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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미스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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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스미스는 1580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탐험가, 작가, 군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고,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 개척에 참여하여 제임스타운의 지도자가 되었다. 스미스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칙으로 식민지 주민들의 노동을 독려했지만, 원주민과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의 저술은 신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식민지 개척을 장려했지만, 포카혼타스와의 일화는 과장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1614년 뉴잉글랜드 해안을 탐험하고 지도를 제작했으며, 1631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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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미스 (탐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1624년의 스미스 삽화
1624년의 스미스 삽화
출생 이름알 수 없음
출생일1579년경
출생지윌러비, 링컨셔, 잉글랜드 왕국
세례일1580년 1월 6일
사망일1631년 6월 21일 (51세)
사망지런던, 잉글랜드 왕국
사망 원인알 수 없음
안장 장소세인트 세펄크-위다웃-뉴게이트, 런던
국적알 수 없음
직업군인, 탐험가, 작가
활동 분야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 및 통치 지원, 체사피크 만 탐험, 뉴잉글랜드 탐험 및 명명, 영어 문학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부모알 수 없음
친척알 수 없음
존 스미스 선장의 서명
존 스미스 선장의 서명
주요 작품

2. 생애

제임스타운에 세워진 존 스미스의 동상


존 스미스는 1580년 1월 6일 잉글랜드 링컨셔주 윌러비에서 세례를 받았다.[4] 라우스 (링컨셔)의 킹 에드워드 6세 그래머 스쿨에서 교육받았으나,[6] 16세에 집을 떠나 용병으로 활동하며 유럽 각지에서 싸웠고,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우며 공을 세워 기사 작위를 받았다.[9][10] 1602년 크림 타타르족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탈출하여[11] 1604년 영국으로 돌아왔다.[12]

1606년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버지니아 식민지화 계획에 참여하여 1607년 북아메리카 최초의 영국 영구 정착지인 제임스타운 건설을 이끌었다.[2] 초기 식민지의 어려움 속에서 지도자로 활동하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칙을 세우고[22][23] 체서피크 만 일대를 탐험하고 지도를 제작했다.[17] 포우하탄 연맹과의 관계는 초기 교류에서 점차 갈등으로 변했으며, 스미스는 식량 확보 과정에서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6] 1609년 화약 폭발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돌아간 후 다시는 버지니아로 돌아가지 못했다.[2]

1614년 북미 북동부 해안을 탐험하고 이 지역을 '뉴잉글랜드'라고 명명했으며,[36] 탐험 결과를 담은 ''뉴잉글랜드의 묘사''(A Description of New Englandeng)를 출판했다.[37] 그의 탐험과 저술은 이후 영국인들의 신세계 이주를 촉진했으나, 이는 원주민에 대한 침략과 영토 약탈이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스미스는 1631년 6월 21일 런던에서 사망하여[44] 세인트 세풀처-위드아웃-뉴게이트 교회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와 모험

존 스미스는 1580년 1월 6일 잉글랜드 링컨셔주 앨포드 근처 윌러비에서 세례를 받았다.[77][4] 그의 부모는 그곳에서 윌러비 드 에레스비 남작의 소작농이었다.[77] 스미스는 1592년부터 1595년까지 라우스에 있는 에드워드 6세 그래머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78][6] 한때 노퍽의 킹스 린에서 상인 견습을 할 예정이었으나,[7][8] 상인의 단조로운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7][8] 아버지가 사망한 후, 16세의 나이에 집을 떠나 선원이 되었다.[77]

스미스는 용병으로 활동하며 프랑스의 앙리 4세 국왕을 위해 스페인과 싸웠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스페인펠리페 2세에 맞서 싸우는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이후 지중해로 이동하여 무역과 해적 행위에 가담했으며, 장기전 (오스만 전쟁)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1600년1601년 사이, 왈라키아 공국(현재의 루마니아)의 미하이 비테아줄 휘하에서 헝가리 왕국의 합스부르크 왕가 편에서 싸우며 기병 대위로 승진했다. 미하이 비테아줄 사후에는 왈라키아의 라두 슈테판을 섬기며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었던 이에레미아 모빌러와 싸웠다.[9]

스미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휘관 세 명과 벌인 일대일 결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그들을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공로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바토리 지그몬드 공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고, 세 명의 터키인 머리가 그려진 문장과 말을 하사받았다.[10]

윌러비의 세인트 헬레나 교회 창문에 전시된 스미스의 문장.


