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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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마스 테일러는 1576년 요크셔 리치먼드에서 태어난 영국의 청교도 목사이자 작가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윌리엄 퍼킨스의 영향을 받아 설교를 시작했으며, 엘리자베스 1세 앞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1608년 청교도 탄압을 비판하여 침묵을 강요받았으며, 17년간 채플린 등으로 활동하다가 1625년 런던 세인트 메리 올더먼버리 교구 목사가 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아일워스로 은퇴했다. 1632년 흉막염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 중 '디도서 주석'이 유명하다. 그는 다수의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작품 전집이 출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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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테일러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1576년 |
사망 | 1632년 |
직업 | 성직자 |
종교 | 성공회 |
학력 | |
교육 | 웨스트민스터 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학사, 석사, 신학 박사) |
경력 | |
재직 기관 | 리드 (레스터셔) 교구 목사 세인트 폴 대성당 참사회원 |
임명 | 1614년 리드 교구 목사 1625년 세인트 폴 대성당 참사회원 |
저서 | |
주요 저서 | '다윗의 샘에서 길어 올린 물' (1622년) '그리스도의 달콤한 맛 또는 천국으로 가는 성도의 가장 귀한 선물' (1623년) '모세와 아론' (1625년) '언약의 징조와 유산' (1630년) '요나의 생애와 죽음' (1636년) |
참고 자료 | |
참고 문헌 | J. Sears McGee, ‘Taylor, Thomas (1576–1632)’,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online edn, Jan 2008 https://doi.org/10.1093/ref:odnb/27083 (2008년 5월 22일 접속) |
2. 생애
토마스 테일러는 1576년 요크셔 리치먼드에서 태어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공부했다.[2][3] 그는 윌리엄 퍼킨스의 영향을 받아 젊은 나이에 설교자로 활동했으며, 강력한 반가톨릭적 입장을 보였다.[2][1]
1608년, 청교도에 대한 리처드 밴크로프트 대주교의 정책을 비판하는 설교로 인해 약 17년간 공식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2] 이 기간 동안 그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으며 저술과 설교 활동을 이어갔고, 레딩 등지에서 젊은 설교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2]
1625년 런던 세인트 메리 올더먼버리의 교구 목사가 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곧 은퇴했다.[2] 그는 1628년 신학사, 1630년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2][1][4] 1632년 아일워스에서 흉막염으로 사망했다.[2][1][4]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테일러는 1576년 요크셔 리치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청교도 및 (영국 국교회의 탄압으로) 공식적으로 설교할 수 없었던 목사들에게 친절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2][3]그는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펠로우가 되었고, 히브리어 강사로도 활동했다.[2][3] 윌리엄 퍼킨스의 신학적 입장을 따랐던 테일러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설교를 시작했으며, 25세 무렵에는 런던의 유명한 야외 설교 장소인 세인트 폴 크로스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설교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2][1] 그는 강력한 반(反)로마 가톨릭적 견해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2][1]
1608년, 테일러는 케임브리지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설교하며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리처드 밴크로프트가 청교도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정책을 비판했다.[2] 이 설교로 인해 그는 당시 케임브리지 부총장이었던 새뮤얼 하스넷 주교로부터 설교 금지 조치를 당하고 강등될 위협에 처했다.[2]
이 사건 이후 약 17년 동안 테일러는 공식적인 교구 직책 없이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그는 후원자의 지원을 받았으며, 에드워드 콘웨이 경의 개인 채플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1] 1612년에는 왓퍼드에 거주했으며, 이후 레딩으로 이사했다. 레딩에서는 그의 형제인 시오필러스 테일러가 1618년부터 1640년까지 세인트 로렌스 교구 목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테일러는 나중에 그의 작품을 편집하게 되는 윌리엄 젬맷을 비롯한 젊은 설교자들의 존경을 받았다.[2]
