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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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1946년 시러큐스 내셔널스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어 1949년 NBA에 합류한 프로 농구팀이다. 1963년 필라델피아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현재의 팀명을 갖게 되었다. 1955년 NBA 챔피언십 우승을 시작으로, 1967년 윌트 체임벌린 시대를 거쳐 1983년 줄리어스 어빙과 모제스 말론을 앞세워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대 찰스 바클리 시대를 지나 앨런 아이버슨 시대를 거치며 2001년 NBA 파이널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후 팀 재건을 거쳐 조엘 엠비드를 중심으로 다시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으며, 보스턴 셀틱스와의 오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델라웨어 블루코츠를 G 리그 제휴팀으로 두고 있으며, 프랭클린 더 독을 마스코트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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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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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팀 이름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원어 표기 | Philadelphia 76ers |
별칭 | 76ers, 시크서스, |
![]() | |
연고지 |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경기장 | 웰스 파고 센터 |
수용 인원 | 20,318명 |
개장 | 1996년 |
창단 | 1946년 |
팀 역사 | 시라큐스 내셔널즈 (1946년-1963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63년-현재) |
소속 리그 | NBA |
컨퍼런스 | 동부 컨퍼런스 |
디비전 | 애틀랜틱 디비전 |
팀 색상 | 파랑 빨강 은색 남색 하양 |
후원사 | Crypto.com |
웹사이트 | sixers.com |
운영진 | |
CEO | Tad Brown |
구단주 | Harris Blitzer Sports & Entertainment (조시 해리스와 David Blitzer) |
사장 | Daryl Morey |
단장 | Elton Brand |
감독 | Nick Nurse |
제휴팀 | 델라웨어 블루코츠 |
우승 기록 | |
리그 우승 | 3회 (1955년, 1967년, 1983년) |
컨퍼런스 우승 | 5회 (1977년, 1980년, 1982년, 1983년, 2001년) |
디비전 우승 | 12회 (1950년, 1952년, 195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77년, 1978년, 1983년, 1990년, 2001년, 2021년) |
파이널 진출 | 6회 (1967년, 1977년, 1980년, 1982년, 1983년, 2001년) |
영구 결번 | |
영구 결번 선수 | 2 3 4 6 10 13 15 24 32 34 |
유니폼 정보 | |
어소시에이션 유니폼 | pattern_b: _philadelphia76ers_association pattern_s: _philadelphia76ers_association |
아이콘 유니폼 | pattern_b: _philadelphia76ers_icon pattern_s: _philadelphia76ers_icon |
스테이트먼트 유니폼 | pattern_b: _philadelphia76ers_statement pattern_s: _philadelphia76ers_statement |
2. 역사
1963년 3월 26일, 플레이오프 연장전 패배를 끝으로 시러큐스 내셔널스는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이후 투자자 어브 코슬로프와 아이크 리치먼이 대니 바이어소네로부터 팀을 인수하여 필라델피아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이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가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지 1년 만에 NBA 팀이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것이었다. 시러큐스는 NBA 팀을 보유한 마지막 중소 도시 중 하나였으나, 당시 뉴욕 중부 지역 규모로는 더 이상 팀 유지가 어렵다는 판단이 있었다.
팀의 새 이름을 정하기 위한 공모전이 열렸고, 월터 스탈버그가 제안한 "세븐티식서스(76ers)"가 최종 선택되었다.[14][1] 이 이름은 1776년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독립 선언이 서명된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했다. "식서스(Sixers)"라는 짧은 약칭 역시 기사 제목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팀 마케팅에도 빠르게 채택되어 현재까지 "76ers"와 "Sixers"는 공식적으로 혼용되고 있다.[15]
필라델피아에서 보낸 첫 4년 동안, 세븐티식서스는 주로 필라델피아 아레나와 시빅 센터-컨벤션 홀에서 홈 경기를 치렀으며, 때때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더 팔레스트라에서도 경기를 가졌다. 팀의 초대 감독으로는 돌프 셰이스가 임명되었고, 그는 첫해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이후 3년간은 감독직을 수행하며 총 4년간 팀을 이끌었다.
2. 1. 시러큐스 내셔널스 (1946-1963)



1946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업가 대니 바이어소네는 뉴욕주 시러큐스에서 5천달러에 내셔널 농구 리그(NBL)의 '''Syracuse Nationals|시러큐스 내셔널스영어'''를 창단했다.[8] 대부분 중서부 소도시 팀들로 구성된 NBL에서 내셔널스는 첫 시즌인 1946-47 시즌에 21승 23패의 성적을 거두며 4위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로체스터 로열스에게 패했다. 두 번째 시즌인 1947-48 시즌에는 24승 36패로 5위에 그쳤지만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앤더슨 더피 패커스에게 3연패로 탈락했다.
