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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토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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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틴토레토는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 화가로,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하여 극적이고 역동적인 화풍을 창조했다. 그는 <성 마르코의 기적>, <천국> 등 대규모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었으며, 엘 그레코 등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틴토레토는 염색공의 아들로 태어나 티치아노에게서 미술을 배웠으며, 딸 마리에타 로부스티도 화가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은 과감한 붓놀림, 극적인 원근법, 인물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이며, 대표작으로는 <최후의 만찬>, <은하수의 기원>, <성 마르코의 기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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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토레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자화상
자화상, 1588년경, 루브르 박물관, 파리
본명자코포 로부스티
출생일1518년 9월 하순 또는 10월 초
출생지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사망일1594년 5월 31일
사망지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국적베네치아
분야회화
유파르네상스
매너리즘
베네치아파
별칭il Furioso (격노한 자)
서명
참고
설명역사가 스테파니아 메이슨에 따르면, 1678년 베네치아의 에이전트가 스페인 미술 수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코포의 성이 코민(Comin)이었다는 "기발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출판한 것이 자코포의 성이 코민이라는 오해를 낳았다고 한다. 로부스티는 그의 세금 신고서와 기타 공식 문서에 나타나는 이름이다.
발음

2. 생애

베네치아 태생으로,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코민이었으나 아버지가 염색공이었기에 '염색공의 아들'이라는 뜻의 틴토레토로 불렸다.[49] 젊은 시절 티치아노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49] 그는 미켈란젤로의 뛰어난 소묘 능력과 티치아노의 풍부한 색채 감각을 자신의 예술적 목표로 삼았으며[10], 인공적인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 과감한 단축법 등을 사용하여 화면에 강렬하고 순간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데 뛰어났다.

1539년경 독립적인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49], 초기 대표작인 《노예를 구출하는 성 마르코》(1548)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기법으로 주목받았다. 이 작품은 산 로코 동업 조합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여러 스쿠올라(Scuola, 종교적 형제회 또는 조합)를 위해 많은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50][51] 그는 특히 그림을 매우 빨리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때로는 보수를 받지 않고 동료 화가들의 작업을 돕기도 했다고 전해진다.[52]

1550년대 후반부터는 공간과 극적 효과를 더욱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1584년 《성 마르코의 기적》을 발표하며 베네치아 화파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마지막을 장식한 주요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후대의 마니에리스모 화가들, 특히 엘 그레코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도제궁의 대회의실을 장식한 거대한 벽화 《천국》과 《최후의 만찬》 등이 있다. 특히 《천국》은 7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 대작이다.

틴토레토는 긴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 베네치아에서 보냈으며, 1594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자신이 많은 작품을 남긴 마돈나 델로르토 교회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틴토레토는 151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코민이며, 아버지는 염색공(이탈리아어: ''tintore'', 베네치아어: ''tintor'') 조반니 바티스타 로부스티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작은 염색공' 또는 '염색공의 아들'이라는 뜻의 틴토레토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4] [49] 그의 가족은 원래 롬바르디아의 브레시아(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출신으로 여겨지나, 토스카나의 루카 출신이라는 이전 연구도 있다. 도메니코라는 형제를 포함해 최소 한 명 이상의 형제자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5]

그의 어린 시절이나 정식 교육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초기 전기 작가 카를로 리돌피(1642)와 마르코 보스키니(1660)에 따르면, 틴토레토가 받은 유일한 정식 도제 수업은 티치아노의 작업실에서였으나, 며칠 만에 끝나고 말았다.[6] [49] 티치아노가 그를 내쫓은 이유에 대해서는, 리돌피는 티치아노가 너무 유망한 제자를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고, 보스키니는 성격 차이 때문이라고 보았다.[6] 이 사건 이후 틴토레토는 스승 티치아노를 계속 존경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좋지 않았으며 티치아노와 그의 추종자들은 틴토레토를 공공연히 깎아내렸다.[7]

