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가와 히데카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세가와 히데카즈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던 무장으로, 오다 가신 시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활동했다. 혼노지의 변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가 탈출을 도왔으며,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키슈 정벌,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으나, 1594년 조선에서 병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94년 사망 - 틴토레토
틴토레토는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 화가로,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하여 극적이고 역동적인 화풍을 창조했으며, <성 마르코의 기적> 등 대규모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고 엘 그레코 등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1594년 사망 - 이시카와 고에몬
이시카와 고에몬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인물로 의적이자 민중 영웅으로 알려졌지만, 역사적 기록 부족으로 실제 삶은 미스터리이며, 권력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재해석되어 다양한 전설과 창작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오다 노부나가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오다 노부나가 - 아케치 미쓰히데
아케치 미쓰히데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나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그를 살해했으며, 전략과 행정에 능하고 문화적 교양도 뛰어났지만 야마자키 전투에서 패배 후 살해당해 그의 삶과 죽음은 역사적 논쟁과 창작물의 소재가 되고 있다. -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자 - 다테 마사무네
다테 마사무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다이묘이며 센다이 번의 초대 번주로, '독안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오슈 지역을 장악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속, 임진왜란과 오사카 전투에 참전, 센다이 번 건설과 스페인과의 통상 추진, 문화 예술에도 힘썼다. -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자 - 아리마 하루노부
아리마 하루노부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기리시탄 다이묘로, 히젠 아리마 씨의 당주이자 히노에 번 번주였으며, 가톨릭 개종 후 덴쇼 소년사절단 파견, 임진왜란 참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이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후 처형되었고, 그의 죽음은 에도 막부의 기독교 탄압 강화와 시마바라의 난의 배경이 되었다.
하세가와 히데카즈 | |
---|---|
기본 정보 | |
씨명 | 장곡천씨 |
이름 | 장곡천 수일 |
![]() | |
시대 | 전국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출생 | 불명 |
사망 | 문록 3년 (1594년 2월) |
개명 | 해당사항 없음 |
이명 | 죽, 죽환, 등오랑 (통칭), 정장, 우시바 도고 시종 |
시호 | 해당사항 없음 |
계명 | 해당사항 없음 |
묘소 | 후쿠이현후쿠이시 도고 니케마치 레이센지 |
관위 | 종5위하, 종4위하・시종 |
막부 | 해당사항 없음 |
주군 |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
씨족 | 하세가와 씨 |
가계 | |
부모 | 아버지: 하세가와 요지 |
형제 | 해당사항 없음 |
배우자 | 이오 나오키요의 딸 |
자녀 | 딸 (호리 히데하루의 부인) |
특기 사항 | |
특기 사항 | 해당사항 없음 |
2. 생애
하세가와 히데카즈는 아이치현이치노미야시 북방 마을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소년 시절부터 섬겼다.[1][2] 어릴 적부터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았으며, 오다 가신 시대에는 '''하세가와 다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2] 1575년 이세 나가시마성 복구 공사에 참여한 것이 기록상 처음 등장한다.[3]
1578년 하리마 칸키성 공격 때 감찰관으로 파견되었고,[4] 이듬해 아리오카성 전투에서 만미 시게모토가 전사하자 그의 저택을 물려받아 봉행으로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5] 1579년 안토 종론에서는 정엄원의 경비를 담당했고, 일련종 측의 사과문을 수취했다.[4] 이후 스가야 나가요리,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여러 업무를 처리하며 반텐렌 부지 조성, 안토의 마장 건설 봉행 등을 맡았다.[4]