비록 공식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았지만, 테일러는 학문 연구를 계속하여 1628년에 신학사(B.D.) 학위를 받았다. 1630년에는 매튜 렌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에서 신학 박사(D.D.) 학위를 간신히 취득했다.[2][1][4] 이후 옥스퍼드에서도 그의 학위를 인정받았다.[2]
2. 2. 종교 활동과 정치적 입장
테일러는 청교도를 지지하는 아버지 아래 1576년 요크셔 리치먼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공부하며 두각을 나타내 펠로우가 되었고 히브리어 강사로도 활동했다.[2][3]윌리엄 퍼킨스의 신학적 입장을 따랐던 테일러는 21세에 설교를 시작했으며, 25세 무렵에는 세인트 폴 크로스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설교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 내에서 강경한 반(反)로마 가톨릭교회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2][1]
1608년, 테일러는 케임브리지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의 설교를 통해 리처드 밴크로프트 캔터베리 대주교가 청교도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는 당시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고, 이 일로 그는 새뮤얼 하스넷에 의해 설교 금지 처분을 받고 강등될 위협에 처했다.[2] 이 사건 이후 약 17년 동안 테일러는 공식적인 교구 직책 없이 지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에드워드 콘웨이와 같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개인 채플린 등으로 활동하며 신앙 활동을 이어갔다.[1] 그는 1612년 왓퍼드에 거주했으며, 이후 그의 형제 시오필러스 테일러가 목사로 있던 레딩으로 이주했다. 레딩에서 그는 윌리엄 젬맷을 포함한 젊은 설교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2]
오랜 공백기 끝에 1625년 1월 22일, 테일러는 런던 세인트 메리 올더먼버리의 교구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인해 약 1630년경 아일워스로 은퇴하여 요양했다.[2]
테일러는 1628년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1630년에는 매튜 렌과 같은 인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632년 아일워스에서 흉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시신은 세인트 메리 올더먼버리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서는 그의 제자였던 젬맷이 장례 설교를 맡았다. 속기법 개발자인 시오필러스 메트칼프는 그의 조카이다.[2][1][4]
2. 3. 후기 생애와 죽음
1608년 케임브리지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한 설교에서 테일러는 리처드 밴크로프트 대주교가 청교도를 가혹하게 대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이 일로 그는 새뮤얼 하스넷에 의해 설교를 금지당하고 강등될 위협까지 받았다.[2] 이 시점부터 약 17년 동안 테일러는 공식적인 직함 없이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았으며, 에드워드 콘웨이의 채플린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1] 1612년에는 왓퍼드에 거주했으며, 이후 레딩으로 이사했는데, 이곳에서는 그의 형제인 시오필러스 테일러가 1618년부터 1640년까지 세인트 로렌스 교구 목사로 있었다. 레딩에서 테일러는 젊은 설교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중에는 나중에 그의 저작들을 편집하게 되는 윌리엄 젬맷도 포함되어 있었다.[2]1625년 1월 22일, 테일러는 런던 세인트 메리 올더먼버리의 교구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져 약 1630년경 아일워스로 은퇴하여 요양했다.[2]
테일러는 1628년에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1630년에는 매튜 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어렵게 취득했다. 같은 해 옥스퍼드에도 편입되었다. 그는 1632년 아일워스에서 흉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시신은 세인트 메리 올더먼버리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 설교는 윌리엄 젬맷이 맡았다. 유명한 속기사였던 시오필러스 메트칼프는 그의 조카였다.[2][1][4]
3. 작품 활동
테일러는 다작의 작가였으며, 인쇄된 설교 외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2] 그의 작품들은 여러 차례 전집 형태로 출판되기도 했으나, 완전한 형태의 전집은 없다.[2]
3. 1. 주요 저서
테일러는 다작하는 작가였으며, 인쇄된 설교 외에도 다음과 같은 여러 저서를 남겼다.[2]- 윌리엄 퍼킨스의 저서 ''유다서 해설''(1606, 편집): 윌리엄 러셀, 1대 손호러의 러셀 남작에게 헌정함.[1]
- ''베델의 아름다움''(The Beautie of Betheleng), 런던, 1609.
- ''야펫의 첫 번째 공개 설득, 셈의 천막으로''(Iaphets First Publique Perswasion into Sems Tentseng), 케임브리지, 1612.
- ''다윗의 배움''(Davids Learningeng), 1617: 윌리엄 놀리스, 1대 월링포드 자작에게 헌정함.[1]
- ''그리스도의 투쟁''(Christs Combateeng), 1618: 프랜시스 놀리스 경에게 헌정함.[1]
- ''기독교 실천의 세 가지 알파벳''(Three treatises: The Pearle of the Gospell, The Pilgrims Profession, and A Glasse for Gentlewomeneng), 1618; 1688년 재출판.
- ''성 바울의 디도서에 대한 해설''(A Commentarie upon the Epistle of S. Paul written to Tituseng), 케임브리지, 1619.
