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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테라유 드 바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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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테라유 드 바야르는 15-16세기 프랑스의 군인으로, 기사도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도피네 지역에서 태어나 샤를 8세와 프랑수아 1세 시대를 거치며 이탈리아 전쟁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특히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300명의 스페인 군대를 혼자 막아낸 일화는 유명하며,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지만 용맹함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메지에르 방어전에서는 1,000명의 병력으로 35,000명의 신성 로마 제국 군대를 6주간 막아내 프랑스군을 구원했다. 그는 "공포도 비난도 없는 기사"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그의 유산은 기념물과 대중문화 작품을 통해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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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테라유 드 바야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피에르 테라유 드 바야르
출생일1476년경
출생지샤토 바야르
사망일1524년 4월 30일
사망지로마냐노 세시아
참전이탈리아 전쟁 (1494년-1498년)
포르노보 전투
이탈리아 전쟁 (1499년-1504년)
가릴리아노 전투 (1503년)
캉브레 동맹 전쟁
아냐델로 전투
파도바 공성전
브레시아 공성전
라벤나 전투 (1512년)
스퍼스 전투
마리냐노 전투
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
메지에르 공성전
세시아 전투 (1524년) (전투 중 사망)
훈장성 미카엘 훈장
서명

2. 생애

바야르는 도피네의 바야르 성에서 태어났으며, 거의 2세기 동안 주요 전투에서 사령관을 맡아온 귀족 가문의 후예였다.[3] 그는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리니 군주들의 고귀한 추종자 중 하나로 승진시킬 때까지 수습기사로서 카를로 1세 디 사보이아를 섬겼다. 어릴 때부터 외모, 매력적인 예절, 창술로 유명했다.[4]

1494년, 샤를 8세를 따라 이탈리아로 진입한 바야르는 포르노보 전투(1495년)에서 적의 깃발을 탈취하여 기사로 서임되었다. 얼마 후, 적을 추격하다 밀라노에 입성했다가 포로로 잡혔으나, 루도비코 스포르차에 의해 아무런 배상금 없이 풀려났다. 1502년에는 카노사에서 부상을 입었다.[6]

바야르는 13명의 프랑스 기사가 같은 숫자의 스페인 기사들과 싸운 유명한 싸움에 참가했으며, 이탈리아 전쟁 기간 동안 쉼없는 에너지와 용맹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가릴리아노의 다리에서 200명의 스페인 병사들을 단독으로 막아낸 그의 공훈에 감탄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그를 교황청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했다.[6] 1508년 제노바 공성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509년 왕은 그를 보병과 기병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파도바 공성전에서 용맹을 떨친 바야르는 1512년 브레시아 공성전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느무르 공작 가스통 드 푸아와 함께 라벤나 전투에 참전하였다. 1513년 스퍼스 전투에서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그의 용맹함에 감탄한 헨리 8세에 의해 6주간의 구금 후 풀려났다.

1515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즉위 후, 바야르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의 용맹으로 칭찬받고 어린 주군을 기사 서임하는 영예를 얻었다. 카를 5세와의 전투에서, 1,000명의 병력으로 메지에르를 6주 동안 방어하여 프랑스 중부를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냈다.

프랑수아 1세는 바야르를 생 미셸 기사단의 일원으로 임명하고, 100명의 장다름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제노바 반란 진압과 도팽 지방의 전염병 방지에 힘쓴 바야르는 기욤 가피에르와 함께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레베코에서 패배 후 퇴각 중이던 기욤의 군대를 지휘하여 구원하던 바야르는 1524년 4월 30일 후방을 지키던 중 적군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샤를 드 부르봉에 의해 적진 한가운데서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친구들에 의해 수습되어 그르노블에 매장되었다.

바야르는 기사의 상징이자 그 시대의 가장 숙련된 장군으로, 정찰대와 간첩망을 이용한 정보 분석으로 유명했다.

2. 1. 가문과 초기 생애

도피네의 바야르 성에서 태어난 바야르는 거의 2세기 동안 주요 전투에서 사령관을 맡아온 귀족 가문의 후예였다.[3] 테라이유 가문은 3대에 걸쳐 1356년부터 1465년까지 조상들이 전투에서 사망했다.[3]

어린 시절, 바야르는 사보이 공작 샤를 1세의 시종으로 일하며 1490년 3월 샤를 1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를 섬겼다.[4]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마술을 선보여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눈에 띄어 "피케"(박차)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

이후 바야르는 프랑스의 샤를 8세의 수습기사로서 카를로 1세 디 사보이아를 섬겼다.