1580년 고텐진 성을 포위 중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진영에 파견되어 사흘간 시찰하고 돌아왔다.[6] 1581년 영지를 크게 증여받았고, 오미국에서 미인계를 벌인 일당을 체포하여 오미의 노부나가 직할령 대관직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
1582년 사기장 때 마와리슈, 쇼네이슈를 이끌고 개선했고, 고슈 정벌에 출진하여 다케다 가쓰요리 측근을 처형하는 등의 사후 처리를 담당했다.[4] 이후 안토로 돌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환영 연회에 참석하고, 오사카 사카이 방문 시 이에야스 일행의 안내역을 맡았다.[4]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지리에 밝지 않은 이에야스 일행을 위해 안내를 자처하여 교토를 빠져나가는 길을 설명하고, 이가고에를 도왔다.[9][10][4]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지하여 이세국 미네성을 공격하고,[11] 오미 히다성주가 되었다.[12] 이때부터 '''하세가와 후지고로 히데카즈'''로 이름을 바꾸었다.[8]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하여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지원했으나 패배하고 후퇴했다.[13][14][15] 1585년 키슈 정벌에 참가하여 센고쿠보리성 전투, 제2차 오타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6] 같은 해 에치젠국 도고 15만 석의 영주가 되었고,[17] 1586년 승진, 1587년 규슈 평정에 참전했으며, 하시바 성을 받고 "하시바 도고 지주"라 칭했다.[19][20] 1588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고,[20]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했다.[21]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에 건너가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했다.[22] 1594년 조선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전해지나,[22] 귀국 후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23] 히데카즈에게는 적자가 없어 하세가와 가문은 대가 끊겼다.[23]
2. 1. 오다 가신 시대
아이치현이치노미야시 북방 마을 출신[1]으로, 오다씨 가신인 하세가와 요지의 아들이다. 오다 노부나가를 소년 시절부터 섬겼으며, 야베 가사다와 함께 어릴 적부터 여러 일에 참여했다.[2]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았으며[출처 필요] 오다 가신 시대에는 '''하세가와 다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덴쇼 3년(1575년) 1월 30일자 노부나가의 서장으로, 이때 히데카즈는 이세에서 나가시마성 복구 공사에 종사하는 석수들의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3]덴쇼 6년(1578년) 6월, 하리마 칸기성 공격 때 감찰관인 오츠 나가마사와 함께 파견되어 스가야 나가요리, 야베 가사다, 만미 시게모토, 이와이 시게마사와 교대로 검열을 실시했다.[4] 같은 해 12월 아리오카성 전투에서 만미 시게모토가 전사하자, 이듬해 덴쇼 7년(1579년) 1월 안토(현재의 오미하치만시안토정)에서 저택 교체가 이루어졌다. 옛 만미 저택은 히데카즈의 저택이 되었고, 옛 하세가와 저택에는 타카하시 토라마쓰가 들어왔다.[5] 하세가와보다 상석이었던 만미의 사망으로 인해 직책이 승진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히데카즈는 봉행으로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2. 2. 오다 가 봉행
아이치현이치노미야시 북방 마을 출신[1]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소년 시절부터 섬겼으며, 야베 가사다와 함께 어릴 적부터 여러 일에 기용되었다.[2]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았으며[출처 필요], 오다 가신 시대에는 "'''하세가와 다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덴쇼 3년(1575년) 1월 30일 자 노부나가의 서장으로, 이때 히데카즈는 이세에서 나가시마성 복구 공사에 종사하는 석수들의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3]덴쇼 6년(1578년) 6월, 하리마 칸기성 공격 때 감찰관인 오츠 나가마사와 함께 파견되어 스가야 나가요리·야베 가사다·만미 시게모토·이와이 시게마사와 교대로 검열을 실시했다.[4] 같은 해 12월 아리오카성 전투에서 만미 시게모토가 전사하자, 이듬해 덴쇼 7년(1579년) 1월 안토(현재의 오미하치만시안토정)에서 저택 교체가 이루어져, 옛 만미 저택이 히데카즈의 저택이 되었고, 옛 하세가와 저택에는 타카하시 토라마쓰가 들어갔다.[5] 만미 시게모토는 하세가와보다 상석이었는데, 그의 사망으로 인해 히데카즈의 직책이 승진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봉행으로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덴쇼 7년(1579년) 5월 27일 안토 종론에서는 정엄원(浄厳院)의 경비 담당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종론에서 패배한 일련종 측은 사과문을 제출했는데, 그 수취인은 스가야 나가요리, 호리 히데마사, 하세가와 히데카즈였다.[4] 이후 스가야, 호리와 함께 여러 업무를 함께 처리했는데, 반텐렌(伴天連) 부지 조성이나 안토(安土)의 마장(馬場) 건설 봉행 등을 세 사람이 함께 맡았다.[4]
