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코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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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탈리코타 전투는 1565년 남인도의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데칸 술탄국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실권자 라마 라야는 데칸 술탄국 간의 세력 균형을 이용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무슬림 왕국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비자푸르, 골콘다, 아흐마드나가르, 베라르, 비다르 술탄국은 연합하여 라마 라야를 공격했고, 전투에서 라마 라야가 사망하고 비자야나가라 군대가 궤멸하면서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전투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정치적 단절을 초래하고 데칸 지역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켰으며,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문명 충돌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더 중요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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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코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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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교전 | 탈리코타 전투 |
부분전 | 데칸 술탄국-비자야나가라 충돌 |
![]() | |
날짜 | 1565년 1월 23일 |
장소 | 현재 카르나타카 주의 탈리코타 근처의 라카사기, 탕가다기 마을 인근 |
결과 | 데칸 술탄국 연합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아흐마드나가르 술탄국 비자푸르 술탄국 골콘다 술탄국 비다르 술탄국 |
교전 2 | 비자야나가라 제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 1 지휘관 | 후사인 니잠 샤 1세 알리 아딜 샤 1세 이브라힘 쿨리 쿠트브 샤 왈리 알리 바리드 샤 1세 |
교전 2 지휘관 | 라마 라야 벤카타드리 티루말라 데바 라야 아추타파 나야크 |
병력 규모 | |
교전 1 병력 | 약 110,000명 |
교전 2 병력 | 약 150,000명 |
피해 규모 | |
교전 2 피해 | 100,000명 |
2. 역사적 배경
라마 라야는 바흐마니 술탄국이 여러 국가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각 술탄국 간의 내분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이익을 추구했다. 초기에는 이 전략이 성공을 거두었으나,[3][4][5] 찰루키아 왕조의 수도였던 칼리안[6]을 차지하려는 시도와 술탄국들을 도발하는 외교 정책은 결국 이슬람 세력의 연합을 초래했다.
이후, 후세인 니잠 샤 I와 알리 아딜 샤 I (각각 아흐마드나가르와 비자푸르), 알리 바리드 샤 I (비다르), 이브라힘 쿨리 쿳브 샤 왈리 (골콘다)는 결혼 동맹을 통해 결속하여 1565년 1월 말, 라마 라야를 공격하기 위해 집결했다.[3][9]
2. 1.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데칸 술탄국의 관계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데칸 술탄국의 싸움은 이들 국가의 전신인 바흐마니 왕조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비자푸르 왕국과 라이추르 지방(Raichur Doab)을 둘러싼 다툼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3]1542년 비자야나가라 왕 아추타 데바 라야 (재위 1529년 ~ 1542년)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아들 벤카타 1세 (재위 1542년)도 내란으로 사망하면서, 왕국의 실권은 크리슈나 데바 라야 (재위 1509년 ~ 1529년)의 사위 아리야 라마 라야와 그의 동생 티루말라 데바 라야에게 넘어갔다.
라마 라야는 국내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무슬림 5개 왕국을 서로 싸우게 하여 약화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는 포르투갈과의 무역 협정으로 비자푸르 왕국에 대한 말 공급을 중단하여 비자푸르 왕국을 격파하고, 이후 비자푸르 왕국에 동맹을 제안하여 골콘다 왕국과 아흐마드나가르 왕국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점차 무슬림 왕국들의 반감을 샀고, 그들도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비자푸르 왕국, 골콘다 왕국, 아흐마드나가르 왕국, 베라르 왕국, 비다르 왕국은 동맹을 맺었다.[9]
2. 2. 라마 라야의 외교 정책과 그 한계
라마 라야는 바흐마니 술탄국이 여러 국가로 분열된 틈을 타, 각 술탄국 간의 내분을 이용하여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책을 펼쳤다. 초기 20년간 이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3][4][5]그러나 찰루키아 왕조의 수도였던 칼리안[6]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술탄국들을 자극하는 외교적 행위는 결국 이슬람 세력의 연합을 초래했다. 후세인 니잠 샤 I, 알리 아딜 샤 I, 알리 바리드 샤 I, 이브라힘 쿨리 쿳브 샤 왈리는 결혼 동맹을 통해 결속하여 1565년 1월 말, 라마 라야를 공격했다.[3][9]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데칸 술탄국 간의 갈등은 바흐마니 왕조 시절부터 계속되었으며, 특히 라이추르 지방을 둘러싼 분쟁이 빈번했다. 1542년 아추타 데바 라야 왕 사후,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발생한 내분으로 크리슈나 데바 라야의 사위인 라마 라야와 그의 동생 티루말라 데바 라야가 권력을 장악했다.