틴토레토는 더 이상 스승을 찾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에 매진했다. 리돌피에 따르면, 그는 신화 그림으로 가구를 장식하는 장인들과 함께 일하며 경험을 쌓는 한편, 살아있는 모델을 그리거나 시체를 해부하며 인체 해부학을 공부했다고 한다.[8] 가난 속에서도 석고상, 부조, 판화 등을 모아 연습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특히 1540년대에는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인 ''새벽'', ''낮'', ''황혼'', ''밤''의 모형을 구해, 파란색 종이에 모든 각도에서 수없이 드로잉하며 연구했다.[9] [49] 또한 줄리오 로마노, 안드레아 스키아보네, 고대 조각 등 당시 베네치아에서 접할 수 있었던 다양한 예술 작품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나갔다.[49] 그의 작업실 벽에는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색채"("Il disegno di Michelangelo ed il colorito di Tiziano")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이상과 야망을 보여준다.[10] 비록 티치아노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스승 티치아노의 영향 또한 찾아볼 수 있다.[49]

1539년의 한 문서에는 그가 스스로를 '마에스트로(maestro, 거장)'라고 칭한 기록이 남아있어, 이 무렵 독립적인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음을 시사한다.[49]

2. 2. 초기 작품 활동

베네치아에서 염색공 조반니 바티스타 로부스티(본명 조반니 바티스타 코민)의 아들로 태어나, "틴토레토(염색공의 아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49] 화가이자 작가인 카를로 리돌피가 1642년에 쓴 틴토레토 전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를 티치아노의 문하생으로 보냈으나[49] 오래 배우지는 않았다.[49] 틴토레토는 미켈란젤로의 소묘 능력과 티치아노의 색채 감각을 동시에 추구했으며, 인공적인 빛과 그림자 효과, 과감한 단축법을 사용하여 극적이고 순간적인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다. 초기 작품인 《사도 바울의 회심》(워싱턴 국립 미술관)이나 《Ecce homo|엑체 호모lat》(상파울루 미술관) 등에서 스승 티치아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49] 1539년 기록에는 틴토레토가 스스로 '마에스트로(대가)'라고 칭한 내용이 있어, 이 무렵부터 독립적인 화가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49]

''젊은 시절의 자화상'', 1548년경


''아솔라 공성전'' (1544–45), 포즈난 국립박물관, 포즈난


1540년대 틴토레토의 작품들은 그가 당시 베네치아 예술계 동향에 밝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줄리오 로마노, 안드레아 스키아보네, 피렌체 건축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이후에도 고대 조각 등을 모사하며 기량을 갈고 닦았는데, 리돌피에 의하면 산 로렌초 교회 신 성구실의 미켈란젤로 조각처럼 고대 대리석의 석고 모형을 연구하기도 했다.[49] 그렇다고 티치아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49]

틴토레토는 재능이 넘치는 화가였으며, 특히 그림을 매우 빨리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았으며, 때로는 동료 화가인 안드레아 스키아보네 등의 일을 보수 없이 돕기도 했다.[11][52] 틴토레토 역시 초기에는 거의 보수를 받지 않고 벽화 작업을 했는데, ''벨샤자르의 향연''과 ''기병 전투''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을 포함한 그의 모든 프레스코화는 현재 소실되었다. 초기에 주목받았던 작품 중 하나는 자신과 기타 치는 형제를 그린 초상화였는데, 야경 효과를 사용한 이 작품 역시 남아있지 않다. 이후 그는 티치아노가 칭찬할 만한 역사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틴토레토의 초기 작품으로는 베네치아 카르미니(Carmini) 교회의 ''성전에서 예수의 소개'' (1542년경)가 있다. 산 베네데토(S. Benedetto) 교회에는 ''수태고지''와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한 그리스도''가 있다. 또한, 베네치아의 스콜라 델라 트리니타(Scuola della Trinità)를 위해 창세기를 주제로 한 네 점의 그림을 그렸다. (당시 베네치아의 스콜라는 교육 기관이라기보다는 자선 활동을 하는 신자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이 중 ''아담과 이브''와 ''아벨의 죽음'' 두 점은 현재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작품들은 틴토레토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특별한 정식 교육 없이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드문 화가 중 한 명이다.

