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모가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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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모가바르는 10세기 알-안달루스에서 약탈과 기습을 하던 사라센 무장 집단을 가리키는 데서 유래하여, 아라곤 왕관의 이슬람 국가 정복에 기여했다. 시칠리아 만종 사건 이후 앙주 가문에 맞서 싸웠으며, 카탈루냐 용병대를 결성하여 동로마 제국을 방어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아테네 공국을 점령하여 아라곤 통치의 기반을 마련했으나, 레콩키스타가 마무리되면서 쇠퇴했다. 알모가바르는 가벼운 무장과 뛰어난 기동성을 활용했으며, 아달리드, 알모카덴, 알모가바르 등의 계급으로 구성되었다. 문화적으로는 발칸 반도와 그리스의 민속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있으며, 스페인 군대와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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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모가바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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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알무가바레스 (Almugávares) 알모가베르스 (Almogàvers) 알모가바레스 (Almogávares) |
어원 | 아랍어 '알-무가위르' (المغاور, al-mughā́wir)에서 유래, "습격자", "약탈자"를 의미 |
역사적 배경 | |
활동 시기 | 중세 시대 |
출신 지역 | 아라곤 왕국 |
주요 활동 지역 | 이베리아 반도 지중해 |
주요 전투 | 해군 전투 육군 전투 |
군사적 특징 | |
주 무기 | 창 칼 단검 |
특징 | 가볍고 빠른 보병 산악전 및 습격에 능함 기동력이 뛰어남 용감하고 잔인한 전사 소규모 전투에 능함 |
갑옷 | 갑옷을 거의 입지 않음 민첩성을 강조 |
조직 | |
구성원 | 평민 출신 농민, 양치기, 산악민 |
지휘관 | 각 부대의 지도자 존재 |
영향 | |
후대 영향 | 다른 군사 조직에 영향 중세 전쟁사에 중요 역할 |
문화적 의미 | |
민속 | 스페인 민속에 등장 |
문학 | 스페인 문학 작품에 자주 등장 용감하고 모험적인 인물로 묘사 |
2. 어원
'알모가바르'라는 명칭은 al-mughāwirar (المغوارar, '약탈자')[6], al-mukhābirar (المخابرar, '소식 전달자'), al-mujāwirar (المجاورar, '순례자' 또는 '성지의 부속물')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오만한' 또는 '거만한'으로 번역되는 형용사 gabarar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7] 알모가바르의 군 계급 명칭 또한 아랍어에서 유래했다.[8]
알모가바르라는 용어는 10세기 알-안달루스 지역에서 약탈과 기습 공격을 하는 소규모 사라센 무장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되었다.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887년에서 955년 사이에 아흐마드 이븐 무하마드 알-라지가 저술한 "아크바르 멀룩 알-안달루스"에 등장한다. 코르도바의 역사가인 그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에브로 계곡에 도착했을 때 사라고사 도시에 알모가바르라고 불리는 부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9]
3. 역사
레콩키스타의 마지막 세기 동안 "알모가바르"라는 단어는 그라나다 국경에서 그라나다 왕국으로부터 무르시아 왕국과 발렌시아 왕국 왕국의 국경 도시들을 공격한 무어족 산적 집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10] 아라곤 사람들은 이러한 전략을 채택하여 사라센 부대처럼 싸웠고, 결국 그들 또한 알모가바르로 불리게 되었다. 1105년에서 1110년경 알폰소 1세 시대에 알모가바르들이 엘 카스테야르 요새를 강화하고 사라고사 정복을 예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침입과 레콩키스타 전쟁으로 인해, 기독교 목자들은 생존을 위해 도적떼를 조직하여 적의 영토로 침투하여 생존에 필요한 것을 구했다. 보통 며칠 동안 지속되는 이러한 약탈에서 알모가바르들은 자급자족하며 야외에서 잠을 잤다. 이들은 대부분 기후가 혹독하고 자원이 부족한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자랐으며,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기독교 왕국이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무슬림 영토와 접경하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계속 채택되었다. 또한, 가톨릭 알모가바르와 함께 싸우는 이슬람 알모가바르의 존재도 기록되어 있다.[12]
알모가바르는 당시 최고의 보병 중 하나로 여겨졌다.[22] 기사도 정신이 이상으로 남아 있던 시대, 기병이 군대의 주력 무기였던 시대에 알모가바르는 지형을 이용하고 야간 전투를 벌이며 항상 갑옷을 착용하지 않고 보병으로 싸워 뛰어난 기동성을 확보했다. 라마르 루유는 알모가바르를 석궁병과 중장갑 기사와 같은 중요성을 지닌 병력으로 평가했다.
