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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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트로 로레단은 베네치아의 명문가 출신으로, 베로나의 포데스타를 역임했으나 공화국의 주요 공직은 맡지 않았다. 그는 무역에 종사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고, 1569년 아르세날레 화재, 사설 은행 부도, 식량 부족 등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도제로 선출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키프로스 침략 위협에 직면하여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키프로스 상실을 막지 못했다. 1570년 포도를 먹다 질식사했고, 산 조베 교회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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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로레단 | |
---|---|
기본 정보 | |
![]() | |
재임 기간 | 1567년 11월 29일 – 1570년 5월 3일 |
즉위 | 1567년 11월 29일 |
이전 통치자 | 지로라모 프리울리 |
다음 통치자 | 알비세 1세 모체니고 |
출생 | 약 1481년 |
출생지 | 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
사망 | 1570년 5월 3일 |
사망지 | 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
매장일 | 1570년 5월 7일 |
매장지 | 성 요브 교회 |
배우자 | 루크레치아 카펠로 |
자녀 | 알비세 로레단 (1521–1593) |
아버지 | 알비세 로레단 디 산 판탈레오네 |
어머니 | 이사벨라 바로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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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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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
가문 | 로레단 가문 |
2. 가문 및 초기 생애
피에트로 로레단은 1481년 베네치아의 S. 판탈론 델라 프레스카다 가문에서 알비세 디 폴로 디 프란체스코 로레단과 이사벨라 바로치 디 피에트로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사벨라 바로치는 S. 모이세 가문 출신이었다.[1]
그는 마리아 파스쿠알리고와 첫 결혼을 하였고, 1517년에는 S. 마리아 마테르 도미니 가문의 루크레치아 디 로렌초 카펠로와 재혼하였다. 루크레치아는 유명한 비앙카 카펠로와 같은 가문 출신이었다. 피에트로와 루크레치아 사이에는 알비세 로레단(1521–93)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엘레나 디 조반니 에모와 결혼하여 많은 자손을 남기며 가문을 이었다. 베네치아, 파도바, 트레비소 지역에 있던 재산, 부동산, 토지는 유언에 따라 리오 델라 프레스카다에 있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저택을 계속 사용한 수많은 후손들에게 분배되었다.[1]
Francesco Loredanit |
폴로 로레단 |
알비세 로레단, 이사벨라 바로치 |
알비세 로레단, 엘레나 에모 |
엘리자베타 로레단 포스카리 |
2. 1. 초기 활동
피에트로 로레단은 베네치아의 주요 가문 중 하나이자 제75대 도제인 레오나르도 로레단에게서 내려온 로레단 가 출신이다.[1]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 바로치(Isabella Barozzi)도 베네치아의 오래된 가문 출신이다.[1]그는 마리아 파스콸리고(Maria Pasqualigo)와 결혼했다가 마리아 루크레치아 카펠로(Maria Lucrezia Cappello)와 재혼하여, 아들 알비세를 가졌다.[1] 그는 무역 활동에 종사했으며,[1] 베로나의 포데스타였지만, 그 외에 공화국의 주요 공직 자리를 맡은 적은 없었다.[1]
3. 정치 경력
로레단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상업에 종사하면서도 공직 생활을 이어나갔다.
