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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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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성결교회는 1907년 김상준과 정빈이 동경성서학원 졸업 후 서울에 중앙복음전도관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전파하며 부흥을 이루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교단이 해산되고 순교자가 발생했지만 광복 후 재건되었다. 1961년에는 에큐메니즘 관련 갈등으로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로 분열되었으나, 1, 2차 통합을 거쳤다. 현재 기성, 예성,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나성)가 한국성결교회연합회를 통해 교류하며 한국교회연합에서 활동하고 있다.

2. 한국 성결교의 초창기 역사

1910년 영국 웨일스 출신의 존 토마스(John Thomas) 목사가 조선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경성에 상주하면서 조선 전 지역의 사역을 관장하였다. 같은 해 후반 무교정에 있던 기존의 낡은 기와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무교정복음전도관을 최신 서양식 3층 건물로 크게 신축하였다. 그리고 이 건물의 일부 공간을 이용하여 1911년 3월 13일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을 개원하였다.

2. 1.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

김상준, 정빈 두 사람이 일본 도쿄에 있는 동경성서학원을 1907년 3월 졸업하고, 그해 5월 30일 조선 경성부 종로 염곡(현재 종로2가 관철동)의 작은 기와집을 빌려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중앙복음전도관을 설립한 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이다. 이 중앙복음전도관은 중앙성결교회의 모체로서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따 염곡복음전도관이라고도 불렀다. 이때부터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조선에 전파하며 뜨겁게 구령활동을 시작하였다.

종로 염곡에서 중앙복음전도관이 크게 부흥하자 더 큰 건물이 필요했다. 자체적인 큰 건물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자금 확보 및 건설 준비 등으로 시간적 여유가 없어 6개월간 임시로 사용할 건물이 필요하였다. 구리개동현(銅峴)(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부근으로 한자로 銅峴(동현) 지역인데 현재 을지로2가에 있다)에서 유리 창문이 있고 규모가 상당한 서양식 벽돌건물을 빌려 1908년 11월 이전하였다. 이 중앙복음전도관을 그 지역의 이름을 따 구리개복음전도관 또는 동현복음전도관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다. 일종의 전도폭발이었다.

1909년 5월 구리개와 염곡 근처의 무교정에서 터가 넓고 허름한 기와집을 구입하여 중앙복음전도관을 이전하였다. 이 중앙복음전도관은 그 지역의 이름을 따 무교정복음전도관이라고도 불렸고 모다리 옆에 있어 모다리복음전도관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1910년 10월 서울의 공식 명칭이 한성부에서 '''경성부'''로 변경됨에 따라, 경성복음전도관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2. 2. 일제강점기에서 성결교단의 창립

어니스트 A. 길보른 목사가 1921년 3월에 3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같은 해 9월, 33개의 교회와 기도소를 통괄할 조직을 위하여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교단을 형성하였다. 1922년부터 교단잡지인 활천을 발행하고 선교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1929년 2월 연회가 창립할 때 75개 교회의 남녀교역자 200여명에 이르렀다.

2. 3.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나성)의 분립·창립

일본 나사렛교회 동부연회는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재일 조선인 목사인 장성옥을 1937년 9월 조선 평양에 파송하여 개척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장성옥 목사는 열심히 기도와 전도를 하여 60명이나 모이는 큰 규모로 발전하였고, 모든 준비를 마친 뒤 1938년 6월 평양 신양리교회를 창립하였는데, 이것이 조선 최초의 나사렛 교회이다. 그해 말 조정환(曺廷煥) 목사가 두 번째 나사렛 교회인 평양 신리교회를 창립했고, 이듬해인 1939년 11월 1일에 장성옥 목사는 평양 신양리교회를 동경성서학원 후배인 정희섭 목사에게 맡기고 일본 나사렛교회의 자금을 받아 경성부 현저동에 있는 일본인 오다 나라찌 목사(한국명: '''전영복(田永福)''')의 조선복음교회를 인수하여 조선에서 세 번째 나사렛교회인 경성 영천교회를 1939년 설립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일본 나사렛교회의 직접지도 하에 있었으므로 한국 나사렛교회의 시원으로 보지는 않는다.

1936년 11월 정남수 목사를 중심으로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에서 이탈한 약 열 개의 교회와, 송태용 목사가 이끌고 있던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와 다름)가 연합하였다. 이들은 몇 년 후인 1948년 미국의 나사렛교회와 연합하여 대한기독교 성교회를 창립하게 된다. 1974년 7월 나성은 한글 교단명을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4. 일제 강점기말과 해방 및 6.25전쟁

일제의 탄압으로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1943년 12월에 교단이 강제 해산되었으며, 380명의 교인이 순교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재건총회가 열리고 교단명을 기독교조선성결교회로 변경하였다. 이후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됨에 따라 1949년 4월 개최된 제4회 총회에서 교단 명칭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47년에 의회 제도로 개정하고 NCCK에 회원 교단이 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155명의 교인이 순교하고 다수의 목회자가 납북당하는 등 교단이 사실상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교인들이 힘을 모아 교회를 재건하여 한국 교회사의 기적을 새기게 된다.

2. 5.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의 분열 및 합동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는 1955년 한기총의 전신인 한국복음주의자협의회(NAE)에 가입했지만, 이미 NCCK에 가입된 상태였다. 이에 대한 교단 내 논란이 끊이지 않자, 1961년 4월 제16대 총회에서 에큐메니즘(교회연합운동) 지지 여부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다. 에큐메니즘(교회연합운동) 반대파와 중립파들은 NCC와 NAE 모두에 가입한 총회에 각성을 요구하며 따로 독립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를 설립했다. 이로써 한국의 성결교회는 양분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에서 NCC와 NAE를 탈퇴하는 등 통합을 위한 조치가 이루어지자, 이에 고무된 예성 교회들이 1965년 기성으로 이동하여 1차 통합을 이루었다. 이후 1973년 예성의 97개 교회들이 기성으로 다시 이동하여 2차 통합을 이루었지만, 아직 완전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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