 의해 기록되었다.[1]
1433년 '페라라 평화 조약'(롬바르디아 전쟁을 보라)의 결과, 그는 볼모로 베네치아와 만토바에서 거주했다.[8] 베네치아 시대에는 총독 프란체스코 포스카리의 지배하에 비토리노 다 펠트레의 학교에서 광범위한 교양을 쌓았다.[8] 1437년,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고, 같은 해에 구비오에서 젠틸레 브란칼레오니(Gentile Brancaleoni)와 혼인 하였다.
16세 나이에 그는 니콜로 피치니노 하에서 콘도티에로로서 경력을 시작했다.[8] 1438년, 밀라노와 계약을 맺은 용병 대장 니콜로 피치니노(Niccolò Piccinino) 휘하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8] 1441년에 성 레오 성(castle of St. Leo)을 정복한 사건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그는 남은 생에를 이 성에서 보냈다. 피치니노와 결별한 이후, 그는 페사로(Pesaro)로 가, 마르케에서 리미니의 군주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를 상대로 방어전을 펼쳤다. 1439년, 이웃 나라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가 아버지의 영토를 공격해왔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전쟁에 참가했다. 이후로 시지스몬도와는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를 맺게 된다.[8]
1444년 7월 22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우르비노 공작이 된 그의 배다른 형제 오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가 밝혀지지는 않은 (아마도 페데리코가 개입했으리라 추정되는) 음모 속에서 암살되었고, 그 뒤에 우르비노는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경제적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지만, 페데리코는 콘도티에로서 전쟁을 벌였다. 그의 첫 용병계약은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였으며, 당시 페데리코는 300명의 기사들을 거느린 콘도티에로 중 한 명으로서, 부하들에게 충성심을 갖게 한다는 평판이 있었다.[13][2] 절대로 무보수로 싸운적이 없는 페데리코는 스포르차 가문과 13,000 플로린에 계약한다.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를 분노하게 하던 포솜브로네를 그의 소유로 받는 조건에 스포르차의 페사로 통치를 위해 이동을 하게 되었다. 페데리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르케에서 스포르차 가문은 다음 해에 지배권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스포르차 가문이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떠날때, 시지스몬도는 포솜브로네에서 폭동을 일으켰는데, 페데리코는 3일만에 이것을 진압한다.
피렌체에서 6년을 일한 뒤, 페데리코는 당시 밀라노의 공작 가문이던 스포르차 가문에 고용된다. 하지만 그는 마상대회에서의 부상으로 오른쪽 눈을 잃으면서, 임무 수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8] 그는 남은 생 동안 어마어마하고 흉측한 상처를 오늘쪽 얼굴에 지니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초상화를 그릴때는 "좋은"면, 곧 왼쪽 얼굴만을 그리게 되었다. 그는 이 부상으로 스포르차 하에서 지위를 얻는데 이익을 얻었다. 그 때문에, 1451년 10월에 페데리코는 대신 나폴리의 군주인 아라곤의 알폰소 5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피렌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오른쪽 눈을 잃은 후, 음모에 익숙하고 《군주론》을 쓴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 인상을 받은 지도자 중 하나인 페데리코는 그의 콧대(그 사건으로 인해 다쳤던)를 제거하는 외과 수술을 하였다. 이 수술로 그의 시야가 현저하게 개선되었고, 암살 시도에 덜 취약하게 해주었으며, 야전 사령관으로서 그의 장점을 회복시켜주어, 그후 그의 성공적인 경력을 할 수 있게 하였다.
1453년에 나폴리 군대가 말라리아로 타격을 입었고, 페데리코 자신도 그의 건강한 눈을 잃을 뻔 하였다. 다음 해에 로디 조약으로 그의 군사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보일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1458년에 알폰소 5세와 그의 총애를 받던 사생아 부온콘테(Buonconte)가 세상을 뜨면서, 페데리코의 분위기를 일으켜 주지 못 하였다. 그의 운은 페데리코를 문화인이라며 호감을 지니던 교황 비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그를 신성 로마 교회의 곤팔로니에레로 선언하면서 회복되었다. 나폴리 왕국에서 일부 주목할만한 업적을 거둔 후, 그는 말라테스타를 상대로 마르케에서 싸웠고, 세니갈리아 인근 체사노 강(1462년)에서 철저하게 그를 격퇴시켰다. 다음 해 그는 파노와 세니갈리아를 함락시켰고 시지스몬도 판돌포를 포로로 붙잡았다. 교황은 정복한 영토의 사제로 그를 임명하였다.