라마 라야는 내부 안정을 꾀하는 한편, 이슬람 5개 왕국을 서로 싸우게 하여 약화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포르투갈과의 무역 협정을 통해 비자푸르 왕국의 말 공급을 차단하여 승리하였고, 이후 비자푸르와 동맹을 맺어 골콘다 왕국과 아흐마드나가르 왕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간책은 결국 이슬람 왕국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용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비자푸르 왕국, 골콘다 왕국, 아흐마드나가르 왕국, 베라르 왕국, 비다르 왕국은 동맹을 결성했다.
2. 3. 데칸 술탄국의 동맹 결성
라마 라야는 바흐마니 술탄국의 후계 국가들 간의 내분에서 이익을 얻는 정치 전략을 채택했고, 이는 약 20년 동안 효과를 보았다.[3][4][5]그러나 칼리안[6] 지배권을 유지하려는 일련의 공격적인 노력과 술탄국에 대한 모욕적인 외교적 거래 이후, 네 개의 무슬림 술탄국, 즉 후세인 니잠 샤 I와 알리 아딜 샤 I(아흐마드나가르와 비자푸르), 알리 바리드 샤 I(비다르), 이브라힘 쿨리 쿳브 샤 왈리(골콘다)는 현명한 결혼 외교를 통해 동맹을 결성하여 1565년 1월 말 라마 라야를 공격하기 위해 집결했다.[3][9]
3. 전투
1564년 12월, 무슬림 5개 왕국 동맹군은 비자야나가르 왕국 영토로 진격했고, 라마 라야와 티루말라 데바 라야는 이들을 맞아 12월 25일 탈리코타(락샤시-탕가티)에서 전투를 벌였다.[9][11]
초기에는 평화 협상이 시도되었으나 라마 라야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12월 26일 전투가 시작되어 약 1개월간 지속되었으나, 1565년 1월 23일 라마 라야가 배신으로 붙잡혀 살해당하면서 1월 26일 비자야나가르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비자야나가르 병사 10만 명이 사망했다. 티루말라 데바 라야는 전장을 떠나 수도 비자야나가르로 돌아가 재물을 싣고 페누콘다로 도망쳤다.
3. 1. 전투의 전개
1564년 12월, 무슬림 5개 왕국 동맹군은 총 11만 명의 병력으로 비자야나가르 왕국 영토로 진격했다. 라마 라야와 티루말라 데바 라야는 이보다 많은 15만 명의 대군으로 맞섰다. 양측 군대는 같은 달 12월 25일 크리슈나 강 북쪽, 비자푸르 동쪽의 탈리코타(락샤시-탕가티)에서 대치했다.[9][11]초기에 무슬림 5개 왕국 측은 비자야나가르 왕국과 평화를 맺으려 했으나, 라마 라야가 이를 거절했다. 다음 날인 12월 26일, 티루말라 데바 라야의 부대와 아흐마드나가르 왕국 및 골콘다 왕국의 군대가 격돌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약 1개월 동안 지속되었지만, 1565년 1월 23일 라마 라야가 전투 중 배신으로 붙잡혀 살해당했다. 같은 달 1월 26일에는 비자야나가르 왕국 군대가 큰 타격을 입어, 이 전투에서 병사 10만 명이 사망했다.
헤르만 쿨케와 디트마 로터문트는 인도 역사를 연구하면서, 비자야나가라 군대의 두 명의 무슬림 장군이 전향하기 전까지는 비자야나가라 측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다고 말했다.[4][13][9][8][2][23]
모든 것을 지켜본 티루말라 데바 라야는 전장을 떠나 수도 비자야나가르로 돌아왔다. 그는 국고의 재물을 1,500마리의 코끼리에 싣고 남쪽의 페누콘다로 도망쳤다.