그러나 1602년 크림 타타르족과의 전투 중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려갔다.[11] 스미스는 "우리는 시장의 동물들처럼 노예로 팔려갔다"고 기록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터키 귀족의 그리스인 연인(차라차 트라가비그잔다)에게 선물로 보내졌다고 주장했다. 스미스에 따르면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일각에서는 스미스가 몸값을 지불할 사람을 찾기 위해 잠시 가정교사를 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후 스미스는 크림반도로 보내져 농사일을 하며 이슬람으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곳에서 주인에게 주기적으로 구타를 당하던 스미스는 결국 주인을 살해하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서 탈출했다. 그는 러시아 차르국을 거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도망쳤다. 이후 유럽북아프리카를 여행한 뒤 1604년 영국으로 돌아왔다.[12]

2. 2. 버지니아 식민지 개척



1606년, 스미스는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버지니아 식민지화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 계획은 제임스 1세 국왕의 특허장에 근거했다. 탐험대는 1606년 12월 20일 ''디스커버리'', ''수잔 컨스턴트'', ''갓스피드'' 세 척의 배로 출항했으며, 스미스의 수행원 중에는 사무엘 콜리어라는 소년도 있었다.[2]

항해 중 스미스는 반란 혐의로 기소되어 함대를 지휘하던 크리스토퍼 뉴포트 선장에 의해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13][14] 1607년 4월 26일 케이프 헨리에 도착 후 개봉된 버지니아 회사의 명령서에 따라 새 식민지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지명되어 위기를 모면했다.[2][15] 1607년 5월 14일, 제임스타운이 정착지로 선정되었지만, 초기 식민지는 식량 부족과 질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늪지대 환경 속에서 많은 정착민들이 사망하여, 그해 9월에는 초기 정착민 104명 중 60명 이상이 사망한 상태였다.[16]

1608년 초, 뉴포트 선장이 제1차 보급과 함께 새로운 정착민들을 데려왔으나, 곧이어 발생한 화재와 겨울철 식량 부족, 제임스 강 결빙 등으로 고난은 계속되었다. 뉴포트 선장과 선원들이 가치 없는 황철석을 싣는 데 시간을 허비하면서 식량 확보는 더욱 어려워졌다.[17] 같은 해 10월, 두 번째 보급으로 더 많은 정착민(최초의 여성 포함)과 일부 장인들이 도착했지만,[18][19][20][21] 식량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버지니아 회사의 비현실적인 요구는 스미스와의 갈등을 유발했다.[16]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스미스는 1608년 여름, 체서피크 만 일대를 탐험하며 식량을 확보하고 중요한 지도를 제작했다. 이 지도는 이후 버지니아 탐험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17] 이 탐험은 존 스미스 체서피크 국립 역사 트레일로 기념되고 있다.

1608년 9월, 지역 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스미스는[22] 식민지의 기강을 잡고 노동을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식량 확보를 위해 현지 원주민들과 교류하기도 했으나, 점차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16]

1609년,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계획 변경으로 대규모 정착민들이 추가로 도착하면서 식민지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2] 같은 해 버뮤다에 난파되었던 ''바다 모험호''의 생존자들이 1610년 5월 새로운 총독 토마스 게이츠와 함께 도착했지만,[34] 식량 부족은 여전하여 게이츠 총독은 한때 제임스타운 포기를 고려하기도 했다.[2]

스미스는 1609년 10월 중순, 카누에서 발생한 화약 폭발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다시는 버지니아로 돌아오지 못했다.[2] 스미스가 떠난 후 제임스타운은 "굶주림의 시대"라 불리는 극심한 기근을 겪었으나, 버지니아 회사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식민지는 유지될 수 있었다.[35] 스미스의 탐험과 보고는 이후 많은 영국인들의 신대륙 이주를 촉진했지만, 이는 원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2. 1. 포우하탄 부족과의 관계

제임스타운 초기 정착 시기, 포우하탄 연맹과의 관계는 식민지의 생존에 매우 중요했다. 1607년 12월, 치카호미니 강 유역에서 식량을 구하던 존 스미스는 오프차나카노가 이끄는 포우하탄족 전사들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포우하탄 연맹의 중심 마을인 웨로워코모코로 끌려가 연맹의 최고 추장인 와훈소나코크(오프차나카노의 형) 앞에 서게 되었다.[24][25][61]

추장 포우하탄과 함께 있는 롱하우스 안 (1612년 존 스미스 지도 상세도)