1464년, 신임 교황 교황 바오로 2세는 교황이 지배하던 라치오 북부 지역을 점거한 안구일라라 가문을 몰아내기 위해 페데리코를 부른다. 다음 해, 그는 로마냐의 체세나, 베르티노로를 함락시킨다. 1466년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사망하자, 페데리코는 그의 동생 갈레아초 스포르차를 도왔고, 또한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1467년 몰리넬라 전투에 참여했다.
1467년 몰리넬라 전투에 참여했는데, 이 전투는 노령의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가 전장에 나선 마지막이자, 가장 기사도적인 예의범절을 갖춘 두 용병 장군의 대결로 유명하다.[8] 페데리코는 베네치아에 대한 이탈리아 연합군 사령관으로 출전했다.[8] 나중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이 전투를 용병 전쟁의 기만성을 조롱하기 위한 전형적인 예로 제시했지만―양 용병 군은 수 시간 동안 서로 싸웠지만 전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정보이다.[8] 실제로 양측 모두 수백 명의 전사자가 있었고, 페데리코 자신도 거의 그중 한 명이 될 뻔했다.[8] 덧붙여 이 전쟁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피에로 디 코지모 데 메디치 시대에 반메디치파가 페라라와 손을 잡은 것에서 시작된 전쟁이다.[9]
1469년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가 사망하자, 교황 바오로 2세는 리미니를 차지하기 위해 페데리코를 보냈으나, 리미니에서 교황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게 되어 자신의 본진인 우르비노 역시도 위협 받을 것을 우려하여 리미니를 점거한다. 1469년 8월 30일에 교황의 군대를 격퇴시킨 후, 그는 시지스몬도의 아들 로베르토 말라테스타에게 리미니를 양도한다.
이 사태는 페데리코의 딸 조반나(Giovanna)와 결혼한 자신의 총애하던 조카 조반니 델라 로베레를 둔 교황 식스토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해결되었고, 1474년에 페데리코를 공작으로 임명하였으며, 그의 또 다른 딸 엘리사베타(Elisabetta)를 로베르토 말라테스타와 결혼시켰다.
1472년, 전년도 볼테라 폭동 사건(명반(明礬)의 이권을 피렌체가 얻기 위해 로렌초 데 메디치가 대량의 처벌을 한 사건) 진압을 위해 페데리코 몬테펠트로가 군사 사령관을 맡았다.[10]
1478년, 그는 파치 음모에 연루되었고, 음모가 실패한 후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영토를 공격했다.[3]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메디치 가문 편에서 용병 활동을 했지만 식스토 4세 등의 사주와 몬테펠트로 나름의 주장(피렌체의 개입이 교황령을 방해하고 있다[11])이 있어 참전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교황 측에 서는 일이 없었다.
1481년, 로렌초의 피렌체와 다시 우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25살의 나이에 일곱 번째 아이를 낳고 회복되지 못한 그의 사랑받는 둘째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엘리사베타 말라테스타와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의 딸)가 사망한 후, 페데리코는 대부분의 시간을 궁전에서 보냈다. 1482년에 그는 에르콜레 1세 데스테가 베네치아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에 그의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왔지만, 고열로 인해 쓰러져 9월 페라라에서 사망한다. 말라리아가 유행하여 부하들을 버려둘 수 없어 자신도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8]
페데리코의 아들 구이도발도는 만토바의 군주인 페데리코 1세 곤차가의 뛰어나고 학식있는 딸인 엘리사베타 곤차가와 결혼하였다. 1508년, 구이도발도의 사망으로 우르비노의 공작직은 교황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에게 넘어간다. 구이발도가 후손이 없이 죽자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우르비노 공작을 이어 받았다.[15]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1422년 구비오의 페트로이아 성에서 스폴레토의 공작이자 우르비노, 구비오, 카스텔두란테의 군주인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1] 2년 뒤,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자신의 조카딸 카테리나 콜론나를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아내로 인정하면서, 페데리코는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받게 되었다.[1] 그러나 페데리코가 귀단토니오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는 교황 피우스 2세를 포함하여 페데리코 생전에 여러 해설가들에 의해 기록되었다.[1]1433년 '페라라 평화 조약'(롬바르디아 전쟁을 보라)의 결과, 그는 볼모로 베네치아와 만토바에서 거주했다.[8] 베네치아 시대에는 총독 프란체스코 포스카리의 지배하에 비토리노 다 펠트레(Vittorino da Feltre)의 학교에서 광범위한 교양을 쌓았다.[8] 1437년,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고, 같은 해에 구비오에서 젠틸레 브란칼레오니(Gentile Brancaleoni)와 혼인 하였다.
