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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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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흐메트 2세는 143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의 아들로 태어나, 1444년 12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이듬해 퇴위했다. 1451년 다시 술탄이 된 그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1453년에 정복하여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지역 정복,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 이탈리아 원정 등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148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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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젠틸레 벨리니의 메흐메트 2세 초상화
젠틸레 벨리니가 1480년에 그린 메흐메트 2세 초상화
칭호오스만 제국의 카이사르
두 땅의 술탄이자 두 바다의 칸
이름메흐메트 빈 무라드 한
로마자 표기Meḥmed-i s̱ānī
터키어 표기II. Mehmed
발음ˈicinˈdʒi ˈmehmet
별칭에부'르-페트흐 (정복자),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카이사르-이 룸
재위1444년 8월 – 1446년 9월 (1차 재위)
1451년 2월 3일 – 1481년 5월 3일 (2차 재위)
출생일1432년 3월 30일
출생지오스만 제국, 에디르네
사망일1481년 5월 3일
사망지오스만 제국, 게브제 근처 휭카르차이으르 (테크푸르차이르)
매장지터키, 이스탄불, 파티흐 모스크
왕가오스만 왕조
종교수니파
가족 관계
아버지무라트 2세
어머니휘마 하툰 (생모), 마라 브란코비치 (양모)
배우자귈바하르 하툰
귈샤흐 하툰
시티샤흐 하툰
치체크 하툰
안나 하툰
헬레나 하툰
마리아 하툰
하티제 하툰
자녀게브헤르한 하툰
바예지드 2세
셰흐자데 무스타파
셰흐자데 젬
서명
메흐메트 2세의 투그라

2. 생애

15세기 메흐메트 2세(1432–1481) 초상화, 이탈리아의 영향이 보임


메흐메트 2세는 1432년 3월 30일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에디르네에서 술탄 무라트 2세와 후마 하툰 사이에서 태어났다.[5][6] 어린 시절 아마시아마니사 등지에서 총독직을 수행하며 통치 경험을 쌓았고, 여러 스승에게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자신의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게 되었다.

1444년, 아버지 무라트 2세가 은퇴하면서 12세의 나이로 잠시 술탄에 즉위했으나,[9][91] 헝가리의 침입으로 위기를 맞았다. 바르나 전투에서 아버지 무라트 2세가 복귀하여 십자군을 격퇴한 후,[91] 1446년 무라트 2세가 다시 술탄으로 복위하면서 메흐메트는 마니사 총독으로 물러나야 했다.[9][7]

1451년 무라트 2세가 사망하자 메흐메트 2세는 19세의 나이로 다시 술탄 자리에 올랐다. 즉위 직후 카라만 베이국의 침입을 격퇴하고,[91]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여 천 년 이상 지속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9]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스탄불로 개칭하고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으며, 도시 재건과 인구 유입에 힘썼다. 또한 스스로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룸의 카이사르'(카이세리 룸)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15]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메흐메트 2세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발칸 반도에서는 세르비아 공국(1459년), 모레아 데스포타트(1460년), 보스니아 왕국(1463년) 등을 정복했으며,[21][22][23] 1456년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는 후녀디 야노시에게 패배하기도 했다.[31][30] 발라키아의 블라드 3세와의 격전 끝에 발라키아를 복속시키고(1462년),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사후 알바니아 대부분을 정복했다(1479년).

아나톨리아에서는 트라페주스 제국(1461년)과 카라만 왕조를 병합했으며(1474년), 1473년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동방의 강자였던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463년부터 1479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랜 전쟁을 벌여 네그로폰테(에비아섬), 슈코더르 등을 빼앗고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세력을 약화시켰다.[59] 1475년에는 크림 칸국을 복속시켜 흑해를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73]

말년에는 이탈리아 정복을 목표로 삼아 1480년 오트란토를 점령했으나,[280] 다음 해인 1481년 5월 3일, 새로운 원정을 준비하던 중 이스탄불 근교에서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111] 그의 죽음으로 오트란토 원정은 중단되었고, 장남 바예지드 2세와 차남 젬 술탄 사이에 제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다.[217]

2. 1. 초창기

1451년 에디르네에서의 메흐메트 2세 즉위


메흐메트 2세는 1432년 3월 30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에디르네에서 술탄 무라트 2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5][6] 그의 어머니는 노예 출신인 후마 하툰이었는데,[5][6] 정확한 출신은 불확실하지만 당시 세르비아 흄 지방(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의 그리스도인 노예였다는 설도 있다.

어린 시절, 메흐메트는 형들이 총독으로 있던 소아시아의 아마시아로 보내졌고, 형들의 뒤를 이어 총독직을 맡기도 했다. 이후 마니사 총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1세 때에는 통치 경험을 쌓기 위해 두 명의 라라(고문)와 함께 다시 아마시아로 보내졌으며, 아버지 무라트 2세는 여러 스승을 보내 그를 교육했다. 이러한 이슬람 교육은 메흐메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스승 몰라 규라니와 악샴사딘의 영향 아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을 이슬람 군주로서의 중요한 의무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계모인 세르비아 제후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딸 마라 브란코비치가 보여준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림을 통해 도시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35] 1443년, 메흐메트는 마니사의 주지사로 부임하여 학문에 더욱 힘썼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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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둘째 형마저 사망하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유력한 계승자가 되었다. 1444년, 아버지 무라트 2세는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연합군 및 헝가리와 평화 조약을 맺은 후[91]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1444년 7~8월경 12살의 어린 메흐메트에게 술탄의 지위를 물려주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9][91]

