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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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테네 공국은 제4차 십자군에 참여한 부르고뉴 기사 오토 드 라 로슈가 1205년에 건국하여 초대 공작이 된 국가이다. 처음에는 테살로니카 왕국의 봉신이었으나, 테살로니카 왕국 멸망 이후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아카이아 공국과 소유권을 다투었으며, 1267년 이후에는 시칠리아 왕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아티카 반도와 보이오티아를 점령하고 테살리아까지 확장되었으며, 아크로폴리스가 공작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1311년 카탈루냐 용병대에 의해 아라곤 연합 왕국의 속국이 되었고, 이후 피렌체 아차이올리 가문의 지배를 거쳐 1444년 모레아 전제군주국에 점령되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다. "아테네와 네오파트리아 공작" 칭호는 현재 스페인 왕까지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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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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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아테네 공국 |
통화 | 데니에 투르누아 |
시대 | 중세 |
지위 | 다양한 국가의 봉신 국가 사실상 자치 |
시작 연도 | 1205년 |
종료 연도 | 1458년 |
이전 사건 | 제4차 십자군 |
이전 날짜 | 1204년 |
시작 사건 | 공국 설립 |
종료 사건 | 오스만 제국 정복 |
사건 1 | 아라곤 정복 |
사건 날짜 1 | 1311년 |
사건 2 | 아차이올리 가문 통치 |
사건 날짜 2 | 1388년 |
사건 3 | 모레아에 공물 바침 |
사건 날짜 3 | 1444년 |
선행 국가 | 비잔티움 제국 |
후행 국가 | 오스만 제국 |
정부 형태 | 봉건 군주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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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아테네, 테베 |
공용어 | 프랑스어 (1311년까지) 카탈루냐어 (1311–88) 그리스어 (1388년 이후 대중적 및 공식적으로) |
종교 | 가톨릭교회 (국교) 동방 정교회 (대중적) |
통치자 칭호 | 아테네 공작 |
현재 국가 | 그리스 |
2. 역사
제4차 십자군 이후 부르고뉴 출신 귀족 오토 드 라 로슈가 1205년 아테네 공국을 세웠다. 처음에는 테살로니카 왕국의 봉신이었으나, 1224년 테살로니카 왕국이 멸망한 후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과 아카이아 공국이 서로 소유권을 주장했다. 1267년부터는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로 1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1308년 아테네 공작이 된 고티에 5세 드 브리엔은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하여 에페이루스와 니케아 제국에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1311년 고티에 5세가 배반하자, 카탈루냐 용병대는 할미로스 전투에서 그를 죽이고 공국을 아라곤 연합 왕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1318년 카탈루냐 용병대는 테살리아 남부를 점령하고 네오파트리아 공국을 아테네 공국에 합병시켰다.
1379년 나바라 용병대가 테베와 네오파트리아를 점령하면서 아라곤은 네오파트리아와 아티키 지방 일부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1381년 아테네 공국은 시칠리아 왕국의 속국이 되었고, 1388년 피렌체의 아차이올리 가문이 아테네를 점령했다.
1444년 아테네는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 점령되었다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1456년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와 네오파트리아 공작" 칭호는 아라곤 왕들을 거쳐 현재의 스페인 왕까지 계승되고 있다.