2. 2. 샤를 8세 시대 (1490-1498)

16세기 프랑스 학교 그림 속의 바야르 기사


바야르는 도피네의 바야르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리니 군주들의 고귀한 추종자 중 하나로 승진시킬 때까지 카를로 1세 디 사보이아의 수습기사로 섬겼다. 어릴 때부터 외모, 매력적인 예절, 창술로 유명했다.[4] 1490년 피에르 드 룩셈부르크의 가신이 된 바야르는 영지 리니의 영주(1490년 11월)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총애를 받았다.

1494년 7월 20일 리옹에서 국왕과 궁정이 참석한 기사 시합에서 18세가 되지 않았음에도 최고의 영예를 얻으며 다시 한번 국왕의 주목을 받았다.

1494년, 바야르는 샤를 8세의 나폴리 왕국 점령을 위한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했다. 이 원정은 1494-1498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1495년 포르노보 전투에서 깃발을 빼앗은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얼마 후, 적을 추격하기 위해 홀로 밀라노에 들어갔다가 포로로 잡혔지만, 루도비코 스포르차에 의해 몸값 없이 풀려났다.

2. 2. 1. 소토마요르와의 결투

바야르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502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다. 가스코뉴 출신 가스파르가 로마로 가는 길에 거대한 체격과 헤라클레스적인 힘을 가진 스페인 기사 알론소 데 소토마요르를 포로로 잡았다. 가스파르가 몸값을 기다리는 동안, 바야르는 포로가 학대받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데려와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친구에게 대하는 것과 같은 존경과 예우를 다했다. 그러나 스페인인은 자유를 얻은 후 바야르가 자신을 학대하고 끔찍한 고통을 겪게 했다고 비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바야르는 분개하여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8]

당시 바야르는 심각한 말라리아 발작으로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있었고, 환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대리하도록 할 권리가 있었다. 그의 친구 벨라브레가 즉시 그를 대신하겠다고 자원했지만, 바야르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며 거절했다. 결투 당일 그는 마지막 열병 발작에서 겨우 회복되었다. 땅에 엎드려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긴 후, 그는 적을 기다리기 위해 내려갔다. 소토마요르는 그를 지치게 하고 더욱 약하게 만들 의도로 갑옷을 입은 채 햇볕 아래서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8]

라 팔리스는 지연에 대해 걱정하여 스페인인에게 결투장에 나타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소토마요르는 이제 결투에 조건을 걸었다. 도전받은 쪽으로서 사용할 무기를 선택할 권리가 그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검과 단검을 가지고 도보로 싸우고 싶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하면 그는 자신의 체격 덕분에 상대를 능가할 수 있었다. 그 요청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는데, 기사들은 항상 과 검을 가지고 말을 타고 격돌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야르가 친구들에게 결투를 취소하도록 설득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야르는 말에서 내렸고 결투가 시작되었다.[8]

소토마요르는 처음에는 바야르를 페인트하여 상대를 지치게 하려 했다. 그는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했다. 즉, 두 손으로 검을 들어 바야르의 머리 위로 내리치려 했지만 바야르는 항상 피했다. 네 번째로 그 전술이 반복되었을 때, 바야르는 기회를 이용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검 끝으로 스페인인의 드러난 목을 아래에서 꿰뚫었고, 그런 다음 단검을 눈에 꽂아 마무리지었다. 프랑스인들은 북과 피파리로 열광하며 그를 축하했지만, 바야르는 죽음을 축하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조용히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교회로 가서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8]

2. 3. 루이 12세 시대 (1498-1515)

바야르는 프랑스의 샤를 8세가 그를 리옹 군주들의 고귀한 추종자 중 하나로 승진시킬 때까지 사보이아의 카를로 1세를 수습기사로서 섬겼던 귀족 가문의 후예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그의 외모와 매력적인 예절, 창술로 유명했다. 1494년 그는 샤를 8세를 수호하여 이탈리아로 진입했고, 적의 깃발을 탈취한 포르노보 전투(1495년)에서 기사로 서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적의 추격을 받고 밀라노에 입성했다가, 그는 포로로 잡혔으나 루도비코 스포르차에 의해 아무런 배상금 없이 해방되었다. 1502년에 카노사에서 부상당했다.[6]