16세 나이에 그는 니콜로 피치니노 하에서 콘도티에로로서 경력을 시작했다.[8] 1438년, 밀라노와 계약을 맺은 용병 대장 니콜로 피치니노(Niccolò Piccinino) 휘하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8] 1441년에 성 레오 성(castle of St. Leo)을 정복한 사건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그는 남은 생에를 이 성에서 보냈다. 피치니노와 결별한 이후, 그는 페사로(Pesaro)로 가, 마르케에서 리미니의 군주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를 상대로 방어전을 펼쳤다.
1444년 7월 22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우르비노 공작이 된 그의 배다른 형제 오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가 밝혀지지는 않은 (아마도 페데리코가 개입했으리라 추정되는) 음모 속에서 암살되었고, 그 뒤에 우르비노는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2] 경제적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지만, 페데리코는 콘도티에로서 전쟁을 벌였다. 그의 첫 용병계약은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였으며, 당시 페데리코는 300명의 기사들을 거느린 콘도티에로 중 한 명으로서, 부하들에게 충성심을 갖게 한다는 평판이 있었다.[2]
2. 2. 콘도티에로로서의 경력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1422년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1] 2년 후 교황 마르티노 5세에 의해 적자로 인정받았다.[1] 1433년 롬바르디아 전쟁의 여파로 베네치아에 인질로 보내졌고, 프란체스코 포스카리의 지배하에 비토리노 다 펠트레의 학교에서 교육받았다.[8]1438년 니콜로 피치니노 휘하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고, 1439년 이웃 나라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의 공격에 맞서 고향을 지켰다.[8] 1444년 이복형 오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가 암살된 후 우르비노를 장악했다.[2]
페데리코는 혼란스러운 재정 상황 속에서 콘도티에로로서 전쟁을 계속했다.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 첫 계약을 맺고 페사로를 스포르차 가문 통제하에 두었으며, 포솜브로네를 자신의 몫으로 받았다.[2] 그는 부하들에게 충성심을 갖게 한다는 평판이 있었다.[13]
1450년 스포르차 가문에 고용되었으나, 1451년 마상대회에서 오른쪽 눈을 잃는 부상을 입었다.[8] 이후 아라곤의 알폰소 5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피렌체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8] 그는 외과의에게 코의 콧등과 눈꺼풀을 제거하도록 하여 시야를 개선하고 암살 위험을 줄였다.[3]
1453년 로디 조약으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보일 기회를 잃었으나, 1458년 교황 비오 2세가 그를 성 로마 교회의 곤팔로니에레로 임명하면서 운명이 회복되었다.[3] 1462년 체사노 강에서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를 격파하고 파노와 세니갈리아를 점령했다.[3]
1464년 교황 바오로 2세의 부름으로 앙귀야라 가문을 몰아내고, 1465년 로마냐의 체세나와 베르티노로를 점령했다. 1466년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를 도왔고, 1467년 몰리넬라 전투에 참여했다. 1469년 리미니를 점거했으나 로베르토 말라테스타에게 양도했다.[3]
1474년 교황 식스토 4세는 그를 우르비노 공작으로 임명하고, 파치 음모에 연루되기도 하였다.[3], 1481년 로렌초 데 메디치와 다시 우호관계를 맺는다. 1482년 페라라 전쟁에서 에르콜레 1세 데스테 군대를 지휘했으나,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8]
2. 3.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는 스폴레토의 공작이자 우르비노, 구비오, 카스텔두란테의 군주인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사생아로서 구비오의 페트로이아 성에서 태어났다.[1] 2년 뒤,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자신의 조카딸 카테리나 콜론나를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아내로 인정하면서, 페데리코는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받게 되었다.[1]
1433년 '페라라 평화 조약'의 결과, 그는 볼모로 베네치아와 만토바에서 거주했다. 베네치아 시대에는 총독 프란체스코 포스카리의 지배하에 비토리노 다 펠트레의 학교에서 광범위한 교양을 쌓았다.[8] 1437년,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고, 같은 해에 구비오에서 젠틸레 브란칼레오니(Gentile Brancaleoni)와 혼인 하였다.