한때 스키아보네의 작품으로 여겨졌던 ''성녀 헬레나의 성지 항해''는 2012년 새로운 분석을 통해 틴토레토의 작품임이 밝혀졌다. 이 그림은 성녀 헬레나와 성십자가 전설을 다룬 세 점짜리 연작 중 하나로, 영국 내 유럽 유화 작품 목록 작성 프로젝트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12] 이 작품은 1865년부터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연작의 다른 두 작품인 ''참십자가의 발견''과 ''성녀 헬레나의 참십자가 검증''은 미국 미술관에 있다.[12]

1548년, 산 로코 동업 조합으로부터 《노예를 구출하는 성 마르코》 제작을 의뢰받으면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50] 이 작품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베네치아의 스쿠올라(Scuola)는 종교적 조합으로, 지역 관리에 의해 운영되었다. 중세 시대 조합원들의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16세기 중반 트리엔트 공의회의 영향으로 크게 확산되었다.[51] 틴토레토는 산 마르코 대신도회과 이후 산 로코 동업 조합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대중 및 종교계와 소통할 기회를 얻었다.[51]

2. 3. 성 마르코 연작과 명성의 확립

''노예의 기적'' (1548)


1548년, 틴토레토는 스콜라 그란데 디 산 마르코(Scuola Grande di San Marco)로부터 대형 장식화인 '노예의 기적'(Miracolo dello schiavoita)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는 이 작업이 자신을 주요 화가로 발돋움시킬 특별한 기회임을 인지하고,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구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그림은 성 마르코에 대한 신앙심 때문에 고문을 당할 위기에 처한 기독교인 노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노예가 고문을 당하기 직전 성 마르코가 기적적으로 나타나 노예의 뼈를 부수고 눈을 멀게 할 고문 도구들을 파괴하여 그를 구출했다고 한다.[13] 틴토레토는 이 이야기를 강렬한 연극적 구성, 독특한 색채 사용, 그리고 활기 넘치는 붓질로 표현했다.[14]

일부 비평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예의 기적'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틴토레토의 친구였던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이 작품을 극찬하면서 특히 노예의 묘사에 주목했지만, 너무 서둘러 작업하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다.[14] 이 그림의 성공 덕분에 틴토레토에게는 수많은 의뢰가 쏟아졌다. 1549년에는 산 로코 교회(San Rocco)를 위해 '성 로코가 역병 환자들을 치료하다'(San Rocco risana gli appestatiita)를 그렸는데, 이는 틴토레토가 그린 많은 '라테랄리'(lateraliita, 수평화) 중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라테랄리는 베네치아 예배당의 측면 벽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대형 그림을 말한다. 틴토레토는 관람객들이 그림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보게 될 것을 고려하여, 그림의 중심에서 벗어난 원근법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예배당 입구에 가까운 쪽에서 그림을 볼 때 깊이감이 느껴지는 착시 효과를 만들어냈다.[15]

1555년경에는 산타 마리아 데이 크로치페리(Santa Maria dei Crociferi) 교회를 위해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성모 승천'(Assunzione della Vergineita)을 제작했다.[16]

''성 마르코의 시신 베네치아로 운반되다'' (1564년경)


''영광의 성 로코'' (1564)