국경 침투 작전을 수행할 때 알모가바르는 일반적으로 기습에 의존하여 5명에서 15명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자치적인 부대로 싸웠다. 공개적인 전쟁 시기에는 부대 규모가 더 커져서 한 부대당 20명 또는 30명의 동료가 언급되기도 한다. 매우 드물지만, 일부 알모가바르는 그라나다를 상대로 해적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24]
알모가바르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의 국경 지역의 폭력 속에서 탄생했으며, 종종 국경 긴장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평화로운 삶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사라센과의 국경은 모험가들, 위험을 감수하고 주먹과 적의 영토 약탈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3. 1. 기원과 초기 활동
"알모가바르"라는 용어는 10세기 알-안달루스 지역에서 약탈과 기습 공격을 하는 소규모 사라센 무장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되었다.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887년에서 955년 사이에 아흐마드 이븐 무하마드 알-라지가 저술한 "아크바르 멀룩 알-안달루스"에 등장한다. 코르도바의 역사가인 그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에브로 계곡에 도착했을 때 사라고사 도시에 알모가바르라고 불리는 부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9]
11세기, 아라곤 왕국은 이러한 전략을 채택하고 알모가바르로 알려진 사라센 부대처럼 싸운 최초의 기독교인들이었으며, 결국 그들 또한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105년에서 1110년경 알폰소 1세 시대에 알모가바르들이 엘 카스테야르 요새를 강화하고 사라고사 정복을 예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레콩키스타의 마지막 세기 동안 "알모가바르"라는 단어는 그라나다 국경에서 그라나다 왕국으로부터 무르시아 왕국과 발렌시아 왕국 왕국의 국경 도시들을 공격한 무어족 산적 집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10]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침입과 레콩키스타 전쟁으로 인해, 기독교 목자들은 생존을 위해 도적떼를 조직하여 적의 영토로 침투하여 생존에 필요한 것을 구했다. 보통 며칠 동안 지속되는 이러한 약탈에서 알모가바르들은 자급자족하며 야외에서 잠을 잤다. 이들은 대부분 기후가 혹독하고 자원이 부족한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자랐고, 그들은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기독교 왕국이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무슬림 영토와 접경하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계속 채택되었다. 또한, 가톨릭 알모가바르와 함께 싸우는 이슬람 알모가바르의 존재도 기록되어 있다.[12]
3. 2. 아라곤 왕관에서의 활약
아라곤 왕관(스페인어: Corona de Aragón)의 알모가바르는 주로 아라곤 왕국, 카탈루냐 공국, 발렌시아 왕국 출신으로, 지중해 확장 시대와 카탈루냐 용병대에서 활약하여 명성을 얻었다.
아라곤의 페드로 3세(1276–1285)는 튀니지와 시칠리아 원정에 1만 5천 명의 알모가바르를 이끌었으며, 아라곤 십자군(아라곤 왕관에 대한 십자군) 기간 동안 로제 드 로리아의 지휘 아래 카탈루냐 공국에서 싸웠고, 파니사스 고개 전투(카탈루냐어)에도 참여했다.[30]
카탈루냐인, 아라곤인, 그리고 후대의 발렌시아인 알모가바르들은 아라곤 왕관의 이슬람 국가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년), 마요르카 정복(1229~1232년), 발렌시아 정복(1233~1245년)에 참여했다. 1232년 알모가바르 군대는 아레스와 모렐라의 전략 요충지를 점령하여 발렌시아 정복의 길을 열었다.[30] 1240년에는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알모가바르 부대의 연합군이 카소라 조약에 따라 카스티야에 할당된 비예나를 점령하여 알미스라 조약 체결의 원인이 되었다. 1264년 무르시아에서 무어인의 반란이 일어나자 하메 1세는 오리우엘라에서 "자정에 로르카 출신 알모가바르 두 명이 문을 두드렸다"고 그의 연대기(Llibre dels Fets)에 기록하며, 이들이 로르카에서 무르시아로 향하는 무어인 부대를 경고했다고 전한다.[17]
1282년 3월 30일,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 만종 이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소유권을 두고 앙주의 샤를 1세와 전쟁을 벌였다. 알모가바르는 훈련, 잔혹함, 창을 던지는 힘으로 앙주 군대의 중장기병에 대항하여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기사 대신 말을 공격하여 기병을 무력화시켰고, 땅에 떨어진 기사는 알모가바르에게 쉬운 표적이 되었다.