1948-49 시즌을 앞두고 NBL의 네 팀이 BAA로 이적하며 리그 재편의 움직임이 있었다.[9] 내셔널스는 단장으로 레오 페리스를 영입하며 변화를 모색했다.[10] 페리스는 알 서비를 선수 겸 감독으로 영입하고, 뉴욕 닉스와의 경쟁 끝에 신인 돌프 셰이스 영입에 성공했다.[11] 셰이스의 합류로 전력이 강화된 내셔널스는 40승 23패를 기록하며 창단 후 처음으로 5할 이상의 승률을 달성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해몬드 캘루멧 버캐니어스를 꺾었지만, 준결승에서 앤더슨 더피 패커스에게 다시 패배했다. 1949년, NBL과 BAA가 합병하여 NBA가 출범하면서 내셔널스는 NBA에 합류한 7개의 NBL 팀 중 하나가 되었다.
NBA 합류 첫 시즌인 1949-50 시즌, 내셔널스는 51승 13패라는 리그 최고 성적을 기록하며 동부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와 뉴욕 닉스를 연달아 꺾고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파이널에서는 NBL 시절 라이벌이었던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와 맞붙었으나, 1차전 홈 경기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6차전 끝에 준우승에 머물렀다.
1950-51 시즌에는 32승 34패로 다소 주춤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1위 워리어스를 꺾는 저력을 보였다. 그러나 동부 결승에서 닉스에게 접전 끝에 패배했다. 1951-52 시즌, 선수 활동을 줄이고 감독 역할에 집중한 알 서비는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팀을 이끌어 40승 26패로 동부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워리어스를 다시 꺾었지만, 동부 결승에서 또다시 닉스에게 패하며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
1952-53 시즌에는 47승 24패로 동부 디비전 2위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보스턴 셀틱스와 만나 1차전 홈 경기 패배 후, 2차전 원정 경기에서 4번의 연장전 끝에 105-111로 패하며 탈락했다. 이 경기는 NBA 플레이오프 역사상 가장 긴 경기로 기록되어 있다.[12] 1953-54 시즌에는 42승 30패로 동부 디비전 2위를 차지했고, 플레이오프 라운드 로빈 토너먼트를 전승으로 통과하며 동부 결승에 진출했다. 동부 결승에서 셀틱스를 꺾고 다시 NBA 파이널에 올랐지만, 레이커스와의 7차전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했다.
1954-55 시즌, 구단주 바이어소네는 경기 지연을 막기 위해 24초 공격 제한 시간(슛 클락) 도입을 제안했고, 이는 리그 전체의 경기 속도와 득점을 향상시키는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슛 클락이 도입된 첫 시즌, 내셔널스는 43승 29패로 동부 디비전 1위를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셀틱스를 꺾고 2년 연속 NBA 파이널에 진출한 내셔널스는 포트웨인 피스톤스와 맞붙었다. 홈에서 열린 1, 2차전을 승리했지만 원정 3연전에서 모두 패하며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홈에서 열린 6차전을 승리하며 승부를 7차전으로 끌고 갔다. 7차전 막판, 조지 킹의 결정적인 자유투와 스틸에 힘입어 92-91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창단 첫 NBA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했다.[13]
우승 이후 내셔널스는 꾸준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다시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다. 1955-56 시즌에는 35승 37패로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동부 결승까지 올랐으나 워리어스에게 패했다. 1956-57 시즌 도중 폴 시모어가 감독으로 부임했고, 팀은 38승 34패로 2위를 기록하며 다시 동부 결승에 진출했지만 이번에는 셀틱스에게 패했다. 1957-58 시즌에는 41승 31패로 2위를 기록했으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워리어스에게 패배했다. 이 시기 포트웨인과 로체스터 팀이 각각 디트로이트와 신시내티로 이전하면서, 시러큐스는 NBA의 마지막 소도시 연고팀으로 남게 되었다.
1958-59 시즌에는 35승 37패로 동부 결승에 진출했지만 셀틱스와의 7차전 접전 끝에 패했고, 1959-60 시즌에는 45승 30패의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윌트 체임벌린이 이끄는 워리어스에게 탈락했다. 1960-61 시즌에는 38승 41패로 다시 동부 결승에 진출했지만 셀틱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레이커스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면서 내셔널스는 원래 연고 도시에 남아있는 마지막 구 NBL 팀이 되었다. 1961-62 시즌에는 셰이스가 부상으로 결장하는 동안 할 그리어가 팀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하며 41승 39패를 기록했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워리어스에게 패했다. 1962-63 시즌에는 노쇠화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니 커의 활약에 힘입어 48승 32패로 2위를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신시내티 로열스에게 5차전 연장 접전 끝에 패하며 탈락했다.
