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바르디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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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롬바르디아 전쟁은 1423년부터 1454년까지 밀라노 공국과 주변 국가들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통칭한다. 제1차 전쟁은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영토 확장 야망으로 시작되었고, 피렌체와 밀라노 간의 대립으로 번졌다. 제2차 전쟁은 지기스문트 황제의 조언으로 비스콘티 가문이 조약을 거부하면서 재발했고, 제3차 전쟁은 비스콘티 가문이 루카를 차지하려 하면서 발생했다. 제4차 전쟁은 콘도티에리 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어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간의 세력 다툼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제5차 전쟁(밀라노 계승 전쟁)은 비스콘티 가문이 단절된 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를 장악하면서, 밀라노와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간의 세력 균형을 위한 로디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롬바르디아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적 지형을 변화시키고, 세력 균형이라는 유럽 정치 원칙의 등장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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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디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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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명 | 롬바르디아 전쟁 |
시기 | 1423년–1454년 |
장소 | 롬바르디아 |
결과 | 로디 조약 체결, 세력 균형 및 안정의 시기 도래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Coat of Arms of the Republic of Venice.svg|23px]] 베네치아 공화국 [[파일:Arms of Florence.svg|23px]] 피렌체 공화국 (1450년까지) 나폴리 왕국 사보이 공국 몬페라토 변경백국 |
교전국 2 | [[파일:Blason famille it Visconti2.svg|23px]] 밀라노 공국 제노바 공화국 만토바 변경백국 루카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 [[파일:Arms of Florence.svg|23px]] 피렌체 공화국 (1450년부터) 프랑스 왕국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프란체스코 부소네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 타데오 데스테 니콜로 포르테브라초 자코포 피치니노 |
교전국 2 지휘관 |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코시모 데 메디치 니콜로 피치니노 니콜로 포르테브라초 앙주 공작 르네 |
주요 전투 | |
전투 목록 | 1424년 차고나라 1427년 마클로디오 1431년 손치노 1431년 포 강 1432년 산로마노 1432년 델레비오 브레시아 1438–1440 1440년 앙기아리 1452년 폰테비코 1453/5년 폰테비코 1453년 게디 1453/10년 폰테비코 |
기타 | |
관련 정보 | 베네치아는 1402년에 베로나를, 1405년에 파도바를, 그리고 베네치아의 테라 페르마(본토)인 나머지 롬바르디아 동부 지역을 진압했다. 이전에는 베네치아가 절대적으로 해상력만 가지고 있었고,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투에서 특히 절정에 오른 키오자 전투등 모두 해전이였다. |
오스만 제국 확장 | 오스만의 영향력이 발칸반도로 확장되고 에게해에서 1415년 이래로 간헐적인 전쟁이 발발함. |
페라라 전쟁 | 하지만 잠시 페라라 전쟁 (1482년–1484년)이 발발하여 바뇰로 조약이 채결됐다.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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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차 전쟁 (1423년-1426년)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영토 확장에 대한 야망으로 롬바르디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포를리의 영주 조르조 오르델라피 사후, 그의 아들 테오발도 2세의 후견인으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지명되었다. 그러나 테오발도 2세의 어머니이자 이몰라 영주인 루크레치아 델리 알리도시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스스로 섭정을 맡았다. 이에 포를리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밀라노의 콘도티에로인 아뇰로 델라 페르골라를 도시로 불러들였다(1423년 5월 14일).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피렌체는 비스콘티 가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피렌체의 용병대장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이몰라의 알리도시 가문을 돕기 위해 로마냐로 진군했으나 패배하였고, 1424년 2월 14일 이몰라는 함락되었다.
2. 1. 발단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영토 확장에 대한 야망으로 롬바르디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포를리의 영주 조르조 오르델라피 사후, 그의 아들 테오발도 2세의 후견인으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지명되었다. 그러나 테오발도 2세의 어머니이자 이몰라 영주인 루크레치아 델리 알리도시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스스로 섭정을 맡았다. 이에 포를리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밀라노의 콘도티에로인 아뇰로 델라 페르골라를 도시로 불러들였다(1423년 5월 14일).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피렌체는 비스콘티 가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피렌체의 용병대장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이몰라의 알리도시 가문을 돕기 위해 로마냐로 진군했으나 패배하였고, 1424년 2월 14일 이몰라는 함락되었다.