1284년에서 1285년 사이, 마르티누스 4세는 아라곤 왕관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여 아라곤의 페드로 3세(대왕)에 대항했다. 알모가바르는 페드로 왕이나 로제 드 로리아의 지휘 아래 전투에 참여했다.
로제 드 로리아는 함장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그의 함대는 특수 훈련받은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궁수들을 먼저 사용하고, 노 젓는 알모가바르들은 은폐 상태를 유지했다. 이 알모가바르들은 중무장 기사들보다 훨씬 민첩했다. 로제는 계략을 사용하여 병력 규모를 위장하고, 전투 시작 후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갤리선을 숨겨두기도 했다.
로제는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적인 행동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의 명성은 적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3. 3. 카탈루냐 용병대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en)으로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전투가 끝나자, 로제르 데 플로르(전 템플 기사단 소속)가 이끄는 알모가바르들은 카탈루냐 용병대(en)를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를 섬겼다.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두 왕은 알모가바르가 자국에 실업 상태로 남는 것보다 이 전략을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받아들였다.[31]
1303년부터 1304년까지, 소아시아에서 알모가바르의 원정은 계속된 군사적 승리였다. 그러나 재정난 때문인지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은 알모가바르는 폭력에 의존하며 동로마 국민에게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로제르 데 플로르와 그의 부하들은 1305년 보상에 관한 논의 자리에서 황제의 아들 미카엘에게 암살당했다. 아마도 카탈루냐 용병대를 배제한 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제노바 상인이 사주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31] 이 배신 행위의 결과, 알모가바르의 잔당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를 약탈했다.
카탈루냐 복수는 1305년부터 1307년까지 로저 드 플로르의 살해와 갈리폴리에 주둔 중이던 용병대의 몰살 시도에 대한 복수와 보복으로 동로마 제국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절멸과 체계적인 약탈 전쟁이었다.[31]
3. 4. 아테네 공국 점령
1311년, 알모가바르는 할미로스 전투(en)에서 프랑스의 브리엔 가문이 통치하던 아테네 공국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 공 고티에 5세는 패배했고, 아테네 공국은 멸망했다. 알모가바르는 많은 프랑스 귀족들의 아내와 재산을 나누어 가졌고, 아테네 공국을 아라곤 왕에게 바쳤다.
아테네 공국이 아라곤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알모가바르의 전성기 시절 공적 덕분이었다. 비록 아테네 공국은 이후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스페인 국왕은 '아테네 및 네오파트라스 공작'(Duque de Atenas y Neopatria)이라는 칭호를 유지하고 있다.