바야르는 13명의 프랑스 기사가 같은 숫자의 스페인 기사들과 싸운 유명한 싸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 이탈리아 전쟁 기간 중 쉼없는 에너지와 용맹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1503년 가을, 프랑스군은 나폴리로 진격하여 11월에 가릴리아노 강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경계병들은 몇 달 전 체리뇰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준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지휘하는 스페인군을 발견했다. 강물이 범람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스페인군이 작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포격 지원을 받으며 배 다리를 강에 설치했다. 다리를 설치한 프랑스군은 야영지를 건설했고, 이듬해 봄까지 나폴리 진격을 연기하기로 했다. 너무 많은 병력 때문에 같은 야영지에 머무를 수 없었던 프랑스군은 분산되어 여러 대대가 주변 마을에 흩어져 주둔했다. 스페인군은 겨울 안개와 프랑스군의 분산을 틈타 12월 28일,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의 조언에 따라 강에 또 다른 배 다리를 설치하고, 경비가 허술하고 방어가 취약한 야영지를 점령했다. 이어진 참패는 루이 12세의 군대에게 엄청난 재앙이었다. 경계병들은 너무 늦게 공격을 알아차렸고, 방심한 지휘관들은 효과적인 방어를 조직할 시간도 없이 이탈리아와 스페인 기병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도주했다.[8]

한때 그는 가릴리아노의 다리에서 200명의 스페인 병사들을 단독으로 막아내었다. 바야르는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다리 한가운데에 서서, 비록 수가 많았지만 그를 물러서게 할 수 없었던 300~400명의 스페인군에게 혼자 도전했다. 기사 주변으로 화살, 창, 삽날이 쏟아졌지만, 그는 그것들을 피하며 자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 모든 사람을 계속 물리쳤고, 그의 친구 벨라브르가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달려올 때까지 계속 싸웠다. 바야르의 활약은 프랑스군의 퇴각을 돕고, 스페인군에 맞서 반격을 준비할 수 있도록 포병을 배치할 시간을 벌어주었다.[8] 이 공훈에 감탄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바야르를 교황청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6]

바야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가릴리아노에서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그들의 군대는 거의 전멸했다. 스페인의 압도적인 승리의 주요 설계자인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에 따르면, 루이 12세의 군대는 1,500개의 창, 3,400명의 기병, 8,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는데, 전투 후에는 200개의 창, 150명의 기병, 600명의 보병으로 줄었다. 이들은 가에타에 갇혔고, 며칠 후 항복을 협상했지만 모든 포로의 석방과 북쪽으로의 통행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이에 동의했다.[8]

1508년 바야르는 반란을 일으킨 제노바에 맞서 프랑스의 루이 12세를 수행했다. 반란을 진압한 전투에서 바야르는 프랑스군의 돌격에서 선봉이자 주력 역할을 수행했다. 제노바 민병대의 창병 부대가 지키는 난공불락의 바리케이드를 향해 산비탈을 질주하는 맹렬한 기병 돌격이었다. 제노바군은 바야르와 프랑스 헌병의 맹렬한 공격에 굴복하여 도주했다. 제노바는 결국 함락되었고, 바야르는 국왕을 따라 개선하여 도시로 들어갔다.

그 해 6월, 루이 12세는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트를 맞이했다. 토너먼트, 연회, 무도회를 포함한 몇 주간의 축제가 이어졌다. 바야르는 토너먼트의 우승자였으며, 마지막 행사에서 가리글리아노 전투에서 그의 전 (前) 적수였던 스페인의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엘 그란 카피탄 ("위대한 대장")과 재회했다.

1509년,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교황청은 이탈리아 북동부의 베네치아의 영토 제국을 빼앗기 위해 캄브레 동맹을 결성했다. 이 작전을 위해 국왕은 바야르에게 기병과 보병 부대를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당시까지 프랑스 보병은 경멸받는 오합지졸이었다. 바야르의 부대는 규율, 높은 사기, 전투 효율성의 모범이 되었고,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을 상대로 프랑스 선봉대를 구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해 말 바야르는 독일 동맹국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지원하기 위해 자크 드 라 팔리스 휘하의 프랑스 군대에 합류하여 파도바 공방전에 참전했다. 공방전은 결국 실패했지만, 초기에 연합군이 거둔 성공은 바야르의 냉철한 지도력과 대담한 용맹함의 결합 덕분이었다. 황제가 공방전을 중단한 후, 바야르와 300명의 중기병은 베로나의 수비대로 물러났다. 바야르는 이 지역의 베네치아 군대에 대한 일련의 기습과 매복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오늘날 "특수 작전"이라고 불리는 작전을 능숙하게 이끄는 "소규모 전쟁"의 달인임을 증명했다.