2. 2. 경과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영토 야망에 맞서 발생한 첫 번째 전쟁은 포를리의 군주 조르조 오르델라피와 그의 아들 테오발도의 후견인 문제와 연관이 있었다. 이몰라 군주의 딸인 루크레치아 델리 알리도시는 테오발도의 후견인으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선정된것에 동의하지 않고 직접 섭정을 맡았다. 포를리인들은 이에 반란을 일으키고 밀라노인 콘도티에로 아뇰로 델라 페르골라를 도시로 불러들였다(1423년 5월 14일). 피렌체는 이에 맞서 비스콘티 가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피렌체의 용병대장인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이몰라의 알리도시 가문을 돕기위해 로마냐로 진군했으나, 패배하고 이몰라는 1424년 2월 14일 함락되고 말았다. 루이지 델리 알리도시는 밀라노로 생포되어 보내졌고 며칠 뒤 파엔차의 군주 구이단토니오 만프레디가 비스콘티 세력에 가담했다. 그때 피렌체 군대를 지휘하던 카를로 말라테스타는 차고나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비스콘티 가문측이 풀어주고 그도 밀라노 측에 가담하였다. 피렌체는 이어서 니콜로 피치니노와 오도 다 몬토네를 고용했지만, 그 두 명도 발디라모네에서 격퇴당했다. 오도는 전사했고 피치니노는 만프레디에게 비스콘티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해야한다고 설득할 수 있었다.
로마냐에서의 작전이 실패한 후, 피렌체는 리구리아에서 나폴리의 아라곤인들과 동맹하여 비스콘티에 저항했다. 24척의 아라곤 갤리선 함대와 육군이 밀라노와 맞서기 위해 제노바로 보내졌지만 실패하였다. 그동안에 피치니노와 다른 콘도티에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비스콘티 가문에 고용되었었는데, 구이도 토렐로가 지배하는 토스카나를 침공하도록 군대를 보냈었다. 그는 나중에 안기아리(Anghiari)와 파주올라(Faggiuola)에서 피렌체 군대를 패배시켰다.
피렌체의 재앙은 1425년 12월 4일 서약을 맺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반격하였다. 베네치아의 참전 동의는 베네치아의 롬바르디아 정복을 위한 파견과 피렌체의 토스카나와 로마냐 정복을 위한 파견등 두 국가간의 공동 비용을 추구하였고, 또다른 콘도티에로 카르마뇰라는 동맹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뒤이은 전쟁 기간(1425년–26년)에 최근까지 비스콘티 가문의 봉급을 받았던 카르마뇰라는 엄청난 수의 포병들을 동원하여 오랜 공성전을 거친후, 밀라노가 얼마전에 획득한 브레시아를 점령하였다(1426년 11월 26일). 한편 프란체스코 벰보 휘하의 포강에 있던 베네치아 함대는 파도바까지 진군하였고, 피렌체는 토스카나에 있는 그들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교황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미 포를리와 이몰라를 교황에게 넘긴 비스콘티 가문은 중재를 요청했다. 교황 특사 니콜로 델리 알베르가티의 중재를 통해, 평화 조약이 1426년 12월 30일 베네치아에서 채결됐다.