16세 나이에 그는 니콜로 피치니노 하에서 콘도티에로로서 경력을 시작했다.[8] 1438년, 밀라노와 계약을 맺은 용병 대장 니콜로 피치니노(Niccolò Piccinino) 휘하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8] 1441년에 성 레오 성(castle of St. Leo)을 정복한 사건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그는 남은 생에를 이 성에서 보냈다. 피치니노와 결별한 이후, 그는 페사로(Pesaro)로 가, 마르케에서 리미니의 군주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를 상대로 방어전을 펼쳤다. 1439년, 이웃 나라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가 아버지의 영토를 공격해왔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전쟁에 참가했다. 이후로 시지스몬도와는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를 맺게 된다.[8]
1444년 7월 22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우르비노 공작이 된 그의 배다른 형제 오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가 밝혀지지는 않은 (아마도 페데리코가 개입했으리라 추정되는) 음모 속에서 암살되었고, 그 뒤에 우르비노는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경제적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지만, 페데리코는 콘도티에로서 전쟁을 벌였다. 그의 첫 용병계약은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였으며, 당시 페데리코는 300명의 기사들을 거느린 콘도티에로 중 한 명으로서, 부하들에게 충성심을 갖게 한다는 평판이 있었다.[13][2] 절대로 무보수로 싸운적이 없는 페데리코는 스포르차 가문과 13,000 플로린에 계약한다.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를 분노하게 하던 포솜브로네를 그의 소유로 받는 조건에 스포르차의 페사로 통치를 위해 이동을 하게 되었다. 페데리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르케에서 스포르차 가문은 다음 해에 지배권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스포르차 가문이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떠날때, 시지스몬도는 포솜브로네에서 폭동을 일으켰는데, 페데리코는 3일만에 이것을 진압한다.
피렌체에서 6년을 일한 뒤, 페데리코는 당시 밀라노의 공작 가문이던 스포르차 가문에 고용된다. 하지만 그는 마상대회에서의 부상으로 오른쪽 눈을 잃으면서, 임무 수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8] 그는 남은 생 동안 어마어마하고 흉측한 상처를 오늘쪽 얼굴에 지니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초상화를 그릴때는 "좋은"면, 곧 왼쪽 얼굴만을 그리게 되었다. 그는 이 부상으로 스포르차 하에서 지위를 얻는데 이익을 얻었다. 그 때문에, 1451년 10월에 페데리코는 대신 나폴리의 군주인 아라곤의 알폰소 5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피렌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오른쪽 눈을 잃은 후, 음모에 익숙하고 《군주론》을 쓴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 인상을 받은 지도자 중 하나인 페데리코는 그의 콧대(그 사건으로 인해 다쳤던)를 제거하는 외과 수술을 하였다. 이 수술로 그의 시야가 현저하게 개선되었고, 암살 시도에 덜 취약하게 해주었으며, 야전 사령관으로서 그의 장점을 회복시켜주어, 그후 그의 성공적인 경력을 할 수 있게 하였다.
1453년에 나폴리 군대가 말라리아로 타격을 입었고, 페데리코 자신도 그의 건강한 눈을 잃을 뻔 하였다. 다음 해에 로디 조약으로 그의 군사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보일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1458년에 알폰소 5세와 그의 총애를 받던 사생아 부온콘테(Buonconte)가 세상을 뜨면서, 페데리코의 분위기를 일으켜 주지 못 하였다. 그의 운은 페데리코를 문화인이라며 호감을 지니던 교황 비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그를 신성 로마 교회의 곤팔로니에레로 선언하면서 회복되었다. 나폴리 왕국에서 일부 주목할만한 업적을 거둔 후, 그는 말라테스타를 상대로 마르케에서 싸웠고, 세니갈리아 인근 체사노 강(1462년)에서 철저하게 그를 격퇴시켰다. 다음 해 그는 파노와 세니갈리아를 함락시켰고 시지스몬도 판돌포를 포로로 붙잡았다. 교황은 정복한 영토의 사제로 그를 임명하였다.