1551년, 파올로 베로네세가 베네치아에 도착하면서 틴토레토가 원하던 명망 있는 작업 의뢰들을 빠르게 확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에 자극받은 틴토레토는 이웃한 마돈나 델로르토(Madonna dell'Orto)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재료비만 받고 거대한 두 점의 캔버스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제안했다.[17] 그는 이미 이 교회를 위해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성전에서의 성모 영보'(Presentazione della Vergine al Tempioita, 1556년경)를 그린 바 있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가 이전에 다루었던 주제를 다시 그린 것이지만, 티치아노의 고전적이고 균형 잡힌 구성 대신, 뒤로 물러나는 듯한 계단 위에 인물들을 배열하여 놀라운 시각적 드라마를 연출했다.[18] 틴토레토는 마돈나 델로르토 교회를 위해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그림 중 가장 큰 두 점의 캔버스를 제작하여 세상을 놀라게 할 계획이었다.[19] 그는 교회 근처 폰다멘타 데 모리(Fondamenta de Mori)가 내려다보이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집에 자리를 잡았다.[20]

'황금 송아지 숭배'(Adorazione del vitello d'oroita)와 '최후의 심판'(Giudizio universaleita)을 묘사한 높이 14.5m의 이 두 그림(1559년–60년경)은 널리 찬사를 받았고, 틴토레토는 제한된 예산으로도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틴토레토는 저렴한 비용으로 그림을 신속하게 제작하는 방식으로 다른 화가들과 경쟁하는 경향을 보였다.[21] 1564년경, 틴토레토는 스콜라 그란데 디 산 마르코를 위해 '성 마르코의 시신 발견'(Ritrovamento del corpo di san Marcoita), '성 마르코의 시신 베네치아로 운반되다'(Trafugamento del corpo di san Marcoita), 그리고 '성 마르코가 난파된 사라센을 구출하다'(San Marco salva un Saracenoita) 등 세 작품을 추가로 제작하며 성 마르코 연작을 이어갔다.

1560년경, 틴토레토는 두 번째 아내인 파우스티나 데 베스코비(Faustina de Vescoviita)와 결혼했다. 그녀는 스콜라 그란데 디 산 마르코의 '수호자 그란데'(guardian grandeita) 직책을 맡았던 베네치아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22][2] 이 시기 동안 제작된 성 마르코 관련 작품들과 대규모 종교화들은 틴토레토를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했다.

2. 4. 산 로코 대학교회 장식

1565년부터 1567년까지, 그리고 1575년부터 1588년까지 틴토레토는 산 로코 대학교회(Scuola Grande di San Rocco)의 벽과 천장을 장식하기 위한 많은 그림들을 제작했다. 그가 첫 의뢰를 따낸 방식은 "틴토레토 경력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23] 1564년, 산 로코 대학교회는 알베르고 홀(Sala dell'Albergo) 천장 장식을 위해 틴토레토, 페데리코 추카로, 주세페 살비아티, 파올로 베로네세 등 네 명의 최종 후보자에게 "영광 속의 성 로크"를 주제로 한 모형(modelli) 제출을 요청했다. 그러나 틴토레토는 스케치 대신 실물 크기의 그림을 제작하여 몰래 천장에 설치했고, 경쟁 당일 이를 기정사실로 공개했다. 이후 그는 그림을 선물로 기증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선물을 거절할 수 없다는 수도회의 규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23]

1565년, 그는 수도회에서 작업을 재개하여 250두캇에 "십자가에 못 박힘"을 그렸다. 1576년에는 큰 홀 천장을 위한 또 다른 중앙 작품—"뱀의 재앙"—을 무료로 제공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유월절 만찬"과 "바위를 치는 모세" 그림으로 천장을 완성했다. 그는 수도회가 지불하기로 한 적은 금액을 받아들였다.



