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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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부회는 프랑스에서 국왕의 세금 징수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소집된 신분제 의회로, 1302년 필리프 4세에 의해 최초로 소집되었다.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로 구성되었으며, 국왕은 보조금 지급, 왕권에 대한 자문 등을 위해 이들을 소집했다. 14세기에는 삼부회가 상당한 권력을 가졌으나, 14세기 후반부터 왕실 세금의 영구화로 권한이 약화되었고, 백년 전쟁 이후에는 재정권을 포기했다. 1789년 루이 16세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으나, 신분별 투표 방식과 재정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삼부회는 프랑스 혁명으로 종결되었으며, 지방 삼부회도 존재했으나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점차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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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회 | |
---|---|
지도 정보 | |
명칭 | |
프랑스어 | États généraux |
한국어 | 삼부회 |
로마자 표기 | Etach general |
기본 정보 | |
유형 | 자문 회의 |
구성원 | 제1신분 (성직자) 제2신분 (귀족) 제3신분 (평민) |
설립일 | 1302년 |
해산일 | 1789년 |
국가 | 프랑스 |
언어 | 프랑스어 |
역사적 맥락 | |
설립 배경 |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갈등 중 왕권 강화 목적 |
소집 목적 | 왕의 자문 세금 승인 국가적 문제 논의 |
주요 사건 | 1302년 최초 소집 프랑스 혁명 발발의 원인 중 하나 |
소집 빈도 | 왕의 필요에 따라 소집 (정기적이지 않음) |
기능 및 권한 | |
주요 기능 | 국왕에게 자문 제공, 특히 세금 문제에 대한 자문 |
권한 범위 | 입법 권한은 없었으며, 자문 및 제안 권한만 보유 |
한계 | 왕의 의지에 따라 소집 및 해산 결정 각 신분별 투표 방식의 불평등 |
조직 및 절차 | |
신분별 대표 | 각 신분별로 대표를 선출하여 참여 |
투표 방식 | 각 신분별로 한 표씩 행사 (제3신분에 불리) |
소집 장소 | 왕의 거처 또는 지정된 장소 |
의사 진행 | 왕 또는 왕의 대리인이 주관 |
해체 및 영향 | |
해체 과정 | 1789년 국민의회로의 전환 |
프랑스 혁명과의 관계 |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 |
역사적 의의 | 프랑스 정치사에서 중요한 위치 차지, 사회적 불평등의 상징 |
관련 용어 | |
프랑스어 | États provinciaux (지방 삼부회) |
독일어 | 란트타게 (지역 의회) |
참고 문헌 | |
참고 문헌 | Medieval Geopolitics: The Conflict between Pope Boniface VIII and King Philip IV of France (Andrew Latham, 2019년 4월) The hinges of history: state-making and revolt in early modern France (Edgar Kiser & April Linton, 2002년 12월) |
2. 기원과 역사
필리프 4세가 1302년 삼부회를 최초로 소집한 이후, 삼부회는 프랑스 왕국의 중요한 정치 기구로 기능했다.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제3신분이라 불리는 도시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주요 기능은 프랑스 국왕의 세금 징수에 대한 동의였다.[47]
초기 삼부회는 왕권 강화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필리프 4세는 교황과의 갈등에서 국내 지지를 얻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47] 그러나 삼부회는 점차 왕권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성장했다. 14세기에는 왕의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며 상당한 권력을 누렸지만, 14세기 후반부터 왕실 세금이 영구화되면서 삼부회의 권한은 약화되는 경향을 보였다.[49]
백년전쟁 기간 동안 삼부회는 세금 징수와 행정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며 다시 영향력을 확대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재정권을 포기하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49] 1484년 삼부회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기도 했지만, 이후 왕권이 강화되면서 삼부회는 자주 소집되지 않았다.[5]
16세기 후반, 종교 전쟁과 재정난으로 인해 삼부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1560년 오를레앙, 1561년 퐁투아즈, 1576년과 1588년 블루아에서 삼부회가 열렸지만, 종교적 갈등과 왕권 다툼 속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49] 1614년 앙리 4세 사후 소집된 삼부회 역시 신분 간 갈등으로 인해 성과 없이 해산되었고, 이후 1789년까지 소집되지 않았다.[49]
삼부회는 이론적으로 자문 권한만 가졌지만, 실제로는 왕에게 불만 사항을 제출하고 법령 제정에 영향을 미치는 등 입법 과정에 참여했다. 또한 왕위 계승과 같은 국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2. 1. 중세 삼부회
필리프 4세는 1302년 4월 10일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갈등에서 국내 지지를 얻기 위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삼부회를 처음 소집했다.[4] [13]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제3신분이라 불리는 도시 대표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주요 기능은 프랑스 국왕의 세금 징수에 대한 동의였으며, 때로는 조작이나 날조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47]14세기 프랑스의 각 지방에서도 지방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카페 왕조 이래 프랑스 국왕은 지방 도시에 대한 특허장을 통해 지방의 독자적 법전과 관습을 인정해 왔다. 삼부회는 교황과의 갈등에서 국내 지지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무너지고 알비 십자군이 종결되자 교황의 영향력이 커졌고,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통해 왕권을 지키려 했다.[47]
프랑스 국왕뿐만 아니라 삼부회의 각 구성원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삼부회를 활용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국왕의 요구에 동의하는 대신 농민 지배를 강화하려 했고, 도시 대표자들은 조세의 대가로 경제적 특권을 얻고자 했다.[48]
초기 삼부회는 제한적인 선거 요소만 있었다. 속인 귀족과 교회 귀족은 국왕이 직접 선택했고, 성직자 계층에서는 수도원, 대성당의 장 같은 특정 교회 기관도 소집되었다. 이 기관 대표는 수도사나 장의 교구 사제들이 선출했다.