3. 2. 라마 라야의 죽음과 비자야나가라 군의 패배
라마 라야는 아딜 샤가 라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그를 돕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술탄 니잠 후세인 본인 또는 그의 지시를 받은 누군가에 의해 참수되었다.[9] 그 결과 발생한 혼란 속에서, 라야의 형제인 티루말라 데바 라야는 전군을 이끌고 도주했다.[3][5] 그의 다른 형제인 벤카타드리는 눈이 멀었고 전투 중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3]1565년 1월 23일, 라마 라야가 전투 중에 무장의 배신으로 붙잡혀 살해당했고, 1월 26일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군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병사 10만 명이 사망했다.
모든 것을 지켜본 티루말라 데바 라야는 전장을 떠나 수도 비자야나가르로 돌아와, 국고의 재물을 1500마리의 코끼리에 싣고 남쪽의 페누콘다로 도망쳤다.
3. 3. 티루말라 데바 라야의 후퇴와 저항
라마 라야가 술탄 니잠 후세인 또는 그의 지시를 받은 누군가에 의해 참수되자,[9] 혼란 속에서 라야의 형제인 티루말라는 전군을 이끌고 도주했다. 그는 비자야나가라에서 재집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외곽으로 이동했다.[3][5]티루말라 데바 라야는 전장을 떠나 수도 비자야나가르로 돌아와, 국고의 재보를 1500마리의 코끼리에 싣고 남쪽의 페누콘다로 도망쳤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탈리코타 전투 이후, 무슬림 5개 왕국 연합군은 티루말라 데바 라야를 쫓아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수도 비자야나가르로 진격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도망치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3]
이 전투에서 승리한 무슬림 5개 왕국의 동맹은 일시적인 것으로, 전투 후 곧바로 다툼을 시작하여 9년 후에 아흐마드나가르 왕국이 베라르 왕국을 멸망시켰다.
4. 1.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쇠퇴

술탄국 군대는 저항 없이 비자야나가라를 약탈했다.[3] 이 전투는 비자야나가라에 정치적 단절을 초래했고 데칸 정치의 구성을 영구적으로 변경했다.[3] 기념물과 사원에 대한 후원이 중단되었고, 왕실의 후원이 중단되면서 비자야나가라 시에서 비슈누 숭배가 사라졌으며, 왕립 중심지는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3][16]
티루말라는 이전 제국의 파편을 지배하는 아라비두 왕조를 설립했다.[5][17] 그러나 계승 분쟁, 중앙 권위의 재등장을 원하지 않는 여러 지역 족장들의 반란, 그리고 비자푸르 술탄국과의 지속적인 갈등에 직면하여 1640년대 후반에 붕괴되기 전에 남쪽으로 이동했다.[3][5][9][19]
탈리코타 전투에서의 희생과 수도 비자야나가르의 파괴는 비자야나가르 왕국에 큰 타격을 주어 쇠퇴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후 티루말라 데바 라야는 주군 사다시바 라야를 옹립하여 페누콘다를 수도로 통치를 계속했으며, 1569년에는 사다시바 라야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Aravidu dynasty영어를 열었다.
탈리코타 전투 이후, 비자야나가르 왕국에 인접한 비자푸르 왕국과 골콘다 왕국이 자주 침입해 왔지만, 티루말라 데바 라야의 아들이자 "마지막 명군"인 벤카타 2세의 분전도 있어서, 비자야나가르 왕국이 멸망한 것은 1649년으로 훨씬 뒤의 일이었다.