스미스는 이후 자신의 기록에서 이때 포우하탄 추장이 자신을 처형하려 했으나, 추장의 어린 딸 포카혼타스가 몸을 던져 막아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했다.[62] 그는 포카혼타스가 자신을 구해줬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설득해 자신을 제임스타운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 줬다고 썼다.[63]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미국 건국 신화의 일부로 미화되어 알려졌지만,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이 구출 이야기에 대한 스미스의 첫 기록은 사건 발생 후 거의 10년이 지난 1616년, 영국을 방문한 포카혼타스를 앤 여왕에게 소개하며 그녀를 존중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에서 처음 등장했다.[26][63] 이 시간적 간극 때문에 스미스가 포카혼타스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이야기를 과장하거나 꾸며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6] 헨리 브룩스 애덤스와 같은 역사학자들은 스미스가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 이야기가 "뻔뻔한 거짓말"이라고 비판했다.[28][68] 일부 학자들은 스미스가 겪은 일이 실제 처형 위협이 아니라,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통과 의례(죽음과 부활을 상징)였을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29][30][70][71] 그러나 포우하탄족의 의식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다른 북미 원주민 부족에게서 유사한 의식이 발견되지 않아 이는 추측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72]

더욱이 포카혼타스의 부족인 마타포니족 측에서는 당시 포카혼타스가 11세에 불과해 중요한 부족 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스미스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반박한다.[73] 또한 인디언 사회에서 추장은 합의를 이끄는 조정자일 뿐, 독단적으로 처형을 명령할 권한이 없다는 점[74], 스미스가 포우하탄 추장을 유럽 군주처럼 권력자로 오해하고 대했다는 점도 지적된다. 포우하탄족의 로이 크레이지호스 추장은 스미스가 런던에서 관심을 끌기 위해 이야기를 조작했으며, 훗날 런던에서 스미스를 만난 포카혼타스가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분노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했다.

스미스는 1608년에도 포카혼타스가 자신을 다시 구해주었다고 주장했다. 포우하탄 추장이 스미스 일행을 웨로워코모코로 초대했지만, 포카혼타스가 몰래 찾아와 추장이 그들을 죽일 계획이라고 경고해주어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32][64] 이 이야기 역시 스미스의 과장 혹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60]

실제로 스미스와 포우하탄족의 관계는 복잡했다. 초기에는 포우하탄족이 식량을 제공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식민지가 확장되고 식량난이 심해지자 스미스는 군사적 위협과 약탈을 통해 식량을 확보하려 했다.[16] 그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정착민들을 통제하고 농업을 강요하는 한편,[22][23] 포우하탄족에게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식민 지도자로서 원주민에 대한 협박과 약탈에 의존했으며, 특히 추장 오프차나카노를 인질로 잡고 식량을 요구하는 등 원주민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스미스는 "이 '살인자 웁찬카노'를 잡아서... 그의 머리의 긴 곱슬머리를 자르고 그의 가슴에 권총을 겨누며...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20톤의 옥수수를 우리 배에 싣도록 약속하게 했다"고 기록하며 자신의 강압적인 방식을 드러냈다. 이러한 스미스의 행동은 결국 1609년 포우하탄족과의 전면적인 충돌로 이어졌고, 스미스는 화약 폭발 사고로 중상을 입고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스미스와 포우하탄 부족의 관계는 초기 제임스타운 정착에 필수적이었으나, 스미스의 강압적인 정책과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로 인해 파탄에 이르렀다. 특히 포카혼타스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스미스의 일방적인 주장에 기반한 것으로, 그 진실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과 함께 원주민의 관점을 무시한 채 미화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 2. 2. 식민지 운영과 갈등

1608년 9월, 스미스는 지역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식민지에 대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식민지의 질서를 유지하고 노동을 장려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유명한 원칙을 내세웠다.[22][23] 이 정책은 효과를 보여 정착민들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일부 정착민들이 제임스타운을 떠나려 하거나 인디언 마을로 탈주하기도 했으나, 스미스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돌아왔다.[2]

그러나 식량 부족 문제는 계속해서 식민지를 괴롭혔다. 1609년 봄에는 쥐떼의 침입과 습기로 인해 저장된 옥수수가 모두 파괴되는 등 식량 위기가 심화되었다.[23] 스미스는 절박한 상황에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 원주민 부족에게 의존했는데, 이때 군사적인 위협을 동원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6] 스미스는 식량 제공을 거부하는 원주민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려 했으며, 포우하탄족의 추장 웁찬카노를 인질로 잡고 식량을 강탈하기도 했다. 스미스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웁찬카노 추장의 머리채를 잡고 권총을 겨누며 위협하여 옥수수 20톤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러한 약탈 행위는 원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스미스는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에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포카혼타스로부터 그 계획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고 주장했다.[22][23] 하지만 스미스의 강압적인 통치와 식량 약탈은 결국 1609년, 포우하탄족과 버지니아 정착민들 사이에 전면적인 전쟁을 촉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존 스미스가 파먼키 왕을 포로로 잡고 있는 모습(1624년 역사)


같은 해, 스미스는 카누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1609년 10월 영국으로 돌아갔고, 이후 다시는 버지니아로 돌아오지 않았다.[2] 스미스가 떠난 후 제임스타운은 극심한 식량난과 질병으로 "굶주림의 시대"를 겪게 된다.