제3신분 대표만이 선거로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평민이 아닌 특권 도시(''bonnes villes'') 대표만 선출되었고, 이들은 주로 도시 시정관이었지만, 때로는 대표자들이 선출되기도 하였다. 시골 지역(''plat pays'')은 대표되지 않았다. ''bonnes villes'' 내에서도 선거권은 제한적이었다.
삼부회의 실질적 권력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14세기에는 상당한 권력을 가졌고, 이론적으로 왕은 일반적인 조세를 부과할 수 없었다. 왕은 귀족, 교회 영주, 도시들의 동의, 즉 삼부회의 승인을 얻어야 했고, 삼부회는 단기간만 보조금을 허가했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특정 왕실 세금이 영구화되고 삼부회 투표와 무관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왕실은 "봉토원조" 성격을 변화시켜 자체 권한으로 조세를 부과하려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장 2세 몸값을 위해 삼부회 투표 없이 20년 동안 세금을 거두었다. 15세기 후반에는 주요 세금(taille, aids, gabelle)이 왕실 이익을 위해 영구화되었다. 1437년 ''aids''처럼 삼부회 공식 동의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백년전쟁은 삼부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장 2세 치세(1355~1358)에 삼부회는 세금 투표, 행정, 사법권까지 통제했다. 프랑스의 샤를 7세 치세 전반기에는 거의 매년 소집되어 왕실에 보조금을 투표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재정권을 포기했다. 1337년 백년 전쟁 발발 후, 필리프 6세와 장 2세는 전비 마련을 위해 삼부회를 자주 소집하여 특별 보조금을 받았다.[15]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포로가 되자 샤를 5세는 삼부회를 소집했다.[15] 파리 상인 두목 에티엔느 마르셀은 고문 회의에 의한 통치를 요구하며 분쟁을 일으켰고, 파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16] 왕세자는 파리를 탈출, 마르셀에 대항하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지지를 얻어 반란을 진압했다.
1484년 삼부회에서 프랑스의 루이 11세 사후,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프랑스의 샤를 8세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권을 얻으려 했다. 삼부회는 샤를의 누이인 프랑스의 앤 편에 서서 거부했다.[5] 세 계급 대표들은 정기적 조세 승인 권리를 되찾고자 노력했다. ''taille''를 2년간 투표하고, 샤를 7세 통치 말기 금액으로 줄였다. 2년 후 소집 약속을 요구했고 얻어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1560년까지 삼부회는 소집되지 않았다. 이 76년간 왕들은 중앙집권 국가 역할을 확장했다. 16세기 중반, 공무원(''officiers'')들은 제4 계급 형성을 모색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6]
2. 2. 근세 삼부회
필리프 4세가 1302년 처음 소집한 삼부회는 14세기에는 상당한 권력을 가졌다. 왕은 이론적으로 일반적인 조세를 부과할 수 없었고, 특권을 가진 도시들은 자체적으로 조세를 부과할 권리를 가졌다. 왕은 일반적인 조세를 거두기 위해 귀족, 교회 영주, 도시들의 동의, 즉 삼부회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삼부회는 이러한 보조금을 단기간 동안만 허가했기에 자주 소집되었고 왕권에 대한 권력도 상당했다.[47]그러나 14세기 후반, 특정 왕실 세금이 영구적이 되고 삼부회의 투표와 무관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왕실은 "봉토원조"의 성격을 변화시켜 자체 권한으로 일반적인 조세를 부과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장 2세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삼부회의 투표 없이 20년 동안 세금을 거두었다. 15세기 후반에는 주요 세금인 taille, aids, gabelle이 왕실의 이익을 위해 영구화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삼부회의 공식적인 동의도 있었다.[49]
백년전쟁의 격변기는 삼부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장 2세 치세에는 세금 투표뿐 아니라 세금 행정과 사법권까지 통제했다. 샤를 7세 치세 전반기에는 거의 매년 소집되어 왕실에 보조금을 투표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재정권을 포기했다.[49]