1963년 3월 26일, 로열스와의 플레이오프 패배는 시러큐스 내셔널스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시러큐스가 상업적으로 팀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투자자 어브 코슬로프와 아이크 리치먼이 바이어소네로부터 팀을 인수하여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이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가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지 1년 만에 NBA 팀이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것이었다. 새로운 팀명 공모를 통해 1776년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독립 선언이 서명된 것을 기념하는 '''세븐티식서스'''(76ers)가 팀명으로 결정되었다.[14][1] "식서스"(Sixers)라는 약칭도 널리 사용되었다.[15] 팀의 초대 감독으로는 돌프 셰이스가 임명되었다.
시즌 | 승 | 패 | 승률 | 플레이오프 결과 | 상대팀 및 결과 |
---|---|---|---|---|---|
시러큐스 내셔널스 (Syracuse Nationals) | |||||
1949-50 | 51 | 13 | .797 | 디비전 준결승 승리 디비전 결승 승리 NBA 파이널 패배 | 내셔널스 2, 필라델피아 0 내셔널스 2, 닉스 1 미네아폴리스 4, 내셔널스 2 |
1950-51 | 32 | 34 | .485 | 디비전 준결승 승리 디비전 결승 패배 | 내셔널스 2, 필라델피아 0 닉스 3, 내셔널스 2 |
1951-52 | 40 | 26 | .606 | 디비전 준결승 승리 디비전 결승 패배 | 내셔널스 2, 필라델피아 1 닉스 3, 내셔널스 1 |
1952-53 | 47 | 24 | .648 | 디비전 준결승 패배 | 셀틱스 2, 내셔널스 0 |
1953-54 | 42 | 30 | .583 | 라운드 로빈 (vs 셀틱스) 라운드 로빈 (vs 닉스) 디비전 결승 승리 NBA 파이널 패배 | 내셔널스 2, 셀틱스 0 내셔널스 2, 닉스 0 내셔널스 2, 셀틱스 0 미네아폴리스 4, 내셔널스 3 |
1954-55 | 43 | 29 | .597 | 디비전 결승 승리 NBA 파이널 우승 | 내셔널스 3, 셀틱스 1 내셔널스 4, 포트웨인 3 |
1955-56 | 35 | 37 | .486 | 타이브레이크 게임 승리 디비전 준결승 승리 디비전 결승 패배 | 내셔널스 1, 닉스 0 내셔널스 2, 셀틱스 1 필라델피아 3, 내셔널스 2 |
1956-57 | 38 | 34 | .528 | 디비전 준결승 승리 디비전 결승 패배 | 내셔널스 2, 필라델피아 0 셀틱스 3, 내셔널스 0 |
1957-58 | 41 | 31 | .569 | 디비전 준결승 패배 | 필라델피아 2, 내셔널스 1 |
1958-59 | 35 | 37 | .486 | 디비전 준결승 승리 디비전 결승 패배 | 내셔널스 2, 닉스 0 셀틱스 4, 내셔널스 3 |
1959-60 | 45 | 30 | .600 | 디비전 준결승 패배 | 필라델피아 2, 내셔널스 1 |
1960-61 | 38 | 41 | .481 | 디비전 준결승 승리 디비전 결승 패배 | 내셔널스 3, 필라델피아 0 셀틱스 4, 내셔널스 1 |
1961-62 | 41 | 39 | .513 | 디비전 준결승 패배 | 필라델피아 3, 내셔널스 2 |
1962-63 | 48 | 32 | .600 | 디비전 준결승 패배 | 신시내티 3, 내셔널스 2 |
2. 2.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63-현재)
시라큐스 내셔널스는 더 큰 시장을 찾아 1963년 필라델피아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이는 같은 해 필라델피아 워리어스가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공백을 메우는 결정이었다. 팀 이름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변경되었다. '세븐티식서스(76ers)'라는 이름은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독립선언이 이루어진 해인 1776년을 기념하여 지어졌다.필라델피아 이전 후 팀은 윌트 체임벌린을 중심으로 1967년 첫 NBA 파이널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줄리어스 어빙과 모세스 말론 시대인 1983년에 다시 한번 정상에 올랐다. 그 뒤를 이어 찰스 바클리, 앨런 아이버슨, 조엘 엠비드와 같은 스타 선수들이 팀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2. 2. 1. 윌트 체임벌린 시대 (1965-1968)

1964-65 NBA 시즌 중반, 세븐티식서스는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로부터 필라델피아 출신의 전설적인 센터 윌트 체임벌린을 영입했다. 워리어스는 원래 필라델피아를 연고지로 했던 팀이었고, 체임벌린은 오버브룩 고등학교 시절 필라델피아 농구계의 스타였기에 이는 그의 고향 복귀였다. 체임벌린 합류 후 세븐티식서스는 플레이오프 동부지구 결승에서 보스턴 셀틱스와 7차전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를 벌였다. 그러나 7차전 종료 직전, 110-109로 뒤진 상황에서 할 그리어가 시도한 인바운드 패스를 셀틱스의 존 해블리체크가 가로채면서 아쉽게 패배했다.[16]
