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키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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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세키 술탄은 오스만 제국에서 술탄에게 독점적으로 속한 여성을 지칭하는 칭호로, 16세기 쉴레이만 1세의 황후 휘렘 술탄에게 처음 사용되었다. 하세키 술탄은 황실 하렘 내에서 발리데 술탄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휘렘 술탄, 누르바누 술탄, 사피예 술탄, 쾨셈 술탄 등이 하세키 칭호를 받았으며, 17세기 초 쾨셈 술탄을 마지막으로 칭호가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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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키 술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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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유형 | 오스만 제국의 궁정 작위 |
사용 시기 | 16세기 ~ 17세기 |
수여 대상 | 오스만 제국의 술탄의 배우자 |
상세 정보 | |
하세키 술탄 | 술탄의 배우자 |
유래 | 하세키 (خاصکى, 술탄의 총애를 받는 배우자) |
창설 | 쉴레이만 1세 |
폐지 | 17세기 말 |
후계 작위 | 카딘 |
2. 용어
"하세키(خاصکي-خاصگی)"는 아랍어 "Khassa(خاصه)"에 페르시아어 접미사 "gi(گی)"가 붙어 "무언가에 독점적으로 귀속된"이라는 뜻을 가진다.[2] 즉, 하세키는 술탄에게 독점적으로 속한 사람을 의미한다.
술탄(sultan)은 "권위" 또는 "지배"를 나타내는 아랍어 단어이다. 16세기부터 이 칭호는 오스만 왕조의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사용되었으며, 황실 가족의 주요 구성원이 사용하던 다른 칭호(특히 여성의 "하툰(hatun)", 남성의 "베이(bey)")를 대체했다. 이는 가족 특권으로서의 오스만 제국의 주권 권력 개념을 보여준다.
서양에서는 오스만 통치자를 "술탄"이라고 불렀지만, 오스만 제국 내에서는 "파디샤(padişah)"(황제) 또는 "휜카르(hünkar)"와 같은 페르시아어도 사용했다.[2] 황제의 공식 칭호는 "술탄"과 "칸"을 함께 사용했다(예: 술탄 쉴레이만 칸). 술탄의 자녀들도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황태자(세흐자데)는 이름 앞에, 황녀는 이름 뒤에 이 칭호를 사용했다. "술탄"은 종종 술타나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오스만 왕실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왕조의 여성 구성원을 남성 술탄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2. 1. 하세키 (Haseki)
'하세키(خاصکي-خاصگی)'는 아랍어 'Khassa(خاصه)'에 페르시아어 접미사 'gi(گی)'가 붙어, '무언가에 독점적으로 귀속된'이라는 뜻을 가진다.[2] 즉, 하세키는 술탄에게 독점적으로 속한 사람을 의미한다.술탄(سلطان)은 "권위" 또는 "지배"를 나타내는 아랍어 단어이다. 16세기부터 이 칭호는 오스만 왕조의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사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칭호 하세키 술탄은 국왕 배우자에 해당하는 유럽식 칭호였다. 휘렘 술탄 이전에는 오스만 제국에 칭호가 있는 여왕은 없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전통을 깨고 그의 전 (前) 시녀 휘렘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법적으로 결혼하여 그녀의 지위를 "가장 총애하는 배우자"에서 "국왕 배우자"로 격상시켰다.[3]
"하세키" 칭호는 이름 앞이나 뒤에 사용되었다. 하세키 칭호가 사용된 초기에는 이 칭호는 특별한 지위를 가진 술탄의 수석 후궁이 사용했으며, 술탄의 저명한 후궁들이 알려진 다른 칭호와 지위(하툰, 카딘)를 능가했다. 하세키 술탄은 황실 하렘에서 발리데 술탄 다음으로 두 번째로 강력한 여성이었고, 술탄의 침실과 가까운 곳에 있는 방을 사용하며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다. 하세키 술탄의 지위는 한 세기 동안 사용되었으며, 전직 노예였던 황실 후궁들이 오스만 궁정에서 누린 막강한 권력을 반영했으며, 오스만 공주보다 지위가 높았고, 유럽의 황후 후궁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발리데 술탄의 지위가 비어 있을 때, 하세키는 발리데의 역할을 맡아 상당한 경제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었고, 황실 하렘의 수장이 되었으며, 정치 문제에 있어서 술탄의 조언자가 되었고, 심지어 외교 정책과 국제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사례는 휘렘 술탄, 누르바누 술탄, 사피예 술탄, 쾨셈 술탄의 시대에 일어났다.