비스콘티 가문은 리구리아에서 피렌체가 점령한 땅을 돌려받았지만, 아메데오 8세 디 사보이아가 정복한 베르첼리 지역을 포기해야했고, 브레시아를 베네치아에게 넘기고 로마냐와 토스카나를 침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2. 3. 결과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영토 야망에 맞서 발생한 4번의 전쟁 중 첫 번째 전쟁의 결과, 1425년 12월 4일 베네치아 공화국이 피렌체와 동맹을 맺고 참전하였다. 베네치아의 참전 동의는 베네치아의 롬바르디아 정복과 피렌체의 토스카나와 로마냐 정복을 위한 공동 비용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콘도티에로 카르마뇰라가 동맹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카르마뇰라는 엄청난 수의 포병들을 동원하여 오랜 공성전 끝에 브레시아를 점령하였다(1426년 11월 26일). 한편 프란체스코 벰보 휘하의 포 강에 있던 베네치아 함대는 파도바까지 진군하였고, 피렌체는 토스카나에 있는 그들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교황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미 포를리와 이몰라를 교황에게 넘긴 비스콘티 가문은 중재를 요청했고, 교황 특사 니콜로 델리 알베르가티의 중재를 통해 1426년 12월 30일 베네치아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비스콘티 가문은 리구리아에서 피렌체가 점령한 땅을 돌려받았지만, 아메데오 8세가 정복한 베르첼리 지역을 포기해야 했고, 브레시아를 베네치아에게 넘기고 로마냐와 토스카나를 침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3. 제2차 전쟁 (1427년-1428년)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황제의 조언을 받은 비스콘티 가문은 조약을 거부하고 1427년 5월 전쟁을 다시 일으켰다. 밀라노는 카살마조레를 점령하고 브레셸로를 포위하였으며(브레셸로에 파견된 함대는 벰보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에 불태워졌다), 니콜로 피치니노가 5월 29일 고톨렌고에서 카르마뇰라를 격퇴시키는 등, 초기에 승리를 가져갔다. 베네치아 사령관은 니콜로 피치니노를 후퇴시켜내고 7월 12일에 카살마조레를 정복한 반면에 파르마 인근 몇 개의 성의 군주인 오를란도 팔라비치노는 아메데오 8세와 같이 비스콘티에 반란을 일으켰고 조반니 자코모 델 몬페라토는 동쪽으로부터 롬바르디아를 침공했다.
비스콘티 가문은 스포르차, 델라 페르골라(della Pergola), 피치니노, 구이도 토렐로 같은 당시 최고의 콘도티에로들에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기심 넘쳤기에, 카를로 말라테스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후에 마클로디오에서 밀라노군을 이끌었지만, 카르마뇰라 지휘하의 베네치아군에 대패하였다. 하지만 그 승리는 결정적이지 못했고, 비스콘티 가문은 아마데오 8세와 화해하고자 베르첼리를 넘겨주고 그의 딸 사보이아의 마리아와 혼인하였다. 하지만 스포르차가 제노바 망명군에게 패배하고 지기스문트의 도움을 원하자, 비스콘티 가문은 조약을 제안하였다. 교황의 중재하에 평화 조약은 1428년 4월 18일 페라라에서 체결됐다. 베네치아 총독이 베르가모와 크레마(1429년)에 파견되었고, 추가적으로 브레시아를 베네치아 소유로 인정했다. 피렌체는 볼테라 외에도 반란으로 잃었던 요새들을 되찾았다. 볼테라를 진입하기 위해 보내진 니콜로 포르테브라초 휘하의 피렌체 군대는 그 후에 과거 비스콘티 가문과 편을 섰던 파올로 구이니지가 군주로 있던 루카를 침공했다.
