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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미자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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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미자니노는 이탈리아의 매너리즘 화가로, 1503년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태어나 1540년 사망했다. 그는 18세 이전에 '바르디 제단화'를 완성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로마 약탈 이후 볼로냐와 파르마에서 활동하며 '성인과 함께 있는 성모자', '목이 긴 성모'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파르미자니노는 에칭의 선구자로서 판화 제작에도 기여했으며, '성 히에로니무스의 환시', '장미의 성모'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매너리즘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파르미자니노는 필리포 마촐라와 도나텔라 아바티의 여덟 번째 자녀였다. 그의 아버지는 파르미자니노가 태어난 지 2년 만에 흑사병으로 사망했고, 아이들은 삼촌 미켈레와 피에르 일라리오의 손에서 자랐는데, 바사리에 따르면 그들은 재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예술가였다.[5] 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인 피에르 일라리오(Pier Ilario)에게 길러졌는데, 이 삼촌이 예술가였기에 그림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9]

1515년, 그의 삼촌은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의 예배당 장식을 위해 니콜로 장그란디로부터 의뢰를 받았는데, 이 작업은 후에 젊은 파르미자니노가 완성했다. 18세가 되기 전에 이미 ''바르디 제단화''를 완성했다.

1521년, 파르미자니노는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교황 군대 사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비아다나로 보내졌다(사촌과 결혼할 화가 지로라모 베돌리와 함께). 비아다나에서 그는 템페라 기법으로 두 개의 패널을 그렸는데, 하나는 성 프란체스코를 묘사하여 프라티 데' 조콜리 교회를 위해, 다른 하나는 ''성 카타리나의 신비로운 결혼''을 묘사하여 산 피에트로 교회를 위해 제작했다. 그는 또한 산 조반니에서 작업했으며 코레조를 만났는데, 코레조는 프레스코 장식 작업을 하고 있었다.

''목이 긴 성모'' (1535-40)


1524년, 그는 '예수 할례'와 '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을 포함한 다섯 점의 소품 그림을 가지고 메디치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후원을 얻기 위해 로마로 갔다. 바사리는 파르미자니노가 로마에서 "라파엘로의 환생"으로 칭송받았다고 기록했다. 1526년 1월, 파르미자니노와 그의 삼촌 피에르 일라리오는 치타 디 카스텔로 출신의 마리아 부팔리나와 함께 라우로의 산 살바토레 교회에 '성 예로니모의 환시' 제단화(1526-27, 런던 국립 미술관)를 장식하기로 합의했다. 1년 안에 발생한 로마 약탈로 인해 파르미자니노와 다른 많은 예술가들은 피신해야 했다.

그는 약 3년 동안 볼로냐에 머물렀다. 1528년경에 그는 《성인과 함께 있는 성모자》(볼로냐 피나코테카)를 그렸고, 이후 1528년에는 《장미를 든 성모》 (드레스덴)와 《성 자카리아와 함께 있는 성모》 (우피치)를 그렸다. 1530년까지 파르미자니노는 파르마로 돌아갔다.

''성 제롬의 환상''(1526-27)


1531년, 파르미자니노는 미완성된 산타 마리아 델라 스테카타 성당에서 성 요셉과 세례자 요한을 묘사한 두 개의 제단화를 의뢰받았다. 교회를 감독하는 형제단은 그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재료와 자재를 약속했지만, 1535년까지 프로젝트는 미완성 상태였다. 12월, 그는 로마 교황청의 파르마 성직자인 돈 니콜라 카솔라를 법적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파르미자니노는 그가 보니파치오 고차디니로부터 《성 세례자 요한과 성 자카리아와 함께 있는 성모》에 대한 50개의 금화 ''스쿠디''를 징수하도록 승인했다.

1534년, 《목이 긴 성모》(《목이 긴 성모》)는 엘레나 바이아르디 가족의 예배당에 걸기로 결정되었다.