메흐메트 2세의 첫 번째 통치는 순탄치 않았다. 1444년 9월, 헝가리는 세게드 조약의 휴전 조건을 파기하고 야노시 후냐디가 이끄는 십자군을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을 침공했다.[91] 교황의 대표였던 율리우스 체사리니 추기경은 헝가리 왕에게 무슬림과의 휴전을 깨는 것이 배신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위기에 처한 오스만 제국의 재상 찬달르 할릴 파샤는 은퇴한 무라트 2세에게 복귀하여 군대를 지휘해 달라고 간청했다. 무라트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17세기 연대기에 따르면[7] 어린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아버지에게 "당신이 술탄이라면 와서 당신의 군대를 이끌라. 내가 술탄이라면 당신에게 지금부터 내 군대를 이끌 것을 명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 할릴 이날칙은 메흐메트 2세가 직접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할릴 파샤가 무라트 2세의 복귀를 주도했다고 주장한다.[9][7] 결국 무라트 2세는 전장으로 돌아와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91]

바르나 전투 승리 후 2년 뒤인 1446년, 무라트 2세는 다시 술탄으로 복귀했고 메흐메트 2세는 술탄 칭호는 유지한 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니사의 총독으로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재상 찬달르 할릴 파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부터 메흐메트와 할릴 파샤는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훗날 할릴 파샤는 메흐메트가 다시 술탄이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때 동로마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죄목으로 처형당한다. 퇴위당한 메흐메트가 마니사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확실하지 않다.[279]

1451년 아버지 무라트 2세가 사망하자 메흐메트 2세는 두 번째로 술탄 자리에 올랐다. 즉위 직후 카라만의 이브라힘 2세가 오스만 영토를 침략하고 반란을 선동하자, 메흐메트 2세는 이에 대한 첫 원정을 수행했다. 이 시기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잠재적 왕위 계승자인 오르한을 석방하겠다고 위협하며 메흐메트 2세를 견제하려 했다.[91]

2. 2. 첫 번째 즉위와 퇴위 (1444-1446)

1444년 6월 헝가리 왕국과 평화를 맺고,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연합군과도 평화 협정을 맺은 술탄 무라트 2세[136] 그해 7월 또는 8월,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12세의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술탄의 지위를 넘겨주었다.[5][6] 그는 남부 아나톨리아 또는 마니사로 물러나 은둔했으며,[136] 유임된 대재상 찬달르 할릴 파샤에게 어린 술탄의 보좌를 맡겼다.[136] 메흐메트 2세는 할릴 파샤를 '라라'(Lala, 스승 또는 후견인)라 부르며 존대했지만, 그와 가까워지지는 못했다.[137]

그러나 메흐메트 2세의 첫 번째 통치는 순탄치 않았다. 1444년 9월, 헝가리 왕국의 야노시 후냐디와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이끄는 십자군 연합군이 세게드 조약의 휴전 조건을 깨고 트란실바니아불가리아를 침공했다.[138] 교황의 대표였던 율리우스 체사리니 추기경은 헝가리 왕에게 무슬림과의 휴전을 깨는 것이 배신이 아니라고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대재상 할릴 파샤는 어린 술탄이 이 위기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은퇴한 무라트 2세에게 복위를 간청했다.[138] 무라트 2세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17세기 연대기에 따르면[7] 메흐메트 2세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만약 내가 술탄이라면 지금 당신에게 술탄으로서 명령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어주시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메흐메트 2세가 직접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할릴 파샤가 무라트 2세의 복위를 계획하고 설득했다고도 한다.[7]) 결국 무라트 2세는 전장으로 복귀하여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한 무라트 2세는 일단 물러났으나, 1445년 에디르네에서 예니체리의 반란이 일어나자[139] 할릴 파샤는 다시 무라트 2세의 복위를 추진했다.[138] 결국 1446년 무라트 2세가 다시 술탄으로 복위하였고, 메흐메트 2세는 술탄 칭호는 유지했지만 실권 없이 마니사 총독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 과정에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을 사실상 퇴위시키고 아버지를 복위시킨 할릴 파샤에게 깊은 적개심을 품게 되었으며, 자가노스 파샤와 같은 그의 측근들은 이러한 감정을 더욱 부추겼다.[138] 퇴위당한 메흐메트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니사에 머물렀다.[279]

2. 3. 두 번째 즉위 (1451)

1451년 2월 3일 아버지 무라트 2세가 사망하자[143], 메흐메트 2세는 술탄위를 계승하기 위해 수도 에디르네로 향했다. 당시 그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를 따르는 자는 뒤따르라"고 외치며 즉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144][145] 같은 해 2월 18일 에디르네에 도착하여 19세의 나이로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 직후 메흐메트는 잠재적 경쟁자였던 어린 이복동생 아흐메트를 목욕탕에서 교살했다.[146][145] 이는 왕위 계승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후계자 후보를 살해하여 내분을 막는 이러한 "형제 살해"는 메흐메트 2세의 치세부터 율마(이슬람 법학자)의 동의를 얻어 법적 효력이 인정되며 관례화된 것으로 여겨진다.[148][149] 또한, 그는 예니체리 군단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상여금을 지급했다.[147]

정치적으로는 아버지 시대의 재상이었던 할릴 파샤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150] 메흐메트는 점차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메흐메트의 즉위에 반대 입장이었다고 전해지는 이삭 파샤는 지방으로 좌천되었다.[150]