3. 1. 발단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황제의 조언을 받은 비스콘티 가문은 조약을 거부하고 1427년 5월 전쟁을 다시 일으켰다. 밀라노는 카살마조레를 점령하고 브레셸로를 포위하였으며, 니콜로 피치니노가 5월 29일 고톨렌고(Gottolengo)에서 카르마뇰라를 격퇴시키는 등 초기에 승리를 가져갔다. 베네치아 사령관은 니콜로 피치니노를 후퇴시키고 7월 12일에 카살마조레를 정복했다. 파르마 인근 몇 개의 성의 군주인 오를란도 팔라비치노는 아메데오 8세와 같이 비스콘티에 반란을 일으켰고 조반니 자코모 델 몬페라토는 동쪽으로부터 롬바르디아를 침공했다.3. 2. 경과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황제의 조언을 받은 비스콘티 가문은 조약을 거부하고 1427년 5월 전쟁을 일으켰다. 밀라노는 카살마조레를 점령하고 브레셸로를 포위하였으며(브레셸로 파견된 함대는 벰보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에 불태워졌다), 니콜로 피치니노가 5월 29일 고톨렌고에서 카르마뇰라를 격퇴시키는 등, 초기에 승리를 가져갔다. 베네치아 사령관은 니콜로 피치니노를 후퇴시켜내고 7월 12일에 카살마조레를 정복한 반면에 파르마 인근 몇 개의 성의 군주인 오를란도 팔라비치노는 아메데오 8세와 같이 비스콘티에 반란을 일으켰고 조반니 자코모 델 몬페라토는 동쪽으로부터 롬바르디아를 침공했다.비스콘티 가문은 스포르차, 델라 페르골라(della Pergola), 피치니노, 구이도 토렐로 같은 당시 최고의 콘도티에로들에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기심 넘쳤기에, 카를로 말라테스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후에 마클로디오에서 밀라노군을 이끌었지만, 카르마뇰라 지휘하의 베네치아군에 대패하였다. 하지만 그 승리는 결정적이지 못했고, 비스콘티 가문은 아마데오 8세와 화해하고자 베르첼리를 넘겨주고 그의 딸 사보이아의 마리아와 혼인하였다. 하지만 스포르차가 제노바 망명군에게 패배하고 지기스문트의 도움을 원하자, 비스콘티 가문은 조약을 제안하였다. 교황의 중재하에 평화 조약은 1428년 4월 18일 페라라에서 체결됐다. 베네치아 총독이 베르가모와 크레마(1429년)에 파견되었고, 추가적으로 브레시아를 베네치아 소유로 인정했다. 피렌체는 볼테라 외에도 반란으로 잃었던 요새들을 되찾았다. 볼테라를 진입하기 위해 보내진 니콜로 포르테브라초 휘하의 피렌체 군대는 그 후에 과거 비스콘티 가문과 편을 섰던 파올로 구이니지가 군주로 있던 루카를 침공했다.
3. 3. 결과
교황의 중재로 1428년 4월 18일 페라라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됐다. 베네치아는 베르가모와 크레마에 총독을 파견했고(1429년), 브레시아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피렌체는 볼테라를 제외하고 반란으로 잃었던 요새들을 되찾았다. 볼테라를 함락시키기 위해 파견된 니콜로 포르테브라초 지휘하의 피렌체 군대는 이후 루카를 침공했다.4. 제3차 전쟁 (1431년-1433년)
비스콘티 가문이 3,000명의 기병과 함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보내 루카를 차지하려 한 것이 세 번째 전쟁(1431년-33년)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스포르차는 피렌체에 5만 두캇에 매수되었고, 콘도티에로가 떠난 후에도 루카 포위 공격을 계속했다. 비스콘티 가문은 제노바 공화국을 설득하여 피렌체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하였다. 이후 세르키오 하구에서 피렌체군의 사령관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를 격퇴(1430년 12월 2일)하자, 피렌체인들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다시 동맹을 맺었고, 베네치아 출신의 신임 교황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지를 받았다.
동맹군은 손치노(1431년 5월 17일)에서 패배했고, 밀라노군은 파비아 인근에서 니콜로 트레비사니 지휘하의 베네치아 함대를 격파했다(1431년 6월 23일). 1431년, 비스콘티 가문은 사보이아의 아메데오 8세와 동맹을 맺었다.
베네치아는 1431년 8월 27일에 산프루투오소에서 제노바에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베네치아군 사령관 카르마뇰라는 반역죄로 체포되어 1432년 3월에 처형됐다. 1432년 11월 베네치아군은 델레비오에서 피치니노에게 패배했다.
1433년 5월 페라라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며 불안정한 현상 유지가 이루어졌다. 루카와 그 동맹국들을 상대로 한 피렌체의 전쟁은 이전 상태로 돌아갔지만, 주요 동맹 지도자들은 성과 부족으로 권위를 잃었다. 베네치아 도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사임 직전이었고, 코시모 데 메디치는 체포되어 파도바에 유폐되었다. 또한, 몬페라토 변경백국은 사보이아 공국의 위성국으로 축소되었다.