"프레스테자(prestezza)"라고 불리는 빠른 회화 기법의 개발은 그가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도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고객의 증가하는 요구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과 조수들의 활용 덕분에 틴토레토는 결국 베네치아 국가를 위해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24]

다음으로 틴토레토는 산 로코 대학교회 전체와 인접한 교회의 그림 작업을 시작했다. 1577년 11월, 그는 연간 100두캇의 비율로 작품을 제작하고 매년 세 점의 그림을 제출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꼼꼼하게 이행되었으며, 화가의 죽음만이 일부 천장 주제의 실행을 막았다. 수도회 건물 전체에 지불된 총액은 2,447두캇이었다. 사소한 작품들을 제외하면 수도회 건물과 교회에는 52점의 기념비적인 그림이 있다. 이 그림들은 마치 거대한 암시적인 스케치와 같으며 완성된 그림의 숙련된 솜씨는 있지만 의도적인 정밀함은 없고 어두운 반광 아래에서 보도록 제작되었다. 수도회 건물에는 "아담과 이브",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경배", "무고한 아이들의 학살", "겟세마네 동산의 고뇌",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그리고 (복원으로 인해 훼손된) "성모 승천"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교회에는 "중풍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가 있다.

2. 5. 도제궁 장식과 <천국>

''천국'', 도제궁 대회의실


틴토레토 생애의 대표작은 도제궁을 위해 그린 거대한 ''천국''이었다. 크기는 9.1m × 22.6m로, 캔버스에 그린 그림 중 가장 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거대한 작품의 의뢰가 아직 미결정 상태였을 때, 틴토레토는 상원 의원들에게 자신이 이 작품을 의뢰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고 말하곤 했다. 죽은 후 천국이 그의 보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틴토레토는 여러 다른 예술가들과 이 명망 있는 의뢰를 놓고 경쟁했다. 그가 1577년 제출한 작품의 대형 스케치는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583년, 그는 다른 구성의 두 번째 스케치를 그렸는데, 이것은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에 있다.[26]

이 의뢰는 파올로 베로네세와 프란체스코 바사노에게 공동으로 주어졌지만, 베로네세는 1588년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했고, 의뢰는 틴토레토에게 재할당되었다.[27] 그는 Scuola vecchia della Misericordia에 캔버스를 설치하고 끈기 있게 작업하면서 많은 수정을 가하고 실제 인물을 보고 여러 인물의 머리와 의상을 그렸다.

그림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그는 그림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고, 조수들(그의 아들 도메니코가 가장 앞서 있었다)에 의해 주로 완성되었다. 베네치아 전체가 완성된 작품에 박수를 보냈다. 리돌피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천국의 행복이 필멸자의 눈에 드러난 것 같았다"고 적었다.[28] 현대 미술사가들은 덜 열정적이었고, 일반적으로 ''천국''을 두 개의 스케치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여겼다.[28] 이 작품은 방치되었지만, 복원으로 인한 손상은 거의 없다.

틴토레토는 자신의 가격을 정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이를 당국에 맡겼다. 그들은 상당한 금액을 제시했고, 그는 그 금액에서 일부를 감액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가 보수 없이 작업했던 이전 사례들과 비교하여 탐욕이 적었음을 보여준다.

2. 6. 말년과 죽음

그의 묘소, 마돈나 델로르토 교회에 위치


틴토레토는 《천국》을 완성한 후 한동안 휴식을 취했으며, 이후로는 더 이상 중요한 작품을 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기력이 다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1592년에는 상인 길드(Scuola dei Mercanti)의 회원이 되었다.[34]

1594년 그는 심한 복통과 고열에 시달렸고, 2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의 먹지 못했다. 결국 1594년 5월 31일에 사망했다. 그는 1590년 서른 살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사랑하는 딸 마리에타 옆, 마돈나 델로르토 교회에 묻혔다.

1866년 그의 아내의 가문인 베스코비 가문과 틴토레토의 묘가 열렸고, 두 가족의 유골 아홉 구가 발견되었다. 이후 묘는 합창석 오른쪽의 새로운 위치로 옮겨졌다.