1484년 삼부회에서 루이 11세 사후, 오를레앙 공작은 샤를 8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권을 얻으려 했으나, 삼부회는 앤 드 보주 편에 서서 거부했다.[5] 세 계급의 대표들은 정기적으로 조세를 승인할 권리를 되찾고자 노력했고, ''taille''를 2년 동안만 투표하고 샤를 7세 통치 말기 금액으로 줄였다. 2년 후 재소집 약속을 요구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1560년까지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49] 이 기간 동안 왕들은 중앙집권 국가의 역할을 확장했다. 16세기 중반, 공무원(''officiers'')들은 제4 계급 형성을 모색했지만, 많은 이들이 귀족이 되는 매력 때문에 실패했다.[6]
16세기 후반, 재정난과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삼부회가 부활했다. 1560년 오를레앙, 1561년 퐁투아즈, 1576년과 1588년 블루아에서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1588년 삼부회는 앙리 3세의 쿠데타로 끝났고, 1593년 파리에서 소집된 삼부회는 성공하지 못했다. 1614년 파리에서 앙리 4세 사후 혼란을 계기로 다시 삼부회가 소집되었지만, 세 신분 사이의 불화로 약화되어 해산되었고 1789년까지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49]

삼부회는 왕실 재정 부족과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위그노) 간의 갈등으로 16세기 후반에 부활했다.[12] 앙리 2세 사후 실권을 장악한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1560년 오를레앙 삼부회를 소집하여 섭정 지명을 받는 동시에 종교 화합책을 모색했다.[19] 1561년에는 푸아시와 퐁투아즈에서 삼부회가 소집되어 성직자 계층에 압력을 가하여 재정 부담을 승인하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푸아시 협정),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회담은 실패로 끝났다(푸아시 회담).[20]
위그노 전쟁 중 앙리 3세에 의해 소집된 1576년 블루아 삼부회에서는 국왕이 가톨릭 동맹의 요구를 받아들여 위그노와의 평화 협정을 파기했다.[21] 가톨릭 동맹의 압력이 증가하는 가운데 개최된 1588년 블루아 삼부회는 앙리 3세에 의한 동맹 수령 기즈 공작 앙리 암살이라는 쿠데타로 끝났다.[22] 앙리 3세가 암살되고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4세가 즉위하자, 그에게 적대적인 가톨릭 동맹이 1593년 파리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신자 국왕의 선출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동맹의 삼부회).[12][23][24]
1614년, 앙리 4세 사후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고,[12] 콩데 공작의 요구에 따라 섭정 마리 드 메디시스는 파리에서 다시 삼부회를 소집했다. 의사록에는 고귀한 애국심이 기록자에 의해 칭찬되었지만, 삼계급의 의견 충돌이 그들을 약화시켜 결국 삼부회는 일을 마치지 못하고 폐회했다.[12][25] 이후 1789년까지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12]
이후,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 귀족으로 구성된 고등 법원이 왕권에 대한 자문 기관이자 발전하는 절대 왕정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루이 14세의 성인식을 계기로 새로운 삼부회 소집이 발표되고 각 선거구에 공개 서한이 배포되었지만, 결국 삼부회는 열리지 않았다.[12][26] 절대 왕정이 명확하게 확립됨에 따라 삼부회의 기능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12] 루이(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왕세자)의 측근이었던 자유주의자들은 미래의 부르고뉴 공작 즉위에 대비하여 삼부회 재개를 준비했다.[12] 생 시몽 공작과 프랑수아 페네롱이 이 계획을 세웠지만, 페네롱은 선거가 아닌 귀족에 의한 회의를 우선시했다.[12] 부르고뉴 공작은 요절했고, 루이 14세 사후 어린 루이 15세가 즉위했고, 생 시몽 공작은 섭정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에게 중용되었지만, 삼부회는 소집되지 않았다.[12]
3. 삼부회의 종결과 프랑스 혁명
1789년 루이 16세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고자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려 했으나, 이들은 반발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새로운 세금 부과를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50] 이는 1614년 이후 175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 14세 말기부터 권력 과시와 사치로 재정이 악화되었고, 루이 15세를 거치며 더욱 심각해졌다. 국채 발행 남발로 인해 1년 세수입의 절반이 국채 상환과 이자 비용으로 소진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50] 특히,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면서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50]