1510년, 페라라 공국이 동맹에 가입했다. 바야르는 페라라 시와 알폰소 1세 데스테 공작을 수비하고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병력의 공동 지휘관이었다. 8개월 동안 머무는 동안 바야르는 공작과 그의 아내인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존경을 받았다. 바야르의 전기 작가인 "충실한 종"(바야르의 궁수이자 평생 비서인 자크 드 마예)에 따르면, 바야르는 루크레치아의 존경에 완전히 화답하며 그녀를 여성들 중 "진주"로 여겼다. 그는 라벤나 전투가 일어나기 몇 달 전에 가스통 드 푸아, 네무르 공작과 함께 한 번 더 페라라로 돌아와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그 전투에서 공작은 목숨을 잃었다.

1511년까지 캉브레 동맹은 교황의 프랑스의 이탈리아 내 세력 확장에 대한 두려움으로 붕괴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신성 동맹 결성을 선언했다. 이 동맹은 프랑스를 교황청뿐만 아니라 과거의 동맹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그리고 궁극적으로 스위스 연방과 대립하게 만들었다. 페라라 주변에서 교황군과의 여러 소규모 전투에서 바야르는 계속해서 명성을 얻었다. 한 번은 교황을 거의 사로잡을 뻔하기도 했다. 이때, 알폰소 공작과 바야르는 교황의 파문령을 받았다. 바야르의 파문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1512년 브레시아 공성전에서 바야르는 무장한 기병들을 이끌고 방어자들을 공격했는데, 그 자신이 선두에 섰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여러 차례 격퇴되었으나, 바야르는 매번 프랑스군을 재정비하여 공격을 재개했다. 그의 대담함은 마침내 허벅지에 심각한 부상을 입혔지만, 방어선을 돌파하고 프랑스군이 도시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병사들은 바야르를 인근 저택으로 옮겼는데, 그곳은 귀족의 거주지였으며, 바야르는 그의 아내와 딸들을 위협으로부터 보호했다. 바야르는 밤마다 노래를 불러주는 어린 딸들에게 매료되었다. 상처가 아물기 전에 그는 라벤나에서 전투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급히 떠나려고 했다. 그는 그 집의 부인이 가족을 위해 지불했던 몸값인 천 개의 금 두카트씩 두 딸에게 주었다.

바야르는 그의 지휘관이자 친구인 네무르 공작 가스통 드 푸아와 함께 운명의 라벤나 전투 (1512년)에 참전했다. 바야르의 용맹함과 드 푸아 휘하의 프랑스 기병대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작은 마지막 순간에 전사하여 전투는 프랑스에게 전략적 손실이자 바야르에게는 개인적인 비극으로 남았다.

바야르는 장 3세 드 나바르와 그의 공동 군주인 카트린을 지원하기 위해 라 팔리스와 함께 나바르로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되찾고 싶어했다. 그 왕국은 스페인 국왕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에게 정복당했었다. 바야르는 티에바스 성의 점령과 팜플로나에 대한 실패한 공격(1512년 11월 27일)에 참여했다.

1513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스퍼스 전투 (기네가트, 바야르의 아버지가 1479년 전투에서 평생 앓을 부상을 입은 곳)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을 때, 바야르는 동료들을 모으려다 탈출로가 막혔다. 항복할 의사가 없었던 그는 갑자기 무장하지 않고 쉬고 있던 영국 장교에게 말을 몰아 항복을 요구했고, 기사가 이에 응하자 바야르는 그에게 스스로를 넘겨주었다. 그는 영국군 진영으로 끌려갔지만, 그의 용감함은 루도비코와 마찬가지로 헨리 8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왕은 그에게 6주 동안 복무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받고 몸값을 요구하지 않고 석방했다.

2. 4. 프랑수아 1세 시대 (1515-1524)

1515년 프랑수아 1세가 즉위하면서 바야르는 도피네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곧 국왕과 군대를 따라 밀라노 영토로 들어갔다. 당시 스위스는 밀라노의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마리냐노 전투에서 양측 군대는 길고 피비린내 나는 격전을 벌였고, 프랑스는 바야르, 국왕 프랑수아, 프랑스 젠다르메(갑옷을 입은 창기병)의 용맹함 덕분에 승리했다. 전투 후 바야르는 젊은 국왕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영예를 안았다.