3. 작품과 양식

틴토레토의 집, 베네치아 칸나레지오의 "폰다멘타 데이 모리"


틴토레토는 베네치아를 거의 떠나지 않고 활동했다.[30] 초기 전기 작가들은 그의 뛰어난 지능과 강한 야망에 대해 기록했는데, 카를로 리돌피는 "그는 항상 자신을 세계에서 가장 대담한 화가로 알리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전한다.[19] 그는 모든 예술을 사랑하여 젊은 시절에는 류트를 비롯한 여러 악기를 직접 만들어 연주하기도 했고, 극장 의상과 소품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기계 장치에도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평소에는 유쾌한 성격이었지만, 작업을 할 때는 대부분 작업실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도 조각상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가까운 친구조차 작업실 출입을 거의 허락하지 않고 조수들과만 작업 방식을 공유하며 비밀을 유지했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든 아니든 재치 있는 대화를 나누었지만 정작 자신은 거의 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피에트로 아레티노를 포함한 여러 작가 및 출판인과 교류했으며, 아레티노는 그의 중요한 초기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31]

틴토레토의 회화 양식은 과감한 붓놀림과 윤곽 및 하이라이트를 표현하는 긴 붓 터치가 특징이다.[35] 그의 그림은 움직이는 인체의 역동성을 강조하며,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극단적인 단축법과 원근법을 자주 사용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인물의 표정보다는 몸짓과 역동성으로 전달된다.[36]

그의 작업 속도는 매우 빨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개월 안에 각각 20명의 인물(그중 7명은 초상화)이 포함된 역사화 두 점을 완성하겠다는 계약서가 남아 있을 정도이다. 세바스티아노 델 폼보는 틴토레토가 이틀 만에 자신이 2년 동안 그릴 양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으며, 안니발레 카라치는 틴토레토가 많은 그림에서 티치아노와 맞먹지만 다른 그림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이는 당시 베네치아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들은 틴토레토에게 금, 은, 철 세 종류의 연필(즉, 다양한 수준의 작품)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성 조르조, 성 루이, 그리고 공주'' (1553)


틴토레토의 독창성은 ''성 조르조, 성 루이, 그리고 공주'' (1553)와 같은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성 조르조가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하는 전통적인 주제를 비틀어, 공주가 채찍을 들고 용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미술 비평가 아서 단토는 이를 "페미니스트적 유머의 날카로움"을 지닌 것으로 평가하며, "공주가 직접 문제를 해결했고... 조르조는 창이 부러진 채 무력하게 팔을 벌리고 있다... 이는 분명 세련된 베네치아 관객을 염두에 두고 그려진 것"이라고 설명했다.[37]

''마르키스 프란체스코 게르다르디니의 초상'' (1568), 카 레조니코 미술관, 베네치아


틴토레토는 활동 기간 내내 베네치아에서 가장 많은 초상화를 그린 화가 중 한 명이었다.[39] 현대 비평가들은 그의 초상화를 평범한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40] ''알비세 코르나로'' (1560/1565)와 같이 노인을 묘사하는 그의 능력은 널리 인정받았다.[41] 미술사가 로버트 에콜스와 프레드릭 일치먼에 따르면, 틴토레토의 작업실에서 조수들이 주로 제작한 많은 초상화 때문에 그의 자필 초상화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어려워졌는데, 그의 자필 초상화는 서사적인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절제되고 차분한 분위기를 지닌다.[39] 로렌스 고잉은 틴토레토의 "자신의 불길에 휩싸인 듯한 인물들의 뜨거운 초상화"를 그의 "가장 매혹적인" 작품으로 꼽았다.[42]

그는 두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첫 번째 자화상(1546년–47년경;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는 이전 자화상들에서 흔히 보이던 지위를 과시하는 장식 없이 자신을 표현했다. 비공식적인 분위기,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 과감한 붓놀림 등은 혁신적이었으며, "수세기에 걸쳐 전해 내려온 많은 예술적으로 꾸밈없는 자아 이미지 중 첫 번째"라는 평가를 받는다.[43] 두 번째 자화상(1588년경; 루브르 박물관)은 노년의 화가가 "냉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듯한 금욕적이고 대칭적인 모습이다.[44] 이 작품의 사본을 그린 에두아르 마네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45]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두칼레궁전이나 당시 여러 곳에 있었던 스쿠올라(Scuola, 종교적·사회적 단체) 회관 등을 위해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회화는 참신하고 대담한 구도와 극적인 표현이 특징이며, 『성 바오로의 회심』, 『갈릴래아 호수의 그리스도』와 같이 성서의 이야기를 장대한 드라마처럼 그린 작품들은 다음 세기의 바로크 회화를 예견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3. 1. 대표작