4. 1. 발단
비스콘티 가문이 3,000명의 기병과 함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보내 루카를 차지하려 한 것이 세 번째 전쟁(1431년-33년)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스포르차는 피렌체에 5만 두캇에 매수되었고, 콘도티에로가 떠난 후에도 루카 포위 공격을 계속했다. 비스콘티 가문은 제노바 공화국을 설득하여 피렌체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하였다. 이후 세르키오 하구에서 피렌체군의 사령관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를 격퇴(1430년 12월 2일)하자, 피렌체인들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다시 동맹을 맺었고, 베네치아 출신의 신임 교황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지를 받았다.4. 2. 경과
세 번째 전쟁(1431년-33년)은 비스콘티 가문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보내 루케세를 차지하려 한 것이 원인이 되어 발발하였다. 비스콘티 가문은 제노바 공화국을 피렌체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하였다. 이후 피렌체는 베네치아,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동맹을 재건하였다.동맹군은 손치노(1431년 5월 17일)에서 패배했고, 밀라노군은 파비아 인근에서 니콜로 트레비사니 지휘하의 베네치아 함대를 격파했다(1431년 6월 23일). 1431년, 비스콘티 가문은 사보이아의 아메데오 8세와 동맹을 맺었다.
베네치아는 1431년 8월 27일에 산프루투오소에서 제노바에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베네치아군 사령관 카르마뇰라는 반역죄로 체포되어 1432년 3월에 처형됐다. 1432년 11월 베네치아군은 델레비오에서 피치니노에게 패배했다.
4. 3. 결과
1433년 5월 페라라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며 불안정한 현상 유지가 이루어졌다. 루카와 그 동맹국들을 상대로 한 피렌체의 전쟁은 이전 상태로 돌아갔지만, 주요 동맹 지도자들은 성과 부족으로 권위를 잃었다. 베네치아 도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사임 직전이었고, 코시모 데 메디치는 체포되어 파도바에 유폐되었다. 또한, 몬페라토 변경백국은 사보이아 공국의 위성국으로 축소되었다.5. 제4차 전쟁 (1438년-1441년)
롬바르디아 전쟁의 발단은 이른바 "네 번째 전쟁"이라고 불리는 국경 문제에서 시작되었으며, 개인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콘도티에로들 간의 갈등이었다. 가타멜라타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베네치아를 위해 싸웠고, 비스콘티 가문 측은 니콜로 피치니노가 이끌었다. 피치니노는 에우제니오 4세 교황에게 마르케를 재정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라벤나와 볼로냐를 점령한 후에는 약속을 어기고 이 도시들을 밀라노의 종주권 하에 두었다.
이후 잔프란체스코 1세 곤차가에게 밀려난 피치니노는 베네치아 소유의 롬바르디아 지역을 침략, 1438년 9월에 브레시아를 포위하였고 베르가모와 베로나를 공격했다.
== 경과 ==
잔프란체스코 1세 곤차가의 지원을 받은 니콜로 피치니노는 베네치아 소유의 롬바르디아 지역을 침략했다. 1438년 9월, 그는 브레시아를 포위 공격하고 베르가모와 베로나를 공격했다. 이에 베네치아는 피렌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동맹을 맺었다.
밀라노 군은 토스카나와 손치노(1440년 6월 14일)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1441년 2월, 피치니노는 키아리에서 스포르차의 수비대를 격파했다. 스포르차는 마르티넨고를 포위했지만, 피치니노가 그에게 후퇴의 가능성을 차단하자 상황은 다시 밀라노에게 유리해 보였다. 승리를 확신한 스포르차는 비스콘티에게 피아첸차(Piacenza)의 영주권을 요구했고, 밀라노 공작은 스포르차와 합의를 요청했다.