파르미자니노는 아마도 코레조의 뒤를 이어 교회의 총애를 받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1538년 4월, 행정 사무소는 처음에는 조르조 간디니 델 그라노, 그 다음에는 지롤라모 베돌리에게 파르마 대성당의 앱스와 성가대석을 장식하도록 의뢰했다.

이 시기에 그는 연금술의 신봉자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바사리는 이것이 그가 마법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학자들은 이제 파르미자니노의 과학적 관심사가 그의 에칭을 위한 새로운 매체를 찾으려는 집착 때문일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의 연금술 연구의 결과로, 그는 교회에서 거의 작업을 완료하지 못했다. 그는 콘프라테르니타가 만장일치로 그에게 교회의 작업을 계속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후 계약 위반으로 두 달 동안 투옥되었다. 그는 1539년에서 1540년 사이에 줄리오 로마노 (화가)로 대체되었으며, 줄리오 로마노 역시 즉시 계약에서 철수했다.

''연인들''(에칭과 조각)


파르미자니노는 1540년 8월 24일 카잘마조레에서 열병으로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세르비테 수도회 성당에 "가슴에 사이프러스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지닌 채 벌거벗은 상태"로 묻혔다.

파르미자니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로는 그의 사촌 지롤라모 마주올리와 지롤라모의 아들 알레산드로 마주올리, 폼포네오 아미다노, 자코모 베르토이아, 프란체스코 보르가니 등이 있다.

2. 1. 초기 생애 (1503-1523)

파르미자니노는 필리포 마촐라와 도나텔라 아바티의 여덟 번째 자녀였다. 그의 아버지는 파르미자니노가 태어난 지 2년 만에 흑사병으로 사망했고, 아이들은 삼촌 미켈레와 피에르 일라리오의 손에서 자랐는데, 바사리에 따르면 그들은 재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예술가였다.[5] 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인 피에르 일라리오(Pier Ilario)에게 길러졌는데, 이 삼촌이 예술가였기에 그림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9]

1515년, 그의 삼촌은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의 예배당 장식을 위해 니콜로 장그란디로부터 의뢰를 받았는데, 이 작업은 후에 젊은 파르미자니노가 완성했다. 18세가 되기 전에 이미 ''바르디 제단화''를 완성했다.

1521년, 파르미자니노는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교황 군대 사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비아다나로 보내졌다(사촌과 결혼할 화가 지로라모 베돌리와 함께). 비아다나에서 그는 템페라 기법으로 두 개의 패널을 그렸는데, 하나는 성 프란체스코를 묘사하여 프라티 데' 조콜리 교회를 위해, 다른 하나는 ''성 카타리나의 신비로운 결혼''을 묘사하여 산 피에트로 교회를 위해 제작했다. 그는 또한 산 조반니에서 작업했으며 코레조를 만났는데, 코레조는 프레스코 장식 작업을 하고 있었다.

2. 2. 로마 시대 (1524-1527)

1524년, 파르미자니노는 메디치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후원을 얻기 위해 예수 할례와 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을 포함한 다섯 점의 소품 그림을 가지고 로마로 갔다.[9] 바사리는 파르미자니노가 로마에서 "라파엘로의 환생"으로 칭송받았다고 기록했다. 1526년 1월, 파르미자니노와 그의 삼촌 피에르 일라리오는 치타 디 카스텔로 출신의 마리아 부팔리나와 함께 라우로의 산 살바토레 교회에 성 예로니모의 환시 제단화(1526-27, 런던 국립 미술관)를 장식하기로 합의했다.[9] 그러나 1년 안에 발생한 로마 약탈로 인해 파르미자니노와 다른 많은 예술가들은 피신해야 했다.[9]

2. 3. 볼로냐와 파르마 시대 (1527-1540)

파르미자니노는 1527년 로마 약탈 이후 약 3년 동안 볼로냐에 머물렀다. 1528년경에는 《성인과 함께 있는 성모자》(볼로냐 피나코테카)를 그렸고, 1528년에는 《장미를 든 성모》(드레스덴)와 《성 자카리아와 함께 있는 성모》(우피치)를 그렸다. 1530년까지 파르미자니노는 파르마로 돌아갔다.