1464년, 신임 교황 교황 바오로 2세는 교황이 지배하던 라치오 북부 지역을 점거한 안구일라라 가문을 몰아내기 위해 페데리코를 부른다. 다음 해, 그는 로마냐의 체세나, 베르티노로를 함락시킨다. 1466년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사망하자, 페데리코는 그의 동생 갈레아초 스포르차를 도왔고, 또한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1467년 몰리넬라 전투에 참여했다. 1469년 시지스몬도 판돌포가 사망하자, 바오로 2세는 리미니를 차지하기 위해 그를 보냈으나, 리미니에서 교황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게 되어 자신의 본진인 우르비노 역시도 위협 받을 것을 우려하여 리미니를 점거한다. 1469년 8월 30일에 교황의 군대를 격퇴시킨 후, 그는 시지스몬도의 아들 로베르토 말라테스타에게 리미니를 양도한다.
이 사태는 페데리코의 딸 조반나(Giovanna)와 결혼한 자신의 총애하던 조카 조반니 델라 로베레를 둔 교황 식스토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해결되었고, 1474년에 페데리코를 공작으로 임명하였으며, 그의 또 다른 딸 엘리사베타(Elisabetta)를 로베르토 말라테스타와 결혼시켰다. 당시 그는 그의 옛 후원자들인 피렌체를 상대로 싸웠고, 교황이 그를 몰아내고 교황의 친척인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위해 우르비노를 넘겨주려던 시도도 저지시켜냈다. 1478년에 그는 파치 음모에 연루됐었다.[14]
하지만 25살의 나이에 일곱 번째 아이를 낳고 회복되지 못한 그의 사랑받는 둘째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엘리사베타 말라테스타[Elisabetta Malatesta]와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의 딸)가 사망한 후, 페데리코는 대부분의 시간을 궁전에서 보냈다. 1482년에 그는 에르콜레 1세 데스테가 베네치아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에 그의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왔지만, 고열로 인해 쓰러져 9월 페라라에서 사망한다.
페데리코의 아들 구이도발도는 만토바의 군주인 페데리코 1세 곤차가의 뛰어나고 학식있는 딸인 엘리사베타 곤차가와 결혼하였다. 1508년, 구이도발도의 사망으로 우르비노의 공작직은 교황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에게 넘어간다. 구이발도가 후손이 없이 죽자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우르비노 공작을 이어 받았다.[15]
2. 4. 파치 음모와 말년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1467년 몰리넬라 전투에 참여했는데, 이 전투는 노령의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가 전장에 나선 마지막이자, 가장 기사도적인 예의범절을 갖춘 두 용병 장군의 대결로 유명하다.[8] 페데리코는 베네치아에 대한 이탈리아 연합군 사령관으로 출전했다.[8] 나중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이 전투를 용병 전쟁의 기만성을 조롱하기 위한 전형적인 예로 제시했지만―양 용병 군은 수 시간 동안 서로 싸웠지만 전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정보이다.[8] 실제로 양측 모두 수백 명의 전사자가 있었고, 페데리코 자신도 거의 그중 한 명이 될 뻔했다.[8] 덧붙여 이 전쟁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피에로 디 코지모 데 메디치 시대에 반메디치파가 페라라와 손을 잡은 것에서 시작된 전쟁이다.[9]1469년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가 사망하자, 교황 바오로 2세는 리미니를 차지하기 위해 페데리코를 보냈으나, 리미니에서 교황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게 되어 자신의 본진인 우르비노 역시도 위협 받을 것을 우려하여 리미니를 점거한다. 1469년 8월 30일에 교황의 군대를 격퇴시킨 후, 그는 시지스몬도의 아들 로베르토 말라테스타에게 리미니를 양도한다.