1966-67 NBA 시즌, 알렉스 해넘 감독의 지휘 아래 세븐티식서스는 역사적인 시즌을 보냈다. 해넘 감독은 이전까지 7년 연속 득점왕이었던 체임벌린에게 득점 부담을 줄이고 팀 플레이에 더 집중하도록 역할을 조정했다. 이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어, 팀은 정규시즌 68승 13패라는 당시 NBA 역대 최고 승률 기록을 세웠다.[18] 특히 시즌 첫 50경기에서는 46승 4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적수가 없음을 증명했다.[17] 체임벌린을 중심으로 빌리 커닝햄, 할 그리어, 쳇 워커, 루셔스 잭슨, 월리 존스 등 강력한 선수진을 갖춘 세븐티식서스는 플레이오프 동부지구 결승에서 8년 연속 NBA 챔피언 자리를 지키던 숙적 보스턴 셀틱스를 5경기 만에 제압했다. 이 승리로 셀틱스의 오랜 독주가 마감되자 필라델피아 팬들은 "보스턴은 죽었다!(Boston's dead!)"를 외치며 열광했다. 이어진 1967 NBA 파이널에서는 체임벌린의 친정팀 격인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를 6경기 만에 꺾고 시러큐스 내셔널스 시절 이후 12년 만에, 팀 역사상 두 번째 NBA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이 시즌의 세븐티식서스는 1980년 NBA 35주년 기념팀 선정 당시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으로 뽑힐 정도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8년 시즌 종료 후, 팀은 핵심 선수였던 윌트 체임벌린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트레이드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비록 체임벌린의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여전히 위력적이었던 그의 공백은 팀 전력에 큰 손실을 가져왔고, 이는 이후 팀 암흑기의 시작점이 되었다.
2. 2. 2. 줄리어스 어빙 시대 (1976-1987)
1976년, 팻 윌리엄스 단장은 ABA의 해체 과정에서 재정난을 겪던 뉴저지 네츠로부터 슈퍼스타 줄리어스 어빙을 600만달러에 영입하며 팀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다. 어빙의 합류로 팀은 단숨에 강호로 부상했지만, 우승까지는 쉽지 않았다. 1980년 NBA 파이널에서는 신인 매직 존슨이 이끄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2승 4패로 패했고, 1981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숙적 보스턴 셀틱스에게 7차전 접전 끝에 3승 4패로 패배했으며, 1982년에는 다시 셀틱스를 꺾고 파이널에 올랐지만 이번에도 레이커스에게 2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1981년 팀을 인수한 해롤드 카츠 구단주는 우승을 위해 1982년 휴스턴 로키츠에서 또 다른 ABA 출신 스타 센터 모제스 말론을 영입했다. 어빙과 말론이라는 강력한 조합에 모리스 치크스, 앤드류 토니, 보비 존스 등 뛰어난 선수들이 더해진 식서스는 1982-83 시즌, 정규리그에서 65승 17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리그 전체 1위를 차지했고, 말론은 정규시즌 MVP에 선정되었다.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말론은 모든 시리즈를 4승으로 끝내겠다는 의미의 "포, 포, 포 (Fo', Fo', Fo')"를 언급하며 자신감을 보였다. 식서스는 플레이오프를 거의 완벽하게 지배했다.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밀워키 벅스에게 단 1패만을 내줬을 뿐, 나머지 시리즈를 모두 휩쓸며 파이널에 진출했다. 파이널에서는 카림 압둘자바와 매직 존슨이 버티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4승 0패, 완벽한 스윕으로 꺾고 마침내 팀 통산 세 번째 우승이자 필라델피아 연고 이전 후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 총 전적 12승 1패는 당시 NBA 역사상 최고 승률이었으며, 이 시즌의 식서스는 1996년 'NBA 50주년 올타임 팀'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역사적인 팀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강력했던 시기에도 식서스의 우승은 1983년 단 한 번에 그쳤는데, 이는 당시 NBA를 양분하며 황금기를 구가하던 보스턴 셀틱스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라는 강력한 경쟁자들 때문이었다.