삼부회는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으로 구성되었다. 제1신분은 10만 명의 가톨릭 성직자로 프랑스 토지의 5~10%를 소유했고, 제2신분은 40만 명의 귀족으로 정부 고위직 등을 독점했다. 이들은 면세 특권을 누렸다. 제3신분은 2,500만 명으로 부르주아, 농민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세금 납부 의무를 졌다.[50]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소집되었으나, 표결 방식을 둘러싸고 신분 간 갈등이 발생했다. 제3신분은 대표 수를 두 배로 늘렸지만, 투표는 신분별로 진행되어 제3신분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50]
이에 시에예스 신부의 제안으로 제3신분은 별도로 회의를 열고 스스로를 '국민의회'로 선포했다. 이들은 다른 신분에게도 참여를 촉구했지만,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국정을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50]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해산하려 했으나, 의회는 테니스 코트로 장소를 옮겨 테니스 코트의 서약(1789년 6월 20일)을 통해 헌법 제정 전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성직자 대표 대다수와 일부 귀족도 합류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굴복했지만, 파리와 베르사유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에 파리와 다른 도시들에서 국민의회를 지지하는 메시지가 쏟아졌고, 7월 9일 국민의회는 헌법 제정 국민 의회로 재편성되었다.[50]
4. 삼부회의 구성과 운영
1302년 필리프 4세가 처음 소집한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제3신분이라 불리는 도시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47] 각 신분은 프랑스 국왕의 세금 징수에 동의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때로는 이러한 동의가 조작되거나 날조되기도 하였다.[47]
초기 삼부회는 제한적인 선거 요소를 가졌다.[12] 속인 귀족과 교회 귀족은 국왕이 직접 선택했고, 성직자 계층에서는 특정 교회 기관 대표가 수도사 등에 의해 선출되었다.[12] 제3신분 대표만이 선거로 선출되었는데, 초기에는 특권을 가진 도시(''bonnes villes'')만이 대표를 선출했고, 농촌 지역은 대표되지 않았다.[12]
16세기 후반, 삼부회는 전국 삼신분의 선거에 의한 대표로 구성되는 기관이 되었다.[12] 1484년 삼부회에서는 삼신분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직접적인 참정권이 있었으나, 농촌 지역 평민은 사실상 이 권한을 이용할 수 없었고, 간접 선거 제도가 관습화되었다.[12] 성직자와 귀족의 참정권은 직접 선거였지만, 대체로 성직록을 가진 성직자와 레앙(봉토)를 가진 귀족만이 선거 회합 참가를 인정받았다.[9]
삼부회는 왕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삼부회 구성원들은 점차 왕이 자신들의 동의를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삼부회는 기능적으로 하나의 의회 또는 세 개의 의회로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헌법적 결정은 없었다. 왕은 왕국 세 신분의 동의를 필요로 했고, 공동 또는 별도 표명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1484년 삼부회에서는 공동 선거와 결의가 이루어졌지만, 1560년 이후 각 신분별 별도 심의가 규칙이 되었고, 1789년 6월 23일 왕의 선언에서는 세 개의 별개 의회로 구성됨을 명시했다. 그러나 1789년 소집을 결정한 자크 네케르의 국왕평의회 보고서는 공동 관심사에 대해 각 신분이 찬성하는 별도 투표를 하고 왕이 동의하면 함께 심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삼부회는 위원회 심의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왕이 주재하는 ''séances royales''라는 엄숙한 총회가 있었지만, 토론은 없었다. 다른 왕실 회의에서는 각 신분이 선출한 연설자가 답변이나 의견을 알렸다. 유용한 작업은 각 신분 대표가 나뉜 ''sections''에서 이루어졌다. 고대 삼부회에는 개인 투표가 없었고, ''bailliage'' 또는 ''sénéchaussé'' 단위로 각 ''bailliage''당 한 표를 가졌으며, ''bailliage'' 대표 다수가 투표를 결정했다.
1484년 삼부회 이후, 선거인들은 대표에게 제출할 ''cahier de doléances''(불만 사항 진술)를 작성했고, ''cahier général'' 작성은 회의의 주요 업무(''le grand œuvre'')였다. 삼부회는 이를 통해 ''ordonnances'' 자료를 제공했지만, 왕은 ''cahiers'' 제안을 항상 채택하지 않고 수정했다.