외교적으로 메흐메트는 즉위 초기에 헝가리와 3년 휴전 협정을 맺고, 동로마 제국에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151] 유럽 국가들은 이를 보고 오스만 제국이 약화될 것이라 예상하기도 했다.[152][153] 그러나 이는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베이국이 무라트 2세의 죽음을 틈타 오스만 영토를 침입하고,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 중이던 오스만 왕족 오르한의 몸값 인상을 요구하며 압박해오는[151][154]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임시 방편에 가까웠다. 메흐메트는 우선 카라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건너가 카라만 군을 격파했다.[154] 동로마의 요구는 일단 수용하는 듯 보였으나,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다.[154] 카라만 문제를 정리한 후, 그는 자신의 오랜 목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147][155]

2. 4. 콘스탄티노플 정복 (1453)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는 메흐메트 2세


메흐메드 2세의 두 번째 통치 초기에 오스만 제국




1451년 아버지 무라트가 사망하자, 메흐메트 2세는 다른 형제들을 제거하고 다시 술탄에 즉위했다. 그는 오스만 해군을 강화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아나톨리아 내륙의 카라만 제후국을 격파한 뒤, 1452년 귀환하는 길에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연안에 루멜리 히사르(Rumelihisari, '유럽의 성')라는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156] 이 요새는 그의 증조부 바예지드 1세가 아시아 쪽에 건설한 아나돌루히사르 요새와 함께 해협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157][158][159] 동로마 제국 사절이 항의했지만, 메흐메트는 요새 건설이 협정 위반이 아니라고 일축했다.[156] 요새 완공 후, 메흐메트는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통행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노바 공화국이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동방 무역에 타격을 주었다.[160] 정지 신호를 무시한 베네치아 선박은 포격으로 침몰했고, 생존 선원들은 참수당했으며, 선장은 경고의 의미로 말뚝에 박혔다.[9][10]

파우스토 조나로 (1854–1929)가 그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는 메흐메드 2세 술탄


1453년, 재상 할릴 파샤 등 일부 신하들은 유럽 기독교 세력의 개입을 우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반대했지만, 자가노스 파샤 등 메흐메트의 측근들은 공격을 지지했다.[162] 메흐메트는 과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장기 포위전 대신 단기 결전을 선택했고,[161] 반대를 무릅쓰고 1453년 4월 6일[163]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8만에서 20만 명에 달하는 군대와 70문 이상의 대형 야포, 그리고 320척의 함대를 동원했다. 도시는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포위되었고, 보스포루스 입구의 함대는 해상 지원을 차단했다.[9]

포위 초반, 헝가리 기술자 오르반이 개량한 거대한 대포가 성벽에 큰 피해를 주었지만[164], 도시 방어는 견고했다. 황금뿔 항구는 부표 사슬과 28척의 군함으로 방어되고 있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4월 22일, 메흐메트는 약 80척의 작은 군함들을 육로로 갈라타를 돌아 황금뿔 북쪽 해안으로 옮기는 기발한 작전을 실행했다. 나무로 포장된 길을 통해 배들을 옮기면서 비잔티움군은 더 넓은 범위의 성벽을 방어해야 했다.

한편, 메흐메트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했을 때, 그의 스승 악샴사딘은 674년 첫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중 사망한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동료 아부 아이유브 알 안사리의 묘를 발견했다. 메흐메트는 정복 후 이곳에 아이유프 술탄 모스크를 건설하여 이슬람 세계에 대한 정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지로서의 역할을 부각했다.

5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켰고, 이로써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125][165][166][167]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해 있던 오스만 황족 오르한은 탈출하려다 실패하고 사망했다. 이 사건은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오스만 제국에게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168]

술탄 메흐메드 2세의 명령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건설된 파티흐 모스크의 역사 사진. 오스만 정복 이후 도시에 건설된 최초의 황실 모스크이다.


정복 후 메흐메트는 도시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169][170] 그는 현재 톱카프 문으로 알려진 곳을 통해 도시에 입성한 직후 성 소피아 대성당으로 가서 건물 보호를 명령하고, 이맘을 불러 이슬람 신앙 고백을 낭송하게 하여 동방 정교회 대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했다.[76] 이는 자선 신탁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슬람 지배를 공고히 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그는 성내 기독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갈라타 지구의 제노바인들에게 기존의 특권을 재확인해주었다.[171][165][267] 6월 1일에는 서방과의 타협을 반대했던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나디오스 2세)로 임명하여, 밀레트 제도의 기초를 다졌다.[165][18][19] 겐나디오스 2세는 메흐메트를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다.[18][19] 또한 유대인 대랍비직(하캄 바시)과 콘스탄티노플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청도 설립했다.

반면, 정복 직후 메흐메트는 전쟁에 반대하며 적에게 유리한 행동을 했다는 명목으로 대비지르 할릴 파샤와 그의 일족을 투옥했고,[172] 같은 해 8월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173] 대신 발칸 출신의 자가노스 파샤를 새로운 대비지르로 임명하여 중앙 집권화를 강화했다.[131]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9] 도시 재건과 인구 회복에 힘썼다.[266] 즉시 성벽 수리, 성채 건설, 병원, 문화 단지, 예니체리 병영, ''토파네'' 주철 공장, 새로운 궁전(톱카프 궁전)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77] 그는 제국 전역의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유대교도에게 도시 이주를 명령했고, 9월까지 5,000 가구가 이주하도록 했다.[77] 포로와 강제 이주민("Sürgün", σουργούνιδεςel)들도 도시로 보내졌다.[78] 이러한 노력 덕분에 도시는 빠르게 발전하여, 1478년 조사에서는 약 8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79] 인구 구성은 이슬람교도 약 60%, 기독교도 20%, 유대교도 10%였다.[80] 메흐메트의 통치 말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번영하는 제국의 수도로 변모했다. 당대 오스만 역사가 네슈리는 "술탄 메흐메드가 이스탄불 전체를 창조했다"고 기록했다.