카브리아나에서 스포르차는 양측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1441년 11월 20일 체결된 크레모나 평화 조약으로 베네치아는 라벤나를, 피렌체는 카센티노(Casentino)를 유지했다. 피치니노는 파르마에 있는 영지를 받았고,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제노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토스카나와 로마냐에 다시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 결과 ==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카브리아나에서 양측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1441년 11월 20일 크레모나 평화 조약으로 큰 영토 변화는 없었으나, 베네치아는 라벤나를, 피렌체는 카센티노를 지켜냈다. 니콜로 피치니노는 파르마의 오를란도 팔라비치노의 영지를 상으로 받았고,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제노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토스카나와 로마냐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5. 1. 발단
롬바르디아 전쟁의 발단은 이른바 "네 번째 전쟁"이라고 불리는 국경 문제에서 시작되었으며, 개인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콘도티에로들 간의 갈등이었다. 가타멜라타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베네치아를 위해 싸웠고, 비스콘티 가문 측은 니콜로 피치니노가 이끌었다. 피치니노는 에우제니오 4세 교황에게 마르케를 재정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라벤나와 볼로냐를 점령한 후에는 약속을 어기고 이 도시들을 밀라노의 종주권 하에 두었다.이후 잔프란체스코 1세 곤차가에게 밀려난 피치니노는 베네치아 소유의 롬바르디아 지역을 침략, 1438년 9월에 브레시아를 포위하였고 베르가모와 베로나를 공격했다.
5. 2. 경과
잔프란체스코 1세 곤차가의 지원을 받은 니콜로 피치니노는 베네치아 소유의 롬바르디아 지역을 침략했다. 1438년 9월, 그는 브레시아를 포위 공격하고 베르가모와 베로나를 공격했다. 이에 베네치아는 피렌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동맹을 맺었다.밀라노 군은 토스카나와 손치노(1440년 6월 14일)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1441년 2월, 피치니노는 키아리에서 스포르차의 수비대를 격파했다. 스포르차는 마르티넨고를 포위했지만, 피치니노가 그에게 후퇴의 가능성을 차단하자 상황은 다시 밀라노에게 유리해 보였다. 승리를 확신한 스포르차는 비스콘티에게 피아첸차(Piacenza)의 영주권을 요구했고, 밀라노 공작은 스포르차와 합의를 요청했다.
카브리아나에서 스포르차는 양측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1441년 11월 20일 체결된 크레모나 평화 조약으로 베네치아는 라벤나를, 피렌체는 카센티노(Casentino)를 유지했다. 피치니노는 파르마에 있는 영지를 받았고,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제노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토스카나와 로마냐에 다시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5. 3. 결과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카브리아나(Cavriana) 야전에서 양측의 중재인으로서 활동했으며, 카르마뇰라가 그의 머리를 잃으면서, 그 활동을 완수했다. 1441년 11월 20일 크레모나에서 채결된 평화 조약으로 큰 영토 변화는 없었으나, 베네치아는 라벤나를, 피렌체는 카센티노를 지켜냈다. 니콜로 피치니노는 파르마의 오를란도 팔라비치노의 영지를 상으로 받았고,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제노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토스카나와 로마냐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이른바 "네 번째 전쟁"은 콘도티에로인 가타멜라타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베네치아를 위해, 비스콘티 가문 측은 니콜로 피치니노가 이끌었다. 피치니노는 라벤나와 볼로냐를 점령했지만, 이 도시들을 밀라노의 종주권하로 인정시켰다.
잔프란체스코 1세 곤차가에 의해 밀려난 피치니노는 베네치아 소유의 롬바르디아 지역을 침략, 1438년 9월에 브레시아를 포위하였고 베르가모와 베로나를 공격했다. 베네치아는 피렌체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아스토레 2세 만프레디, 폴레시네를 회복한 니콜로 3세 데스테등과 동맹을 맺었다.
밀라노군은 토스카나와 손치노(1440년 6월 14일)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피치니노가 1441년 2월에 로마냐에서 돌아오고 키아리(Chiari)에서 스포르차의 수비대를 괴멸시켰다. 스포르차는 마르티넨고를 포위했지만, 피치니노는 그에게 피아첸차(Piacenza)의 영주권과 교환을 요청했다.