3. 5. 카스티야 왕국 및 기타 지역에서의 활동
카스티야 왕국에서 알모가바르는 안달루시아 정복과 그라나다 국경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알폰소 10세 시대의 활동 외에도, 알모가바르들이 알카사르 예배당에서 철야 기도를 올린 후 전투에서 승리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전리품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33]
코르도바 정복 당시, 알모가바르들은 안두하르에 모여 코르도바 도시가 방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235년 12월 23일 밤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무어인으로 변장하여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라 콜로드로 문을 장악했으며, 이후 다른 탑들을 함락시켜 1236년 6월 29일 코르도바가 페르난도 3세에게 항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4]
그라나다 국경에서 알모가바르는 전리품을 노리는 국경 지역 주민과 모험가들로 구성되었으며, 때로는 복수심으로 인해 알모가바르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들은 북아프리카인의 잔혹한 습격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생존자들로, 알모카덴의 지휘 아래 끊임없는 복수심을 불태웠다.[35]
알모가바르는 약탈 외에도 그라나다 산적떼를 기습하거나 국경 감시 및 정보 활동을 수행했다. 이들은 국경 전역에 배치되어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시야가 좋은 산악 지대에서 연기나 불 신호를 통해 경고를 전달했다. 또한 주요 도로와 산길, 강 건널목을 지키며 강도 행위를 경계하고, 에스파르토 말굽 등 독특한 흔적을 통해 그라나다 강도를 추적했다.[35]
알모가바르의 자유 활동은 체결된 평화를 존중하지 않아 그라나다와 외교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특히 발렌시아 알모가바르의 습격은 카스티야 왕관과 마찰을 빚었다.[35]
그라나다 전쟁에서 알모가바르는 그라나다 지역을 잘 알고 전투 방식에 익숙했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오비에도 출신 귀족들의 지휘를 받았다.[36] 디에고 우르타도 데 멘도사는 알모가바르를 적의 땅을 빼앗기 위해 온 시골 사람들의 안내자이자 지도자로 묘사하며, 이들이 야생 동물이나 사람의 발자국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흔적을 해석하는 데 능숙하다고 기록했다.[36]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포르투갈 왕국에 맞서기 위해 알모가바르의 신속한 파견을 요청했다. 또한 무르시아 알모가바르 군대는 가톨릭 군주 초기 통치 시대에 귀족 반대파에 맞서 개입했다.[17]
포르투갈 왕국에서도 알모가바르는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북아프리카 원정에서 활약했으며, 북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국경을 지켰다. 이들의 군사 계급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동료들과 같았으며, 마누엘 1세 왕의 연대기에는 "그들은 알모가바르를 보내어 … 무어인들을 공격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7][39]
3. 6. 쇠퇴
14세기 말, 레콩키스타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알모가바르의 수는 점차 감소했다. 아라곤 알모가바르들은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1296~1304)에서 활약했지만, 주요 확장 전쟁이 끝나고 많은 이들이 페드로 4세의 시칠리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길벨린 또는 카탈루냐 용병대에 가입하여 이탈리아에서 계속 싸웠다.[32] 그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고, 이후 여러 원정에 참여했지만 예전처럼 보병의 주력을 이루지 않고 특수 부대 역할을 수행했다.[32]
이베리아 반도의 대규모 전쟁이 끝나고 그라나다 왕국만이 저항하면서 알모가바르의 수는 더욱 감소했다. 그라나다 국경은 여전히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포로로 잡힌 무어인 대부분이 노예로 전락했고, 가격이 낮아 위험을 감수할 만큼 수익성이 높지 않았다.[40] 또한 평화 시대에는 왕실 관리들의 감시로 노예로 팔기가 어려워졌다.[40]
이러한 상황은 알모가바르가 산악 석궁병(Ballestero de monte)과 머리 사냥꾼으로 변모하거나, 일부는 산적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평화 시대에 불법 행위를 하던 오리우엘라 출신의 일부 알모가바르들은 자국 영토 내의 무어인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어인들을 포로로 잡아 몸값을 요구하거나 노예로 팔았다.[41] 이들은 "콜레라츠(Collerats)"라고 불렸으며, "알모가바르"라는 단어는 "콜레라츠"와 동의어가 될 정도였다.[41]