2. 3. 뉴잉글랜드 탐험

1614년, 스미스는 메인 주와 매사추세츠 만 해안으로 항해를 떠났다. 그는 이 지역을 '뉴잉글랜드'라고 이름 붙였다.[36] 원래 목적은 고래잡이를 통해 지느러미와 기름을 얻고 금 또는 구리 광산을 찾는 것이었으나, 이것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항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물고기와 모피를 수집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대부분의 선원이 어업에 종사하는 동안, 스미스와 다른 8명은 작은 보트를 타고 해안을 탐험하며 원주민들과 교역하여 소총을 주고 비버 가죽 11,000개, 담비와 수달 가죽 각각 100개를 얻었다.

스미스는 충분한 모피, 트레인 오일(고래 기름), 대구를 모아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토마스 헌트가 지휘하던 탐험대의 다른 배는 뒤에 남아 파툭세트족의 스콴토를 포함한 일부 원주민을 납치해 노예로 삼았다. 스미스는 헌트의 행동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헌트가 원주민들을 자극함으로써 자신이 "그곳에 식민지를 세우려던 의도를 막고", 헌트와 몇몇 상인들이 독점할 수 있도록 그 땅을 "어둠 속에" 두려 했다고 주장했다. 스미스에 따르면, 헌트는 스미스의 정착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그 지역의 지도와 기록을 가져갔으며,[37] 얻을 수 있는 "사적인 이득"이 거의 없었음에도 "그 어리석은 야만인들을 8개의 리알에 팔았다"며 헌트의 탐욕을 비판했다.

1616년, 스미스는 탐험을 바탕으로 지도를 출판했는데, 이 지도는 '뉴잉글랜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찰스 1세의 요청에 따라 원주민 지명 대신 영국 도시 이름이 사용되었다.[38] 플리머스 식민지의 정착민들은 스미스가 붙인 지역 이름 '뉴잉글랜드'를 받아들였고,[38] 지도에 표시된 찰스 강(The River Charles)이나 케이프 앤(Cape Anna) 같은 다른 지명들도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스미스는 1614년과 1615년에 다시 같은 해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두 번 시도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폭풍으로 배의 돛대가 부러졌고, 두 번째 시도(1615년)에서는 아조레스 제도 근해에서 프랑스 해적에게 붙잡혔다. 스미스는 몇 주간의 억류 끝에 탈출하여 영국으로 돌아와, 이 두 번의 항해 경험을 담은 ''뉴잉글랜드의 묘사''(A Description of New Englandeng)를 출판했다. 이후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영국에 머물렀다.

스미스는 버지니아에서의 경험과 뉴잉글랜드 관찰 결과를 비교하며 일부 영국 식민지 사업이 실패한 이유를 분석했다. 그는 프랑스가 명목상 영국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서조차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메인에서 케이프 코드에 이르는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큰 옥수수 밭과 잘 갖춰진 많은 사람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프랑스는 6주 안에 그들이 제공해야 할 모든 것을 교역으로 확보했다.[39] 이는 프랑스가 효과적인 무역망을 구축하고 원주민과의 관계를 다진 반면, 영국은 이러한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부족 간 전쟁이 있었던 곳에서도 프랑스는 모피 무역을 위해 평화를 조성했다. 매사추세트족과 아베나키족 같은 이전의 적대 부족들이 "모두 친구가 되어 서로 교역하며, 서로의 국경에서 사회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40]

스미스는 외교만으로는 이러한 현실을 되돌리기 너무 늦었고,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영국 모험가들이 전 세계 전쟁에서의 자신의 경험[41]과 뉴잉글랜드에서 소수의 인원으로도 큰 충돌이나 장기적인 적대감 없이 "어리석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42] 또한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의 복종을 달성하기 위해 몇 명의 무장한 병력이 필요한지를 결정하는 경험을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2. 4. 말년