6. 제5차 전쟁 (밀라노 계승 전쟁, 1447년-1454년)
롬바르디아 전쟁은 전투 외에도 중요한 왕조적,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비스콘티 가문에 들어가 그의 딸인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와 결혼했고, 피렌체는 코시모 데 메디치 치하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447년 비스콘티가 사망한 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1450년 5월 밀라노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했다.
이후 스포르차의 밀라노와 메디치의 피렌체가 한편을 이루고, 다른 한편에는 베네치아와 아라곤의 나폴리 왕국이 맞서는 두 개의 연합이 형성되었다. 전쟁의 주요 무대는 롬바르디아에 남았다.[1][2]
1452년 4월 베네치아 공화국은 밀라노 공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밀라노 공국은 아다 강을 건너 베르가모와 브레시아의 백작령을 침략했다. 1453년 봄, 자코포 피치니노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다. 그의 공세는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폰테비코 포위전에서 멈추었는데, "세레니시마"가 오글리오 강을 따라 중요한 항구이자 요새인 폰테비코를 탈환했기 때문이다. 1453년 여름, 피치니노는 스포르차 군에 중요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반대로, 8월 15일 밀라노 군은 게디 전투 이후 게디와 "바사 브레시아나"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다.
가을 동안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그의 동맹인 앙주 백작이자 나폴리 왕인 르네 앙주와 합류했고, 그는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프랑코-밀라노 연합군은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폰테비코 성을, 11월 17일에는 오르지누오비를 성공적으로 포위했다. 따라서 "바사 브레시아나"는 밀라노 공작과 앙주 백작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다. 롬바르디아에 남은 베네치아의 마지막 도시들은 브레시아, 베르가모, 그리고 크레마였다.
1454년 초, 상황은 뒤바뀌었다.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군인들은 밀라노 군과의 지속적인 충돌로 짜증이 나고, 그들의 전술이 이탈리아 전술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알고 르네 앙주와의 합의 하에 전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전쟁을 떠났고 밀라노와 베네치아는 평화를 맺기로 결정했다. 1454년 4월에 로디 조약이 체결되어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간 평화가 이루어졌으며,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축복을 받았다.[1][2] 이 조약은 의식적으로 표현된 유럽의 정치 원칙인 세력 균형의 등장으로 자주 간주된다.[1][2]
6. 1. 발단
롬바르디아 전쟁은 전투 외에도 중요한 왕조적,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비스콘티 가문에 들어가 그의 딸인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와 결혼했고, 피렌체는 코시모 데 메디치 치하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1][2] 1447년 비스콘티가 사망한 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1450년 5월 밀라노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했다.
이후 스포르차의 밀라노와 메디치의 피렌체가 한편을 이루고, 다른 한편에는 베네치아와 아라곤의 나폴리 왕국이 맞서는 두 개의 연합이 형성되었다. 전쟁의 주요 무대는 롬바르디아에 남았다.[1][2]
1452년 4월 베네치아 공화국은 밀라노 공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밀라노 공국은 아다 강을 건너 베르가모와 브레시아의 백작령을 침략했다. 그러나 1453년 봄 베르가모와 브레시아의 "바사 브레시아나"의 상당 부분을 정복하는 초기 밀라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군 사령관 자코포 피치니노는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다. 그의 공세는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폰테비코 포위전에서 멈추었는데, "세레니시마"가 오글리오 강을 따라 중요한 항구이자 요새인 폰테비코를 탈환했기 때문이다. 1453년 여름, 피치니노는 스포르차 군에 중요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반대로, 8월 15일 밀라노 군은 게디 전투 이후 게디와 "바사 브레시아나"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다.[1]
가을 동안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그의 동맹인 앙주 백작이자 나폴리 왕인 르네 앙주와 합류했고, 그는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프랑코-밀라노 연합군은 약 2만 명의 보병과 3,500명의 기사로 구성되었다.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폰테비코 성을, 11월 17일에는 오르지누오비를 성공적으로 포위하여 "바사 브레시아나"는 밀라노 공작과 앙주 백작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다. 롬바르디아에 남은 베네치아의 마지막 도시들은 브레시아, 베르가모, 그리고 크레마였다.[1]
