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남 328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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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남 328고지 전투는 1950년 8월 14일부터 30일까지 한국 전쟁 중 대구를 방어하기 위해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와 북한군 제3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북한군은 8월 5일부터 8일까지 약목면 일대에서 도하를 시도하며 공격을 시작했으나, 미군의 지원과 한국군의 방어로 인해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328고지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미 공군의 폭격과 한국군의 저항으로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한국군은 328고지를 사수하여 대구를 방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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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남 328고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8월 14일 ~ 1950년 8월 30일 |
장소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 |
결과 | 대한민국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한민국 |
교전국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백선엽 제1사단장 준장 최영희 제15연대장 대령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류재성 제1대대장 소령 안광영 제2대대장 소령 이재일 제2대대장 소령 (8.20 교대) 최병순 제3대대장 소령 |
지휘관 2 | 리영호 제3사단장 소장 미상 제7연대장 미상 제8연대장 미상 보충연대장 미상 포병연대장 |
병력 규모 | |
병력 1 | 제15연대 2,000여명 |
병력 2 | 3사단 6,000여명 |
사상자 규모 |
2. 배경
대구를 정면으로 공격하던 북한군 제3사단은 약목면 일대에서 낙동강 도하 준비를 완료하고, 8월 5일부터 8일 간 전차를 앞세워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를 공격했다. 북한군 제3사단은 약목면에 지휘소를 두고 예하 부대와 20여 대의 전차 지원을 받았다. 북한군은 일시적으로 강 기슭의 몇 개 고지를 점령했으나, 폭격과 반격으로 교두보 확보에 실패하고 큰 병력 손실을 입었다.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미군의 지원으로 방어선을 고수했고, 개전 이래 처음으로 3.5인치 로켓포를 장비해 적 전차 타격이 가능해졌다.[1]
8월 13일, 한국군은 육군본부의 전선 정비에 따라 현 방어선에서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8월 14일, 한국군 제1사단은 사령부를 다부동 남쪽 9km 지점인 동석동(현 동명리 동명초등학교)에, 15연대는 사령부 북쪽 약 3km 지점인 하지동(현 가천리)에 각각 배치했다. 같은 날 10시, 한국군 제15연대는 미 제1기병사단과 우측에, 제12연대와 망정동 선에서 좌측에 인접했다. 제15연대는 328고지를 중심으로 우측 능선에 1대대, 좌측 능선에 3대대를 배치하고, 2대대는 예비대로 다부동에서 대기했다.[1]
2. 1. 전투 이전 상황
대구 정면을 향하여 주공을 지향한 북한군 제3사단은 약목면 일대에서 도하 준비를 완료하고 8월 5일부터 8일 간에 걸쳐 전차를 선두로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 정면을 공격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은 지휘소를 약목면에 두고 예하 보충, 제7연대, 제8연대와 1개 포병연대, 그리고 20여 대의 전차가 지원하고 있었다.[1] 북한군은 일시적으로 강 기슭의 몇 개 고지를 점령하였으나 폭격과 반격으로 인해 끝내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하고 막대한 병력 손실만 입었다.[1]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5일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미군의 지원으로 방어선을 고수하였으며 개전 이래 처음으로 3.5인치 로켓포를 장비하게 되어 적 전차 타격이 가능해졌다.[1] 8월 13일 한국군은 육군본부의 전선 정비에 따라 현 방어선에서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였다.[1] 8월 14일 한국군 제1사단은 사령부를 다부동 남쪽 9km 지점의 동석동(현 동명리 동명초등학교)에, 15연대는 사령부 북방 약 3km 지점의 하지동(현 가천리)에 각각 배치하였다.[1] 같은 날 10:00, 한국군 제15연대는 미 제1기병사단과 좌측에 인접하고, 좌측에는 제12연대와 망정동 선에서 접하였다.[1] 제15연대는 328고지를 중심으로 우측 능선에 1대대를, 좌측 능선에 3대대를 배치하였으며 2대대는 예비대로 다부동에서 대기하였다.[1]2. 2. 전력 배치
