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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부르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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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부르크가는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스위스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귀족 가문이다. 11세기에는 슈바벤 지역의 딜링겐 백작 가문과 연계되었으며, 12세기에는 키부르크 가문으로 분리되어 스위스 영토를 확장했다. 체링겐 가문의 단절 이후에는 라인강 서쪽 지역과 취리히 지역을 획득했으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견제를 받았다. 13세기에는 노이-키부르크 가문으로 이어졌지만, 1417년 마지막 후손이 사망하면서 가문은 단절되었다. 이후 키부르크 영지는 취리히에 매각되어 지역 행정 구역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그 역사를 기리는 유적과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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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부르크가
가문 정보
키부르크
원어명Kyburgs
휘장
본가딜링겐 백작가
국가슈바비아 공국
창립일1180년
창설자하르트만 3세 폰 키부르크
최종 통치자하르트만 4세 폰 키부르크
작위키부르크 백작
해체1264년
개요
가문 유형중세 스위스 귀족 가문
관련 가문딜링겐 백작가
역사
기원딜링겐 가문
창시자하르트만 3세 폰 키부르크
존속 기간1180년 - 1264년
주요 영토키부르크 백국
문장
문양두 마리의 사자
최초 기록1220년 (네 마리 사자 문양)
설명검은색 바탕에 금색 벤드, 두 마리의 금색 사자
참고14세기에는 방패가 붉은색으로 표현됨
기타

2. 키부르크 가문의 역사

키부르크 성을 중심으로 현재의 스위스 북동부 지역에서 11세기 초에 키부르크 가문이 세력을 키웠다. 1078년 가문의 남계가 단절되면서 키부르크 성과 영지는 딜링겐 백작 가문에게 넘어갔다. 딜링겐 백작 하르트만과 키부르크 가문의 상속녀 아델하이드의 결혼을 통해 키부르크 영지는 딜링겐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12세기 중반, 하르트만 3세 폰 딜링겐은 스위스 영지를 상속받아 키부르크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키부르크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봉신으로서 렌츠부르크 백작 가문, 체링겐 가문 등 다른 유력 가문들과의 경쟁과 협력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특히 1218년 체링겐 가문이 단절되자 키부르크 가문은 라인강 서쪽과 부르고뉴 지역의 영지를 획득하며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키부르크 가문은 디센호펜, 빈터투어 등의 도시를 건설하고, 미니스테리알리스를 임명하여 지배력을 강화했다. 13세기 초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결혼 동맹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유지했다.

1250년 이후 키부르크 가문은 분열되어 노이-키부르크 가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4세기 말부터 베른과의 갈등, 졸로투른 공격 실패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1417년 노이-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백작이 사망하면서 키부르크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후 키부르크 영지는 취리히에 매각되어 1798년까지 취리히의 관리하에 있었다. 1815년에는 지역 행정 중심지가 되었으나, 1831년 취리히 주 개편으로 행정적 역할을 잃었다.

2. 1. 초기 역사 (11세기~12세기)

키부르크 백작가의 첫 번째 일원은 1020년대에 지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남성 계통은 1078년에 단절되었다. 키부르크 성은 빈터투어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의 취리히 주) 슈바벤의 딜링겐 백작에게 넘어갔다.[2] 하르트만 폰 딜링겐(1121년 사망)과 아델하이드의 결혼을 통해 딜링겐가는 옛 키부르크 영토와 투르가우의 영유권을 획득했다. 아델하이드의 정확한 출신은 불분명하다. 그녀는 그뤼닝겐-빈터투어 백작의 손녀이거나 빈터투어 가문의 방계 가문인 넬렌부르크 백작 출신일 수 있다. 그녀는 또한 1053년 치비타테 전투에서 노르만족에 맞서 싸우다 사망한 빈터투어의 마지막 기사 아달베르트 2세 폰 빈터투어(1053년 사망)의 딸일 수도 있다.

2. 2. 키부르크 가문의 확장 (12세기~13세기)

키부르크 가문은 하르트만 폰 딜링겐의 손자인 하르트만 3세(1180년 사망)가 딜링겐 영지를 분할하면서 딜링겐 가문에서 갈라져 나왔다.[3] 아달베르트(1170년 사망)는 슈바벤 영토를, 하르트만 3세 폰 딜링겐은 스위스 영지를 받아 키부르크의 하르트만 1세가 되었다. 키부르크 가문은 슈바벤 공작의 봉신이었는데, 슈바벤 공작은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으로 1138년부터 1254년까지 독일 왕을 배출했다. 1172/73년에 렌츠부르크 백작 가문이 단절되자 키부르크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및 체링겐 가문과 함께 렌츠부르크 영지를 나누어 가졌다.

