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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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라라 전쟁은 1482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페라라 공국 간에 발발한 분쟁으로, 1484년 바뇰로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베네치아의 소금 무역 독점에 대한 페라라의 도전, 그리고 교황 식스토 4세의 권력 확대를 위한 외교적 개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베네치아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비고 지역을 획득했지만, 교황과의 갈등을 겪었고, 이는 식스토 4세의 사망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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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라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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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라 전쟁 | |
분쟁 | 페라라 전쟁 |
날짜 | 1482년 ~ 1484년 |
장소 | 페라라 |
결과 | 베네치아 승리, 로비고를 베네치아에 양도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Emblem of the Papacy SE.svg|18px]] 교황청 (1482)' '베네치아 공화국' |
교전국 2 | '[[파일:Arms of the house of Este (1).svg|16px]] 페라라 공국' '[[파일:Coat of arms of the House of Gonzaga (1433).svg|16px]] 만토바 변경백국' '[[파일:Emblem of the Papacy SE.svg|18px]] 교황청 (1483-1484)' '나폴리 왕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로베르토 산세베리노 |
지휘관 2 |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
2. 외교적 배경
1478년 파치 음모사건으로 피렌체가 교황령과 나폴리 연합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로렌초는 페르디난도 1세와의 외교를 통해 1480년에 평화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평화는 베네치아와 교황 식스토 4세 모두를 불만스럽게 했다.[1]
1479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오랜 분쟁을 마무리한 베네치아는[1] 이탈리아 반도 내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특히 베네치아가 독점하던 소금 무역을 두고 페라라와 갈등이 있었다. 에르콜레 1세 데스테가 통치하던 페라라는 코마키오 제염소를 장악하여 베네치아의 이익을 침해했다.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1480년 포를리를 점령하고 교황의 승인을 얻어 델라 로베레 가문의 영토 확장을 위해 페라라를 주시하고 있었다.[2] 1482년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사소한 특혜 위반 문제였다. 페라라 주교는 베네치아 대표인 비스도미니오를 파문하고 추방했는데, 베네치아는 이를 전쟁 명분으로 삼았다.[2]
이 전쟁에서 베네치아와 교황령은 제노바 공화국,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8세 델 몬페라토의 지원을 받았다.[3] 페라라는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지휘하는 페라라군, 페르디난도 1세 디 나폴리의 아들 칼라브리아의 알폰소가 이끄는 나폴리군, 루도비코 일 모로가 보낸 밀라노 군대, 만토바의 페데리코 1세 곤차가와 볼로냐의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2. 1. 파치 음모사건과 피렌체의 위기 (1478년)
1478년에 벌어진 파치 음모사건으로 인해 피렌체는 교황령과 나폴리 등의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매우 불리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전쟁 중 주변 동맹국들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피렌체는 연이은 패전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피렌체의 실권자인 로렌초(1449~92)는 페르디난도 1세와 대담한 외교전을 펼쳐 1480년에 종전과 함께 평화를 이끌어냈다.[1] 그러나 이 예기치 못한 평화는 베네치아와 교황 식스토 4세의 추종자들 모두를 매우 불만스럽게 만들었다.2. 2.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의 관계 (1479년)
1479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16년간 이어진 분쟁을 종결했다.[1] 이로써 베네치아는 국내 문제와 이탈리아 반도 내 갈등 해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2. 3. 페라라와 베네치아 간의 갈등
에르콜레 1세 데스테가 통치하던 페라라는 코마키오에 있는 제염소를 장악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베네치아의 소금 무역 독점에 대한 위협이었다.[2] 베네치아는 이몰라와 포를리의 군주이자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1480년 9월 포를리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한 후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델라 로베레 가문의 영지 확장을 위해 페라라를 주시하고 있었다.[2]1482년 초, 전쟁의 명분은 베네치아의 특혜 위반 시비였다. 베네치아는 페라라에 베네치아인 지역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비스도미니오라는 고위 대표를 파견했다. 1481년, 페라라 주교는 성직자 체포를 권한 남용으로 판단하여 비스도미니오를 파문하고 추방했는데, 베네치아는 이를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2]