- ''로마 지도''(A Mappe of Romeeng), 런던, 1620: 화약 음모 사건에 대한 다섯 편의 설교 모음집이다. 장 자케모(Jean Jaquemot)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라 마페 로맹''(La Mappe Romainefra)이라는 제목으로 1623년 제네바에서 출판되었으며, ''씨 뿌리는 자와 씨앗의 비유''의 세 번째 판과 함께 재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스페인 결혼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1]
- ''씨 뿌리는 자와 씨앗의 비유''(Parable of the Sower and of the Seedeng), 런던, 1621; 제2판(삽화 포함), 1623; 제3판(''로마 지도'' 포함), 1634. 조슈아 샌드(Josuah Sand)에 의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메르크 테크넨 반 에엔 고트 엔 데 엘릭 헤르테''(Merck-teeckenen van een Godt-zaligh ende Heyligh Hertenld)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1658년 로테르담에서 제2판이 나왔다.
- ''두 편의 설교''(Two Sermonseng), 1624: 제임스 1세의 4대 의회 의원들에게 행한 설교로, 강력한 반가톨릭 내용을 담고 있다.[1]
- ''그리스도 안의 사람''(The Man in Christeng), 제2판, 런던, 1629: 여기에 ''창조물에서 온 명상''(Meditations from the Creatureseng) 제4판이 포함되었다. 1635년 제4판 출판.
- ''회개의 실천, 여러 방향으로 제시, 도움, 방해, 징조 및 동기와 함께''(The Practice of Repentance, laid down in sundry directions, together with the Helpes, Lets, Signes and Motiveseng), 제2판. 1629; 4판 1635.
- ''규범 비타에: 복음 아래의 법의 규칙''(Regula Vitæ: The Rule of the Law under the Gospeleng), 런던, 1631; 1635년 재인쇄. 반율법주의에 반대하는 작품으로, 로버트 타운은 1644년 ''은혜의 주장''(Assertion of Graceeng)에서 이 책에 반박했다.[5]
- ''성도의 완전한 성화로의 진보''(The Progresse of Saints to Full Holinesseeng), 런던, 1630; 또 다른 판. 1631. 로버트 할리 경에게 헌정함.[1]
- ''신중한 걷기''(Circumspect Walkingeng), 런던, 1631, 12모; 런던, 1658년 재인쇄.
- ''용 또는 사탄의 몰락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Christs Victorie over the Dragon or Satans Downfalleng), 런던.
- 세 편의 논문: ''복음의 진주'', ''순례자의 직업'', 그리고 ''여성을 위한 거울''(Three treatises: The Pearle of the Gospell, The Pilgrims Profession, and A Glasse for Gentlewomeneng), 런던, 1633.
- ''기독교 실천의 원리''(The Principles of Christian Practiceeng), 1635.
- ''그리스도 계시''(Christ Revealedeng), 1635, 4토: 1766년 웨일스 트레베카의 레이디 헌팅던 신학교에서 재인쇄되었고, 1816년 글래스고에서 재인쇄되었으며, 웨일스어로 번역되어 1811년 메르서 티드빌에서 출판되었다.
- ''모세와 아론, 또는 유형과 그림자 . . . 설명''(Moses and Aaron, or the Types and Shadows . . . explainedeng), 1653년: 윌리엄 제맷의 서문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는 테일러를 "계몽된 의사"라고 칭했으며, 이 표현은 토마스 풀러와 앤서니 우드 등이 인용했다.
테일러의 작품 전집은 여러 차례 출판되었으나 완전한 전집은 없다.[2]
# 에드먼드 캘러미의 서문과 조셉 캐릴의 연설 포함, 런던, 1653년.
# 저자의 생애와 56세 때의 초상화(토마스 크로스 조각) 포함, 런던 1658년.
# ''유능하고 학식 있는 토마스 테일러의 작품''(The Works of that Judicious and Learned Divine Thomas Tayloreng), 런던, 1659년.
3. 2. 작품집
테일러는 다작의 작가였다. 인쇄된 설교 외에도 그는 다음 작품의 저자였다.[2]- 윌리엄 퍼킨스의 저서 ''유다서 해설''(Commentary upon the Epistle of St. Judeeng)(1606, 편집), 윌리엄 러셀, 1대 손호러의 러셀 남작에게 헌정[1]
- ''베델의 아름다움''(The Beautie of Betheleng), 런던, 1609.
- ''야펫의 첫 번째 공개 설득, 셈의 천막으로''(Japhets first publique Perswasion into Sems Tentseng), 케임브리지, 1612.