메흐메트 2세 술탄이 오스만인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카이사르의 궁전으로 알려진 부콜레온 유적에 들어서자 그는 사아디의 유명한 구절을 외쳤다고 전해진다.[11][12][13]

> 거미는 코스로에스 궁전의 휘장을 들고 있고,

> 올빼미는 아프라시아브 성에서 교대를 알린다.

일부 무슬림 학자들은 무스나드 아흐마드의 하디스가 메흐메드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그것을 예언의 성취이자 다가오는 종말의 징조로 보았다.[14]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후 메흐메트는 자신이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의미에서 카이사르(''Qayser-i Rûm'') 칭호를 사용했다.[15]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330년부터 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므로, 그곳을 점령한 자신이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갖는다는 논리였다. 당대 학자 트레비존드의 조지는 이를 지지했으나,[16][17] 가톨릭교회와 서유럽 대부분은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동방 정교회는 이를 인정했다.

마지막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그의 조카들은 메흐메트의 궁정에 편입되었다. 장남은 하스 무라드 파샤로 개명하여 발칸의 베일러베이가 되었고, 차남은 메시 파샤로 개명하여 오스만 함대 제독과 갈리폴리의 산자크베이를 거쳐 바예지드 2세 치하에서 그랜드 베지어를 두 번 지냈다.[20]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에도 정복 활동을 계속하여 1460년에는 펠로폰네소스의 모레아 데스포타트, 1461년에는 아나톨리아 북동부의 트라브존 제국을 멸망시켜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잔재들을 흡수했다. 정복 10년 후 트로이 유적지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리스인(비잔티움인)을 정복함으로써 트로이인들의 복수를 했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21][22][23]

2. 5.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정복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메흐메트 2세는 아나톨리아발칸반도에 남아있던 구 비잔티움계 제후국들을 차례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 세르비아 정복 ===

1389년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상태였던 세르비아에 대한 첫 원정은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후 시작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의 계모이자 무라트 2세의 아내였던 마라 브란코비치가 세르비아 군주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딸이라는 점을 이용해 세르비아 영토 일부의 할양을 요구했다.[24] 세르비아가 이를 거부하자, 1454년 메흐메트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여러 요새를 점령하고 오스트르비차 전투에서 세르비아 기병대를 격파했다.[26][27] 수도 스메데레보를 포위했으나,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 구원군이 접근하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28] 이후 크루셰바츠 근처에서 오스만 군대가 패배하기도 했으나,[29] 곧 오스만 군대는 세르비아 군대를 격파하고 사령관을 처형하며 복수했다.[29] 결국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오스만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합의했다.[24]

1455년, 메흐메트 2세는 다시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중요한 광산 도시인 노보 브르도를 40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켰다.[27]

1456년 말,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사망하자 세르비아는 후계자 분쟁에 휩싸였다. 1458년 마흐무드 파샤 안젤로비치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헝가리 군대가 개입하려 했으나 우지체 전투에서 오스만 군에게 격퇴당했다.[37][32] 1459년 메흐메트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 수도 스메데레보를 공격하여 6월 20일 함락시켰다.[38] 이로써 베오그라드를 제외한 세르비아 전역이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었고, 세르비아 데스포타트는 멸망했다.[39]

=== 베오그라드 포위 실패 (1456) ===

1456년 베오그라드 공방전을 묘사한 오스만 미니어처


1456년 메흐메트 2세는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거대한 대포를 주조하고 도나우강을 통한 보급을 위해 해군까지 동원했다.[30] 7월, 베오그라드 포위가 시작되었고, 오스만 군대는 강력한 포격과 함께 성벽을 공격했다.[30] 그러나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구원군과 조반니 다 카피스트라노가 조직한 십자군이 도나우강에서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고 포위된 도시로 진입하여 수비군의 사기를 높였다.[33][31] 7월 21일, 메흐메트 2세는 총공격을 명령했으나, 격렬한 전투 끝에 오스만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31][32] 메흐메트 2세 자신도 전투 중 부상을 입었으며,[31] 결국 오스만 군대는 포위를 풀고 철수해야 했다.[30][36] 이 패배로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방면 진출은 한동안 중단되었고, 메흐메트 2세는 발칸 반도 내부의 다른 지역으로 정복 목표를 돌렸다.[174][181]

=== 모레아 정복 ===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위치한 모레아 데스포타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존 세력 중 하나였다. 공동 통치자였던 데메트리오스 팔라이올로고스와 토마스 팔라이올로고스 형제는 서로 반목하고 있었고, 오스만에 대한 조공 납부를 거부했다.[185] 1458년 메흐메트 2세는 모레아를 침공하여 상당 부분의 영토를 점령하고 형제에게 조공을 다시 부과했다.[186] 같은 해 아테네 공국도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다.[188]

1459년 토마스가 서유럽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195] 1460년 5월 메흐메트 2세는 다시 모레아로 진군하여 수도 미스트라를 함락시켰다. 데메트리오스는 오스만에 항복했고, 토마스는 이탈리아로 망명했다.[198] 모넴바시아, 마니 반도, 살메니코 등 일부 지역에서 저항이 이어졌으나, 1461년까지 대부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

=== 트라페주스 제국 멸망 ===

1460년 아나톨리아 북동부 흑해 연안에 위치한 트라페주스 제국의 황제 다비드는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 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물 납부를 거부했다.[181][199] 이에 분노한 메흐메트 2세는 1461년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육군은 부르사에서 출발했고, 해군은 시노프로 향하여 그곳을 지배하던 잔다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노프를 점령했다. 이후 메흐메트 2세는 트라페주스로 진격하여 도시를 포위했다(트라페주스 포위 공격). 한 달간의 포위 끝에 1461년 8월 15일, 황제 다비드는 항복했고 200년 이상 존속했던 트라페주스 제국은 멸망했다.[201] 메흐메트 2세는 이후 다비드와 그의 가족 대부분을 처형했다.[201]