4. 2. 데칸 술탄국의 분열
승리한 술탄국 연합은 오래가지 못하고 분열되었다.[5][17] 비자푸르 술탄국이 가장 큰 이익을 얻었지만, 다른 데칸 술탄국들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5][17] 무슬림 5개 왕국의 동맹은 일시적인 것으로, 전투 후 곧바로 다툼을 시작하여 9년 후에 아흐마드나가르 왕국이 베라르 왕국을 멸망시켰다.4. 3. 남인도 정치 지형의 변화
탈리코타 전투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에 정치적 단절을 초래했고 데칸 지역의 정치 지형을 영구적으로 변화시켰다.[3] 왕실의 후원이 끊기면서 비자야나가라 시에서 비슈누 숭배가 사라졌고, 기념물과 사원에 대한 후원도 중단되었으며, 왕립 중심지는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3][16]티루말라는 이전 제국의 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아라비두 왕조를 세우고 2년 동안 비자야나가라에서 통치하다가 펭곤다로 수도를 옮겼다.[5][17] 그러나 왕위 계승 분쟁, 중앙 권력의 재등장을 원치 않았던 여러 지역 족장들(주로 텔루구 나야크 가문)의 반란, 비자푸르 술탄국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인해 1640년대 후반에 붕괴되기 전까지 남쪽으로 이동했다.[3][5][9][19]
티루말라 데바 라야의 아들이자 "마지막 명군"인 벤카타 2세(재위 1586 - 1614)의 분전으로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1649년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한편, 탈리코타 전투에서 승리한 무슬림 5개 왕국의 동맹은 일시적인 것으로, 전투 후 곧바로 내분이 시작되어 9년 후에는 아흐마드나가르 왕국이 베라르 왕국을 멸망시키기도 했다.
5. 역사적 평가 및 유산
탈리코타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다양한 역사적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식민지 시대 사가들은 이 전투를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문명의 충돌'로 묘사하며, 비자야나가라 왕국의 멸망을 힌두 문명의 종말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로버트 슈웰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해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리처드 M. 이튼을 비롯한 여러 역사학자들은 종교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갈등이 전투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비자야나가라 왕국이 무슬림 통치자들과 맺었던 동맹, 왕국 내 이슬람 문화의 영향, 전투 이후 술탄국 동맹의 붕괴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로밀라 타파 등도 이러한 분석에 동의한다.
이 전투는 기리시 카르나드의 희곡 "Rakkasa Tangadi"(Crossing to Talikota영어)로 각색되어 현대에 들어 재조명되기도 했다.[31][32]
5. 1. 문명의 충돌 vs. 정치적 갈등
헤르만 쿨케와 디트마 로터문트는 인도 역사를 연구하면서, 비자야나가라 군대의 두 명의 무슬림 장군이 전향하기 전까지 비자야나가라 측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다고 말했다.[4][13][9][8][2][23]식민지 시대의 로버트 슈웰, 조나단 스콧 등은 피리스타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이 전투를 "문명의 충돌"이라는 큰 틀 안에서 설명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이 전투는 비자야나가라의 "라마-라자"로 대표되는 힌두 문명과 데칸 술탄국의 동맹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문명이 대립하는 구도였다. 전투 결과는 남인도의 마지막 "힌두교의 보루"가 "무함마드"의 광신과 팽창주의에 의해 몰락하는 것이었다. 알루루 벤카타 라오, B. A. 살레토레,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얀가, K. A. 닐라칸타 사스트리 등 다수의 남인도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탈식민 시대에도 이러한 견해 또는 그와 유사한 견해를 계속 지지해 왔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많은 역사가들이 이러한 견해를 비판하거나 거부했다. 리처드 M. 이튼은 전투 배후에 어떤 종교적 동기도 없다고 부인하며, 문명의 충돌 가설을 결함 있는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전형으로 묘사한다. 이튼은 라마 라야가 여러 무슬림 통치자들과 맺은 다수의 동맹(종교적 요인이 아닌 정치적 요인에 의해 동기 부여됨), 비자야나가라 왕국 내 페르시아 이슬람 문화의 철저한 침투(이슬람 예술, 건축 및 문화에 대한 궁정의 인가와 후원), 탈리코타에서 싸운 데칸 술탄의 후계자들과 라마 라야의 후계자들(아라비두 왕조) 간의 전략적 동맹 등, 여러 증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한다. 로밀라 타파, 버튼 스타인, 산자이 수브라마니암, 무자파르 알람, 스튜어트 N. 고든은 유사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러한 관점에 동의했다. 추가적인 논거에는 무슬림 베라르 술탄국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 전투 직후 술탄국 동맹이 붕괴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비자야나가라 왕실 궁정에서 무슬림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등 비자야나가라 제국 내 조화로운 힌두-무슬림 관계가 존재했다는 점이 있다.
5. 2. 대중문화에서의 재조명
탈리코타 전투는 기리시 카르나드가 쓴 "Rakkasa Tangadi"(Crossing to Talikota영어)라는 연극으로 각색되었다.[31][3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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