14세기 삼부회는 큰 권한을 가졌다.[12] 국왕은 전국적 과세를 할 수 없었고,[12] 왕령 지역에서도 상급 재판권(''haute justice'')이 있는 곳에서만 과세할 수 있었다.[12] 상급 재판권이 있는 영지에는 과세할 수 없었고,[12] 특권 도시는 자체 조세권이 있었다.[12] 국왕은 보편적 과세를 위해 성직 귀족과 도시의 동의, 즉 삼부회 동의를 얻어야 했으며, 이는 단기 특별 보조금 승인과 같았다.[12]
하지만 14세기 후반, 특정 왕실 세금은 전국 과세 경향을 보이며 항구적 성격을 띠고 삼부회 표결과 독립적이 되었다.[12]
삼부회는 '개정권'이라는 특수 권한을 가졌지만, 자주 행사되지 않았다.[12] 프랑스 일반법에는 '왕국 기본법'(''lois fondamentales du royaume'')이라는 규칙이 있었고, 대부분 관습이었다.[12] 주요 내용은 왕위 계승 규칙과 왕령 불가침 원칙이었다.[12][38] 국왕은 이를 폐지, 개정, 위반할 수 없었지만,[12] 삼부회 동의를 받으면 가능했다.[12] 삼부회는 국왕 동의하에 새로운 기본법을 제정할 수 있었다.[12] 위그 카페 혈통 단절 시 삼부회가 새 국왕을 선택하는 것이 널리 인정되었다.[12]
4. 1. 구성
1302년 필리프 4세에 의해 처음 소집된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제3신분이라 불리는 도시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47] 각 신분은 프랑스 국왕의 세금 징수에 동의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때로는 이러한 동의가 조작되거나 날조되기도 하였다.[47] 14세기에는 각 지방에서도 지방 삼부회가 소집되었다.[47] 카페 왕조 이래 프랑스 국왕은 지방 도시에 특허장을 통해 독자적인 법전과 관습을 인정해 왔는데, 삼부회는 교황과의 갈등에서 국내 지지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47]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무너지고 알비 십자군이 종결되자 교황의 영향력이 커졌고,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통해 왕권을 지키려 했다.[47]각 구성원들은 삼부회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국왕의 요구에 동의하는 대신 농민 지배를 강화하려 했고, 도시 대표자들은 조세의 대가로 경제적 특권을 얻고자 했다.[48]
프랑스 삼부회는 왕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었다. 새로 즉위한 국왕은 삼부회로부터 즉위 선물을 받는 것을 권리로 여겼다.[49] 1484년 삼부회는 샤를 8세 즉위에 30만 리브르를 선물했다.[49] 그러나 삼부회 구성원들은 점차 왕이 자신들의 동의를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16세기 동안 소집된 삼부회는 '기쁜 즉위 선물'을 위한 것이었으나, 1560년 - 1561년, 1576년 삼부회는 부분적으로 과세 동의를 위해 소집되었다.[49] "왕의 의지가 있는 곳에 법이 있는" 것처럼 "왕과 신민 사이에는 상호 우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요구되었다.[49]
삼부회의 구성과 권한은 초기 형태에서 제한적인 선거 요소를 가졌다.[12] 속인 귀족과 교회 귀족은 국왕에 의해 직접 선택되었고, 성직자 계층에서는 특정 교회 기관 대표가 수도사 등에 의해 선출되었다.[12] 제3신분 대표만이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는데, 초기에는 특권을 가진 도시(''bonnes villes'')만이 대표를 선출했고, 농촌 지역은 대표되지 않았다.[12]
16세기 후반, 삼부회는 전국 삼신분의 선거에 의한 대표로 구성되는 기관이 되었다.[12] 1484년 삼부회에서는 삼신분 모두를 위한 보편적이고 직접적인 참정권이 있었으나, 농촌 지역 평민은 사실상 이 권한을 이용할 수 없었고, 간접 선거 제도가 관습화되었다.[12] 성직자와 귀족의 참정권은 직접 선거였지만, 대체로 성직록을 가진 성직자와 레앙(봉토)를 가진 귀족만이 선거 회합 참가를 인정받았다.[9]
프랑스 혁명 당시, 삼부회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신분 | 구성원 | 인구 | 소유 토지 | 특징 |
---|---|---|---|---|
제1신분 | 가톨릭 성직자 | 약 10만 명 | 프랑스 토지의 5~10% | 면세 특권 |
제2신분 | 귀족 | 약 40만 명 (여성, 어린이 포함) | - | 면세 특권, 고위직 독점 |
제3신분 | 부르주아, 농민, 그 외 | 약 2,500만 명 | - | 납세 의무, 상류층에 대한 불만 |
4. 2. 운영 방식
삼부회는 왕의 필요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국왕은 삼부회를 통해 즉위 선물을 받는 것을 권리로 여겼다. 예를 들어, 1484년 삼부회는 샤를 8세의 즉위에 대해 30만 리브르를 선물했다.[49] 그러나 삼부회 구성원들은 점차 왕이 자신들의 동의를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16세기 동안 소집된 삼부회는 새로운 왕이 권리로 여기던 '기쁜 즉위 선물'을 위한 것이었으나, 1560년 - 1561년에 소집된 삼부회와 1576년 삼부회는 부분적으로 과세에 대한 동의를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왕의 의지가 있는 곳에 법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처럼, "왕과 신민 사이에는 상호 우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요구되었다.[49]
삼부회의 실질적인 권력은 시간에 따라 변화했다. 14세기에는 상당한 권력을 가졌다. 이론적으로 왕은 일반적인 조세를 부과할 수 없었다. 심지어 왕실 영지에서도 왕은 고등 재판권(''haute justice'')을 가진 곳에서만 조세를 부과할 수 있었고, 고등 재판권을 가진 영주의 신하들에게는 조세를 부과할 수 없었다. 특권을 가진 도시들은 일반적으로 자체적으로 조세를 부과할 권리를 가졌다. 왕은 일반적인 조세를 거두기 위해 귀족, 교회 영주, 그리고 도시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는 삼부회의 승인을 얻어야 함을 의미했고, 삼부회는 이러한 보조금을 단기간 동안만 허가했다. 결과적으로 삼부회는 자주 소집되었고 왕권에 대한 그들의 권력은 상당해졌다.