1984년 드래프트에서 찰스 바클리를 지명하며 미래를 준비했지만, 영광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갔다. 1986년에는 팀의 기둥이었던 모제스 말론이 워싱턴 불리츠로 트레이드되었고, 1987년에는 팀의 상징과도 같았던 줄리어스 어빙이 은퇴를 선언하며 '닥터 J'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팀은 젊은 찰스 바클리를 새로운 중심으로 삼아 다음 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2. 2. 3. 찰스 바클리 시대 (1984-1992)
어빙과 말론이 선수 생활 황혼기에 접어든 1984년, 찰스 바클리가 팀에 합류했다. 바클리는 특유의 전투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코트 위에서 고군분투했지만, 팀은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했다. 더욱이 마이클 조던이나 하킴 올라주원 같은 드래프트 동기들이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팀 성적 부진 외에도 바클리는 구단 운영 방식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당시 구단주였던 해럴드 카츠(Harold Katz)의 독단적인 운영과 팀 강화에 소극적인 투자, 그리고 투지 없는 프런트 오피스의 태도에 염증을 느낀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불만이 쌓여, 바클리는 1991-92 시즌이 끝난 후 팀에 트레이드를 공식적으로 요구했고, 피닉스 선스로 이적하며 필라델피아를 떠났다.
2. 2. 4. 암흑기 (1992-1996)
1992년 찰스 바클리(Charles Barkley)가 팀을 떠나면서 세븐티식서스는 재편성기에 들어섰다. 이 시기 동안 팀의 주요 선수 구성에 변화가 많았다. 바클리와 함께 허시 호킨스(Hersey Hawkins)(1988-1993), 론 앤더슨(Ron Anderson)(1988-1993), 조니 도킨스(Johnny Dawkins)(1989-1994), 마누테 볼(Manute Bol)(1990-1993) 등 기존 선수들이 팀을 떠났다.새롭게 합류한 선수로는 제프 호르나섹(Jeff Hornacek)(1992-1994), 클래런스 웨더스푼(Clarence Weatherspoon)(1992-1998), 션 브래들리(Shawn Bradley)(1993-1995), 데릭 콜먼(Derrick Coleman)(1995-1998), 제리 스택하우스(Jerry Stackhouse)(1995-1998) 등이 있다. 전설적인 선수 모세스 말론(Moses Malone)이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잠시 팀에 복귀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1996년 앨런 아이버슨(Allen Iverson)이 팀에 합류하면서 마무리된다.
2. 2. 5. 앨런 아이버슨 시대 (1996-2006)
1996년 구단주 해롤드 캐츠가 컴캐스트에 경영권을 매각하면서 팀은 컴캐스트의 스포츠/엔터테인먼트 계열사인 '컴캐스트 스펙테이커' 산하로 들어갔다. 2대 주주 에드 스나이더가 회장직을, 팻 크로치가 사장직을 맡았으며,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출신 브래드 그린버그가 운영 부사장 겸 단장, 조니 데이비스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24] 팀은 오랜 홈구장 스펙트럼을 떠나 신축 구장인 코어스테이트 센터로 이전했고, 크로치 사장은 '5년 계획'을 발표하며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1996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조지타운대 출신의 앨런 아이버슨을 지명하여 제리 스택하우스와 함께 팀의 주축으로 삼으려 했으나, 팀은 22승 60패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아이버슨은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1996-97 시즌 종료 후, 팀은 로고와 색상을 흰색, 검정색, 빨강 등으로 변경하며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데이비스 감독과 그린버그 단장은 해임되었고, 대학 농구 해설가 출신 빌리 킹이 관리 부사장으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래리 브라운을 영입하여 단장 겸 감독의 전권을 맡겼다. 브라운 감독은 수비 중심의 농구 철학으로 알려져 있었다. 1997년 드래프트에서는 전체 2순위로 유타대 출신 키스 밴혼을 지명했으나, 곧바로 뉴저지 네츠가 7순위로 지명한 팀 토마스와 트레이드했고, 이 과정에서 짐 잭슨과 에릭 몬트로스도 영입했다.
1997-98 시즌 초반에도 성적이 부진하자, 1997년 12월 몬트로스와 스택하우스를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로 보내고 애런 맥키와 테오 라틀리프를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1998년 1월에는 시애틀 슈퍼소닉스로부터 에릭 스노우를 영입했고, 2월에는 클래런스 웨더스푼과 짐 잭슨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보내고 조 스미스와 브라이언 쇼를 받는 트레이드를 실시했다.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득점왕으로 성장한 아이버슨의 활약에 힘입어 팀은 이전 시즌보다 11승 늘어난 31승 51패를 기록하며 발전 가능성을 보였다.
1998-99 시즌을 앞두고 빌리 킹이 단장직을 맡았다. 팀은 조지 린치와 맷 가이거를 영입했고, 시즌 중에는 밀워키 벅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타이론 힐을 데려왔다. 직장 폐쇄로 50경기로 단축된 시즌이었지만, 아이버슨을 중심으로 팀은 28승 22패를 기록하며 1991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올랜도 매직을 3승 1패로 꺾었으나, 2라운드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스윕 패배를 당했다.