존 스미스는 1631년 6월 21일 런던에서 사망했다. 그는 1633년 런던 홀본 고가교에 있는 세인트 세풀처-위드아웃-뉴게이트 교회 남쪽 복도에 묻혔다. 이 교회는 1137년에 세워진 런던 시에서 가장 큰 교구 교회이다. 스미스 선장은 이 교회 남쪽 벽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기념되고 있다.[44]

3. 저서

존 스미스는 생전에 8권의 책을 출판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버지니아에서 일어난 주목할 만한 사건과 사고의 진실한 보고서'' (A True Relation of Such Occurrences and Accidents of Note as Happened in Virginia, 1608)
  • ''버지니아 지도'' (A Map of Virginia, 1612)
  • 이 책은 스미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종교와 정부에 대해 관찰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스미스는 이를 통해 원주민 문화의 좋은 점을 식민지에 통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에는 스미스가 직접 그린 지도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아메리카를 좀 더 친숙하게 보이도록 하여 정착을 장려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일부에서는 스미스가 정식 지도 제작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도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스미스는 경험을 통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는 반론도 있다.
  • ''버지니아에 있는 영국 식민지의 진행 상황'' (The Proceedings of the English Colony in Virginia, 1612)
  • 여러 저작물을 모은 것으로, 1609년 12월부터 1610년 여름까지 식민지의 역사를 다룬다. 스미스는 화약 사고로 1609년 10월에 식민지를 떠났기 때문에, 이 책의 일부 내용은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버지니아 지도''보다 글쓰기 스타일이 더 체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http://digitalcommons.unl.edu/etas/4/ ''뉴잉글랜드의 묘사''] (A Description of New England, 1616)
  • ''뉴잉글랜드의 시련'' (New England's Trials, 1620, 1622)
  • [http://hdl.loc.gov/loc.gdc/lhbcb.0262a ''버지니아, 뉴잉글랜드, 서머 아일랜드의 일반 역사''] (The General History of Virginia, New England, and the Summer Isles, 1624)
  • ''경험으로 가는 길, 또는 모든 젊은 뱃사람에게 필요한 경험'' (An Accidence, or the Pathway to Experience Necessary for all Young Seamen, 1626)
  • ''바다 문법'' (A Sea Grammar, 1627) - 영어로 된 최초의 선원 사전으로 평가받는다.
  • ''존 스미스 선장의 진정한 여행, 모험, 관찰'' (The True Travels, Adventures and Observations of Captain John Smith, 1630)
  • ''뉴잉글랜드 또는 어디에서나 경험이 없는 플랜터에 대한 광고'' (Advertisements for the Unexperienced Planters of New England, or Anywhere, 1631)


스미스는 그의 저서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벌거벗은 야만인"이라고 칭하며 일관되게 미개한 존재로 묘사했다. 그는 합의제적 성격이 강한 원주민 사회를 유럽의 군주제와 같은 신분 사회로 오해하고, 추장을 부족의 왕처럼 여기는 등 부정확한 정보를 기록하기도 했다.

4. 유산 및 평가

스미스의 1624년 소머스 아일랜드(버뮤다) 지도. 세인트조지스 타운과 캐슬 아일랜드 요새 등 관련 요새를 보여준다.


존 스미스에 대한 평가는 종종 그가 남긴 기록의 신뢰도 문제와 연결되며, 특히 포카혼타스가 포우하탄족으로부터 그의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의 진위 여부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회의론은 스미스가 남긴 여러 기록 사이의 차이점에서 주로 비롯된다.

그의 초기 저작인 『버지니아의 진실한 이야기』(A True Relation of Virginiaeng)는 제임스타운에서의 경험 직후인 1608년에 출판되었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 사업을 후원하던 버지니아 회사의 규정을 어긴 것이었다. 회사는 식민지에서 오는 모든 정보가 회사를 거치도록 했고, 잠재적 투자자나 이주민들을 "낙담시킬 수 있는 어떤 내용"도 금지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이 규정을 피해 익명으로 책을 출판했다. 이후 1624년에 출판된 『버지니아, 뉴잉글랜드, 서머 아일랜드의 일반 역사』(The Generall Historie of Virginia, New-England, and the Summer Isleseng)에서는 초기 저작과 다른 내용이 포함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발견된다. 역사가 레오 르메이(Leo Lemay)는 『일반 역사』의 편집 과정에서 "인디언들의 적대감, 버지니아 회사 지도자들 간의 갈등, 그리고 초기의 반란"과 같은 민감한 내용이 삭제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포카혼타스 이야기는 『진실한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일반 역사』에 처음 나타나기 때문에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르메이는 스미스의 신뢰성을 옹호하며, "스미스 시대에 아무도" 이 이야기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1616년 스미스가 앤 여왕에게 이 이야기를 알렸을 때 포카혼타스 자신을 포함하여 사건의 진실을 알 만한 많은 사람이 런던에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스미스는 신세계에 관한 그의 모든 저작에서 인디언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었다. 그가 포우하탄족과 맺었던 관계는 제임스타운 식민지가 비극으로 끝난 로어노크 식민지와 같은 운명을 피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역사가 윌리엄 란델(William Randel)은 스미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식민지의 존립 자체가 평화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결코 원주민을 몰살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의 떠난 후에야 격렬한 전쟁과 학살이 있었는데, 이는 더 적대적인 정책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의 저작에서 스미스는 자신의 행동 이면에 있는 태도를 드러낸다." [51]