=== 발라키아와의 충돌 ===

1460년경 발라키아 공작 블라드(드라큘라) 3세의 초상


메흐메트 2세 암살 시도 실패로 이어진 터르고비슈테 야습


오스만 제국은 발라키아를 헝가리 왕국과의 완충 지대로 삼으려 했으나, 블라드 3세(드라큘라)는 오스만의 종주권을 거부했다. 1459년 메흐메트 2세가 밀린 조공과 군대 파견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내자, 블라드 3세는 이를 거부하고 사절들을 처형했다. 오스만이 파견한 함자 파샤의 군대 역시 블라드의 매복에 걸려 전멸당했다.[41]

1462년 겨울, 블라드 3세는 도나우강을 건너 오스만 영토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는 코르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다뉴브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오블루치차와 노보셀로에서부터 라호바(킬리아 근처에 위치)까지, 하류 다뉴브 강에서 사모비트와 기헨과 같은 장소까지, 늙은이와 젊은이를 포함한 남녀 농민들을 죽였다. 우리는 우리가 집에서 불태운 자들 또는 우리 병사들이 목을 베어버린 튀르크인들을 제외하고 23,884명의 튀르크인들을 죽였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제가 그(메흐메트 2세)와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라고 적었다.[42]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발라키아를 침공했다. 블라드 3세는 터르고비슈테 야습을 감행하여 오스만 군대에 타격을 주었으나, 술탄 암살에는 실패했다.[43] 결국 내부 귀족들의 배신과 몰다비아슈테판 3세의 공격으로 블라드 3세는 헝가리로 망명했고, 메흐메트 2세는 그의 동생인 라두 첼 프루모스를 발라키아의 통치자로 세웠다.

=== 보스니아 정복 ===

1463년 보스니아 정복 후 메흐메트 2세가 보스니아의 가톨릭 수도사들에게 발행한 아히드나메(ahidnâme). 종교의 자유와 보호를 보장하는 내용이다.


세르비아 정복 이후 오스만 제국의 다음 목표는 보스니아 왕국이었다. 보스니아 국왕 스테판 토마셰비치는 1461년 왕위에 오른 후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반오스만 정책을 폈다. 1463년 메흐메트 2세는 보스니아를 침공했고, 오스만 군대는 빠른 속도로 보스니아를 장악했다. 수도 보보바츠가 함락되자 스테판 토마셰비치는 클류치로 피신했으나 결국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보스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1463-1479) ===

1478년-1479년 슈코드라 공성전 당시 오스만 군이 슈코드라 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1463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던 아르고스를 오스만 군대가 점령하면서 양국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44] 베네치아는 헝가리, 교황청 등과 동맹을 맺고 반격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5][46] 오스만 군대는 마흐무드 파샤 안젤로비치의 지휘 아래 모레아에서 베네치아 세력을 몰아내고 헥사밀리온 성벽을 다시 파괴했다.[49] 에게해에서도 베네치아 함대는 레스보스섬 점령에 실패하는 등 고전했다.[51] 1470년 메흐메트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베네치아의 중요 거점인 네그로폰테(에비아섬)를 함락시켰다.

알바니아에서는 스칸데르베그가 오스만 군대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1468년 그가 사망하면서 저항 동력이 약화되었다.[69] 오스만 군대는 1474년1478년 두 차례에 걸쳐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슈코더르를 공격했다(슈코더르 공방전).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지친 베네치아는 1479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슈코더르, 네그로폰테, 렘노스 등 주요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할양하고 배상금과 연간 조공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58][59] 이 전쟁으로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 카라만 왕조 정복과 아크 코윤루 격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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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중남부의 강력한 튀르크계 베이국이었던 카라만 왕조는 1464년 통치자 이브라힘 2세 사후 계승 분쟁에 휩싸였다. 메흐메트 2세는 이 분쟁에 개입하여 피르 아흐메트를 지원하는 대가로 영토 일부를 할양받았다.[60] 그러나 피르 아흐메트가 약속을 어기고 오스만과 대립하자, 메흐메트 2세는 1466년 카라만 왕조의 수도 코냐와 카라만을 점령했다. 피르 아흐메트는 동쪽의 아크 코윤루 통치자 우준 하산에게 망명했다.[61]

우준 하산은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을 견제하려 했으며, 1472년 아나톨리아를 침공했다.[215] 이에 메흐메트 2세는 1473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아크 코윤루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216] 이 승리로 카라만 왕조의 영토는 완전히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었고,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오스만의 지배권이 확고해졌다.

=== 크림 칸국 복속 ===

1475년 크림반도크림 칸국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메흐메트 2세는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했다.[218] 오스만 함대는 크림반도 남부 연안의 제노바 식민 도시들(카파, 타나, 아조프 등)을 점령하고, 제노바에 억류되어 있던 멩글리 1세 기라이를 구출하여 칸으로 복위시켰다.[73] 멩글리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속국이 되었으며,[73]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흑해 북부 연안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흑해를 사실상 '오스만의 호수'로 만들었다. 칭기즈칸의 후손인 크림 칸을 복속시킴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권위는 이슬람 세계를 넘어 몽골계 국가와 모스크바 대공국 등에도 알려지게 되었다.[218]

2. 6.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1463-1479)