하세키 술탄이 된 최초의 황실 후궁인 휘렘은 재임 기간 동안, 특히 쉴레이만 1세의 어머니이자 최초의 발리데 술탄이었던 하프사 술탄이 1534년에 사망한 이후, 여러 특별한 권리를 받았다. 휘렘은 여러 아들을 낳을 수 있었는데, 이는 "한 첩모 - 한 아들"이라는 옛 황실 하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었다. 1525년 또는 1526년(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음) 쉴레이만은 휘렘과 성대한 공식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는 메흐메트 2세 이후 결혼한 최초의 오스만 술탄이 되었으며, 술탄이 첩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오스만 제국의 200년 된 관습을 위반한 것이다. 휘렘은 술탄의 궁정에 평생 머무는 최초의 왕자 어머니가 되었다. 휘렘의 막강한 권력은 하세키라는 칭호를 가진 수석 황실 후궁의 부상을 알렸다.
하세키는 매우 중요한 지위가 되었지만, 무라드 3세의 아들인 메흐메트 3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인 사피예 술탄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세키는 메흐메트의 아들 아흐메드 1세의 통치 기간에 다시 사용되었다. 그는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후궁인 쾨셈을 하세키로 선택했다. 쾨셈의 경력은 중요한 면에서 휘렘의 경력과 유사했다. 휘렘처럼 쾨셈은 술탄이나 왕조의 권력이 아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쾨셈이 하세키로 재임하는 동안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아마도 장자 상속에서 가장 연장자 상속으로의 왕위 계승 패턴의 상당한 변화였을 것이다. 베네치아 대사에 따르면, 쾨셈은 "자신의 아들이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무스타파가 형제 살해의 운명을 피하도록 로비했다."[4]
2. 2. 술탄 (Sultan)
술탄(سلطان)은 '권위' 또는 '지배'를 뜻하는 아랍어 단어이다.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은 남녀 모두에게 이 칭호를 사용했으며, 이는 황실 가족의 특권으로서의 주권 권력 개념을 강조한다. 서양에서는 오스만 통치자를 '술탄'으로 칭했지만, 오스만 제국 내에서는 '파디샤(padişah, 황제)' 또는 '휜카르(hünkar)'와 같은 페르시아어도 사용되었다.[2] 황제의 공식 칭호는 '술탄'과 '칸'을 함께 사용했다 (예: 술탄 쉴레이만 칸).3. 오스만 왕조에서의 사용
오스만 제국에서 하세키 술탄 칭호는 쉴레이만 1세가 휘렘 술탄에게 처음 부여했다. 휘렘 술탄은 쉴레이만 1세와 정식으로 결혼한 법적인 부인이었으며, 여러 아들을 낳아 "한 첩모 - 한 아들" 원칙을 깨뜨렸다. 또한 국가 업무에 관여하여 쉴레이만 1세의 수석 고문 역할을 하고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이전의 술탄 후궁들과는 다른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4]
셀림 2세의 하세키 술탄이자 법적인 부인이었던 누르바누 술탄 역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라트 3세 즉위 후에도 하렘에 남아 영향력을 유지했다.
아흐메트 1세의 하세키 술탄이었던 쾨셈 술탄은 왕위 계승 방식을 장자 상속에서 연장자 상속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네치아 대사의 기록에 따르면, 쾨셈 술탄은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스타파 1세가 형제 살해를 피하도록 로비했다고 한다.[4]
그러나 17세기 초부터 하세키 술탄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2세는 하세키 칭호를 가진 배우자가 있었지만,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이셰라는 이름뿐이었다.[5] 무라트 4세의 통치 기간에는 단 한 명의 하세키, 아이셰만이 기록되었고, 이브라힘은 8명의 하세키를 두는 등 칭호의 의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쾨셈 술탄의 영향력과 더불어 여러 명의 하세키가 동시에 존재하고, 왕자들이 지방 관직을 잃으면서 하세키 칭호는 "수석 배필" 또는 "유일한 총애"에서 "황실 배필"과 같은 일반적인 의미로 바뀌었으며, 이는 이전의 ''하툰''과 유사해졌다. 결국 하세키 술탄 칭호는 약 한 세기 동안만 사용된 후 사라졌고, 이후 ''카딘''이 황실 배우자의 최고 지위가 되었다. 오스만 역사상 "하세키 술탄"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여성은 아흐메트 2세의 하세키인 라비아 술탄이었다.
3. 1. 하세키 술탄의 지위
하세키 술탄은 황실 하렘에서 발리데 술탄 다음 가는 지위를 누렸으며, 술탄의 침실과 가까운 곳에 거처했다. 하세키 술탄의 지위는 한 세기 동안 사용되었으며, 전직 노예였던 황실 후궁들이 오스만 궁정에서 누린 막강한 권력을 반영했고, 오스만 공주보다 지위가 높았으며, 유럽의 황후 후궁과 동등했다.[4]발리데 술탄의 지위가 비어 있을 때, 하세키는 발리데의 역할을 맡아 황실 하렘의 수장이 되었으며, 정치 문제에 있어서 술탄의 조언자가 되었고, 심지어 외교 정책과 국제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사례는 휘렘 술탄, 누르바누 술탄, 사피예 술탄, 쾨셈 술탄의 시대에 일어났다.