아리스티드 크루아시가 조각한 바야르(1893), 샤를빌-메지에르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사이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바야르는 1,000명의 병력으로 점령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메지에르를 35,000명의 군대에 맞서 6주 동안 지켜냈고, 결국 제국 장군들은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이 끈질긴 저항은 프랑스 중부를 침략으로부터 구했는데, 당시 국왕은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할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전역은 이 업적을 축하했고, 프랑수아는 1521년 침략자들을 몰아낼 왕립군을 소집할 시간을 벌었다. 파르망은 바야르를 조국의 구원자라고 칭하며 감사를 표했으며, 국왕은 그를 성 미카엘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하고, 당시 왕족에게만 주어졌던 100명의 "무장병"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제노바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도피네에서 역병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 후, 바야르는 본니베 제독과 함께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2. 4. 1. 이탈리아에서의 죽음

본니베 제독은 세시아 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 중 부상을 입자 바야르에게 지휘를 맡아 군대를 구원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선두 추격자들을 격퇴했지만, 1524년 4월 30일 로마냐노 세시아와 가티나라 사이에서 후방을 지키다 아르케부스 총탄에 치명상을 입었다.[7]

그는 적들 한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페스카라의 스페인 사령관과 그의 오랜 동료였던 샤를, 부르봉 공작이 함께했다. 샤를은 "아! 바야르 님... 이런 모습으로 뵙게 되어 매우 슬프오. 당신은 정말 훌륭한 기사였는데!"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바야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의 시신은 친구들에게 돌려보내져 생 마르탱 데르에 묻혔다. 1822년 그의 유해는 그르노블 생탕드레 대학 교회에 안장되었다.[7]

벤자민 웨스트의 ''기사 바야르의 죽음'', 1772년

3. 외모와 성격

자크 드 마이에스가 그린 초상화와 그의 시종이자 전기 작가에 따르면, 바야르는 날카롭고 창백한 얼굴, 갈색 머리카락, 긴 코, 주의 깊고 밝은 두 눈을 가진 남자로 묘사된다. 바야르의 두개골 DNA 연구에 따르면, 그는 갈색 눈, 엷은 갈색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를 가졌다고 한다.[1] 자크는 어린 시절 키가 작았던 바야르가 청소년기에 상당히 성장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그의 두개골에 대한 현대 연구 결과와 일치하며, 그는 당시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1.8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8]

프랑스 역사가 아이마르 뒤 리발은 그를 "예의 바르고 쾌활하며,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다"고 묘사했다.[2]

바야르는 전투에서 받은 기사 서임에 대해 항상 기사도 명예 규범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적에게조차 절대적인 충성심, 자선, 도움은 그의 삶의 규칙이었다. 그는 매춘부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전염병 환자들을 직접 도왔다. 바야르는 약자와 패배자에게 항상 존경심을 보였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모든 잔혹함과 부당함에 격분했다. 그는 또한 식량 조달을 위해 징발한 물품에 대해 자신의 사비로 지불하곤 했다.[8]

그는 보통 전진할 때는 선봉에 섰고, 후퇴할 때는 후위로 이동했기 때문에, 동료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는 것을 막도록 명령했고, 교회와 수도원에 망루를 배치하여 그곳에 피난한 여성들의 약탈과 강간을 막았다.[8]

무장 병사들이 도착하면 숲과 산으로 도망가던 이탈리아 사람들이 바야르의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와 그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그에게 선물을 바치는 등 바야르의 관대함은 명성이 자자했다.[8]

이러한 점은 그가 전투에서 치열하고 두려운 전사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적에게도, 자신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강렬한 종교적 신앙과 모순되지 않았다. 신은 그가 기사가 되기를 원했고, 그는 신의 뜻을 따르는 데 만족했다. 그는 모든 전투 직전에 항상 자신을 신의 손에 맡겼다.[8]

4. 사생활

자크 드 마유는 바야르가 청소년 시절의 첫사랑을 제외하고는 평생 동안 신분을 밝히지 않은 한 여인을 사랑했다고 전한다. 바야르의 외동딸은 1501년 칸투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이름은 잔 테라이유였다. 바야르는 캠페인에 참여하느라 딸을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딸을 프랑스에 있는 그의 누이인 아베 데 자이의 수녀 잔에게 맡겨 길렀다. 테라이유가 "사생아"가 아닌 "딸"로 불리고, 바야르가 앤 여왕이 제안한 결혼을 거절한 것을 보면, 그는 딸의 어머니와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딸의 어머니의 신원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는데, 많은 단서들은 매우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사보이 공작 부인 비앙카 디 몬페라토를 지목한다. 이는 바야르가 당시 피에몬테에 있었고, 딸이 귀족이며 명문가의 여인의 딸이라는 그의 발언으로 뒷받침된다. 이 가설은 폴 발라귀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되는 반면, 카미유 모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8]