2. 1. 건국
제4차 십자군에 참여했던 부르고뉴 출신 기사 오토 드 라 로슈가 아테네의 첫 공작이었다. 1205년 공국 성립 당시부터 아테네 공작으로 알려졌으나, 공식 작위는 1260년에 받았다. 오토는 스스로를 "아테네 공"(Dominus Athenarumla, Sire d'Athens프랑스어)이라 칭했고, 시민들은 아테네 공작을 대군주(Μέγας Κύρηςel)라고 불렀다. '메가스 키리스'는 '메가스키르'로 줄여져 프랑크인들도 자주 사용했다.아테네 공국은 처음에는 테살로니카 왕국의 봉신 국가였으나, 1224년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가 테살로니카를 점령한 후 에페이로스와 아카이아 공국이 서로 소유권을 주장했다. 1267년 이후에는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공국은 아티카 반도와 보이오티아를 점령했고, 테살리아까지 부분적으로 확장되었다. 에게해의 섬들은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였으므로 점유하지 않았지만, 네그로폰테 삼두 정치에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건물은 공작들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2. 2. 테살로니카 왕국 멸망 이후
아테네 공국은 원래 테살로니카 왕국의 봉신 국가였으나, 1224년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가 테살로니카를 점령한 후 에페이로스와 아카이아 공국이 각각 소유권을 주장했다. 1267년 이후에는 다른 라틴 제국 국가들과 함께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 3. 카탈루냐 용병대의 지배
1308년 아테네 공작이 된 브리엔 공작 고티에 5세 드 브리엔은 아라곤의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해 에페이루스와 니케아 제국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1311년 고티에 5세가 용병대를 배반하자 이들은 할미로스 전투에서 그를 죽이고 공국을 차지해 아라곤의 속국으로 만들었다.[1]1312년, 카탈루냐인들은 시칠리아의 프레데리크 3세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아들 만프레드를 공작으로 임명했다. 공작 칭호는 1388년까지 아라곤 왕관의 손에 남아 있었지만, 실제 권한은 일련의 총대리들이 행사했다. 1318/19년에 카탈루냐인들은 시데로카스트론과 테살리아 남부도 정복하여 네오파트리아 공국을 아테네 공국과 통합했다. 테살리아의 일부는 1340년대에 세르비아 제국에 의해 카탈루냐인으로부터 정복되었다.
아라곤 통치하에서 봉건 제도는 ''로마니아의 아시즈''가 아닌 ''바르셀로나의 관습''에 따라 계속 유지되었으며, 공식적인 공용어는 프랑스어에서 카탈루냐어로 바뀌었다. 시칠리아의 예를 따라 각 도시와 지역에는 3년 임기의 자체 지역 총독(''veguer'', ''castlà'', ''capità'')이 있었으며, 이들은 공작, 총대리 또는 지역 대표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요 도시와 마을은 자체 의회와 관리를 가진 ''síndic''에 의해 대표되었다. 판사와 공증인은 종신직으로 선출되거나 심지어 직위를 상속받기도 했다.
2. 4. 아라곤 연합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
1312년, 카탈루냐인들은 시칠리아의 프레데리크 3세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아들 만프레드를 공작으로 임명했다. 공작 칭호는 1388년까지 아라곤 왕관의 손에 남아 있었지만, 실제 권한은 일련의 총대리들이 행사했다. 1318년/19년에 카탈루냐인들은 시데로카스트론과 테살리아 남부도 정복하여 아테네와 통합된 네오파트라스 공국을 건설했다. 테살리아의 일부는 1340년대에 세르비아 제국에 의해 카탈루냐인으로부터 정복되었다.[1]아라곤 통치하에서 봉건 제도는 ''로마니아의 아시즈''가 아닌 ''바르셀로나의 관습''에 따라 유지되었으며, 공식적인 공용어는 프랑스어 대신 카탈루냐어가 사용되었다. 시칠리아의 예를 따라 각 도시와 지역에는 3년 임기의 자체 지역 총독(''veguer'', ''castlà'', ''capità'')이 있었으며, 이들은 공작, 총대리 또는 지역 대표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요 도시와 마을은 자체 의회와 관리를 가진 ''síndic''에 의해 대표되었다. 판사와 공증인은 종신직으로 선출되거나 심지어 직위를 상속받기도 했다.
1379년 (명목상의) 라틴 제국 황제 자크 드 보가 고용한 나바라 용병대가 테베 공국과 네오파트라스 공국의 일부를 정복했지만, 카탈루냐인(아라곤인)의 아테네 공국은 네오파트라스 공국의 다른 지역과 아티카 지방을 계속 유지했다. 1381년부터 1388년까지는 아라곤 연합 왕국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그 후 피렌체 공화국의 아차이올리 가문이 매입했다.
2. 5. 피렌체 아차이올리 가문의 지배
1379년, 라틴 제국 황제 보 공작 제임스가 고용한 나바라 용병대가 테베와 네오파트라스 공국의 일부를 정복했다. 한편, 아라곤은 네오파트라스와 아티카의 다른 부분을 점령했다. 1381년부터 아테네 공국은 시칠리아 왕국의 속국이 되었고, 1388년에는 피렌체의 아차이올리 가문이 아테네를 점령했다. 네오파트라스는 1390년에 점령되었다.