1531년, 파르미자니노는 산타 마리아 델라 스테카타 성당에서 성 요셉과 세례자 요한을 묘사한 두 개의 제단화를 의뢰받았다. 하지만 1535년까지 프로젝트는 미완성 상태였다. 12월, 그는 로마 교황청의 파르마 성직자인 돈 니콜라 카솔라를 법적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파르미자니노는 그가 보니파치오 고차디니로부터 《성 세례자 요한과 성 자카리아와 함께 있는 성모》에 대한 50개의 금화 ''스쿠디''를 징수하도록 승인했다.

1534년, 《목이 긴 성모》는 엘레나 바이아르디 가족의 예배당에 걸기로 결정되었다.

파르미자니노는 코레조의 뒤를 이어 교회의 총애를 받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1538년 4월, 행정 사무소는 조르조 간디니 델 그라노, 지롤라모 베돌리에게 파르마 대성당의 앱스와 성가대석을 장식하도록 의뢰했다.

이 시기에 그는 연금술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사리는 이것이 그가 마법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지만, 학자들은 파르미자니노의 과학적 관심사가 에칭을 위한 새로운 매체를 찾으려는 집착 때문일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의 연금술 연구의 결과로, 그는 교회에서 거의 작업을 완료하지 못했다. 그는 콘프라테르니타가 만장일치로 그에게 교회의 작업을 계속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후 계약 위반으로 두 달 동안 투옥되었다. 1539년에서 1540년 사이에 줄리오 로마노 (화가)로 대체되었으며, 줄리오 로마노 역시 즉시 계약에서 철수했다.

파르미자니노는 1540년 8월 24일 카잘마조레에서 열병으로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세르비테 수도회 성당에 "가슴에 사이프러스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지닌 채 벌거벗은 상태"로 묻혔다.

파르미자니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로는 그의 사촌 지롤라모 마주올리와 지롤라모의 아들 알레산드로 마주올리, 폼포네오 아미다노, 자코모 베르토이아, 프란체스코 보르가니 등이 있다.

3. 작품 세계

파르미자니노는 이탈리아 동판화의 선구자였다.[7] 이 기법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개척되었지만, 소묘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구리판 인쇄 기술은 특별한 기술을 요구했지만, 잉크 대신 산을 사용하여 예술가의 손길의 즉흥성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 "우아한 인물 드로잉의 대가"인 파르미자니노를 매료시켰다.[7] 파르미자니노는 다른 예술가들이 판각한 명암법 목판화도 디자인했다. 그의 판화 작품 수는 적었지만, 이탈리아 판화 제작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판화 중 일부는 조반니 야코포 카라글리오와 협력하여 제작되었다.

파르미자니노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의 세례'' (1519년경) – 베를린 회화관
  • ''바르디 제단화'' (1521) – 산타 마리아 교회, 바르디
  • ''성 바르바라'' (1522) – 프라도 미술관
  • ''예수의 할례'' (1523년경) – 디트로이트 미술관
  • ''볼록 거울 속 자화상'' (1524년경) – 빈 미술사 박물관
  • ''수집가의 초상화'' (1524년경) – 런던 내셔널 갤러리
  • ''갈레아초 산비탈레의 초상'' (1524) – 카포디몬테 미술관
  • ''로렌초 치보의 초상'' (1524) – 코펜하겐 국립 미술관
  • ''다이애나와 악테온의 신화'' (1524년경) – 프레스코, 로카 산비탈레, 폰타넬라토
  • ''천사들과 함께하는 성가족'' (1524년경) – 프라도 미술관
  • ''안테아'' (1524년경–1527년경) – 카포디몬테 미술관
  • ''성모자와 아기 예수'' (1525) –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 ''성 제롬의 환상'' (1526년경–1527년경) – 런던 내셔널 갤러리
  • ''성 바울의 개종'' (1527년경) – 빈 미술사 박물관
  • ''아기 세례 요한이 있는 성가족'' (1528년경) – 카포디몬테 국립 박물관
  • ''성녀 카테리나의 신비로운 결혼'' (1529) – 런던 내셔널 갤러리
  • ''터키 노예'' (''여인의 초상''; 1533년경) – 파르마 국립 미술관
  • ''활을 만드는 큐피드'' (1533년경–1535년경) – 빈 미술사 박물관
  • ''목이 긴 성모'' (1534년경–1540년경) – 우피치 미술관
  • ''피에르 마리아 로시 디 산 세콘도의 초상'' (1535년경–1539년경) – 프라도 미술관
  • ''성 요한과 막달레나를 동반한 성모자와 아기 예수'' (1535년경-1540년경) - 게티 센터
  • ''카밀라 곤차가와 세 아들의 초상'' (1539년경–1540년경) – 프라도 미술관