1999-2000 시즌에는 49승 33패로 동부 컨퍼런스 5위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샬럿 호네츠를 3승 1패로 이겼지만, 2라운드에서 다시 만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2승 4패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이 시기 아이버슨과 브라운 감독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아이버슨의 트레이드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갈등을 봉합한 2000-01 시즌, 아이버슨은 팀의 확실한 리더로 자리매김했고, 에릭 스노우, 테오 라틀리프, 애런 맥키, 토니 쿠코치 등 수비력이 좋은 선수들과 함께 강력한 팀을 구축했다. 시즌 중반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팀은 쿠코치 등을 애틀랜타 호크스로 보내고 수비의 핵심인 디켐베 무톰보를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정규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친 식서스는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밀워키 벅스를 꺾고 1983년 이후 처음으로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파이널에서는 플레이오프 동안 주축 선수들의 부상이 누적된 탓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게 1승 4패로 패배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후 아이버슨과 브라운 감독의 불화가 다시 표면화되었고, 결국 2003년 브라운 감독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로 떠났다. 홀로 팀을 이끌게 된 아이버슨은 상대 팀들의 집중적인 지역 방어에 고전했다. 팀은 데릭 콜먼, 키스 밴혼, 글렌 로빈슨 등을 영입하며 아이버슨을 보좌할 두 번째 득점원을 만들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아이버슨은 2006-07 시즌 도중 덴버 너기츠로 트레이드되면서 10년간 이어졌던 필라델피아에서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2. 2. 6. 앨런 아이버슨 이후 (2006-2016)
2004년 NBA 드래프트에서 안드레 이궈달라를 영입했다. 2006년, 팀의 핵심 선수였던 앨런 아이버슨을 덴버 너기츠로 보내면서 팀 재편에 들어갔다. 이후 200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에서 엘튼 브랜드를 영입하여 그를 중심으로 팀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했다. 2012년 8월 9일에는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던 안드레 이궈달라를 덴버 너기츠로 트레이드하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부터 센터 앤드류 바이넘을 영입하는 변화를 겪었다.2. 2. 7. 조엘 엠비드 시대 (2016-현재)
2019-2020 시즌은 3월 11일 유타 재즈와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루디 고베어가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으면서 경기가 중단되었다.[156][157] 다음 날 검사 결과, 세븐티식서스 팀 스태프 4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해 시즌이 중단되었고, 경기 수가 축소된 정규 시즌을 43승 30패, 동부 컨퍼런스 6위로 마쳤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제이슨 테이텀이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에게 스윕 패배를 당했다.2020년 NBA 드래프트에서 타이리스 맥시를 전체 21순위로 지명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72경기로 축소된 2020-2021 시즌을 49승 23패로 마치며 동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워싱턴 위저즈를 4승 1패로 꺾었다. 그러나 트레이 영이 이끄는 5위 애틀랜타 호크스와의 2라운드에서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했다. 이 시리즈에서 부진했던 벤 시몬스는 도크 리버스 감독의 경기 후 인터뷰 발언과 팬들의 비판 등으로 인해 다음 시즌 오프 시즌 캠프에 불참했다. 2021-2022 시즌 개막 후에도 시몬스는 팀 합류를 거부하고 트레이드를 요구했으며, 또한 트레이드를 요구하며 팀 몰래 협상을 진행한 사실이 드러나 NBA 역사상 가장 무거운 벌금을 부과받았으나, 이후에도 시몬스는 세븐티식서스에서 뛰지 않았다.
2022년 2월, 브루클린 네츠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벤 시몬스, 세스 커리, 앤드루 드러먼드, 복수의 드래프트 지명권을 내주고 2017-18 시즌 MVP 제임스 하든과 폴 밀샙을 영입했다. 하든은 조엘 엠비드와 함께 팀을 이끌며 51승 31패로 동부 컨퍼런스 4위를 기록,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승리했지만, 시리즈 6차전 막판 엠비드가 파스칼 시아캄과의 충돌로 안와 골절 부상을 당했다. 이어진 2라운드 마이애미 히트와의 시리즈에서 엠비드가 첫 2경기에 결장한 여파로 2승 4패로 패배했다.
2022-23 시즌에는 재계약한 하든과 엠비드의 활약을 바탕으로 개막 3연패에도 불구하고 반등에 성공했다. 시즌 중 8개 팀을 상대로 스윕승을 거두고 두 차례 8연승을 기록하는 등 54승 28패의 호성적을 거두며 동부 컨퍼런스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 3. G 리그 제휴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NBA G 리그 제휴팀은 델라웨어주 윌밍턴을 연고지로 하는 '''델라웨어 블루코츠''' (Delaware Blue Coats|델라웨어 블루코츠eng)이다.델라웨어 블루코츠는 2007년 '''유타 플래시''' (Utah Flash|유타 플래시eng)라는 이름으로 창단하여 2011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2013년 '''델라웨어 에이티세브너스''' (Delaware 87ers|델라웨어 에이티세브너스eng)로 팀명을 변경하고 연고지를 델라웨어로 이전했으며, 2018년부터 현재의 팀명인 '''델라웨어 블루코츠'''를 사용하고 있다. 홈 경기장은 체이스 필드하우스이다.