- 1509년과 1510년: 파도바와 트레비소 방어에 참여
- 1510년: 소프라코미토로 공직에 처음 진출
- 1511년 4월: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3]
- 원로원 활동: 유대인 관련 문제, 프랑스 왕국과의 동맹, 크레모나와 기아라 다다의 매각 의사 등을 표명[3]
- 1513년: 다시 파도바와 트레비소를 방어하기 위해 떠남, 스트라디오티 행정관과 총독인 아드리아의 자리를 제안받기도 함[3]
- 1516년: 알렉산드리아 영사 임명을 거절하고 사업 활동 강화[3]
- 1517년: 형제들과 함께 순례자들을 성지로 수송하기 위한 배를 마련[3]
- 1518년: 알렉산드리아 노선에 시장 갤리 설치[3]
- 20명의 현자 회의 임명, 방코 프리울리의 보증인 위원회 참여[3]
- 1545년: 도제 프란체스코 도나 선거인[3]
- 1546년과 1549년 사이: 10인 위원회에 여러 번 출마[3]
- 1550년 초: 10인 위원회에 들어가 수장이 됨, 도르소두로 구역의 공작 고문[3]
- 1550년대: 원로원, 10인 위원회, 도제 고문으로서 시뇨리아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명성을 쌓음[3]
- 1559년: 도제 지롤라모 프리울리의 선거인[3]
- 1560년과 1562년 사이: 중요한 직책을 계속 맡음[3]


4. 도제로서의 생애
로레단은 2주 간의 회의와 76번의 무기명 투표를 거친 후 85세의 나이에 도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의회에서 강력한 추종자가 없었고 도제의 특별한 자질을 지니지도 않았기에, 이는 분명한 해결책이었다.[3]
1567년 11월 29일, 피에트로는 예상 밖으로 도제로 선출되었다. 교황 대사 지오반니 안토니오 파키네티(후에 교황 인노첸시오 9세가 됨)는 그에 대해 "85세의 나이에도 매우 번창하는 인물"이라고 기록했다. 정치적으로 중요성이 적은 인물로 여겨졌던 그의 도제직은 과도기적이고 정치적으로 해가 없었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여겨졌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며, 교육받았고, 비범한 지혜를 가진 피에트로는 처음에는 꺼렸지만, 2년 반의 통치 기간 동안 균형과 신중함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가 "선량하지만 공공 정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격동적인 상황에서 그의 조언을 경청했다면 국가에 이익이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선출 이후, 오스만 제국의 베네치아령 키프로스에 대한 위협이 더욱 커져서, 베네치아와 교황청 사이의 사법적 분쟁을 일시적으로 잠재울 정도였다. 피에트로는 재임 기간 동안 베네치아를 강타한 기근과 1569년 아르세날레를 파괴한 방화로 여겨지는 화재에 대처하기 위해 강력한 헌신을 보여주었다.
4. 1. 주요 사건
1569년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인접한 건물들로 확산되었고,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같은 해 사설 은행 다섯 곳이 부도나고, 곡물 부족으로 식량을 배급하기도 했다.[1]오스만 제국이 키프로스를 침략하면서 전쟁이 발발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술탄의 강력한 압박을 받았다. 베네치아는 외교 활동을 통해 튀르크에 맞서는 동맹 세력을 구축했지만, 신성 동맹과 레판토 해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키프로스를 상실했다.[1]

1570년 봄, 오스만 제국은 키프로스에 대한 전쟁 준비를 강화했다.[1]
5. 죽음
로레단은 이탈리아 동부의 그의 빌라에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곳에서 하인들이 주는 포도를 받아먹던 도중에, 그의 정부가 그에게 대화를 걸면서 포도가 그의 숨을 막아 질식사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목구멍에서 포도를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1]
긴장된 기후는 피에트로의 신체를 약화시켰고, 그는 병에 걸려 열병으로 쓰러져 1570년 5월 3일에 9일 만에 사망했다. 교황 대사는 "국가의 협상가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소식을 며칠 동안 숨겼다. 상원은 도제의 부재 중에 예외적으로 소집되어 비상 사태를 처리했으며, 이례적인 절차를 통해 5월 9일에 선출된 그의 후임자 알비세 1세 모체니고의 임명을 서둘렀다. 5월 7일, 악천후로 인해 산 마르코 대성당 대신 베네치아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에서 국장이 거행되었다. 도제 피에트로 로레단의 시신은 산 조베 성당의 회랑으로 옮겨져 가족 묘에 안장되었다.[1]
도제 피에트로 로레단은 도제의 궁전에서 도메니코 틴토레토에 의해 묘사되어 상원 회의실에 그림이 걸렸으며, 야코포 틴토레토에 의해 스크루티니오 홀에 걸렸다.[2]
참조
[1]
웹사이트
LOREDAN, Pietro in "Dizionario Biografico"
https://www.treccani[...]
2021-01-23
[2]
웹사이트
Portrait of Doge Pietro Loredan {{!}} Kimbell Art Museum
https://www.kimbella[...]
2021-03-02
[3]
Dizionario Biografico
Dizionario Biografico / Pietro Loredan
http://www.trecc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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