이 사태는 페데리코의 딸 조반나(Giovanna)와 결혼한 자신의 총애하던 조카 조반니 델라 로베레를 둔 교황 식스토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해결되었고, 1474년에 페데리코를 공작으로 임명하였으며, 그의 또 다른 딸 엘리사베타(Elisabetta)를 로베르토 말라테스타와 결혼시켰다.
1472년, 전년도 볼테라 폭동 사건(명반(明礬)의 이권을 피렌체가 얻기 위해 로렌초 데 메디치가 대량의 처벌을 한 사건) 진압을 위해 페데리코 몬테펠트로가 군사 사령관을 맡았다.[10]
1478년, 그는 파치 음모에 연루되었고, 음모가 실패한 후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영토를 공격했다.[3]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메디치 가문 편에서 용병 활동을 했지만 식스토 4세 등의 사주와 몬테펠트로 나름의 주장(피렌체의 개입이 교황령을 방해하고 있다[11])이 있어 참전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교황 측에 서는 일이 없었다.
1481년, 로렌초의 피렌체와 다시 우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25살의 나이에 일곱 번째 아이를 낳고 회복되지 못한 그의 사랑받는 둘째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엘리사베타 말라테스타와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의 딸)가 사망한 후, 페데리코는 대부분의 시간을 궁전에서 보냈다. 1482년에 그는 에르콜레 1세 데스테가 베네치아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에 그의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왔지만, 고열로 인해 쓰러져 9월 페라라에서 사망한다. 말라리아가 유행하여 부하들을 버려둘 수 없어 자신도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8]
페데리코의 아들 구이도발도는 만토바의 군주인 페데리코 1세 곤차가의 뛰어나고 학식있는 딸인 엘리사베타 곤차가와 결혼하였다. 1508년, 구이도발도의 사망으로 우르비노의 공작직은 교황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에게 넘어간다. 구이발도가 후손이 없이 죽자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우르비노 공작을 이어 받았다.[15]
2. 5. 우르비노 궁정과 도서관
"이탈리아의 빛"이라는 별명을 지닌 페데리코는 문화 계몽에 기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었다.[16] 그는 인문주의적 교육 원칙을 통해서, 자신의 소국에 정의와 안정을 주려고 하였다. 그는 바티칸 외부에 있는 최고의 종합 도서관을 짓기 위해서, 그의 스크립토륨에 최고의 복사가들과 편집자들을 고용하였고, 초창기에 교육을 받던 라파엘로 산치오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16] 그는 글작가 크리스토포로 란디노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페데리코는 구비오와 우르비노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 스투디올로(사색 또는 연구를 하던 작은 서재)를 주문하였는데, 두 스투디올로는 마커트리로 장식을 한 트롱프 뢰유로 유명하다. 전자는 여전히 현위치에 있고, 후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소장중이다.[16]
페데리코는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신경썼으며, 그 예로 병사들의 딸들에게 지참금을 주었다.[17][18] 그는 종종 우르비노 거주민들의 행복을 알고 싶어해 상점들이 있는 무장과 호위 없이 우르비노의 거리를 산책했었다. 옛 그리스에서 정의했던 것처럼 우르비노의 남성들인, 모든 "시민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평등하였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고전학이였으며, 그 중 특히 역사와 철학이였다.[16]
2. 6. 예술가와 학자 후원
"이탈리아의 빛"이라는 별명을 지닌 페데리코는 문화 계몽에 기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었다.[16] 그는 인문주의적 교육 원칙을 통해 자신의 소국에 정의와 안정을 주려 하였다. 그는 바티칸 외부에 있는 최고의 종합 도서관을 짓기 위해, 그의 스크립토륨에 최고의 복사가들과 편집자들을 고용하였고, 초창기에 교육을 받던 라파엘로 산치오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그는 글작가 크리스토포로 란디노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페데리코는 구비오와 우르비노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 스투디올로(사색 또는 연구를 하던 작은 서재)를 주문하였는데, 두 스투디올로는 마커트리로 장식을 한 트롱프 뢰유로 유명하다. 전자는 여전히 현위치에 있고, 후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소장중이다.