동부 콘퍼런스 소속으로, G 리그에서 다음과 같은 성과를 거두었다.
- '''리그 우승''': 1회 (2023)[159]
- '''콘퍼런스 우승''': 2회 (2022, 2023)
- '''디비전 우승''': 1회 (2009, 유타 플래시 시절)
3. 팀 문화
주어진 원본 소스는 선수 명단 및 코칭 스태프 정보로, '팀 문화' 섹션의 내용을 작성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팀 문화'는 보통 팀의 역사적 배경, 팬과의 관계, 라이벌리, 마스코트 등 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요소들을 다루지만, 제공된 소스에는 이러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위 섹션에 라이벌과 마스코트에 대한 내용이 있지만, 원본 소스를 기반으로 작성해야 하므로 해당 내용을 직접 가져와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주어진 원본 소스만으로는 이 섹션의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3. 1. 라이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오랜 역사 동안 여러 팀과 치열한 경쟁 관계를 형성해왔다. 특히 NBA 동부 컨퍼런스에서 강력한 라이벌 관계를 구축한 팀들이 있다.가장 대표적인 라이벌은 보스턴 셀틱스이다. 두 팀의 라이벌리는 NBA에서 가장 오래되고 치열한 경쟁 중 하나로 꼽히며, NBA 플레이오프에서 역사상 가장 많은 맞대결을 펼쳤다. 1960년대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의 대결부터 1980년대 줄리어스 어빙과 래리 버드 시대, 그리고 2000년대 이후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명승부를 만들어냈다.[129][130]
이 외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경기나 트레이드를 통해 관계를 맺은 팀들이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1. 보스턴 셀틱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보스턴 셀틱스의 라이벌리는 NBA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벌 관계 중 하나로 꼽힌다. 두 팀은 NBA 플레이오프에서 총 19번 만나 역대 가장 많은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치렀으며, 이 중 셀틱스가 12번 승리했다.[129] 이 라이벌리는 셀틱스-레이커스 라이벌리 다음으로 NBA 역사상 두 번째로 치열한 라이벌리로 평가받기도 한다.[130]
라이벌리는 1960년대에 윌트 체임벌린과 셀틱스의 빌 러셀이 맞붙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1966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식서스가 셀틱스에게 패배했지만, 이듬해인 1966-67 NBA 시즌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식서스는 정규 시즌에서 68승 13패라는 경이적인 성적(당시 NBA 역대 최다승 기록)을 거두었고, 플레이오프에서 셀틱스를 꺾으며 보스턴의 8년 연속 우승 행진을 저지했다. 이 승리는 "보스턴은 죽었다!(Boston's Dead!)"라는 유명한 구호를 낳기도 했다. 이 시즌의 식서스는 1980년 NBA 35주년 기념 당시 리그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 잠시 재건기를 거친 식서스는 1976-77 NBA 시즌에 다시 강팀으로 부상하며 플레이오프에서 셀틱스를 꺾고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1980년대에는 두 팀 모두 전성기를 맞이했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동부 컨퍼런스 챔피언십은 오직 식서스 또는 셀틱스만이 차지했다. 래리 버드가 이끈 셀틱스가 5번 우승했고, 줄리어스 어빙이 이끈 식서스가 3번 우승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찰스 바클리가 이끄는 식서스가 셀틱스와 맞섰지만, 두 팀 모두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2000년대 들어 라이벌리는 다시 불붙었다. 2002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식서스가 폴 피어스가 이끄는 셀틱스에게 5차전 접전 끝에 3승 2패로 패배했다. 2006년 정규 시즌에는 3차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식서스가 125-124로 승리했으며, 아이버슨은 이 경기에서 33점 1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정확히 10년 뒤인 2012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케빈 가넷, 폴 피어스, 레이 앨런의 '빅3'를 앞세운 셀틱스가 8번 시드로 올라온 식서스를 7차전 승부 끝에 4승 3패로 꺾었다.
3. 1. 2. 새크라멘토 킹스
2004-05 시즌 동안 필라델피아는 새크라멘토 킹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크리스 웨버를 영입하여, 마침내 아이버슨을 보완할 꾸준한 두 번째 득점 옵션을 찾았다는 기대를 품었다.3. 2. 마스코트

2015년 2월 10일, 프랭클린 더 독(Franklin the Dog)이 프랭클린 연구소에서 400명의 팬들과 언론 앞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새로운 마스코트로 소개되었다. 2015 NBA 올스타전을 위해 뉴욕시에서 주말을 보내며 NBA 최신 마스코트로 활동한 후, 2015년 2월 19일 웰스파고 센터에서 열린 첫 경기에서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이전에는 1980년대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마스코트는 빅 샷(Big Shot)[128]이었다. 그 후 토끼인 힙합(Hip Hop)으로 교체되었는데, 힙합은 주로 시간 제한이나 하프타임 동안 덩크슛을 선보였다. 2011년 NBA 잠정 중단 이후 힙합은 돌아오지 않았다.