3. 1. 주요 작품

파르미자니노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의 세례'' () – 베를린 회화관
  • ''바르디 제단화'' (1521) – 산타 마리아 교회, 바르디
  • ''성 바르바라'' (1522) – 프라도 미술관
  • ''예수의 할례'' (c. 1523) – 디트로이트 미술관
  • ''볼록 거울 속 자화상'' (c. 1524) – 빈 미술사 박물관
  • ''수집가의 초상화'' (c. 1524) – 런던 내셔널 갤러리
  • ''갈레아초 산비탈레의 초상'' (1524) – 카포디몬테 미술관
  • ''로렌초 치보의 초상'' (1524) – 코펜하겐 국립 미술관
  • ''다이애나와 악테온의 신화'' (c. 1524) – 프레스코, 로카 산비탈레, 폰타넬라토
  • ''천사들과 함께하는 성가족'' (c. 1524) – 프라도 미술관
  • ''안테아'' (c. 1524–7) – 카포디몬테 미술관
  • ''성모자와 아기 예수'' (1525) –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 ''성 제롬의 환상'' (1526–1527) – 런던 내셔널 갤러리
  • ''성 바울의 개종'' (c. 1527) – 빈 미술사 박물관
  • ''아기 세례 요한이 있는 성가족'' (c.1528) – 카포디몬테 국립 박물관
  • ''성녀 카테리나의 신비로운 결혼'' (1529) – 런던 내셔널 갤러리
  • ''터키 노예'' (''여인의 초상''; c. 1533) – 파르마 국립 미술관
  • ''활을 만드는 큐피드'' (c. 1533–1535) – 빈 미술사 박물관
  • ''목이 긴 성모'' (1534–40) – 우피치 미술관
  • ''피에르 마리아 로시 디 산 세콘도의 초상'' (c. 1535–1539) – 프라도 미술관
  • ''성 요한과 막달레나를 동반한 성모자와 아기 예수'' (c. 1535-1540) - 게티 센터
  • ''카밀라 곤차가와 세 아들의 초상'' (c. 1539–1540) – 프라도 미술관


3. 2. 판화

파르미자니노는 이탈리아 동판화의 선구자였다.[7] 이 기법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개척되었지만, 소묘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7] 구리판 인쇄 기술은 특별한 기술을 요구했지만, 잉크 대신 산을 사용하여 예술가의 손길의 즉흥성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 "우아한 인물 드로잉의 대가"인 파르미자니노를 매료시켰다.[7] 파르미자니노는 다른 예술가들이 판각한 명암법 목판화도 디자인했다.[7] 그의 판화 작품 수는 적었지만, 이탈리아 판화 제작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7] 그의 판화 중 일부는 조반니 야코포 카라글리오와 협력하여 제작되었다.[7]

4. 영향

5.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미술품
[2] 사전 Parmigianino https://web.archive.[...] Oxfo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Parmigianino 2019-06-15
[4] 인용
[5] 서적 Lives of the Artists: Volume 2 Penguin Classics
[6] 서적 The picture amateur's handbook and dictionary of painters https://books.google[...]
[7] 기타 Correggio and Parmigianino http://www.thecityre[...]
[8] 백과사전 Parmigianino Italian artist https://www.britanni[...]
[9] 서적 Lives of the Artists: Volume 2 Penguin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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