대구를 향해 공격하던 북한군 제3사단은 약목면에서 낙동강 도하 준비를 마치고 8월 5일부터 8일 동안 전차를 앞세워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를 공격했다. 북한군 제3사단은 약목면에 지휘소를 두고 예하 부대와 20여 대의 전차 지원을 받았다. 북한군은 잠시 강가의 몇몇 고지를 점령했지만, 폭격과 반격으로 교두보 확보에 실패하고 큰 병력 손실을 입었다.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미군 지원으로 방어선을 지켰고, 3.5인치 로켓포를 장비해 전차 공격이 가능해졌다.[1]
8월 13일, 한국군은 육군본부의 전선 정비에 따라 기존 방어선에서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8월 14일, 한국군 제1사단은 사령부를 다부동 남쪽 9km 지점인 동석동(현 동명리 동명초등학교)에, 15연대는 사령부 북쪽 약 3km 지점인 하지동(현 가천리)에 배치했다. 14일 10시, 한국군 제15연대는 미 제1기병사단과 우측에, 제12연대와 망정동 선에서 좌측에 인접했다. 제15연대는 328고지를 중심으로 우측 능선에 1대대, 좌측 능선에 3대대를 배치하고, 2대대는 예비대로 다부동에서 대기했다.[1]
3. 전투 경과
8월 14일부터 8월 30일까지 포남 328고지에서 벌어진 전투의 주요 경과는 다음과 같다.
- 8월 14일: 북한군 제3사단이 낙동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했고, 한국군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후퇴했다가 미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여 고지를 탈환했다.[1]
- 8월 15일 - 17일: 328고지를 중심으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한국군은 15일에 고지를 빼앗겼다가 16일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탈환했다.[1] 17일에는 대규모 폭격으로 전투가 일시 중단되었다.[1]
- 8월 18일 - 22일: 소강상태가 이어지다가 북한군이 재공격을 감행하여 328고지에서 여러 차례 공방전이 벌어졌다. 한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으며 고지를 사수했다.[1]
- 8월 23일 - 30일: 북한군 주력이 영천으로 이동하면서 소규모 정찰전만 발생했다. 한국군은 328고지에서 9차례 공방전을 치른 후 미 제1기병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대구로 이동했다.[1]
3. 1. 8월 14일: 북한군의 초기 공세
약목(若木) 일대에서 북한군 제3사단의 증강된 1개 연대 병력이 새벽에 낙동강을 건너 한국군 제15연대 진지로 공격을 감행했다.[1] 제1대대와 제3대대는 328고지의 8부 능선으로 물러나 배치하였으나, 수세의 불리함과 지속적인 포격으로 인한 손실로 14:00에 이르러 남쪽의 464고지로 철수하였다.[1] 재편성을 마친 제1대대와 제3대대는 16:00에 105mm 포, 미군 전폭기의 지원과 함께 반격하여 21:00에 328고지를 탈환하였다.[1] 그러나 제3대대와 통신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제15연대는 연대 수색 소대를 파견하여 서로 접촉할 수 있도록 하였다.[1] 제2대대의 지휘소에 도착한 수색 소대는 대대장의 요청에 따라 328고지의 좌측 능선을 점령하였다.[1] 그러나 밤중에 북한군의 기습으로 수색 소대는 육박전을 전개하였으며 한국군은 1개 분대 사상을 내었고, 북한군의 유기 시체는 20구를 넘었다.[1]3. 2. 8월 15일 - 17일: 고지 쟁탈전
154고지 일대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조선인민군은 새벽에 다시 328고지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진지를 지켰으나, 22:00에 시작된 2개 대대 규모의 야간 공격으로 328고지를 빼앗기고 464고지로 후퇴하였다.[1]328고지를 점령한 조선인민군은 진지를 보강하고 있었으며, 새벽을 틈타 보충연대의 병력이 대한민국 국군 제3대대와 좌측에 인접한 미군 제5기병연대의 전투경계선(328고지와 303고지 사이의 개활지)으로 침투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주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대한민국 국군 제3대대는 미군 제5기병연대의 전차와 포병의 화력 지원을 받으며 반격하여 조선인민군을 격퇴하고 08:30에 328고지의 제3대대 원래 진지를 다시 탈환하였고, 대한민국 국군 제1대대도 09:30에 328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날 미 극동공군의 B-29 폭격기 98대가 낙동강 서부의 조선인민군 집결지로 예상되는 5.6×12km 평방지역에 전략폭격을 가하였다.[1]
16일의 융단폭격으로 인해 17일은 모든 활동이 중지되었다.[1]
3. 3. 8월 18일 - 22일: 소강상태와 재공격