4. 1. 긍정적 평가

1624년, 스미스의 버지니아 지도, ''버지니아, 뉴잉글랜드, 서머 아일랜드의 일반 역사''에서


존 스미스는 북아메리카 초기 영국 식민지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한 탐험가이자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저술 활동은 당시 영국인들에게 신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식민지 개척을 장려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스미스가 신세계에서의 경험과 관찰을 기록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영국의 식민지 개척을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역사가 르메이(Lemay)에 따르면, 당시 많은 홍보 작가들이 미국의 매력을 과장하여 묘사했던 것과 달리, 스미스는 사실을 부풀리지 않고 식민지 개척의 위험성과 가능성을 독자들에게 솔직하게 전달하려 했다. 그는 신세계에 금이 풍부하다는 막연한 기대 대신, 어업, 농업, 조선업, 모피 거래와 같은 구체적인 산업을 통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회를 제시했다. 르메이는 스미스가 잠재적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집에서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신세계로 향하게 할 동기는 결국 '부(wealth)' 외에는 없다고 보았으며, 스미스는 이러한 현실적 기회를 강조했다고 분석한다.[52]

다만 스미스는 신세계가 제공하는 부는 오직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식민지 개척 과정의 위험과 고난을 숨기지 않았으며, 강한 직업 윤리를 가진 사람만이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에서 살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의 실제적인 업적 또한 중요하다. 그는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 인근에 북아메리카 최초의 영국 영구 식민지인 제임스타운 건설을 이끌었다. 1607년부터 1609년까지 버지니아 식민지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버지니아의 여러 강과 체서피크 만 일대를 탐험했다. 비록 포우하탄원주민과의 관계는 복잡했지만, 초기에는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런던에 전달된 스미스의 "신세계" 보고서는 그의 탐험 활동만큼이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기록과 격려는 많은 영국인들이 그의 뒤를 따라 신세계로 이주하여 개척자가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스미스는 미국 북동부 지역을 탐험하고 그곳에 뉴잉글랜드라는 이름을 붙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여기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일하고 토지 소유자가 될 수 있다. ... 만약 일할 손밖에 없다 해도, ... 근면하게 일하면 곧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이주를 독려했다. 이러한 메시지는 이후 수 세기 동안 많은 유럽인들을 신대륙으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4. 2. 부정적 평가

존 스미스북아메리카 백인 최초의 항구적 식민지인 제임스타운 건설을 주도하고 버지니아 식민지의 초기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그의 행동과 기록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이 제기된다.

스미스는 신세계 정착을 독려하며 "여기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일하고 토지 소유자가 될 수 있다. ... 근면하게 일하면 곧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이 메시지는 수많은 영국인들을 신대륙으로 이끌었지만, 결과적으로 원주민에 대한 대규모 학살과 영토 약탈로 이어졌으며, 이는 인디언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포우하탄족과의 관계에서도 스미스의 기록은 논란의 대상이다. 영국인 정착민들은 제임스타운 도착 초기 포우하탄족과 평화 의식을 맺었으나, 스미스는 이후 기록에서 마치 포우하탄족이 지속적으로 영국인들을 위협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인디언 사회에서 평화 의식의 맹세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므로,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있다.[60]

특히 스미스가 와훈소나코크에게 처형당할 뻔했으나 그의 딸 포카혼타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스미스 자신이 남긴 기록에만 등장하며, 사건 발생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그 진위가 의심받는다.[62][63] 이 이야기는 스미스가 자신의 경험을 과장하거나 원주민 문화를 오해한 결과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포카혼타스를 "백인을 구한 착한 인디언"이라는 왜곡된 상징으로 만들어 원주민 사회에 지속적인 상처를 남겼다는 비판이 있다. 스미스가 이후 포카혼타스에게 또다시 구출되었다고 주장한 일화 역시 그의 허구로 여겨진다.[64][60]