그러나 14세기 후반에는 왕실 영지 전역에서 부과되는 특정 왕실 세금이 영구적이 되고 삼부회의 투표와는 무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왕실은 영주가 자신의 봉신에게 봉토 원조를 요구할 수 있는 경우처럼, 자체 권한으로 일반적인 조세를 부과하기 위해 "봉토원조"의 성격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왕실은 프랑스의 장 2세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삼부회의 투표 없이 20년 동안 필요한 세금을 거두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도 여러 차례 의회가 소집되었다. 15세기 후반에는 주요 세금인 taille, aids, gabelle이 왕실의 이익을 위해 확실하게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1437년의 ''aids''와 같이 삼부회의 공식적인 동의가 있었다.
백년전쟁의 격변기는 삼부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장 2세(1355~1358) 치세에는 삼부회가 세금의 투표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원을 통해 세금의 행정과 사법권까지 통제했다. 샤를 7세 치세 전반기에는 거의 매년 소집되어 왕실에 보조금을 충실히 투표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재정권을 포기했다.
1484년 삼부회에서 루이 11세 사후, 오를레앙 공작은 샤를 8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권을 얻으려 했다. 삼부회는 샤를의 누이인 앤 드 보주 편에 서서 거부했다.[5]
세 계급의 대표들은 정기적으로 조세를 승인할 권리를 되찾고자 노력을 합쳤다. 그들은 ''taille''를 2년 동안만 투표했고, 동시에 샤를 7세 통치 말기에 달했던 금액으로 줄였다. 그들은 2년이 끝나기 전에 다시 소집될 것이라는 왕실의 약속을 요구했고, 얻어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삼부회는 1560년까지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이 76년 동안 연이은 왕들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중앙집권 국가의 역할을 확장했다.
삼부회가 기능적으로 하나의 의회를 구성했는지, 아니면 세 개의 의회를 구성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헌법적 관점에서 결정된 바가 없었다. 왕이 필요로 한 것은 왕국의 세 신분의 동의였고, 그들의 결의가 공동으로 표명되었는지, 별도로 표명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1484년 삼부회에서는 세 신분에 대한 선거가 공동으로 이루어졌고, 대표들도 공동으로 결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1560년 이후로 각 신분이 별도로 심의하는 것이 규칙이 되었고, 1789년 6월 23일 왕의 선언에서는 세 개의 별개의 의회를 구성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1789년 소집이 결정된 자크 네케르의 국왕평의회 보고서는 공동 관심사에 대해서는 다른 각 신분이 찬성하는 별도 투표를 통해 결정될 경우, 그리고 왕이 동의할 경우 세 신분의 대표들이 함께 심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삼부회의 기능은 위원회에 의한 심의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왕이 주재하는 ''séances royales''라고 불리는 엄숙한 총회가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는 토론이 없었다. 첫 번째 총회에서 왕이나 그의 대법관은 소집 목적을 발표하고 왕이 제기한 요구 사항이나 질문을 제시했다. 다른 왕실 회의에서는 각 신분이 선출된 연설자를 통해 답변이나 의견을 알렸다. 그러나 거의 모든 유용한 작업은 각 신분의 대표가 나뉘어 있는 ''sections''에서 이루어졌다. 1484년 삼부회에서는 6개의 ''généralité''에 해당하는 6개의 ''nations'' 또는 ''sections''로 나뉘었다. 그 후 같은 ''gouvernement''에 속한 대표들이 심의 및 투표를 위해 그룹 또는 ''bureau''를 형성했다. 특정 질문은 전체 회의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으며, 때때로 삼부회는 각 신분에 대해 동일한 수의 위원을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대 삼부회에는 개인 투표가 없었다. 각 신분 대표 단위는 ''bailliage'' 또는 ''sénéchaussé''였으며, 각 ''bailliage''는 한 표를 가졌고, ''bailliage''의 대표 대다수가 이 투표를 결정했다.