1454년 초,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군인들은 밀라노 군과의 지속적인 충돌로 짜증이 나고, 그들의 전술이 이탈리아 전술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알고 르네 앙주와의 합의 하에 전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전쟁을 떠났고 밀라노와 베네치아는 평화를 맺기로 결정했다. 4월에 그들은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의 네 경쟁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합의의 기초를 형성한 로디 조약을 체결했고, 이탈리아에서 다섯 번째 세력을 대표하는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축복을 받았다. 로디 조약은 의식적으로 표현된 유럽의 정치 원칙인 세력 균형의 등장으로 자주 간주된다.[1][2]
6. 2. 진행
전투 외에도 중요한 왕조적,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비스콘티 가문에 들어가 그의 딸인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와 결혼했고, 피렌체는 코시모 데 메디치 치하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447년 비스콘티가 사망한 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1450년 5월 밀라노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했다. 이제 두 개의 연합이 형성되었는데, 스포르차의 밀라노와 메디치의 피렌체가 한편을 이루고, 다른 한편에는 베네치아와 아라곤의 나폴리 왕국이 맞섰다. 전쟁의 주요 무대는 롬바르디아에 남았다.[1][2]
1452년 4월 베네치아 공화국은 밀라노 공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밀라노 공국은 아다 강을 건너 베르가모와 브레시아의 백작령을 침략했다.[1][2] 1453년 봄, 자코포 피치니노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다. 그의 공세는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폰테비코 포위전에서 멈추었는데, "세레니시마"가 오글리오 강을 따라 중요한 항구이자 요새인 폰테비코를 탈환했기 때문이다. 1453년 여름, 피치니노는 스포르차 군에 중요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반대로, 8월 15일 밀라노 군은 게디 전투 이후 게디와 "바사 브레시아나"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다.
가을 동안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그의 동맹인 앙주 백작이자 나폴리 왕인 르네 앙주와 합류했고, 그는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프랑코-밀라노 연합군은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폰테비코 성을, 11월 17일에는 오르지누오비를 성공적으로 포위했다. 따라서 "바사 브레시아나"는 밀라노 공작과 앙주 백작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다. 롬바르디아에 남은 베네치아의 마지막 도시들은 브레시아, 베르가모, 그리고 크레마였다.
1454년 초, 상황은 뒤바뀌었다.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군인들은 밀라노 군과의 지속적인 충돌로 짜증이 나고, 그들의 전술이 이탈리아 전술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알고 르네 앙주와의 합의 하에 전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전쟁을 떠났고 밀라노와 베네치아는 평화를 맺기로 결정했다. 4월에 그들은 로디 조약을 체결했다.[1][2]
6. 3. 결과
1454년 초,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군인들은 밀라노 군과의 지속적인 충돌로 짜증이 나고, 그들의 전술이 이탈리아 전술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알고 르네 앙주와의 합의 하에 전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1][2] 그래서 프랑스군은 전쟁을 떠났고 밀라노와 베네치아는 평화를 맺기로 결정했다. 1454년 4월에 로디 조약이 체결되어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간 평화가 이루어졌으며,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축복을 받았다.[1][2] 이 조약은 의식적으로 표현된 유럽의 정치 원칙인 세력 균형의 등장으로 자주 간주된다.[1][2]
7. 여파
전쟁이 끝나고 주요 가문과 정치 세력에 변화가 있었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필리포 마리아의 딸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와 혼인하여 비스콘티 가문에서 일하게 되었다. 피렌체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새로운 집권 시기가 열였다. 1447년에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사망하고,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하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밀라노를 손에 넣었다.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과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동맹을 맺어 새로운 연합으로 부상하여, 베네치아와 나폴리 왕국에 맞섰다. 롬바르디아 전쟁에서 체결된 로디 조약은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축복하에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밀라노 4개 세력 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체결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Storia di Milano dal 1451 al 1475
https://www.usdervie[...]
[2]
서적
Storia di Pontevico
https://www.bdl.se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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