1395년부터 1402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이 잠시 공국을 지배했다. 1444년, 아테네는 콘스탄티노스 11세 즉, 모레아 전제공이자 비잔틴 왕위 계승자의 조공국이 되었다. 1456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 이후, 투라하노글루 오메르 베이는 공국의 잔존 세력을 정복했다. 오스만 정복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와 네오파트라스 공작"이라는 칭호는 아라곤 왕, 그리고 그들을 통해 스페인 왕이 현재까지 계속 사용했다.
2. 6. 오스만 제국에 의한 멸망
1379년, 라틴 제국 황제 자크 드 보가 고용한 나바라 용병대가 테베와 네오파트라스 공국의 일부를 정복했다. 한편, 아라곤은 네오파트라스 공국의 다른 부분과 아티카를 유지했다. 1381년부터 아테네 공국은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1388년 피렌체의 아차이올리 가문이 아테네를 점령했다. 네오파트라스 공국은 1390년에 점령되었다.1395년부터 1402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이 잠시 아테네 공국을 지배했다. 1444년, 아테네는 모레아의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이후 비잔티움 제국 황제)에게 점령되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1456년 투라하노글루 오메르 베이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아테네 공국은 완전히 병합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와 네오파트라스 공작"이라는 칭호는 아라곤 왕들을 거쳐 현재의 스페인 왕까지 계승되고 있다.
3. 역대 통치자
오토 드 라 로슈를 시작으로 여러 가문이 아테네 공국을 통치했다. 1205년부터 1308년까지는 드 라 로슈 가문이, 1308년부터 1311년까지는 브리엔 가문이 통치했다. 그러나 브리엔 가문은 명목상으로만 공작위를 유지했고, 실제 통치 기간은 짧았다.
1311년 알미로스 전투 이후, 카탈루냐 용병대가 공국을 장악하고 아라곤 연합 왕국에 복속시켰다. 이후 1388년까지 아라곤 연합왕국 및 시칠리아 왕국 출신 공작들이 통치했으나, 이들은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총독을 파견하여 공국을 다스렸다.[1]
1388년, 피렌체의 아차이올리 가문이 아테네를 점령하여 통치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 기간(1395년 ~ 1402년)을 제외하고 1458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아차이올리 가문이 공국을 다스렸다.
아테네 공작 칭호는 아라곤 왕들을 거쳐 현재의 스페인 왕까지 계승되고 있다.
3. 1. 드 라 로슈 가문
제4차 십자군에 참여한 부르고뉴 출신 기사인 오토 드 라 로슈가 아테네의 초대 공작이었다. 1205년 공국 성립 당시부터 아테네 공작으로 알려졌으나, 공식적으로는 1260년에 작위를 받았다. 오토는 스스로를 "아테네 공"(Dominus Athenarumla, Sire d'Athens프랑스어)이라고 불렀고, 시민들은 아테네 공작을 대군주(Μέγας Κύρηςel)라고 불렀다.부르고뉴 출신의 라 로슈 가문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도시 아테네를 기사도의 유럽식 궁정 수도로 다시 세웠다. 그들이 그 주변에 세운 국가는 그들의 재임 기간 동안 그리스에서 라틴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하고 평화로웠다.
라 로슈 가문은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아티카 동부에 거주했기 때문에 가문 이름이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라 로슈의 이름은 로시스, 로사스, 로카스가 되었고, 내란을 거쳐 최종적으로 파바실레이우가 되었다. 현재도 파바실레이우 가는 라 로슈 가문이 거주했던 아티카 동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드 라 로슈 가문의 아테네 공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위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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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 1205년 – 1225년 |
기 1세 | 1225년 – 1263년 |
장 1세 | 1263년 – 1280년 |
기욤 1세 | 1280년 – 1287년 |
기 2세 | 1287년 – 1308년 |
3. 2. 브리엔 가문 (명목상)
고티에 5세는 아라곤의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하여 에페이루스와 니케아 제국에 맞서 싸우게 했으나, 1311년 이들을 배반하려다 알미로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그의 아내 잔 드 샤티용 또한 잠시 동안 도시를 통치했다. 브리엔 가문의 상속자들은 계속해서 아테네 공작위를 주장했지만, 아르고스 및 나플리아 영주에서만 인정받았다.이름 | 재위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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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티에 5세 | 1308년 ~ 1311년 |
잔 드 샤티용 | 1311년 ~ 1354년 |
고티에 6세 | 1311년 ~ 1356년 |
이사벨 드 브리엔 | 1356년 ~ 1360년 |
소이에르 당기앵 | 1356년 ~ 1367년 |
고티에 4세 당기앵 | 1367년 ~ 1381년 |
루이 당기앵 | 1381년 ~ 1394년 |
3. 3. 아라곤 연합왕국 및 시칠리아 왕국 지배기
1311년, 아테네 공국은 할미로스 전투에서 카탈루냐 용병대에게 정복되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브리엔의 발터 5세가 고용했으나, 이후 발터 5세가 이들을 배반하자 그를 죽이고 공국을 차지했다. 1312년, 카탈루냐인들은 시칠리아 왕국의 프레데리크 3세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아들 만프레드를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아테네 공국은 아라곤 연합왕국의 속국이 되었다.