비잔티움 역사가 미하일 크리토불루스에 따르면, 전쟁은 아테네의 오스만 사령관 휘하 알바니아인 노예가 주인에게서 10만 아스퍼의 은화를 훔쳐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새인 코론으로 도망치면서 시작되었다. 이 노예가 기독교로 개종하자, 베네치아 당국은 오스만 제국의 인도 요구를 거부했다.[44] 이를 빌미로 1462년 11월, 그리스 중부의 오스만 사령관 투라하노글루 외메르 베이는 전략적 요충지인 베네치아 요새 레판토를 공격하여 거의 함락시킬 뻔했다. 1463년 4월 3일에는 모레아(펠로폰네소스) 총독 이사 베그가 배신을 이용하여 베네치아가 점령하고 있던 아르고스를 점령했다.[44]

이에 베네치아는 헝가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양면 공격을 개시했다. 알비세 로레단이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는 모레아에 상륙했고,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는 보스니아를 침공했다.[45] 교황 비오 2세안코나에서 십자군을 준비했으며,[46] 오스만의 다른 경쟁 세력인 카라만 왕조, 우주운 하산의 아크 코윤루, 크리미아 칸국과도 협상이 진행되었다.[46]

1463년 8월 초, 베네치아군은 아르고스를 탈환하고 코린토스 지협의 헥사밀리온 성벽을 복구하며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47] 이후 펠로폰네소스 북서부를 통제하는 아크로코린토스 요새를 포위했으나, 10월 20일 외메르 베이 군대와의 충돌에서 큰 패배를 겪고 포위를 풀고 헥사밀리온과 나프플리아로 후퇴해야 했다.[47] 한편 보스니아에서는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60개 이상의 요새를 점령하고,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12월 16일 수도 야이체를 함락시켰다.[48](야이체 공성전)

오스만 제국의 대응은 신속했다. 메흐메트 2세는 그랜드 베지어 마흐무드 파샤 안젤로비치를 베네치아군에 맞서 파견했다. 또한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에 정박한 베네치아 함대에 대항하기 위해 황금각에 새로운 조선소 카디르가 리마니(Kadırga Limanı)와 해협 방어를 위해 킬리뒬바히르와 술타니예 두 요새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49] 모레아 원정은 오스만의 신속한 승리로 끝났다. 마흐무드 파샤는 헥사밀리온을 파괴하고 모레아로 진격하여 아르고스를 함락시키는 등 베네치아 세력을 몰아냈다.[49]

메흐메트 2세는 마흐무드 파샤를 지원하기 위해 제이투니온까지 진군했으나, 베지어의 성공 소식을 듣고 군대를 북쪽 보스니아로 돌렸다.[49] 그러나 1464년 7월과 8월에 걸친 야이체 탈환 시도는 실패했고, 코르비누스 군대가 접근하자 오스만군은 후퇴했다. 이후 마흐무드 파샤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코르비누스를 후퇴시켰지만, 야이체는 그 후 몇 년간 헝가리 지배하에 남았다.[48] 1464년 8월 15일, 교황 비오 2세가 안코나에서 사망하면서 십자군 계획은 무산되었다.[46][50]

1464년, 베네치아는 시기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공세를 이어갔다. 그는 오스만 요새들을 공격하고 8월부터 10월까지 미스트라를 포위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이후 양측은 소규모 전투와 약탈을 반복했으나, 인력과 자금 부족으로 베네치아군은 대부분 요새에 갇혀 지냈고, 외메르 베이의 군대는 시골 지역을 장악했다.

에게해에서는 1464년 봄, 베네치아군이 레스보스 섬을 점령하려 미틸레네를 6주간 포위했으나, 5월 18일 마흐무드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가 도착하자 철수해야 했다.[51] 이후의 섬 점령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고, 베네치아 해군은 남은 기간 동안 다르다넬스 해협 앞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는 데 그쳤다.[51] 1465년 초, 메흐메트 2세는 평화 협상을 제안했으나 베네치아는 이를 거부했다.[52]

1466년 4월, 베토레 카펠로의 지휘 아래 베네치아의 공세가 재개되었다. 함대는 임브로스, 타소스, 사모트라케 등 에게해 북부 섬들을 점령한 후 사로니코스만으로 항해했다.[56] 7월 12일, 카펠로는 피레우스에 상륙하여 오스만의 주요 거점인 아테네를 공격했으나 아크로폴리스 점령에 실패하고, 펠로폰네소스의 파트라스로 후퇴했다. 당시 파트라스는 베네치아-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된 상태였다.[53] 그러나 카펠로 도착 직전, 외메르 베이가 1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기습하여 포위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베네치아군 600명과 그리스군 100명이 포로로 잡혔고, 지휘관 바르바리고는 전사했다.[54] 며칠 후 도착한 카펠로가 오스만군을 공격했지만 다시 대패했고, 사기가 꺾인 그는 남은 병력과 함께 네그로폰테로 철수했다. 카펠로는 그곳에서 병을 얻어 1467년 3월 13일에 사망했다.[55] 1470년, 메흐메트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네그로폰테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베네치아 구원 함대는 패배했다.

한편, 1466년 봄부터 메흐메트 2세는 알바니아 원정에도 나섰다. 알바니아인들은 지도자 스칸데르베그의 지휘 아래 오랫동안 오스만의 침공에 저항해왔고, 이탈리아로부터 지원을 요청했다.[45] 메흐메트 2세는 알바니아를 재차 공격했지만 크루야 공략에 실패했다(크루야 3차 공성전). 겨울마다 창궐한 전염병으로 지역 저항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56] 1468년 스칸데르베그가 베네치아령 리수스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하면서 알바니아 저항은 큰 타격을 입었다.[69] 스칸데르베그 사후에도 베네치아가 통제하던 북부 알바니아의 자블랴크 크르노예비차, 드리슈트, 레저, 그리고 특히 슈코드라 등의 요새는 계속 저항했다. 메흐메트 2세는 1474년 슈코드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57] 1478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슈코드라 공성전을 지휘했다. 베네치아인과 슈코드라 주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베네치아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1479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맺고 슈코드라를 오스만 제국에 할양했다.