키부르크 가문은 고유 소유권을 획득하여 빈데그 또는 가스터(현재 장크트갈렌주의 제-가스터 선거구에 속하는 7개의 지자체)의 포크트와 바덴 주변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샨니스 수도원과 베로뮌스터도 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4]

1180년, 키부르크 가문은 디센호펜과 빈터투어를 건설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렌츠부르크와 체링겐 가문의 많은 봉신들을 자유가 없는 기사 또는 미니스테리알리스로 임명했다.

1218년 체링겐 가문이 단절되면서 키부르크 가문은 다시 한번 영토를 확장할 기회를 얻었다. 마지막 체링겐 공작 베르톨트 5세의 누이 안나 폰 체링겐은 울리히 3세 폰 키부르크(†1227)의 아내였다. 키부르크 가문은 체링겐 가문으로부터 라인강 서쪽과 부르고뉴에 있는 프리부르, 툰, 부르크도르프를 포함한 도시와 취리히주의 영지를 얻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왕가는 키부르크 가문의 취리히와 1226년 장크트갈렌 수도원에 대한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 결과 키부르크 가문은 점차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멀어졌고, 1243년에는 교황파이자 반 신성 로마 황제파의 주요 지지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1220년경 키부르크 가문은 소유권이 불분명하고 이미 소유하고 있는 토지 근처의 재산과 권리에 대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1225년에는 빈터투어에 있는 전 자유 백작 폰 바이스링겐의 재산 중앙에 ''Chorherrenstift Heiligberg''를 위한 매장지를 설립했고, 1233년에는 빈터투어 서쪽에 퇴스 수도원을 설립했다. 두 부지 모두 바이스링겐 가문과 로스베르크 가문으로부터 빼앗은 재산으로 기증되었다. 이 두 재산은 키부르크 가문과 라퍼스빌 가문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는 역할을 했다.[4]

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통해 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울리히 3세의 손자인 하르트만 5세는 1227년에 라퍼스빌의 안나와 약혼했다. 그의 삼촌인 하르트만 4세는 마가렛 오브 사보이와 결혼했고, 그의 누이 하일비히는 루돌프 1세 폰 합스부르크의 어머니가 된 알브레히트 4세 폰 합스부르크와 결혼했다.

키부르크 가문은 주크, 바덴(1230년), 프라우엔펠트, 아라우, 렌츠부르크, 멜린겐, 주르제, 비젠, 키부르크, 라우펜(1250년) 등의 도시를 건설하고 확장했지만, 권력은 점차 약해졌다. 리헨제와 후트빌은 건설 직후 잃었다.

2. 3. 노이-키부르크 가문 (13세기~15세기)

1250/51년, 하르트만 4세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재산의 서쪽 부분과 부르크도르프 중심지를 조카 하르트만 5세에게 넘겨주었다. 그 결과, 합스부르크가의 지원을 받던 하르트만 5세는 성장하는 도시 국가인 베른과 여러 차례 충돌하게 되었다. 그의 삼촌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주 개입해야 했다. 1263년 하르트만 5세가 사망하자,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백작이 하르트만의 딸 안나의 후견인이 되었고 서쪽 지역의 행정권을 인수했다. 1264년 하르트만 4세가 사망한 후 루돌프는 동쪽 절반을 장악하기 위해 나섰다. 이로 인해 사보이 가문인 미망인 마가렛과 그녀의 가족과의 갈등이 발생했다.[4]

하르트만 5세의 딸 안나는 합스부르크-라우펜부르크의 에버하르트 1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사보이 가문에 맞서 아르가우(아르고비아)에서 합스부르크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4] 에버하르트와 안나의 아들인 하르트만 1세(1275–1301)는 다시 "키부르크 출신"이라고 칭했다.[4] 그의 가문은 노이-키부르크 또는 키부르크-부르크도르프로 알려지게 되었고, 1417년까지 이어졌다.[4]