덴쇼 8년(1580년) 12월에는 이노코 타카나리, 후쿠토미 히데카츠, 니시오 요시츠구와 함께 고텐진 성을 포위 중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진영에 파견되어 사흘 동안 현장을 시찰한 후, 같은 달 22일에 귀국했다.[6]
덴쇼 9년(1581년) 4월 13일, 논노무라 마사나리와 함께 영지를 크게 증여받았다. 같은 해 12월 5일 오미국에서 미인계(美人局)를 벌여 동선사(東善寺)의 엔넨(延念)에게 강요를 한 8이라는 이름의 남자 일당을 논노무라와 함께 체포하여 심문 후 처벌했는데, 이를 통해 두 사람이 오미의 노부나가 직할령에서 대관직(代官職)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 두 사람은 사쿠마 노부모리 추방 후 오미의 류타군(栗太郡), 야스군(野洲郡)의 대관도 맡았다.[7]
덴쇼 10년(1582년) 1월 15일 사기장(左義長) 때는 스가야 나가요리, 호리 히데마사, 야베 요리사다(矢部家定)와 함께 마와리슈(馬廻衆), 쇼네이슈(小姓衆)를 이끌고 개선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노부나가를 따라 스가야 나가요리, 호리 히데마사, 야베 요리사다, 후쿠토미 히데카츠와 함께 마와리슈를 이끌고 코슈 정벌에 출진했지만, 이미 오다 노부타다에 의해 다케다 가문 토벌이 거의 완료되었기 때문에 전투는 없었다. 히데카즈는 고후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측근인 아키야마 만카사이(秋山万可斎), 아키야마 마사나리(秋山昌成)(셋쓰노카미) 부자를 처형하는 등의 사후 처리를 담당했다.[4]
이후 안토로 돌아와 같은 해 5월 19일에는 쇼켄지(摠見寺)에서 열린 도쿠가와 이에야스 환영 연회에 참석했다. 20일에는 고운지(高雲寺)에서 이에야스의 향응을 다뉴 나가히데, 스가야, 호리와 함께 베풀었다.[4] 21일에는 이에야스가 오사카의 사카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히데카즈는 니시오 요시츠구와 함께 이에야스 일행의 안내역을 맡았다.[4] 6월 1일에는 사카이의 쓰다 무네유키(津田宗及) 저택의 다회에 이에야스, 아나야마 노부토모(아나야마 바이세츠)와 함께 참석했다.[8]
2. 3. 혼노지의 변과 이가고에
天正일본어 10년(1582년) 1월 15일 사기장(左義長) 때 스가야 나가요리, 호리 히데마사, 야베 요리사다와 하세가와 히데카즈 네 사람이 마와리슈(馬廻衆)와 쇼네이슈(小姓衆)를 이끌고 개선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따라 스가야 나가요리, 호리 히데마사, 야베 요리사다, 후쿠토미 히데카츠와 함께 마와리슈를 이끌고 고슈 정벌에 출진했지만, 이미 오다 노부타다에 의해 다케다 가문 토벌이 거의 완료되었기 때문에 전투는 없었다. 히데카즈가 한 일은 고후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측근인 아키야마 만카사이(秋山万可斎)와 아키야마 마사나리(秋山昌成)(셋쓰노카미) 부자를 처형하는 등의 사후 처리뿐이었다.[4]그 후 안토로 돌아와 같은 해 5월 19일에는 쇼켄지(摠見寺)에서 열린 도쿠가와 이에야스 환영 연회에 참석했다. 5월 20일에는 고운지(高雲寺)에서 다뉴 나가히데, 스가야, 호리와 함께 이에야스의 향응을 베풀었다.[4] 5월 21일에는 이에야스가 오사카의 사카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히데카즈는 니시오 요시츠구와 함께 이에야스 일행의 안내역을 맡았다.[4] 6월 1일에는 사카이의 쓰다 무네유키(津田宗及) 저택에서 열린 다회에 이에야스, 아나야마 노부토모(아나야마 바이세츠)와 함께 참석했다.[8]
2. 4. 도요토미 가신 시대
1582년 혼노지의 변 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카즈는 지리에 밝지 않은 이에야스 일행을 위해 안내를 자처하여 교토를 빠져나가는 길을 설명했다.[9] 또한 토이치 도오미츠에게 호위 병력 파견을 요청하고, 야마구치 진스케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여, 이에야스 일행이 안전하게 피신하는 데 기여했다.[10][4]1583년,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대립했을 때 히데요시를 지지하여 타키가와 카즈이에의 영지인 이세국 미네성을 공격했다.[11] 같은 해 오미 히다성주가 되었으며,[12] 하시바 히데나가,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다례회에 참석했다. 이때부터 이름을 '''하세가와 후지고로 히데카즈'''로 바꾸었다.[8]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 2,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여 미요시 노부요시 부대를 지원했으나, 도쿠가와 군의 맹공에 패하고 후퇴했다.[13][14][15] 이후 하시바 군의 후위부대를 맡아 오다 노부카쓰 군대와 교전했다.[15]