이 조약은 오스만군이 베네치아 본토 근처까지 진출한 상황에서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베네치아는 울치니, 안티반(바르), 두라조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오랜 공성전 끝에 슈코드라와 달마티아 해안의 다른 영토, 그리고 네그로폰테(에우보이아)와 렘노스 섬을 오스만 제국에 넘겨주었다. 또한 베네치아는 10만 두캇의 배상금을 지불하고,[58] 흑해 무역 특권을 유지하는 대가로 매년 약 1만 두캇의 조공을 바치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으로 베네치아의 레반트 지역에서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59]

2. 7. 몰다비아 및 알바니아 원정

레제 동맹의 군주 스칸데르베그 초상화


알바니아 귀족이자 오스만 제국의 지배 엘리트 출신이었던 스칸데르베그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그는 1444년 알바니아 공국들을 군사 및 외교 동맹인 레제 동맹으로 통합했다. 메흐메트 2세는 스칸데르베그가 살아있는 동안 알바니아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1466년과 1467년 두 차례나 직접 군대를 이끌고 크루야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466년 봄, 메흐메트 2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스칸데르베그와 알바니아인들을 공격했다. 스칸데르베그는 이탈리아에 지원을 요청하며 진행 중이던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1463년-1479년)을 알바니아 독립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45] 베네치아 역시 알바니아인들이 자신들의 해안 영토인 두레스(Durazzo|두라초it)와 슈코더(Scutari|스쿠타리it)를 보호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원정의 주요 성과는 단 25일 만에 건설된 엘바산 요새였다. 이 요새는 알바니아를 둘로 나누어 스칸데르베그의 북부 기지와 남부의 베네치아 영지를 분리시키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69] 그러나 술탄이 철수한 후, 스칸데르베그는 1467년 초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발라반 파샤를 격파하고 크루야 포위를 풀었으며, 엘바산을 공격했지만 점령에는 실패했다.[70][71] 메흐메트 2세는 다시 알바니아로 진군하여 요새들을 공격하고 베네치아 영지를 습격했지만,[70] 크루야를 점령하지 못하고 또다시 실패했다. 하지만 겨울마다 발생하는 전염병은 알바니아의 저항력을 약화시켰다.[56]

1468년,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 정복을 막아왔던 스칸데르베그가 베네치아의 거점 리수스(레제)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69] 그의 죽음을 알게 된 메흐메트 2세는 크게 기뻐하며 아시아와 유럽 양쪽 정복이 가능해졌다고 확신했다.[207] 스칸데르베그 사후 알바니아인들은 그를 대체할 지도자를 찾지 못했고, 이후 10년간 점차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했다.

한편, 몰다비아슈테판 대공(Ștefan cel Mare)은 1472년부터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납금 지불을 거부하고 폴란드, 헝가리, 베네치아, 교황청에 반 오스만 동맹 결성을 호소했다. 1474년 메흐메트 2세는 몰다비아에 키리아(Kiliya, 현 우크라이나)와 알바(현 빌호로드드니스트롭스키) 요새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475년 1월, 바슬루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는 몰다비아 군대에게 예상치 못한 큰 패배를 당했다. 유럽 국가들은 슈테판의 승리를 칭송했고, 무라트 2세의 미망인은 이를 전례 없는 패배라고 회고했다.[220] 그러나 이 전투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전략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고, 슈테판은 오스만의 재공격에 대비해 동맹 결성을 계속 호소했다.[221]

1476년 5월, 메흐메트 2세는 직접 몰다비아 원정을 감행했다. 오스만 군대와 크림 칸국에서 파견된 타타르 병사들은 몰다비아 전역을 휩쓸었다. 같은 해 7월, 메흐메트 2세는 왈레아 알바 전투에서 슈테판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몰다비아 병사들의 끈질긴 저항과 오스만 군 내부에 퍼진 전염병, 식량 부족으로 인해 결국 후퇴해야 했다.[221]

몰다비아 원정에서 돌아온 메흐메트 2세는 곧바로 헝가리 지배하의 세르비아 요새들을 공격했다.[222] 이때 헝가리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아쿤주(오스만 제국의 비정규 기병)가 달마티아크로아티아에 파견되었다.[222] 1477년 아쿤주는 북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세력권에 침입하여 여러 도시들을 파괴했다. 메흐메트 2세는 베네치아의 해외 영토인 레판토 공략을 포기하고, 정복 목표를 다시 알바니아로 옮겼다.

1478년 봄, 메흐메트 2세는 알바니아 원정을 시작했다.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223] 같은 해 6월, 알바니아의 수도였던 크루야는 기근과 전염병, 지원군 부족으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했다.[224] 메흐메트 2세는 알바니아에 남은 마지막 주요 거점인 슈코드라를 포위하고 한 달간의 포격 후 총공격을 명령했다(슈코드라 공방전). 베네치아인들과 슈코드라 주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몇 달간의 공방전 끝에 결국 슈코드라도 함락되었다.[224] 초기 오스만 연대기 작가 아식파샤자데(1400년–81년)는 "술탄 메흐메드의 모든 정복은 슈코드라 점령으로 완성되었다"고 썼다.[72] 크루야와 슈코드라의 함락으로 알바니아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224]