『만나의 수집』1577년 베네치아, 산 로코 대자선회 소장

3. 2. <최후의 만찬> 연구

''최후의 만찬'' (1594)


틴토레토의 마지막 작품인 ''최후의 만찬''(그의 알려진 9점의 같은 주제 그림 중 하나)[38]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같은 주제에 대한 그의 해석을 비교하면 르네상스 기간 동안 예술 양식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보여주는 유익한 시범이 된다.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고전적인 평온함으로 가득 차 있다. 제자들은 거의 수학적인 대칭으로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져 있다. 틴토레토의 손에서 같은 사건은 극적이 된다. 인물들은 천사들과 결합한다. 하인이 전경에 배치되어 있는데, 아마도 요한복음 13:14-16을 참조하는 것일 수 있다. 그의 구성의 불안한 역동성, 빛의 극적인 사용, 강조된 원근법 효과에서 틴토레토는 시대를 앞서간 바로크 화가처럼 보인다.

4. 가족



1550년경, 틴토레토는 파우스티나 데 베스코비(Faustina de Vescovi, 또는 에피스코피 Episcopi)와 결혼했다.[53] 그녀는 베네치아 귀족의 딸이자 산 마르코 대학교회의 수호자였다.[32][2] 파우스티나는 주의 깊은 주부였으며, 남편이 외출할 때 베네치아 시민의 옷을 입도록 하고, 외출 시 손수건에 돈을 싸서 주며 돌아왔을 때는 꼼꼼하게 사용 내역을 물었다고 전해진다. 틴토레토는 늘 가난한 사람이나 죄수들에게 자선을 베푼 덕분이라고 대답했다.

파우스티나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세 아들(도메니코, 마르코, 주안 바티스타)과 네 딸(지에롤리마, 루크레치아, 오타비아, 라우라)이 성년에 이르렀다.[33] 도메니코와 마르코는 아버지의 공방에서 함께 일했다.[53]

틴토레토의 딸 마리에타의 초상화


파우스티나와 결혼하기 전에 틴토레토에게는 어머니가 알려지지 않은 딸 마리에타 로부스티가 있었다.[33] 마리에타 역시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운 화가였으며, 후에 이복 남동생인 도메니코와 마르코도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다.[33] 마리에타는 뛰어난 실력의 초상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가로서 노래와 악기 연주에도 능했다. 현재 그녀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어린 시절에는 남자아이처럼 차려입고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작업을 도왔다.[33] 마리에타는 보석 세공사인 마리오 아우구스타와 결혼했으나,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슬픔에 잠긴 틴토레토가 죽은 딸의 마지막 초상화를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들 도메니코는 종종 아버지가 대작을 위한 예비 작업을 할 때 도왔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그중 많은 작품이 매우 큰 규모였다. 그의 작품은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으로 여겨지며, 틴토레토의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망스럽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나름대로 상당한 그림 실력을 가진 화가로 여겨져야 하며, 특히 역사화보다는 초상화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말년에 중풍으로 오른손이 마비되자 왼손으로 그림을 계속 그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 영향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마지막을 장식한 화가로 평가받으며, 후대 마니에리스모 화가인 엘 그레코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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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One Thousand Years of Painting: An Atlas of Western Painting from 1000 to 2000 A.D. Elec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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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간행물 Scoula Grandi San Rocco
[54] 서적 名画の謎 中野京子と読み解く ギリシャ神話篇 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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