식민지 운영 방식에서도 스미스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식량난 해결을 위해 체서피크 만 주변을 탐험하며 현지 원주민들로부터 식량을 약탈했다. 또한, 식민지 내 규율을 강조하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칙을 내세웠고, 식량 확보를 위해 포우하탄족의 웁찬카노 추장을 인질로 삼아 협박하고 곡물을 강탈하기도 했다. 스미스 스스로 "이 '살인자 웁찬카노'를 잡아서... 그의 머리의 긴 곱슬머리를 자르고 그의 가슴에 권총을 겨누며... 20톤의 옥수수를 우리 배에 싣도록 약속하게 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스미스의 협박약탈에 기반한 식민 통치 방식은 원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609년 포우하탄족과 버지니아 식민지 사이에 전면적인 전쟁이 발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스미스 자신도 이 전쟁 중 화약 폭발 사고로 중상을 입고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4. 2. 1. 포카혼타스 이야기 논란

존 스미스포카혼타스에게 목숨을 구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스미스 자신의 저작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진위성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특히 1860년대 이후 많은 역사가들이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에 의문을 제기했다.[62]

캡틴 존 스미스의 ''버지니아, 뉴잉글랜드, 서머 아일랜드의 일반 역사'', 1624년. 포카혼타스 이야기는 이 책에 처음 등장한다.


주된 의문점 중 하나는 스미스가 버지니아에 관한 초기 저작 두 권에서는 이 극적인 구조 이야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처음으로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사건 발생 후 거의 10년이 지난 1616년, 영국을 방문한 포카혼타스를 앤 여왕이 품위 있게 대우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에서였다.[63] 이후 1624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버지니아, 뉴잉글랜드, 서머 아일랜드의 일반 역사』(The Generall Historie of Virginia, New-England, and the Summer Isleseng)에 이 이야기가 포함되었지만, 1608년에 출판된 『버지니아의 진실한 이야기』(A True Relation of Virginiaeng)에는 빠져 있다. 이 시간적 간극은 스미스가 포카혼타스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과장하거나 꾸며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역사가 레오 르메이(Leo Lemay)는 스미스의 초기 저작들은 주로 지리나 민족지 기술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경험을 자세히 서술할 여지가 없었을 수 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67] 또한 르메이는 스미스 시대의 누구도 이 이야기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포카혼타스 자신을 포함하여 진실을 알 만한 많은 사람들이 1616년 스미스가 여왕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런던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 스미스의 신뢰성을 옹호한다.

19세기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역사가 헨리 브룩스 애덤스는 스미스의 이야기가 점차 윤색되어 "현대에는 있을 수 없는 뻔뻔한 거짓말"이 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스미스가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증언이 기본적인 사실 관계에서는 일관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애덤스의 비판은 당시 남북 전쟁을 앞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미국 건국사에서 남부의 역할을 깎아내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68] 역사가 카밀라 타운센드(Camilla Townsend)는 동시대인들의 평가를 바탕으로 스미스가 "평판 좋은 허풍선이"였으며, 원주민들을 가장 가혹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고 평가한다.[69]

포카혼타스 이야기 자체의 독창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이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일화가 스미스 이전에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1539년 미국 남동부를 탐험했던 스페인 탐험가 에르난도 데 소토는 플로리다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포로 후안 오르티스로부터 "인디언 추장에게 산 채로 구워질 뻔했으나, 추장의 딸의 간청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록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스미스가 겪었다는 사건이 실제 처형 위협이 아니라,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는 부족의 일원 가입 의식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70][71] 그러나 데이비드 A. 프라이스(David A. Price)는 포우하탄족의 의식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북미의 다른 원주민 부족에게서도 유사한 의식의 증거를 찾기 어렵다며 이 가설이 추측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72]

한편, 포우하탄족의 한 부족인 마타포니족(Mattaponi)의 린우드 "리틀 베어" 커스탈로(Linwood "Little Bear" Custalow) 박사는 역사학자 앤절라 L. 대니얼 "실버 스타"(Angela L. Daniel "Silver Star")와의 공저에서, 포카혼타스가 당시 11세 정도의 어린 소녀였으므로 부족의 중요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스미스의 이야기를 반박했다. 커스탈로 박사의 형이자 마타포니족 추장인 칼 "론 이글" 커스탈로(Carl "Lone Eagle" Custalow)는 이 책 서문에서 "인디언에 대한 차별과 우리의 견해가 조롱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포카혼타스의 실화를 말하는 것을 꺼려왔다"고 밝히기도 했다.[73]