일부 알모가바르 집단은 이웃 왕국의 기독교 주민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41] 1296년 5월 무르시아에서 기독교 소년과 사라센인을 납치해 무어인 포로로 팔았고, 같은 달 하이메 2세는 알모가바르들이 약탈하여 판 카탈루냐 기사들의 포로를 돌려줄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범죄 행위로 알모가바르들은 큰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4. 특징 및 전술
알모가바르는 주로 보병 강습 부대였으며, 가벼운 무장을 하고 뛰어난 기동성을 활용했다. 이들은 보통 한 쌍의 투창, 짧은 창, 그리고 팔카르도를 휴대했다.[13] 턱수염을 기르고 짧은 옷과 가죽 벨트, 가죽 샌들을 착용했으며, 부싯돌을 휴대하여 전투 전에 무기에 불을 붙여 큰 불꽃을 냈다.[13][14]
베르낫 데스크로는 알모가바르가 산과 숲에 살며 사라센과 싸우고 약탈하며 살아간다고 묘사했다. 이들은 고된 삶을 견디고, 필요하면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풀을 먹을 수 있었다. 지도자들은 지형과 길을 잘 알았고, 가벼운 복장에 좋은 칼, 창, 투창, 가죽 가방을 휴대했다.[15][16]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그라나다 국경의 알모가바르들은 마을에 거주하며 지형에 정통했고, 그라나다 영토를 유린했다.[17]
알모가바르의 기본적인 특징은 평생 전쟁에 헌신하고, 국경 상황에 적응하며, 약탈과 포로를 기반으로 보수를 받고, 검소하며 피로에 강하고, 가벼운 무기와 계층적인 조직을 갖춘 것이었다. 이들은 정찰, 적 괴롭히기, 기습 공격, 수송대 요격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산개하여 싸우는 것을 선호했지만, 위기 시에는 압축된 대형을 형성하여 기병 돌격을 막기도 했다.[26]
알모가바르는 경보병으로 활동했지만, 중기병과 협력할 수 있었고 자율성을 유지했다. 이들은 적의 국경 지역을 습격하여 생존했기 때문에 항상 가벼운 무기를 휴대하고 신속하게 이동했다.[27] 장거리 행군을 통해 지구력, 속도, 검소함을 증명했다.[28]
당시 유럽에서는 갑옷을 입은 중기병이 주력이었으므로, 알모가바르의 전술은 혁신적이었다. 이들은 승마에 서툴렀고 항상 도보로 싸웠다.[29] 창을 던져 갑옷과 방패를 관통하고 말을 부상시켰으며, 적 대형에 진입하여 칼로 말의 발목을 베거나 창으로 찔렀다. 혼전에서는 칼이나 메이스로 말의 배를 가르고 기수를 죽였다.
알모가바르는 원래 피레네 산맥에서 기원하여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카탈루냐에서 용병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갑옷을 착용하지 않고, 고대 로마 보병과 비슷한 무기를 사용했다. 전투에서는 민첩성을 중시하여 투창으로 기수를 낙마시킨 후, 단검으로 취약한 부분을 찔렀다. 전투 전에는 "들어라! 들어라! 철이 깨어난다!"라고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울렸다.
이들은 왕족, 가톨릭교회, 귀족, 지방 자치 단체에 봉사했으며, 동로마 제국에도 고용되었다.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이후 알모가바르는 아라곤 군대의 핵심 부대가 되었다. 이들은 기사 대신 말을 공격하여 기병대와 싸웠고, 기사가 땅에 쓰러지면 쉽게 제압했다.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en) 이후, 로제르 데 플로르가 이끄는 알모가바르들은 카탈루냐 용병대(en)를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과 싸우던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를 섬겼다. 그러나 임금 문제로 불만을 품고 동로마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1305년 로제르 데 플로르와 부하들이 암살당하자, 잔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를 약탈했다.
이후 알모가바르는 아테네 공국으로 진격하여 1310년 할미로스 전투(en)에서 승리하고 공국을 멸망시켰다. 이들은 아테네 공국을 아라곤 왕에게 헌상했다.
그 후에도 알모가바르는 여러 원정에 동원되었지만,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5. 계급
아랍어 '달리드'(dalid, 안내자)에서 유래한 아달리드(Adalid)는 알모가바르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었다.[15][17] 아달리드는 군대를 적절한 경로로 안내하고 위험을 피하며, 은신처, 충분한 물과 땔나무와 목초지를 확보할 수 있는 지형에 대한 지식, 적의 흔적을 추적하는 방법을 알아야 했다. 지혜, 용기, 지능, 충성심이 필요했으며, 원정 준비 및 조직, 약탈에 대한 모든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가졌다. 기사(하급 귀족)와 유사한 지위를 가졌다.
아달리드 임명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 12명의 아달리드 또는 권한 있는 관리들이 모여 후보자가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선서했다.