1318년 카탈루냐 용병대는 테살리아 남부를 점령하고 네오파트리아 공국을 아테네 공국에 합병시켰다.[1] 1340년대에 테살리아 일부는 세르비아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아라곤 통치하에서 봉건 제도는 ''로마니아의 아시즈''가 아닌 ''바르셀로나의 관습''에 따라 유지되었으며,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 대신 카탈루냐어가 사용되었다. 시칠리아의 예를 따라 각 도시와 지역에는 3년 임기의 총독(''veguer'', ''castlà'', ''capità'')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공작, 총대리 또는 지역 대표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요 도시와 마을은 자체 의회와 관리를 가진 ''síndic''에 의해 대표되었다. 판사와 공증인은 종신직으로 선출되거나 직위를 상속받기도 했다.
공작 칭호는 1388년까지 아라곤 왕관이 소유했지만, 실제 권한은 총대리들이 행사했다. 1381년, 아테네 공국은 다시 시칠리아 왕국의 속국이 되었다.
아테네 공작위는 카탈루냐 용병대에 의한 정복과 아라곤 연합 왕국으로의 병합 이후, 시칠리아 왕이 아테네 공국의 지배를 겸해야 한다는 인식이 이어졌다. 현대에도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세습 칭호에 "아테네 공작(Duque de Atenas)" 및 "네오파트리아 공작(Duque de Neopatria)"을 포함하고 있다.
아라곤 연합왕국 및 시칠리아 왕국 지배기의 아테네 공작과 재임 기간은 다음과 같다.
아테네 공작 | 재임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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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 데슬라르 | 1311년 ~ 1312년 |
만프레디 | 1312년 ~ 1317년 |
굴리엘모 2세 | 1317년 ~ 1338년 |
조반니 2세 | 1338년 ~ 1348년 |
페데리코 1세 | 1348년 ~ 1355년 |
프레데리코 2세 | 1355년 ~ 1377년 |
마리아 | 1377년 ~ 1379년 |
페트로스 | 1379년 ~ 1387년 |
3. 4. 아라곤 왕국의 총독
1312년, 카탈루냐인들은 시칠리아의 프레데리크 3세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아들 만프레드를 공작으로 임명했다. 공작 칭호는 1388년까지 아라곤 왕관의 손에 남아 있었지만, 실제 권한은 일련의 총대리들이 행사했다.[1] 1318/19년에 카탈루냐인들은 시데로카스트론과 테살리아 남부도 정복하여 아테네와 통합된 네오파트라스 공국을 건설했다. 테살리아의 일부는 1340년대에 세르비아 제국에 의해 카탈루냐인으로부터 정복되었다.
아라곤 통치하에서 봉건 제도는 ''로마니아의 아시즈''가 아닌 ''바르셀로나의 관습''에 따라 유지되었으며,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 대신 카탈루냐어가 사용되었다. 시칠리아의 예를 따라 각 도시와 지역에는 3년 임기의 총독(''veguer'', ''castlà'', ''capità'')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공작, 총대리 또는 지역 대표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요 도시와 마을은 자체 의회와 관리를 가진 ''síndic''에 의해 대표되었다. 판사와 공증인은 종신직으로 선출되거나 심지어 직위를 상속받기도 했다.