1322년, 에버하르트 2세하르트만 2세 형제는 분할되지 않은 영토를 누가 상속할 것인가를 놓고 서로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은 "툰 성에서의 형제 살해"로 이어졌고, 에버하르트는 그의 형제 하르트만을 살해했다. 합스부르크 군주로부터 처벌을 피하기 위해 에버하르트는 베른으로 도망쳤다. 이듬해 그는 도시, 그 성, 그리고 툰 주변의 땅을 베른에 팔았다. 베른은 에버하르트에게 땅을 봉토로 돌려주었다.[4]

노이-키부르크의 쇠퇴는 1382년 11월 11일 루돌프 2세졸로투른을 급습하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4] 그 후 구 스위스 연방과의 갈등은 ''부르크도르퍼크리크''(또는 ''키부르거크리크'')로 알려져 있다. 베른은 합스부르크에 맞서 아르가우에서 자신의 이익을 주장할 기회를 잡았고, 베른이 부르크도르프를 포위한 후 노이-키부르크는 불리한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4] 토겐부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5세는 1384년에 키부르크와 빈터투어를 획득했고 (다시 잃음 1402년 프리드리히 7세), 베른은 노이-키부르크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툰과 부르크도르프를 매입했으며, 나머지 도시들은 1408년까지 베른과 졸로투른으로 넘어갔다.[4] 마지막 노이-키부르크 가문인 베르톨트는 1417년 베른에서 가난하게 죽었다.[4]

2. 4. 키부르크 영지 (15세기~18세기)

18세기 취리히가 내 키부르크 영지


백작 가문이 단절되면서 이 영지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의 직접 소유로 넘어갔고, 그는 1424년 이 영지를 취리히에 매각해야 했다.[1] 구 취리히 전쟁에서 대부분의 영토는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게 넘어가고, 글라트 강 서쪽의 노이암트만이 취리히에 남았다.[1] 그러나 합스부르크가는 1452년 다시 이 영지를 취리히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1] 이때부터 스위스에 대한 프랑스 침공이 있었던 1798년까지 이 영토는 총 59명의 역대 관리(Landvögte)에 의해 관리되는 영지(Landvogtei)였다.[1] 빈터투어시는 1467년 취리히에 매입될 때까지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로 남아 있었고, 별도의 관할 구역으로 취급되었다.[1]

스위스 복고 시대인 1815년에 키부르크성은 다시 지역 행정의 중심지(Oberamt)가 되었다.[1] 1831년 현대적인 취리히 주가 창설되면서 키부르크는 행정적 역할을 잃었고, 성은 채석장으로 사용하려는 빈터투어 출신 프란츠 하인리히 히르첼에게 매각되었다.[1] 성의 파괴를 막기 위해 1835년 망명한 폴란드 백작 알렉산더 소반스키(1799–1861)가 성을 매입했다.[1]

취리히가 내 키부르크 영지는 4개의 ''Ämter''로 나뉘었다.[1]

  • 글라트와 Töss 강 사이, 오버엠브라흐-바서스도르프까지의 ''Niederamt''(또는 ''Unteramt'')
  • Töss 강 남쪽의 ''Oberamt''
  • Töss 강과 Thur 사이의 ''Enneramt''
  • Thur 강과 상라인 강 사이의 ''Ausseramt''

여기에 2개의 ''Nebenämter''가 추가되었다.[1]

  • ''Embracheramt'' (엠브라흐, 오버엠브라흐, 루핑겐)
  • ''Illnaueramt'' (키부르크, 일나우, 브뤼텐, 린다우, 폴케르츠빌)


4개의 ''Ämter''에 포함되지 않은 곳은 방엔과 Töss, 그리고 월경지인 에텐하우젠과 에브마팅겐이었다.[1]