또한 스미스는 와훈소나코크 추장이 자신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기록했지만, 전통적인 원주민 사회에서 추장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아니며, 독단적으로 처형을 명령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74] 원주민 사회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운영되었으며, 추장은 중재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했다. 만약 이것이 의식이었다면 주술사가 주관했을 것이며, 추장이 직접 나서서 "명령"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스미스는 원주민 사회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추장을 유럽 군주처럼 절대 권력자로 오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우하탄족의 현 추장인 로이 크레이지 호스(Roy Crazy Horse)는 부족 웹사이트를 통해 스미스와 존 롤프가 "포우하탄족을 먹잇감으로 삼았다"고 비판하며, 런던에서 포카혼타스가 스미스를 만나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분노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스미스가 관심을 끌기 위해 이야기를 조작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존 스미스의 포카혼타스 구조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스미스 개인의 경험이 과장되거나, 혹은 원주민 문화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미국 중심의 신화로 소비되면서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4. 3.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존 스미스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여러 대중 매체에 등장했다.

디즈니1995년 애니메이션 영화 《포카혼타스》와 1998년 비디오 속편 《포카혼타스 2: 새로운 세상으로의 여행》에서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 그려졌다. 첫 영화에서는 멜 깁슨이, 속편에서는 그의 동생 도날 깁슨이 목소리를 연기했다.[56][57]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단체들은 스미스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비판을 이어오고 있다.

테렌스 맬릭 감독의 2005년 영화 《뉴 월드》에서도 스미스는 포카혼타스와 함께 중심 인물로 등장하며, 배우 콜린 파렐이 연기했다.[58]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 1953년 독립 저예산 영화 《존 스미스 선장과 포카혼타스》에서는 앤서니 덱스터가 스미스를 연기했다.[54]
  • 제임스 A. 미치너의 1978년 소설 《체서피크》에 허구적 버전의 스미스가 등장한다.[55]
  • 컨트리 가수 블레이크 쉘턴은 미국 코미디 쇼 《Saturday Night Live》의 미방영 스케치에서 디즈니 버전의 스미스를 연기한 바 있다.[59]
  •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 역사 소설 《A Different Flesh》에서는 신대륙에 호모 에렉투스가 살고 있다는 설정 아래, 존 스미스가 제임스타운 설립 직후 살해당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또한, 존 스미스는 1907년 노포크 (버지니아)에서 열린 제임스타운 박람회를 기념하여 발행된 우표 3종 중 2종에 등장하기도 했다. 1센트 우표에는 사이먼 드 파스의 조각을 바탕으로 한 스미스의 모습이 담겼고, 2센트 우표에는 제임스타운 상륙 장면이 그려졌다.[53]

존 스미스; 1907년 발행


제임스타운 상륙; 1907년 발행

5. 기념물

뉴햄프셔주 해안에서 떨어진 스타 섬에는 존 스미스 선장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이 섬은 쇼얼스 제도의 일부이다. 최초의 기념비는 1864년 스미스가 이 지역을 방문한 지 25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79][45][75] 초기 기념비는 삼각형 기초 위에 세워진 키 큰 기둥 형태였으며,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은 화강암 기둥과 철제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꼭대기의 오벨리스크에는 세 개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이는 스미스가 트란실바니아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던 시절 전투에서 목을 벤 세 명의 튀르크인 머리를 상징했다.[79][45][75]

1914년에는 스미스 방문 300주년을 맞아 뉴햄프셔 식민지 전쟁 협회가 기념비를 부분적으로 수리하고 다시 헌정했다.[80][46][76] 그러나 기념비는 거친 해안의 겨울 날씨에 노출되어 심하게 훼손되었고,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도 거의 마모된 상태이다.[80][47] 당시 신문들은 스미스를 기리는 "청동판" 헌정과 턱 기념비 헌정을 보도하기도 했다.[48]

1914년경 모습의 존 스미스 기념비, 쇼얼스 제도


2014년에는 라이 하버 주립 공원에 스미스를 기리는 새로운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1614년을 기념하여 높이 약 5.18m에 무게 18ton에 달하는 오벨리스크 형태이다.[49][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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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문서 이 지역은 제임스타운의 정북 15마일(24km) 요크강 북쪽 강가에 위치하며, 팜킨키강과 마타포니강이 웨스트포인트에서 합류하는 지점에서 하류 25마일(40km) 지점에 있었다.
[62] 서적 Generall Histo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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