15년 이상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여온 베네치아 공화국은 국고가 바닥나고 유럽 내에서 고립된 상태였다.[225] 페스트 유행과 아쿤주의 습격으로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베네치아 내에서는 강화 여론이 높아졌다.[226] 결국 1479년 1월[227],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맺고 슈코드라를 할양했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흑해의 제해권을 더욱 공고히 했다.[228]

베네치아와의 강화 조약으로 몰다비아는 중요한 지원을 잃게 되었고, 다음 해인 1480년 슈테판 대공은 결국 오스만 제국에 굴복하여 공납을 바치게 되었다.[202]

2. 8. 이탈리아 원정과 죽음 (1480-1481)

A bronze medal of Mehmed II the Conqueror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스스로 로마 제국 황제의 계승자라 여긴 메흐메트 2세는 1480년 이탈리아반도 침공을 감행했다.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는 1480년 8월 이탈리아 남부의 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280]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거점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정복하여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식량 부족으로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는 겨울이 오기 전 대부분의 병력을 알바니아로 돌려보내고, 오트란토에는 보병 800명과 기병 500명의 수비대만 남겨두었다. 그는 겨울 이후 돌아올 계획이었다.

오스만 군의 이탈리아 상륙은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함락될 것이라는 공포가 확산되었다.[125] 교황 식스토 4세는 로마 시민들의 피난 계획을 세우고 1481년 십자군을 다시 호소했다.[230] 여러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헝가리, 프랑스가 이에 호응했으나, 1479년 오스만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참여하지 않았다. 나폴리 왕국은 영국,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했다.[231]

1481년,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는 아들 알폰소 2세가 이끄는 군대를 조직했고, 헝가리의 마차시 코르비누스 왕도 병력을 지원했다. 이들 연합군은 1481년 5월 1일부터 오트란토 탈환을 위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이스탄불에 안치되어 있는 메흐메트 2세의 관


한편, 1481년 봄 메흐메트 2세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새로운 원정에 나섰다. 4월 27일 위스퀴다르에 도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말테페 인근의 테크풀 차이르(Tekfur Çayırlı)에서 병세가 악화되었다.[232] 이 마지막 원정의 목표가 로도스와 남부 이탈리아 정복이었는지,[110] 혹은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고 칼리프 지위를 얻으려던 것이었는지[110], 또는 오트란토 점령 상황을 볼 때 로마 정복을 목표로 했는지[233]는 명확하지 않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1481년 5월 3일,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11] 그의 시신은 이스탄불의 파티흐 모스크 단지 내 튀르베에 안장되었다.[111] 사인에 대해서는 지병 악화설이 일반적이지만[233][234][235], 장남 바예지드의 지시에 의한 독살설도 제기된다.[112]

메흐메트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장남 바예지드와 차남 젬 술탄 사이의 격렬한 제위 계승 분쟁을 촉발시켰다.[217][237] 이 내부 혼란으로 오스만 제국은 오트란토에 증원군을 보낼 수 없었고, 결국 오트란토의 오스만 수비대는 기독교 연합군과의 협상을 통해 알바니아로 철수했다. 오트란토는 1481년 교황군을 포함한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메흐메트 2세의 사망 소식은 유럽 전역에 큰 기쁨을 가져왔고, 베네치아에서는 "La Grande Aquila è morta!|라 그란데 아퀼라 에 모르타!it"('위대한 독수리가 죽었다!')라고 선포하며 축하 행사가 열렸다.[113][114][236]

3. 군주로서의 평가

메흐메트 2세는 30년에 걸친 두 번의 치세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하여 발칸반도의 여러 왕국,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여러 세력을 정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시킨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정복 활동을 통해 오스만 왕조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특히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세계사적 사건으로, 이를 통해 메흐메트 2세는 "정복자(파티흐)"[123]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스스로 로마 제국황제 계승자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또한 "두 바다와 두 대륙의 지배자"[124]라는 칭호도 사용했다.

그는 술레이만 1세보다 앞서 형사법과 헌법을 성문화하여 전제 군주로서 오스만 술탄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개인적으로는 페르시아어로 시를 짓고 아라비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등 학문적 소양을 갖춘 무슬림이었으나,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에만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와 예술가들을 이스탄불로 초빙했으며, 베네치아 출신 화가 젠틸레 벨리니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 등 서구 문화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75] 이러한 면모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 군주 중 한 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128] 그의 궁정은 국제적인 분위기를 띠었으나,[129] 그가 사망한 후 오스만 궁정에서는 이러한 다문화적 분위기가 점차 약화되었다.[130]

메흐메트 2세의 정복 활동은 종종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견되었으며, 그 자신도 알렉산드로스의 전기를 즐겨 읽었다고 전해진다.[127] 그러나 그의 강력한 군사력과 확장 정책은 유럽 국가들에게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고,[125] 이로 인해 "파괴자", "기독교 최대의 적", "피에 젖은 군주" 등으로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26] 역사가 프란츠 바빙거는 메흐메트 2세가 기독교 세계와 일부 신민들에게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여겨졌다고 평가했다. 1480년 이탈리아반도오트란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280] 등은 그의 잔혹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63년 보스니아 정복 후 가톨릭 수도사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보호를 약속하는 아히드나메(Ahidnâme)를 발급한 것처럼, 제국의 안정을 위해 다양한 종교와 민족을 통치하려는 현실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오늘날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제국을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군주로 기억되며, 터키에서는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스탄불의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다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의 초상화는 터키 리라 지폐에도 사용되었다.[115][116]

4. 한국과의 관계 (한국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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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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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278] 서적 オスマン帝国500年の平和
[279] 서적 콘스탄티노플 함락 한길사 2002
[280] 서적 서양 문명의 역사 2 소나무 199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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