16세기 삼부회에서는 ''gouvernement''별로 투표가 이루어졌으며, 각 ''gouvernement''는 한 표를 가졌지만, ''gouvernement''를 구성하는 ''bailliages''의 대다수가 투표 방법을 결정했다.
삼부회는 이론적으로 자문 권한만 가졌고, 보조금을 지급할 권한은 그들의 소집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영구적인 조세가 확립됨에 따라 왕이 이 동의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삼부회는 새로운 조세 부과에 대한 그들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다시 주장했고, 당시 사실은 이 관점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7세기 동안 왕이 자신의 권한만으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원칙이 인정되었다. 1787년에야 파리 의회가 토지세와 인지세를 등록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삼부회는 법적으로 입법권을 공유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왕에게만 속했다. 1576년 블루아 삼부회는 세 신분 각각이 동일한 조건으로 투표한 제안을 법으로 만들도록 왕을 구속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앙리 3세는 거부했다. 그러나 실제로 삼부회는 입법에 크게 기여했다. 삼부회 참석자들은 항상 왕에게 불만, 요청 및 탄원을 제출할 권리가 있었고, 이들은 일반적으로 ''ordonnance''로 응답을 받았다.
1484년 삼부회 이후, 이는 새롭고 특별한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 삼부회는 선거로 구성된 의회가 되었고, 선거에서 선거인들은 대표에게 제출할 ''cahier de doléances''(불만 사항 진술)를 작성했다. 각 ''bailliage''의 각 신분 대표들은 1차 또는 2차 선거인이 작성한 진술의 조합에 의해 제3신분에 도달한 ''cahier des doléances''를 가져왔다. 삼부회 소집 시 ''bailliages''의 ''cahiers''는 각 ''gouvernement''의 ''cahier''로 통합되었고, 이것들은 다시 ''cahier général''로 통합되어 왕에게 제출되고 왕의 평의회에서 응답을 받았다. 세 신분이 공동으로 심의한 경우 ''cahier général''은 하나뿐이었지만, 별도로 심의한 경우 각 신분에 대해 세 개가 있었다. ''cahier général''의 작성은 회의의 주요 업무(''le grand œuvre'')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삼부회는 수많은 ''ordonnances''의 자료를 제공했지만, 왕은 ''cahiers''에 포함된 제안을 항상 채택하지는 않았고, ''ordonnance''로 형성할 때 수정했다. 이는 ''cahiers''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ordonnances de reforme''(개혁 법령)였다. 그러나 대부분 잘 준수되지 않았다. 이 유형의 마지막은 1614년 ''cahiers''와 여러 저명인사 회의의 의견에 따라 작성된 1629년의 ''grande ordonnance''(''Code Michau'')였다.
삼부회의 특별한 권한은 인정되었지만, 자주 행사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구성권이었다. 프랑스의 고대 공법에는 "왕국의 기본법"이라고 불리는 많은 규칙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관습적인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위 계승을 결정하는 규칙과 왕실 영지의 양도를 금지하는 규칙이었다. 왕은 그것을 폐지, 수정 또는 침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삼부회의 동의를 얻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인정되었다. 삼부회는 왕에게 기본법의 면제를 줄 수 있었고, 왕과 합의하여 새로운 기본법을 만들 수도 있었다. 1576년과 1588년 블루아 삼부회는 이 점에서 설득력 있는 선례를 제공한다. 위그 카페의 계보가 끊어질 경우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 것은 삼부회의 기능이 될 것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4. 3. 권한