페데리코는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신경썼으며, 그 예로 병사들의 딸들에게 지참금을 주었다. 그는 종종 우르비노 거주민들의 행복을 알고 싶어해 상점들이 있는 무장과 호위 없이 우르비노의 거리를 산책했었다. 옛 그리스에서 정의했던 것처럼 우르비노의 남성들인, 모든 "시민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평등하였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고전학이었으며, 그 중 특히 역사와 철학이였다.[16]
그의 개인적이고 전문적인 모든 성과물들은 용병 활동을 통해 재원받았다. 병사들의 복지에 대한 헌신으로, 그의 병사들은 대단히 충성깊었고, 놀랍게도 그는 전쟁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17][18]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는 그에게 가터 훈장을 내려주었으며, 그는 페드로 베루게테가 그린 초상화에서 그의 왼쪽 무릎에 가터 훈장을 달고 있다.
2. 7. 스투디올로
"이탈리아의 빛"이라는 별명을 지닌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문화 계몽에 기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었다.[16] 그는 바티칸 외부에 있는 최고의 종합 도서관을 짓기 위해서, 그의 스크립토륨에 최고의 복사가들과 편집자들을 고용하였다.[16] 또한 초창기에 교육을 받던 라파엘로 산치오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고, 글작가 크리스토포로 란디노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다.[16].]]
페데리코는 구비오와 우르비노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 스투디올로(사색 또는 연구를 하던 작은 서재)를 주문하였는데, 두 스투디올로는 마커트리로 장식을 한 트롱프 뢰유로 유명하다. 전자는 여전히 현위치에 있고, 후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소장중이다.
3. 사회적 역할과 유산
"이탈리아의 빛"이라는 별명을 지닌 페데리코는 문화 계몽에 기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었다.[16] 그는 인문주의적 교육 원칙을 통해 자신의 소국에 정의와 안정을 주려고 하였다. 그는 바티칸 외부에 있는 최고의 종합 도서관을 짓기 위해, 그의 스크립토륨에 최고의 복사가들과 편집자들을 고용하였고, 초창기에 교육을 받던 라파엘로 산치오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그는 글작가 크리스토포로 란디노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페데리코는 구비오와 우르비노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 스투디올로(사색 또는 연구를 하던 작은 서재)를 주문하였는데, 두 스투디올로는 마커트리로 장식을 한 트롱프 뢰유로 유명하다. 전자는 여전히 현위치에 있고, 후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소장중이다.
페데리코는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신경썼으며, 그 예로 병사들의 딸들에게 지참금을 주었다.[4] 그는 종종 우르비노 거주민들의 행복을 알고 싶어해 상점들이 있는 무장과 호위 없이 우르비노의 거리를 산책했었다. 옛 그리스에서 정의했던 것처럼 우르비노의 남성들인, 모든 "시민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평등하였다.[16] 그의 학문적 관심은 고전학이었으며, 그 중 특히 역사와 철학이었다.[4][16]
그의 개인적이고 전문적인 모든 성과물들은 용병 활동을 통해 재원받았다. 병사들의 복지에 대한 헌신으로, 그의 병사들은 대단히 충성했고, 그는 전쟁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5][6] 그는 대부분의 군장들을 달고 있었다.[17][18]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는 그에게 가터 훈장을 내려주었으며, 그는 페드로 베루게테가 그린 초상화에서 그의 왼쪽 무릎에 가터 훈장을 달고 있다.[6]
4. 평가
"이탈리아의 빛"이라는 별명을 지닌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문화 계몽에 기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었다.[16] 그는 인문주의적 교육 원칙을 통해 자신의 소국에 정의와 안정을 주려 하였다. 바티칸 외부에 있는 최고의 종합 도서관을 짓기 위해, 그의 스크립토륨에 최고의 복사가들과 편집자들을 고용하였고, 초창기에 교육을 받던 라파엘로 산치오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그는 글작가 크리스토포로 란디노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페데리코는 구비오와 우르비노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 스투디올로(사색 또는 연구를 하던 작은 서재)를 주문하였는데, 두 스투디올로는 마커트리로 장식을 한 트롱프 뢰유로 유명하다. 전자는 여전히 현위치에 있고, 후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소장중이다. .