이름 | 재임 기간 |
---|---|
베렝게르 에스타뇰 | 1312년 ~ 1316년 |
알폰소 파드리케 | 1317년 ~ 1330년경 |
오도 드 노벨 | 1331년 (임시) |
니콜라스 란시아 | 1331년경 ~ 1335년 |
레이몬드 베르나르디 | 1354년 ~ 1356년 |
곤살보 히메네스 데 아레노스 | 1359년 |
마테오 데 몬카다 | 1359년 ~ 1361년 |
페드로 데 푸 | 1361년 ~ 1362년 |
로제르 데 류리아 | 1362년 ~ 1370년 (1366년까지 사실상 인정받지 못함) |
곤살보 히메네스 데 아레노스 | 1362년 ~ 1363년 (불확실) |
마테오 데 몬카다 | 1363년 ~ 1366년 (명목상) |
마테오 데 페랄타 | 1370년 ~ 1374년 |
루이스 파드리케 | 1375년 ~ 1382년 |
필리페 달마우, 로카베르티 자작 | 1379년 ~ 1386년 (1381년 ~ 1382년 그리스 체류) |
레이몬드 데 빌라노바 | 1382년 ~ 1386년 (필리페 달마우의 대리인) |
베르나르 데 코르넬라 | 1386년 ~ 1387년 (그리스에 간 적 없음) |
필리페 달마우, 로카베르티 자작 | 1387년 ~ 1388년 |
페드로 데 파우 | 1386년 ~ 1388년 (네리오 아치아이올리에게 아테네 함락 시까지 베르나르 데 코르넬라, 이후 필리페 달마우의 대리인) |
3. 5. 아차이올리 가문
피렌체 출신의 아차이올리 가문은 나바라 용병대의 도움을 받아 카탈루냐인들을 몰아낸 후 공국을 통치했다. 네리오 1세가 도시와 공국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유증했지만, 투르크의 정복 전까지 피렌체인들에게 돌아갔다.- 네리오 1세 (1388–1394)
- 안토니오 1세 (1394–1395)
- ''베네치아 지배'' (1395–1402), ''포데스타'' 통치:
- 알바노 콘타리니 (1395–1397)
- 로렌초 베니에르 (1397–1399)
- 에르몰도 콘타리니 (1399–1400)
- 니콜로 비투리 (1400–1402)
- 안토니오 1세 (1402–1435), 복위
- 네리오 2세 (1435–1439)
- 안토니오 2세 (1439–1441)
- 네리오 2세 (1441–1451), 복위
- 클레어 (1451–1454)
- 바르톨로메오 콘타리니와 함께 (1451–1454)
- 프란체스코 1세 (1451–1454)
- 프란체스코 2세 (1455–1458)
4. 아테네 공국의 가톨릭 교회
아테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산하의 아테네 대주교구가 있던 곳이었으나, 프랑크족에게 정복당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비잔틴 제국에서 28번째 서열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명한 성직자 미하일 코니아테스를 배출했다. 정복 당시 아테네 대교구는 다음과 같이 11개의 교구를 둔 대교구였다.
교구 이름 |
---|
유리푸스 |
다울리아 |
코로네아 |
안드로스 |
오레오스 |
스키루스 |
카리스토스 |
포르투무스 |
아울론 |
시라 및 세리푸스 |
케오스 및 테르미아 (키트누스) |
라틴족은 그리스 교회의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았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초대 아테네 라틴 대주교인 베라르에게 그의 모든 그리스 전임자의 권리와 관할권을 확인했다. 파리 대교구의 관습이 아테네로 수입되었지만, 서유럽 성직자 중 아테네와 같이 먼 곳으로 옮겨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교육받은 카탈루냐인인 안토니오 발레스터는 그리스에서 대주교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파르테논은 이전에는 정교회인 ''파나기아 아테니오티사 교회''였으나, 아테네의 성 마리아 가톨릭 교회가 되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라틴 당국의 공식적인 승인 없이 지하 조직으로 살아남았다. 12세기에는 그리스 성직자들이 문맹인 경우가 많았고, 라틴 지배 하에서 그들의 교회는 불법이었기 때문에 교육 수준은 확실히 악화되었다.
참조
[1]
간행물
The Athenian Acropolis as a castle under Latin rule (1204-1458): Military and building technology
https://www.academia[...]
2000
[2]
웹사이트
Medieval and Early Modern Jurists: A Bio-Bibliographical Listing: 1298-1500
http://faculty.cua.e[...]
201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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