2. 4. 교황 식스토 4세와 지롤라모 리아리오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1480년 9월 포를리를 점령했고, 교황은 이를 즉시 승인했다.[2] 델라 로베레 가문(교황 식스토 4세의 출신 가문)의 영토 확장을 꾀하던 리아리오는 페라라를 주시하고 있었다.[2]2. 5. 전쟁의 명분 (1482년)
1481년, 채무 불이행을 이유로 성직자가 체포되자, 페라라 주교는 대리인을 통해 페라라 주재 베네치아 비스도미니오를 파문하고 페라라에서 추방했다. 페라라 주교는 이를 권한 남용으로 판단했다. 베네치아는 이것을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2]3. 전쟁의 동맹 관계
1478년 파치 음모사건 이후, 피렌체는 교황령과 나폴리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페르디난도 1세와의 외교를 통해 1480년 평화를 맺었으나, 베네치아와 교황 식스토 4세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1]
에르콜레 1세 데스테 치하의 페라라는 코마키오 제염소를 장악해 베네치아의 소금 무역을 위협했다. 베네치아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의 지원을 받았다. 리아리오는 포를리를 점령하고 교황청 승인을 얻어 페라라를 주시했다.[2]
1481년, 페라라 주교가 베네치아 대표를 파문하고 추방하자 베네치아는 이를 전쟁 명분으로 삼았다.[2] 베네치아는 제노바 공화국,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8세 델 몬페라토의 지원을 받았다.[3]
3. 1. 베네치아 측 동맹
베네치아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리아리오는 1480년 9월 포를리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였고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낸 후 델라 로베레 가문의 영지 확장을 위하여 페라라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3]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은 교황령군과 리아리오 측은 제노바 공화국,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8세 델 몬페라토의 지원을 받았다.[3]
3. 2. 페라라 측 동맹
파치 음모사건으로 인해 피렌체가 교황령 및 나폴리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로렌초 데 메디치의 외교적 노력으로 1480년 평화가 찾아왔으나 베네치아와 교황 식스토 4세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1] 에르콜레 1세 데스테가 통치하던 페라라는 코마키오의 제염소를 장악하며 베네치아의 소금 무역에 위협을 가했다.[2]페라라 측 동맹군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지휘하는 페라라군, 페르디난도 1세 디 나폴리의 아들 알폰소 2세 디 나폴리가 이끄는 나폴리군, 루도비코 일 모로의 밀라노 군대, 페데리코 1세 곤차가의 만토바 군대,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의 볼로냐 군대가 연합하여 구성되었다.[3]
4. 전쟁 과정
콘도티에로 로베르토 산세베리노[4]가 이끈 베네치아군의 공세와 식스토 4세 교황의 입장 변화, 캄포모르토 전투 등 초반에 유리하게 진행되던 베네치아에게 불리한 상황들이 발생하였다.
피렌체 파견대가 도착하며, 에스테 가문의 전운은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는 견제 작전을 위해 비스콘티 가문의 계승 권리를 지원하겠다는 핑계로 로베르토 산세베리노를 밀라노 공국 침략에 보냈지만, 밀라노 영토를 약탈하던 로베르토가 알폰소에게 반격당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4. 1. 베네치아의 초기 공세 (1482년)
콘도티에로 로베르토 산세베리노[4]가 이끈 베네치아군은 북쪽으로부터 페라라 영토를 공격했으며, 맹렬하게 아드리아를 약탈하였다. 신속히 코마키오를 통과하였으며, 해수 소택지의 끝에 있는 아르젠타를 공격하였고 5월에 피카롤로(6월 29일에 함락)와 로비고(8월 17일에 함락)에 공성전을 벌였다.베네치아군은 포강을 넘어 1482년 11월 이전에 페라라 성벽에 도달하여 공성전을 벌였다.
4. 2. 교황 식스토 4세의 입장 변화
식스토 4세는 이탈리아 북부 본토에서 베네치아가 강력한 위치를 갖는 것에 불안감을 느껴 전쟁이 진행되던 중 마음을 바꾸기로 하였다.[4]교황령에서는 콜론나 가문이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그들의 적인 델라 로베레 가문과 싸움을 벌였다. 1482년 8월 21일 벨레트리 인근 캄포모르토 전투에서 나폴리군은 로베르토 말라테스타에게 완패하였고, 칼라브리아 공작은 그의 튀르크인 부대에게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일부 오르시니 가문의 성들도 교황령의 손에 떨어졌으나, 그곳에서 발생한 말라리아로 전투가 실패하고, 로베르토 말라테스타는 9월 10일 로마에서 사망하여 라치오에 있는 교황령 영토는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식스토 4세는 11월 28일에 나폴리와 단독 강화를 맺었고, 평화 조약은 12월 12일에 이뤄졌다.
베네치아 대사의 철수와 파문 위협과 함께 베네치아에 전쟁을 중단하라는 교황의 간청은 완강하게 거절당하였으며, 1483년 5월 식스토 4세는 베네치아를 파문한다는 명령을 내렸다.[4] 식스토 4세는 비르지니오 오르시니 지휘 하의 교황군의 도움을 받아 알폰소와 그의 군대에게 교황의 최근까지의 동맹군들을 상대로 페라라를 방어하러 가는 이들에게 자유 통행권을 약속하였다.