하세키 술탄이 된 최초의 황실 후궁인 휘렘은 재임 기간 동안, 특히 쉴레이만 1세의 어머니이자 최초의 발리데 술탄이었던 하프사 술탄이 1534년에 사망한 이후, 여러 특별한 권리를 받았다. 휘렘은 여러 아들을 낳을 수 있었는데, 이는 "한 첩모 - 한 아들"이라는 옛 황실 하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어머니가 술탄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왕위를 위한 형제 간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1525년 또는 1526년(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음) 쉴레이만은 휘렘과 성대한 공식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는 메흐메트 2세(1451–1481년 재위) 이후 결혼한 최초의 오스만 술탄이 되었으며, 술탄이 첩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오스만 제국의 200년 된 관습을 위반한 것이다. 이후 휘렘은 술탄의 궁정에 평생 머무는 최초의 왕자 어머니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 황실 전통에서 술탄의 후궁은 아들이 성년이 될 때(약 16세 또는 17세)까지만 하렘에 머물러야 했으며, 그 후 아들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보내졌다. 휘렘은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 업무에서도 쉴레이만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녀의 지혜 덕분에 그녀는 쉴레이만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외교 정책과 국제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휘렘의 막강한 권력은 하세키라는 칭호를 가진 수석 황실 후궁의 부상을 알렸다.
어머니의 정치적 역할은 전통적으로 아들을 위한 별도의 가정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녀의 공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술탄 및 그의 가정과의 분리를 수반했다. 누르바누 술탄의 경우, 술탄의 가정을 떠난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역할, 즉 하세키로서의 솔직한 정치적 역할의 수행은 아들들이 정치적 직책을 맡는 시기와 일치했을 수 있다.
하세키는 매우 중요한 지위가 되었지만, 무라드 3세의 아들인 메흐메트 3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인 사피예 술탄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세키는 메흐메트의 아들 아흐메드 1세의 통치 기간에 다시 사용되었다. 아흐메드의 경력은 쉴레이만의 경력과 매우 유사했다. 그는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후궁인 쾨셈을 하세키로 선택했다. 쾨셈의 경력은 중요한 면에서 휘렘의 경력과 유사했다. 휘렘처럼 쾨셈은 술탄이나 왕조의 권력이 아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역사적으로 가장 가혹한 평가를 받은 왕조의 두 여성이 하세키로서의 경력 대부분 동안 발리데 술탄이 부재했고, 아들이 유난히 많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불명예스러운 평판을 안겨준 것은 아들 중 한 명을 다른 아들보다 편애함으로써 제국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들의 권력이었다.
쾨셈이 하세키로 재임하는 동안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아마도 장자 상속에서 가장 연장자 상속으로의 왕위 계승 패턴의 상당한 변화였을 것이다. 그녀는 연장자 상속으로의 전환에서 비롯될 수 있는 개인적 이득을 깨달았음에 틀림없고, 더 이상 하세키가 아니었고, "대기 중인" 아들이 있다는 사실과 결합되었다. 베네치아 대사에 따르면, 쾨셈은 "자신의 아들이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무스타파가 형제 살해의 운명을 피하도록 로비했다."[4] 이 새로운 시스템은 잠재적인 통치자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카페스''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즉위 당시 특정 술탄들의 고령화는 모든 셰흐자데들이 합당한 왕위 계승자가 되기 위한 훈련의 일환으로 오스만 지역 중 하나를 통치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의 결과 중 하나는 하세키의 지위가 전통적인 논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정치적 역할은 전통적으로 아들을 위한 별도의 가정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녀의 공적인 정치적 정체성의 확립은 술탄과 그의 가문으로부터의 분리를 수반했다. 그러나 가부장적 연장자 제도가 시행되면서 셰흐자데(왕자)들이 공적인 성인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자 그들의 어머니들 또한 공적인 역할을 잃게 되었다. 아직 공적인 정체성을 얻지 못한 아들의 어머니를 공개적으로 존경하는 것은 왕조 정치의 프로토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술탄의 진정한 총애를 받는 하세키의 지위는 가부장적 연장자 제도의 관행과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쾨셈 술탄은 영향력 있는 오스만 하세키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17세기 초에 하세키의 쇠퇴와 발리데의 재등장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쾨셈 술탄의 성격과 1617년에 그녀가 하세키가 되는 것을 중단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으며, 만약 그녀가 권력을 되찾으려면 발리데 술탄의 지위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는 점과 관련이 크다.