페데리코는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신경썼으며, 그 예로 병사들의 딸들에게 지참금을 주었다.[17][18] 그는 종종 우르비노 거주민들의 행복을 알고 싶어해 상점들이 있는 무장과 호위 없이 우르비노의 거리를 산책했었다. 옛 그리스에서 정의했던 것처럼 우르비노의 남성들인, 모든 "시민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평등하였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고전학이였으며, 그 중 특히 역사와 철학이였다.[4]
그의 개인적이고 전문적인 모든 성과물들은 용병 활동을 통해 재원받았다. 병사들의 복지에 대한 헌신으로, 그의 병사들은 대단히 충성스러웠고, 놀랍게도 그는 전쟁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군장들을 달고 있었다.[5][6]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는 그에게 가터 훈장을 내려주었으며, 그는 페드로 베루게테가 그린 초상화에서 그의 왼쪽 무릎에 가터 훈장을 달고 있다.
페데리코는 1444년 형인 오단토니오 2세의 죽음으로 우르비노 공작을 계승했다. 우르비노 자체는 작은 나라이며, 군인으로서 교황령,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등의 용병 대장으로 활약하여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영토 지배에서도 관대하여 빈곤한 자를 돕고 주민의 목소리를 잘 들었기 때문에 모든 주민에게 존경받았다고 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우르비노 공국의 인근 도시 출신으로 활동했지만, 그러한 관계로 페데리코의 장서로 만들어진 도서관 출입을 허락받았다. 또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밑에서 한때 일했던 루카 파치올리도 일하던 시절 허락을 받아 『수마』 집필 당시에도 방문했으며, 그의 아들 귀도발도의 후원을 받았다.[12]
두칼레 궁전(Ducal Palace, Urbino)은 1447년부터 페데리코가 건립한 것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최대 걸작 중 하나라고 일컬어진다."[8] 이는 페데리코 자신이 예술 중에서도 "특히 건축에 열정을 가지고, 건축을 예술의 여왕으로 하고, 지적 및 미적 활동의 정점으로 삼았다. 그 자신 건축학에 정통했고, 이와 관련된 학문, 기하학과 기술에도 정통했다고 한다."[8] 군사적 성채의 요소가 없어 "이탈리아의 군주 중 무방비 궁전을 지은 첫 번째 사람", "근세 최초의 궁전"[8] 이라고도 평가받고 있다.
5. 가족 관계
페데리고는 1437년 메르카텔로 두란테 영주 바르톨로메오 브란카레오니의 딸 젠틸레(1457년 사망)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460년 페자로 백작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의 딸 바티스타 스포르차(1446년 - 1472년)와 재혼하였다. 페데리고의 뒤를 이어 아들 구이도발도가 계승했지만, 그는 병약했고, 1502년 체사레 보르자의 교황군이 침공하자 망명했다. 그 후 만토바에 머물다가 체사레의 몰락 후 우르비노 공으로 복귀했다. 구이도발도의 궁정은 발다사레 카스티글리오네의 『궁정인』의 무대이기도 하다.
바티스타와의 사이에서는 엘리자베타, 조반나, 아그네시나, 코스탄차, 비올란테, 키아라, 구이도발도 등의 자녀를 두었다.
또한, 본콘테, 안토니오, 베르날디노, 젠틸레 등의 서자(庶子)가 있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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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
서적
[3]
서적
The Montefeltro conspiracy: a Renaissance mystery decoded
Doubleday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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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r Dynasties
[5]
강의
The Italian Renaissance, Part 2, Lecture 16
[6]
TV series
Civilisation. A Personal View
[7]
웹사이트
The Ideal City
https://web.archive.[...]
The Walters Art Museum
2012-10-09
[8]
서적
1975
[9]
서적
フィレンツェ―世界の都市と物語
文春文庫
1999-04-01
[10]
서적
メディチ家
講談社現代新書
1999-03-20
[11]
웹사이트
そこそこアレな感じで
http://cesareborgia.[...]
2020-06-15
[12]
학술지
貴重書紹介 ルカ・パチョーリ『算術・幾何・比及び比例全書』
https://hdl.handle.n[...]
明治大学図書館紀要編集委員会
2022-03-11
[13]
서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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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ntefeltro conspiracy: a Renaissance mystery decoded
Doubleday
2008
[15]
기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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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r Dynasties
[17]
강의
The Italian Renaissance, Part 2, Lecture 16
[18]
서적
Civilization
[19]
웹사이트
The Ideal City
https://web.archive.[...]
월터스 미술관
201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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