- ''다윗의 배움''(Davids Learningeng), 1617, 윌리엄 놀리스, 1대 월링포드 자작에게 헌정[1]
- ''그리스도의 투쟁''(Christ's Combateng), 1618, 프랜시스 놀리스 경에게 헌정[1]
- ''기독교 실천의 세 가지 알파벳''(Threefold Alphabet of Christian Practiceeng), 1618; 1688년 재출판.
- ''성 바울의 디도서에 대한 해설''(A Commentarie upon the Epistle of St. Paul written to Tituseng), 케임브리지, 1619
- ''로마 지도''(The Romish Spidereng), 화약 음모 사건에 대한 다섯 편의 설교, 런던, 1620. 이 작품은 스페인 결혼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1] 장 자케모(Jean Jaquemotfra)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La Mappe Romainefra''이라는 제목으로 제네바에서 1623년 ''씨 뿌리는 자와 씨앗의 비유'' 세 번째 판과 함께 재출판되었다.
- ''씨 뿌리는 자와 씨앗의 비유''(Parable of the Sower and of the Seedeng), 런던, 1621; 제2판, 삽화 포함, 1623; 제3판 (''로마 지도'' 포함), 1634; 조슈아 샌드(Joshua Sandys)에 의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Merck-teeckenen van eenen Godt-salighen ende Heyligen Kerstennld''; 제2판, 로테르담, 1658.
- ''두 편의 설교''(Two Sermonseng), 1624, 제임스 1세의 4대 의회 의원들에게 연설한 것으로, 강력한 반가톨릭 내용을 담고 있다.[1]
- ''그리스도 안의 사람''(The Man in Christeng), 제2판, 런던, 1629, 여기에 ''창조물에서 온 명상''(Meditations from the Creatureseng)이 포함됨, 제4판. 1635.
- ''회개의 실천''(The Practice of Repentance, laid down in sundry Directions, together with the Helpes, Lets, Signes and Motiveseng), 제2판. 1629; 4판 1635.
- ''규범 비타에: 복음 아래의 법의 규칙''(Regula Vitæ: the Rule of the Law under the Gospellat), 런던, 1631; 1635년 재인쇄. 반율법주의에 반대하는 작품으로, 로버트 타운은 1644년 ''은혜의 주장''(Assertion of Graceeng)에서 이에 응답했다.[5]
- ''성도의 완전한 성화로의 진보''(The Progresse of Saints to full Holinesseeng), 런던, 1630; 또 다른 판. 1631. 로버트 할리 경에게 헌정[1]
- ''신중한 걷기''(Circumspect Walkingeng), 런던, 1631, 12모; 런던, 1658년 재인쇄.
- ''용 또는 사탄의 몰락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Christ's Victorie over the Dragon, or Satan's Downfalleng), 런던. (출판 연도 불명)
- 세 편의 논문: ''복음의 진주''(The Pearle of the Gospelleng), ''순례자의 직업''(The Pilgrims Professioneng), 그리고 ''여성을 위한 거울''(A Glasse for Gentlewomeneng), 런던, 1633.
- ''기독교 실천의 원리''(Principles of Christian Practiceeng), 1635.
- ''그리스도 계시''(Christ Revealedeng), 1635, 4토; 웨일스 트레베카의 레이디 헌팅던 신학교에서 1766년에 재인쇄되었고, 글래스고에서 1816년에 재인쇄되었으며, 웨일스어로 번역되어 머서티드빌에서 1811년에 출판되었다.
- ''모세와 아론, 또는 유형과 그림자 . . . 설명됨''(Moses and Aaron, or the Types and Shadowes of our Saviour . . . explainedeng), 1653년, 윌리엄 제맷(William Jemmat)의 서문 포함. 제맷은 서문에서 테일러를 "계몽된 의사"(an illuminated doctoreng)라고 칭했으며, 이 표현은 토마스 풀러와 앤서니 우드가 인용했다.
테일러의 작품 전집은, 그 중 어느 것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출판되었다:[2]
# 에드먼드 캘러미의 서문과 조셉 캐릴의 연설 포함, 런던, 1653년;
# 저자의 생애와 56세의 초상화(토마스 크로스 조각) 포함, 런던 1658;
# ''유능하고 학식 있는 토마스 테일러의 작품''(The Works of the Judicious and Learned Thomas Tayloreng), 런던, 1659.
참조
[1]
간행물
Taylor, Thomas
[2]
서적
Taylor, Thomas (1576-1633)
[3]
문서
[4]
간행물
Henderson, Frances
[5]
간행물
Towne, Ro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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