3. 키부르크 가문 가계도

가문딜링겐 가문렌츠부르크 가문체링겐 가문합스부르크 가문
1세대빈터투어의 아델하이트
Adelheid von Winterthur|아델하이트 폰 빈터투어gsw
딜링겐의 하르트만 1세(† 1121년)
2세대키부르크의 울리히 3세(1183년 이전 ~ 1227년)[6]렌츠부르크-바덴의 리헨차[5]하르트만 3세(1152년 이전 ~ 1180년)[5]렌츠부르크의 리킨차
3세대키부르크의 헤드비히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 4세(† 1239년)하르트만 4세(1213년 ~ 1264년)[7]사보이의 마르가레타(† 1273년)
4세대합스부르크의 루돌프(1218년 ~ 1291년)
로마 왕 (1273년 ~ 1291년)
에버하르트 폰 합스부르크-로이펜부르크(1227년 ~ 1284년)하르트만 5세(1218년 ~ 1263년)샬롱의 엘리자베스[8]
5세대노이-키부르크 백작
(키부르크-부르크도르프)
1418년 가계 소멸
합스부르크 왕가신성 로마 제국 황제

[9][10]

키부르크 가문은 딜링겐 가문의 분가였다. 이후 키부르크 가문은 다시 여러 분가로 나뉘었으며, 주요 분가로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노이-키부르크 가문이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배출하며 유럽의 주요 왕가로 성장했고, 노이-키부르크 가문은 1418년에 가계가 소멸되었다.

3. 1. 키부르크 가문 가계도

가문딜링겐 가문렌츠부르크 가문체링겐 가문합스부르크 가문
1세대빈터투어의 아델하이드
Adelheid von Winterthur|아델하이트 폰 빈터투어gsw
딜링겐의 하르트만 1세
(† 1121년)
2세대키부르크의 울리히 3세
(1183년 이전 ~ 1227년)[6]
렌츠부르크-바덴의 리헨차[5]하르트만 3세
(1152년 이전 ~ 1180년)[5]
렌츠부르크의 리킨차
3세대키부르크의 헤드비히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 4세
(† 1239년)
하르트만 4세
(1213년 ~ 1264년)[7]
사보이의 마르가레타
(† 1273년)
4세대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218년 ~ 1291년)
로마 왕 (1273년 ~ 1291년)
에버하르트 폰 합스부르크-로이펜부르크
(1227년 ~ 1284년)
하르트만 5세
(1218년 ~ 1263년)
샬롱의 엘리자베스[8]
5세대노이-키부르크 백작
(키부르크-부르크도르프)
1418년 가계 소멸
합스부르크 왕가신성 로마 제국 황제

[9][10]

3. 2. 노이-키부르크 가문 가계도

Neukyburgde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가인 합스부르크-라우펜부르크 가문의 방계 가문이었다. 다음은 Neukyburgde 가문의 가계도이다.[4][10][11][12]

1세대2세대3세대4세대
안나
Eberhard vonde
합스부르크-로이펜부르크
(1227-1284)
에버하르트 1세
(†1290년 이전)
마르가레타
클레베의 디트리히 7세와 결혼
하르트만 1세
(c.1275-1301)
엘리자베스 오브 프라이부르크
(c.1280-1322)
노이샤텔의 마가리타
페터
사생아
올팅겐 포크트
하르트만 2세
(†1322)
에버하르트 2세에게 살해됨
에버하르트 3세
에버하르트 2세
(†1357년 4월 17일)
아나스타샤 오브 시그나우
(c. 1313-1382)
에버하르트 4세
(†1395년 7월 14일)
카테리나
베르덴베르크의 알브레히트와 결혼
니다우의 안나
하르트만 3세
베르톨트
(†1417)
Neukyburgde 가문의 마지막 후손
에고 2세
1406년에 그의 직위를 팔았음
(†c.1415)
루돌프 2세
(†1383)


참조

[1] 서적 Die Grafen von Kyburg https://books.google[...] null 1839
[2] 웹사이트 Kyburg http://www.britannic[...] 2009-08-11
[3] 웹사이트 Genealogy of the House of Kyburg http://www.genealogi[...] 2009-08-13
[4] HDS von Kyburg
[5] HDS Kyburg, Hartmann III. von
[6] HDS Kyburg, Ulrich III. von
[7] HDS Kyburg, Hartmann IV. von (der Ältere)
[8] 문서 Pipitz, pg.69
[9] 웹사이트 Genealogy of the Kyburg line http://www.geni.com/[...]
[10] 서적 Die Grafen von Kyburg https://books.google[...] Weidmann 1839
[11] 웹사이트 Genealogy of Hartmann I http://www.geni.com/[...] 2013-02-22
[12] 서적 Graf Eberhard II. von Kyburg. (1299-1357):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 Grafen von Habsburg-Kyburg https://books.google[...] H. Körber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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