4. 3. 캄포모르토 전투 (1482년)
1482년 8월 21일 벨레트리 인근에서 벌어진 캄포모르토 전투에서 로베르토 말라테스타가 이끄는 교황군은 칼라브리아 공작이 이끄는 나폴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4] 칼라브리아 공작은 그의 튀르크인 부대에게 극적으로 구출되었다.그러나 전투 후 교황령에서 발생한 말라리아로 인해 로베르토 말라테스타는 1482년 9월 10일 로마에서 사망했고, 교황령의 라치오 영토는 완전히 와해되었다.[4]
4. 4. 밀라노 공국 침공 실패
콘도티에로 로베르토 산세베리노[4]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북쪽에서 페라라 영토를 공격하여 아드리아를 약탈하고 코마키오를 빠르게 통과했다. 그 후 해수 소택지 끝에 있는 아르젠타를 공격하고, 5월에는 피카롤로(6월 29일 함락)와 로비고(8월 17일 함락)에 공성전을 벌였다. 1482년 11월 이전에 베네치아군은 포강을 넘어 페라라 성벽에 도달하여 공성전을 벌였다.베네치아는 비스콘티 가문의 계승권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로베르토 산세베리노를 밀라노 공국 침략에 보냈지만, 이 작전은 밀라노 영토를 약탈하던 로베르토가 알폰소에게 반격당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전쟁은 가속도를 잃기 시작했다.
5. 바뇰로 조약 (1484년)
1484년 8월 7일에 체결된 바뇰로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에르콜레 공작은 전쟁 초기에 패배했었던 폴레시네의 로비고를 양도하였으며, 베네치아군은 점령했던 페라라 영토에서 철수하였다. 에르콜레 공작은 에스테 가문의 터전인 페라라가 교황령에 흡수되는 것을 막았다.[5]
바뇰로 평화 조약으로 로비고와 비옥한 포강 삼각주 지역을 할양받으며 베네치아의 ''테라 페르마'' 확장 정책이 확인되었다. 이 획득은 베네치아 영토의 정점을 보여주었으며, 베네치아는 15세기 후반처럼 이렇게 넓은 영토를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주지 못하였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스토 4세는 자신의 협의 없이 조약이 체결된 것에 불쾌해했다.[5]
6. 결과 및 영향
1484년 8월 7일 바뇰로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에르콜레 공작은 전쟁 초기에 패배했던 폴레시네의 로비고를 양도해야 했고, 베네치아군은 점령했던 페라라 영토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에르콜레 공작은 에스테 가문의 터전인 페라라가 교황령에 흡수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5]
식스토 4세는 영토 확장 야망을 위해 베네치아군의 연승을 이용하여 평화를 유지하려 했고, 작은 핑계로 페라라에 전쟁을 선포했다. 피렌체, 나폴리, 만토바, 밀라노, 볼로냐는 페라라 편에 섰다. 교황령군은 페라라를 지원하러 북쪽으로 향하던 나폴리군을 억제했고, 로마의 캄파냐는 콜론나 가문의 압박을 받았다. 밀라노는 제노바와 싸우느라 바빴고, 베네치아는 페라라를 굶주림에 빠뜨리기 위해 포위 작전을 펼쳤다. 베네치아가 페라라를 점령할 준비를 하자, 이전의 동맹을 두려워한 교황은 나폴리와 조약을 맺으며 갑자기 편을 바꿨다. 나폴리군은 교황의 영토 통과 허락을 받아 페라라를 지원하고 포위를 풀었다. 동시에 교황은 베네치아를 파문하고, 모든 이탈리아 국가들이 베네치아에 맞서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부추겼다.[5]
바뇰로 평화 조약으로 로비고와 비옥한 포 강 삼각주 지역을 할양받아, 베네치아의 ''테라 페르마'' 확장 정책이 절정에 달했다. 이 획득은 베네치아 영토의 정점을 상징하며, 베네치아는 15세기 후반처럼 넓은 영토를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5]
식스토 4세는 자신의 협의 없이 조약이 체결된 것에 불쾌해했다. 그는 조약 내용에 격분하여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부끄러움과 굴욕 속에 평화가 선언되었다. 통풍을 앓던 그는 이 소식에 충격을 받아 1484년 8월 12일, 다음날 사망하였다.[5]
페라라 전쟁은 무명의 시인이 쓴 ''La guerra di Ferrara''라는 시의 주제로도 사용되었다.[5]
참조
[1]
서적
바다의 도시 이야기
한길사
1996-02-10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웹사이트
on-line text
http://dante.di.un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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