5. DNA

2017년 제라르 뤼코트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바야르의 mtDNA는 H10E로, YDNA는 R1b-M269로 확인되었다.[1]

6. 유산

장군으로서 바야르는 기사도의 상징이자 그 시대의 가장 숙련된 장군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바야르는 정찰대와 간첩망을 이용하여 적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용병들 사이에서 바야르는 돈에 대한 무관심, 낭만적 기사도, 경건함, 관대함으로 유명했으며, 동시대 사람들과 후계자들에게 그는 공포도 비난도 없는 기사(''le chevalier sans peur et sans reproche'')였다.[1] 그의 쾌활함과 친절함은 그에게 호인기사(''le bon chevalier'')라는 칭호를 얻게 했다.

그는 기사 서임에 대해 항상 기사도 명예 규범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적에게조차 절대적인 충성심, 자선, 도움은 그의 삶의 규칙이었다. 그는 매춘부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전염병 환자들을 직접 도왔다. 그의 동료들이 폭력과 약탈에 탐닉하는 동안, 바야르는 약자와 패배자에게 항상 존경심을 보였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모든 잔혹함과 부당함에 격분했다. 그는 또한 식량 조달을 위해 징발한 물품에 대해 자신의 사비로 지불하곤 했다.[8]

그는 보통 전진할 때는 선봉에 섰고, 후퇴할 때는 후위로 이동했기 때문에, 동료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는 것을 막도록 명령했고, 교회와 수도원에 망루를 배치하여 그곳에 피난한 여성들의 약탈과 강간을 막았다.[8]

무장 병사들이 도착하면 숲과 산으로 도망가던 이탈리아 사람들이 바야르의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와 그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그에게 선물을 바치는 등 바야르의 관대함은 명성이 자자했다.[8]

이러한 점은 그가 전투에서 치열하고 두려운 전사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적에게도, 자신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강렬한 종교적 신앙과 모순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전투 직전에 항상 자신을 신의 손에 맡겼다.[8]

6. 1. 기념물 및 기념관


  • 퐁샤라의 기마상
  • 그르노블, 생 앙드레 광장의 동상
  • 그르노블, 생 앙드레 대학 교회, 바야르 영묘(1625년)
  • 퐁샤라, 샤토 바야르에 있는 바야르 박물관
  • 샤를빌-메지에르의 동상(2005년 10월 건립). 이전 동상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손상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 파리 스타니슬라스 칼리지의 동상
  • 생-드니의 동상
  • 생트-안-도레의 동상
  • 클레망-바야르: 메지에르의 자동차 제조업체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의 이미지가 로고에 통합되었다.
  • 아돌프 클레망-바야르: 1903년 기사를 기리기 위해 클레망-바야르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기업가로 1908년 그의 성에 바야르를 추가했다.

6. 2. 대중문화


  • 새뮤얼 셸라바거의 소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 '''카스티유의 기사'''(1945)
  • '''여우의 왕자'''(1947)
  • '''왕의 기사'''(1950)
  • 1988년 영화 ''용감무쌍''(제라르 쥐노 감독)은 바야르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참조

[1] 뉴스 Chevalier Bayard, une identification ADN et des questions http://www.lefigaro.[...] FIGARO 2018-10-06
[2] 서적 De Hallobrogibus
[3] 웹사이트 The Universal Magazine of Knowledge and Pleasure https://books.google[...] W. Bent 2023-03-15
[4] 서적 The Life of the Chevalier Bayard https://books.google[...] Harper & Brothers 1847
[5] 서적 The Life of the Chevalier Bayard" Harper & Brothers Publishers 1847
[6] 서적 La très joyeuse, plaisante et récréative histoire du gentil seigneur de Bayart http://archive.org/d[...] Paris, Librairie Renouard, H. Loones, successeur 2020-06-04
[7] 서적 Le Saint-Denis des Dauphins : histoire de la collégiale Saint-André de Grenoble L'Harmattan, Paris 2010
[8] 서적 Baiardo, cavaliere senza macchia e senza paura (1475–1524), La v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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