# 왕이나 관리가 후보자에게 칼과 칼집을 수여했다.
# 후보자는 방패 위에 섰고, 왕이나 대표가 칼을 뽑아 쥐여주었다.
# 후보자는 동쪽을 향해 십자가 모양으로 칼로 공중에 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 “나는, N은, 하나님과 나의 주인이자 왕, 그리고 그의 땅의 이름으로 신앙의 모든 적들에게 도전한다.”
# 후보자는 지구의 다른 주요 방위를 향해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 의식이 끝나고 후보자가 칼을 칼집에 넣자 왕이 말했다.
#: “이제부터 당신은 아달리드입니다.”
처음에는 종신직이었지만, 14세기 말부터 세습직이 되어 하급 귀족 계급에 더 가까워졌다.[18] 아달리드는 말을 탔다. 카스티야 지방에서는 아달리드와 알모카덴 사이의 중간 등급이 기록되어 있다.[19]
아랍어 '알 무카뎀'(al-muqaddem, 지도자)에서 유래한 알모카덴(Almocaden)은 알모가바르 부대의 자치적인 소부대 지휘관으로, 하급 지휘관이었다. 전쟁 지식, 부대 지휘 및 동기 부여 능력, 민첩성, 신속성, 은폐 능력, 공정성을 갖추어야 했다.
알모카덴은 경험이 풍부하고 부대원들로부터 지휘관으로 인정받은 알모가바르였다. 말을 탔을 가능성이 높지만, 항상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20]
알모가바르는 카스티야에서 '옴브레스 데 캄포'(시골 사람들) 또는 '페오네스'(보병)라고도 불렸으며, 계급이 가장 낮고 군대의 대부분을 구성했다. 아달리드가 되려면 기병 알모가바르, 기병 알모가바르가 되려면 알모카덴, 알모카덴이 되려면 알모가바르를 거쳐야 했다.[21]
6. 문화적 유산
알모가바르 부대는 발칸 반도와 그리스 지역 민속과 전설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겼다.[42] 이들이 초래한 파괴는 여러 지역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티카와 보이오티아에서는 "카탈루냐인의 복수가 너에게 떨어지기를"이라는 속담이, 파르나소스 지역에서는 "터키인의 손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카탈루냐인의 손에 넘어가겠다"는 속담이 유행했다.
불가리아에서 "카탈루냐인", "아라곤인", "카탈루냐인의 아들"은 "악한 사람, 무정한 사람, 고문자"를 의미한다. 이반 M. 바조프는 1915년 출판된 시 ''해적''에서 카탈루냐인을 터키인과 함께 불가리아 민족을 억압한 자들로 묘사했다. 알바니아에서는 "카탈루냐인"이 "못생기고 사악한 사람"을 의미하며, 알바니아 민속에서 "카탈루냐인" 또는 "카탈라니"는 외눈박이 괴물로 묘사된다. 이는 키클롭스 폴리페무스를 연상시키는 존재로, 인육을 먹는 야만적인 대장장이로 묘사된다. 무릎이 없어 몸을 굽힐 수 없고 배의 돛대처럼 긴 다리를 가진 그는 데달리아라는 젊은 영웅과 맞선다. 이 전통은 ''다에달루스 데 카탈라니''(다에달루스와 카탈라니)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진다.
알모가바르는 수많은 퍼레이드에 등장하고 여러 허구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 1942년 스페인 영화 라사(Raza)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반자전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해군 장교가 자녀들에게 알모가바르를 모범적인 병사로 묘사한다.
- 유비소프트(Ubisoft)의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레벨레이션(Assassin's Creed Revelations)에는 알모가바르를 기반으로 한 "비잔티움 알모가바르" 부대가 등장한다.
- 스페인 공수여단 제6여단은 "알모가바레스"라고 불린다.[43] 최초의 스페인 공수부대는 1953년 10월 17일에 창설되었으며, 알모가바르 지휘관 로제르 데 플로르(Roger de Flor)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955년 비예나(Villena)의 알모가바레스 부대 창설 이후, 알모가바르는 모로스 이 크리스티아노스 축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대 중 하나이다.
- 아라곤의 포크 메탈 그룹 루르테(Lurte)는 그들의 음악에서 알모가바르를 묘사한다.
- 미디블 II: 토탈 워(Medieval II: Total War)에서 알모가바르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모병할 수 있는 부대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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