한국군 제1, 3대대는 낙동강 부근까지 진격하여 일부 잠복 중이던 북한군을 섬멸하였다. 美 공군 전폭기의 활동과 미군 전차 포격으로 교착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국군 제1, 3대대는 강 기슭의 진지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북한군은 3일간의 재정비 끝에 美 공군의 출격이 없는 것을 이용하여 369고지 쪽에서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한국군 제1대대의 154고지 진지를 점령하고 계속 진출하였다. 한국군 제1대대는 328고지로 물러나 청계동 선에 배치된 제3대대와 협동하여 반격을 개시하였으나 북한군의 집중 포격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여 328고지의 배사면(背斜面)으로 진지를 변경하였다. 여러 차례 328고지의 공방전이 지속되었으나 07:30에 美 공군의 출격이 시작되면서 19:00에 이르러 한국군이 328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한국군 제15연대는 부대 정비를 위해 미명에 美 제5기병연대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328고지 후방에서 재편성하여 이른 아침 다시 진지를 인수하였다. 북한군은 09:00경부터 포 화력을 집중시켰고, 약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328고지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20:00에 이르러 일부 병력을 남겨놓고 퇴각하였다.
한국군 제1, 3대대는 북한군의 지속적인 기습전을 사전에 격파하고자 01:00에 포남동과 청계동 선까지 은밀하게 진출하였는데, 북한군이 강 건너편에서 집중 사격을 하여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으나, 05:00에 인접한 美 기병연대의 포병 화력을 지원받아 북한군의 포 진지를 제압함으로써 강 기슭에 진출하였다. 아침에 美 공군 전폭기가 북한군의 포 진지를 공격하였으며, 북한군은 18:00에 369고지로 모두 퇴각하였다.
3. 4. 8월 23일 - 30일: 전투 마무리
8월 20일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쪽으로 전진함에 따라 이 기간 동안에는 가벼운 정찰전만 되풀이되었다.[1] 한국군 제15연대는 2개 대대 병력으로 328고지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 도합 9차례에 걸친 공방전을 전개하여 많은 손실을 보았으나 진지를 고수하였고,[1] 13:00에 미 제1기병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대구로 이동하였다.[1]4. 결과 및 영향
북한군 제3사단은 328고지 점령에 실패하고 큰 손실을 보았다.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으로 진격하면서 전선이 넓어졌고, 보급 및 탄약 부족, 3.5인치 로켓포에 의한 전차 지원 상실로 인해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했다. 반면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328고지를 사수하고 대구, 하양을 거쳐 신덕동으로 이동했다.[1]
4. 1. 전술적 의의
북한군 제3사단은 8월 13일부터 30일까지 328고지를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미 공군의 공중폭격과 한국군의 저항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쪽으로 전진하면서 전선이 넓어졌고, 보급 지연과 탄약 부족으로 지속적인 공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3사단을 지원하던 전차 역시 미 공군과 한국군이 장비한 3.5인치 로켓포에 파괴되어 전차 지원 없이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1] 반면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328고지를 사수하고 8월 30일부터 기동을 시작하여 17:00에 대구, 하양을 거쳐 21:00에 신덕동까지 이동을 완료하였다.[1]4. 2. 전략적 영향
북한군 제3사단은 8월 13일부터 30일까지 328고지를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美 공군의 공중폭격과 한국군의 저항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쪽으로 전진함으로써 전선이 넓어지고 보급 지연과 탄약 부족으로 지속적인 공격이 불가능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을 지원하던 전차도 美 공군과 한국군이 장비한 3.5인치 로켓포에 파괴되어 전차 지원 없는 전투를 하게 되었다.[1] 반면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328고지를 사수하고 8월 30일 17시에 대구, 하양을 거쳐 21시에 신덕동까지 이동을 완료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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