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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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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여장은 청나라 말기의 인물로, 1868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에 들어갔다. 1877년 초대 주일 공사로 임명되어 3년간 활동하며 류큐 처분 사건에 항의하고, 메이지 유신을 관찰한 기록을 담은 《사동술략》을 저술했다. 이후 복주의 선정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청불 전쟁 중 마강 해전 패배로 면직되었으며, 양광총독 이한장의 초청으로 한산서원 주강을 지냈다. 그는 황준헌이 주일 공사로 있을 때 참사관으로 함께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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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장
기본 정보
하여장의 초상
하여장의 초상
이름하여장 (何如璋)
자익 (子益)
예산 (藝珊)
출생1838년
사망1891년
국적청나라
관력
직위초대 주일본 공사
병부좌시랑
임관진사
가계
부친하조용 (何朝墉)
배우자오징 (吳徵)
자녀아들: 하경 (何璹)
딸: 4명
기타
관련 인물황준헌

2. 생애

광둥성 다부 출신으로, 1868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에 들어갔다. 1877년 초대 주일 공사로 임명되어 3년간 공사로 지냈으며, 1879년 류큐 처분 사건 때 일본의 조치에 항의했다.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을 지켜본 기록과 평가를 담은 《사동술략》 (使東述略)을 남겼다.

청나라 귀국 후 복주 선정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청불 전쟁 마강 해전에서 장패륜 등과 후퇴하여 함선 11척과 병사 700명을 잃고 마미선창이 함락되자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 이후 양광총독 이한장의 초청으로 한산서원 주강(主講)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광둥성 다부 출신으로, 1868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에 들어갔다. 1877년 초대 주일 공사로 임명되어 3년간 공사로 지냈으며, 1879년 류큐 처분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의 조치 강행에 대해 항의했다. 일본에 머무르면서 메이지 유신을 지켜본 기록과 평가를 담은 《사동술략》 (使東述略)을 남겼다.

2. 2. 주일 공사 활동 (1877-1880)

1877년 초대 주일 공사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공사직을 수행했다.[1] 1879년 류큐 처분 사건 당시 일본의 강경 조치에 항의했다.[1] 일본 체류 기간 동안 메이지 유신을 관찰하고 그 기록과 평가를 담은 《사동술략》(使東述略)을 저술했다.[1]

2. 3. 청나라 복귀와 복주 선정대신 임명

1879년 류큐 처분 사건 당시 일본의 조치 강행에 대해 항의했던 하여장은, 3년간의 주일 공사 임기를 마치고 청나라로 돌아와 복주의 선정대신으로 임명되었다.[1] 그러나 청불 전쟁 중 마강 해전에서 장패륜 등과 함께 후퇴하면서 11척의 함정과 700명의 병사를 잃고, 마미선창이 함락되자 그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1]

2. 4. 청불 전쟁과 마강 해전

1879년 류큐 처분에 대해 일본의 강경 조치에 항의했다. 청나라로 돌아온 후 복주의 선정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청불 전쟁 중 마강 해전에서 장패륜 등과 함께 후퇴하여 11척의 함선과 700명의 병사를 잃었다. 마미선창이 함락되자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1]

2. 5. 면직 이후

양광총독 이한장의 초청으로 한산서원의 주강(主講)이 되었다.[1]

3. 기타

황준헌조선책략을 만든 인물로, 하여장이 주일 공사로 있을 때 참사관으로 일했다.[2]

3. 1. 황준헌과의 관계

황준헌은 하여장이 주일 공사로 있을 때 참사관으로 일했다.[2]

4. 관련 서적

다음은 하여장과 관련된 서적들이다.


  • 스즈키 토모오의 《양무운동 연구 - 19세기 후반 중국의 공업화와 외교의 혁신에 대한 고찰 -》 (큐코 서원, 1992년)은 양무운동 시기 청나라의 근대화와 외교 정책 변화를 다루며, 하여장의 외교 활동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1]
  • 장웨이슝의 《문인 외교관의 메이지 일본 - 중국 초대 주일 공사단의 이문화 체험 -》 (하쿠쇼보, 1999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와 청나라 초대 주일 공사단의 문화 교류를 다루며, 하여장의 일본 경험을 보여준다.[2]

4. 1. 19세기 후반 중국의 공업화와 외교 연구

스즈키 토모오의 《양무운동 연구 - 19세기 후반 중국의 공업화와 외교의 혁신에 대한 고찰 -》 (큐코 서원, 1992년)을 참고할 수 있다.[1]

4. 2. 메이지 일본과 중국 초대 주일 공사단

장웨이슝의 《문인 외교관의 메이지 일본 - 중국 초대 주일 공사단의 이문화 체험 -》 (하쿠쇼보, 1999년)을 소개한다.[2]

참조

[1] 논문 羅森の目に映った「鎖国」と「開国」の日本 http://www.lib.yamag[...] 山口大学アジア歴史・文化研究会
[2] 뉴스 중국의 역사적 비원 http://news.naver.co[...] 중앙일보 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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