4. 경기장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창단 이후 여러 경기장을 홈으로 사용했다. 시러큐스 시절에는 주립 박람회 콜리세움(1946–1951)과 오논다가 카운티 전쟁 기념관(1951–1963)을 사용했고, 필라델피아로 연고지를 이전한 초기에는 컨벤션 홀 및 필라델피아 아레나(1963–1967)를 이용했다. 이후 1967년부터 1996년까지 약 30년간 스펙트럼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했으며, 1996년부터 현재까지는 웰스파고 센터를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팀의 훈련 시설 및 농구 운영 본부는 뉴저지주 캠든에 위치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훈련 단지이다.[131][132] 이 시설은 2016년 9월에 개장했으며,[133] 이전에는 필라델피아 골수종 의과대학 캠퍼스에서 훈련했다.[134]
4. 1. 홈 경기장

경기장 | 사용기간 | 수용인원 | 장소 | 비고 |
---|---|---|---|---|
시러큐스 내셔널즈 | ||||
스테이트 페어 콜리시엄 | 1946년~1951년 | 7,500명 | 뉴욕주 시러큐스 | |
오논다 카운티 워 메모리얼 콜리시엄 | 1951년~1963년 | 6,230명 |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
필라델피아 컨벤션 홀 | 1963년~1967년 | 12,000명 |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
필라델피아 아레나 | 7,000명 | 제2홈경기장 | ||
코어스테이츠 스펙트럼 | 1967년~1996년 2009년 | 18,176명 | 더 스펙트럼 (1967년~1994년) 2009년 한 경기를 치름. | |
웰스 파고 센터 | 1996년~현재 | 21,000명 | 코어스테이츠 센터 (1996년~1998년) 퍼스트 유니언 센터 (1998년~2003년) 와코비아 센터 (2003년~2010년) | |
세븐티식스 플레이스 앳 마켓 이스트 | 2031년~미래 | 18,500명 | 예정 |
4. 2. 훈련 시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훈련 시설이자 농구 운영 본부는 뉴저지주 캠든에 있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훈련 단지(Philadelphia 76ers Training Complex|영어)에 위치해 있다. 2014년, 세븐티식서스는 새로운 훈련 단지 건설 계획을 발표했으며,[131][132] 2016년 9월 23일에 공식적으로 개장했다.[133]
이전에는 필라델피아 골수종 의과대학(Philadelphia College of Osteopathic Medicine|영어) 캠퍼스에서 훈련을 진행했다.[134]
5. 영구 결번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모든 영구 결번은 웰스 파고 센터의 천장에 걸려 있다.
번호 | 선수 | 포지션 | 활동 기간 | 영구 결번 기념일 |
---|---|---|---|---|
2 | 모세스 말론 | C | 1982–1986 1993–1994 | 2019년 2월 8일[137] |
3 | 앨런 아이버슨 | G | 1996–2006 2009–2010 | 2014년 3월 1일[138] |
4 | 돌프 셰이스 | F/C | 1948–1964 1 2 | 2016년 3월 12일[139] |
63 | 줄리어스 어빙 | F | 1976–1987 | 1988년 4월 18일 |
10 | 모리스 칙스 | G | 1978–1989 4 | 1995년 2월 6일 |
13 | 윌트 체임벌린 | C | 1965–1968 5 | 1991년 3월 18일 |
15 | 핼 그리어 | G | 1958–1973 6 | 1976년 11월 19일 |
24 | 바비 존스 | F | 1978–1986 | 1986년 11월 7일 |
32 | 빌리 커닝햄 | F | 1965–1972 1974–1976 7 | 1976년 12월 17일 |
34 | 찰스 바클리 | F | 1984–1992 | 2001년 3월 30일 |
![]() | 데이브 징코프 | 아나운서 | 1963–1985 8 | 1986년 3월 25일 |
'''참고:'''
- 1 선수 겸 감독으로도 활동 (1963–1966).
- 2 영구 결번 발표 당시 너렌스 노엘이 이 번호를 사용 (2013–2017).
- 3 2022년 8월 11일 빌 러셀을 기리기 위해 리그 전체에서도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140][141]
- 4 감독으로도 활동 (2005–2008).
- 5 필라델피아 출신이며,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에서도 활동 (1959–1962).
- 6 시러큐스 내셔널스에서 1958–1963 활동.
- 7 감독으로도 활동 (1977–1985).
- 8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에서도 활동 (1946–1962).
6. 명예의 전당 헌액자
8
55
1974–1976
1993–1994
34
2009–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