이론적으로 삼부회는 자문 기능만 가졌고, 특별 보조금에 대한 동의 권한은 주요 소집 이유였다.[12] 그러나 항구적인 과세가 확립되면서 국왕은 이 권한을 불필요하게 여겼다.[12] 16세기에 삼부회는 새로운 과세에 대한 동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17세기에는 국왕이 자신의 권위로 과세할 수 있다는 원칙이 인정되었다.[12]14세기 삼부회의 권한은 상당히 컸다.[12] 이론적으로 국왕은 전국적인 과세를 할 수 없었고,[12] 왕령 지역에서도 상급 재판권(''haute justice'')을 가진 곳에서만 과세할 수 있었다.[12] 상급 재판권을 가진 영주의 영지에는 과세할 수 없었고,[12] 특권 도시는 스스로 조세를 거둘 권리가 있었다.[12] 보편적인 과세를 위해 국왕은 성직 귀족과 도시의 동의, 즉 삼부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으며, 이는 짧은 기간 동안의 특별 보조금 승인과 같았다.[12] 그 결과 삼부회는 자주 소집되었고, 국왕에 대한 권한도 컸다.[12]
하지만 14세기 후반, 특정 왕실 세금은 왕국 전역에 과세되는 경향이 생겼고, 항구적인 성격을 띠며 삼부회의 표결과 독립적이 되었다.[12] 이는 국왕이 '봉건적 상납금'을 자신의 권위에 기반한 보편적 과세로 바꾸려 한 것과 관련이 있다.[12] 예를 들어, 장 2세의 몸값을 위한 20년간의 과세는 삼부회 표결 없이 이루어졌다.[12] 15세기 후반에는 타유세(taille), 간접세(aides), 소금세(gabelle) 같은 주요 세금이 국왕의 이익을 위해 항구적이 되었고, 때로는 1437년 간접세처럼 삼부회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12]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는 인두세, 십분의 일세(''dixième''), 이십분의 일세(''vingtième'') 같은 직접세와 많은 간접세가 도입되었다.[12] 이는 조세원(''cours des aides'')과 고등법원(parlement)에 등록되어 발효되었다.[12]
삼부회는 입법 권한이 없었고, 이는 국왕에게만 속했다.[12] 1576년 블루아 삼부회는 삼부에서 채택된 제안을 법령으로 제정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앙리 3세는 거부했다.[12] 그러나 삼부회는 입법에 크게 기여했고,[12] 삼부회 참석자들은 국왕에게 불만 신청(''doléances'')이나 청원을 할 권리가 있었다.[12] 이들은 보통 왕령(''ordonnance'')으로 답변을 받았고, 이를 통해 14~15세기 삼부회의 활동을 알 수 있다.[12]
삼부회는 '개정권'이라는 특수한 권한을 가졌지만, 자주 행사되지는 않았다.[12] 프랑스 일반법에는 '왕국 기본법'(''lois fondamentales du royaume'')이라는 규칙이 있었는데, 대부분 관습이었다.[12] 주요 내용은 왕위 계승 규칙과 왕령 불가침 원칙이었다.[12][38] 이는 왕권에 우월했고, 국왕은 폐지, 개정, 위반할 수 없었지만,[12] 삼부회의 동의를 받으면 가능했다.[12] 삼부회는 국왕 동의하에 새로운 기본법을 제정할 수도 있었다.[12] 1576년과 1588년 블루아 삼부회는 이 선례를 제공했다.[12] 위그 카페 혈통이 끊기면 삼부회가 새 국왕을 선택하는 것이 널리 인정되었다.[12]
5. 지방 삼부회
지방 삼부회(''états provinciaux'')는 14세기에 지방의 공령(公領), 백령(伯領)이 왕권에 통합될 때 지방의 관습과 법령, 그리고 신분제 의회의 존속이 인정되면서 성립되었다.[39] 랑그도크, 노르망디(Normandie), 부르고뉴, 브르타뉴, 프로방스(Provence), 도피네(Dauphiné) 등이 강력했으며, 피레네 산맥 계곡의 십여 개의 작은 주도 지방 삼부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주들을 페이 데타(''pays d'etats'')라고 불렀고,[39] 이 중 랑그도크 삼부회는 가장 넓은 지역을 관할하며, 독자적으로 왕세(王稅)를 배분·징수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40]
지방 삼부회는 국왕에 의해 소집되었고, 국왕의 특임관이나 주총독이 회의를 주재하여 조세의 표결과 감액 협상을 진행하고, 왕세 징수에 관여했다. 또한, 지방 관습법 편찬에 대한 자문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40]
16세기에는 왕국 삼분의 일 지역에 존속했지만,[40] 왕권의 발전과 함께 세제가 통일되면서 지방 삼부회는 역할을 잃고 점차 소멸해 갔다.[41]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 시대에 대법관 미셸 드 마리야크(Michel de Marillac) 등이 지방 특권 배제에 움직여 도피네와 프로방스의 삼부회가 사실상 소멸했다.[41] 루이 14세 시대에는 다른 지방의 삼부회 권한이 약화되었다. 지방 삼부회는 쇠퇴했지만, 랑그도크, 부르고뉴, 브르타뉴 등에서는 1789년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혁명 직전기의 재무총감(Contrôleur général des finances) 브리엔느는 평민의 힘을 이용하여, 면세 특권에 고집하며 신세 도입에 저항하는 성직자·귀족 계층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각지의 지방 삼부회를 부활시켰다.[39] 새로운 삼부회는 제3신분의 정수를 배증시키고, 표결도 신분별로 한 표가 아닌 개인별 투표로 하는 등 진보적인 것이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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