1617년 아흐메드 1세의 죽음 이후, 하세키 술탄의 지위는 특별한 지위를 잃었다. 오스만 2세는 하세키 직함을 가진 배필이 있었지만,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녀의 이름이 아이셰였다는 것뿐이다. 오스만과 마찬가지로 그의 형제 무라드 4세의 첩들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내탕금 기록에는 무라드의 17년간의 통치 기간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명의 하세키, 아이셰가 존재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두 번째 하세키가 등장한다. 무라드는 두 번째 하세키가 나타날 때까지 한 명의 첩만 두었거나, 여러 명의 첩을 두었지만 그중 두 명만 하세키로 특별히 지명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브라힘은 8명의 하세키를 두었고, 그중 처음 세 명인 투르한, 아슈브, 무아제즈는 각각 아들을 한 명씩 두었다.
여러 명의 하세키가 존재했다는 것은 무라드와 이브라힘의 통치 기간에 일어난 중요한 변화였으며, 하세키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쾨셈의 강력한 성격과 발리데 술탄으로서의 영향력과 함께, 8명의 여성이 동시에 하세키 술탄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고, 이브라힘 시대 동안 모든 셰흐자데(왕자)들이 지방 관직을 잃으면서 하세키라는 칭호는 특별한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 칭호의 의미는 "수석 배필"과 "유일한 총애"에서 "황실 배필"과 같은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전의 ''하툰''과 유사했다.
3. 2. 휘렘 술탄과 하세키 칭호의 시작
쉴레이만 1세는 록셀라나(휘렘 술탄)에게 하세키 칭호를 처음 부여했다. 휘렘 술탄은 쉴레이만 1세의 총애를 받았으며, 법적인 결혼을 통해 정식 부인이 되었다. 휘렘 술탄은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이는 "한 첩모 - 한 아들"이라는 황실 하렘 원칙을 깨는 것이었다. 그녀는 국가 업무에도 관여하여 쉴레이만 1세의 수석 고문 역할을 했으며,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10]3. 3. 누르바누 술탄과 정치적 역할
누르바누 술탄은 셀림 2세의 하세키 술탄이자 법적인 부인이었다. 무라트 3세가 즉위한 후에도 하렘에 남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10][11]3. 4. 쾨셈 술탄과 왕위 계승 변화
아흐메트 1세의 하세키 술탄이었던 쾨셈 술탄은 장자 상속에서 연장자 상속으로 왕위 계승 패턴을 변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 대사의 기록에 따르면, 쾨셈 술탄은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스타파 1세가 형제 살해를 피하도록 로비했다고 한다.3. 5. 하세키 칭호의 쇠퇴
17세기 초, 하세키 술탄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오스만 2세는 하세키 칭호를 가진 배우자가 있었지만,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이셰라는 이름뿐이었다.[5] 무라트 4세의 내탕금 기록에는 그의 17년 통치 기간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명의 하세키, 아이셰가 존재했으며, 그 후 두 번째 하세키가 등장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브라힘은 8명의 하세키를 두었는데, 이는 하세키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중요한 변화였다.쾨셈 술탄의 강력한 영향력과 함께, 여러 명의 하세키가 동시에 존재하고, 모든 셰흐자데(왕자)들이 지방 관직을 잃으면서 하세키 칭호는 특별한 지위를 잃었다. 이 시기에 하세키 칭호는 "수석 배필" 또는 "유일한 총애"에서 "황실 배필"과 같은 일반적인 의미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전의 ''하툰''과 유사했다.
하세키 술탄 칭호는 17세기까지 약 한 세기 동안만 사용되었다. 이후 ''카딘''이 황실 배우자의 최고 지위가 되었으며, "제1 이름 카딘 에펜디"와 같은 칭호와 함께 사용되었다. 오스만 역사상 "하세키 술탄"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여성은 아흐메트 2세의 하세키인 라비아 술탄이었다.
4. 역대 하세키 술탄
Hürrem Sultantr
خُرَّم سلطانota
Nurbanu Sultantr
نور بانو سلطانota
부군 훙서
Safiye Sultantr
صفیه سلطانota
부군 훙서
Kösem Sultantr
قسّم سلطانota
부군 훙서
Ayşe Sultantr
عایشه سلطانota
부군 훙서
Ayşe Sultantr
عایشه سلطانota
부군 훙서
Turhan Sultantr
ترخان سلطانota
부군 훙서
Hümaşah Sultantr
ھما شاہ سلطانota
Gülnuş Sultantr
کلنوش سلطانota
부군 폐위
부군 폐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