1585년 키슈 정벌에 참가하여 센고쿠보리성 전투, 제2차 오타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6] 같은 해 8월, 에치젠국 도고 15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17] 1586년 1월 14일 승전(昇殿)하고, 4월 9일 종4위로 승진했다.[18] 1587년 규슈 정벌에 참전했으며, 이 무렵 하시바 성을 받고 "'''하시바 도고 지주'''"라 칭했다.[19][20] 1588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20]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야마나카성 공격에 참가했다.[21]
2. 5. 주요 전투 참전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대립했을 때 히데요시를 지지하여 시바타 측에 가담한 타키가와 카즈이에의 영지인 이세국 미네 성을 공격했다.[11]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 병력 2,3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미요시 노부요시의 군대에 참가했지만 도쿠가와 군의 기습을 받았다. 히데카즈는 공격받는 미요시 부대를 돕기 위해 지원하여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지만 도쿠가와 군의 맹공에 패하고, 제3진의 대장 호리 히데마사에게 노부요시 부대의 패주를 알리는 사자를 보낸 후 자신도 철수했다.[15] 1585년 3월, 키슈 정벌에 참가하여 센고쿠보리성 전투, 제2차 오타성 전투에서 군공을 세웠다.[16] 1587년 2월 규슈 정벌에도 참전했다.[19]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종군하여 야마나카성 공격에 병력 3,000명을 이끌고 참가했다.[21]2. 6. 임진왜란 참전과 최후
1592년부터 시작된 문록의 왜란에서 하세가와 히데카즈는 병사 5,0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갔다. 같은 해 10월부터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등과 함께 진주성 공략에 참가하여, 창원시에서 조선 장수 유숭인을 야전에서 격파하였다. 그러나 진주성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실패하였다.[22] 이후에도 조선에 남아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1594년 2월에 조선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한다.[22]그러나 사망 시기를 귀국 후로 하는 기록도 있다. 『당대기(当代記)』에는 1594년 1월 후시미성 푸싱(普請)의 교명(交名)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그 후 2월에 죽었다고 한다. 하세가와 히데카즈(秀一)에게는 적자가 없어, 하세가와(長谷川)가는 무사단절(無嗣斷絶)되었다.[23]
2. 7. 사후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하세가와 히데카즈는 병사 5,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갔다. 창원시에서 조선 장수 유숭인(柳崇仁)을 야전에서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진주성 전투에서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하였다. 이후에도 조선에 주둔하며 전투를 이어갔지만, 1594년 2월 조선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22] 다만, 사망 시기를 귀국 후로 보는 기록도 존재한다. 『당대기(当代記)』에 따르면, 같은 해 1월 후시미성(伏見城) 보수 공사(푸싱(普請)) 명단(교명(交名))에 히데카즈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며, 그 후 2월에 사망했다고 한다.하세가와 히데카즈에게는 적자가 없었기에 하세가와 가문은 대가 끊겼다(무자단절(無嗣斷絶)). 그러나 영지 몰수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1596년까지 하세가와 요지(長谷川與次, 히데카즈의 아버지) 또는 방계 가문으로 추정되는 하세가와 히데야스(長谷川秀康) 등이 에치젠(越前) 지역 주민(국중(国衆))이나 사찰에 보낸 문서(판물(判物))가 확인된다.[23]
참조
[1]
서적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2]
문서
武家事紀
[3]
문서
妙光寺文書
[4]
서적
信長公記
[5]
문서
安土日記
[6]
서적
家忠日記
[7]
서적
織豊政権期近江の代官支配
[8]
문서
宗及自會記
[9]
서적
東照宮御実紀
[10]
서적
宇治田原町史
[11]
문서
柴田合戦記
[12]
서적
太閤記
[13]
문서
浅野家文書
[14]
문서
金沢市立図書館文庫
[15]
서적
改正三河後風土記
[16]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17]
문서
四国御発向并北国動座記
[18]
서적
天正文禄慶長年間の公家成・諸大夫成一覧
[19]
문서
当代記
[20]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21]
문서
伊達家文書
[22]
문서
聚楽武鑑
[23]
서적
福井県史 通史編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