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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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흠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경시제를 섬기다 광무제에게 투항하여 등우의 군사가 되었다. 적미군 정벌에 참여하여 부양후에 봉해졌으며, 대사도에 임명되었으나 직언을 하다 광무제의 노여움을 사 면직된 후 아들과 함께 자결했다. 그는 광무제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사후에는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광무제의 조처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한 경시제를 섬겨 하내태수를 지냈다. 후한 광무제가 하내군으로 진군하자 동향인 잠팽과 대책을 논의했는데, 잠팽은 광무제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나 광무제가 이미 하내군의 치소인 회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변해 광무제에게 투항했고, 원래 한흠의 계획을 안 광무제에게 주살될 뻔했지만 잠팽이 광무제에게 한흠을 용서하고 등용할 것을 권해 등우의 군사가 되었다.[1]
2. 생애
등우가 적미군을 정벌할 때 군사로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졌다.[1] 그 후, 상서령에 임명되었고, 건무 4년(28년)에 『춘추좌씨전』(좌씨춘추) 박사를 설치하려 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박사 범승과 대립하고 논쟁했다. 또한 패군 태수를 역임하고, 건무 13년(37년) 3월, 사망한 후패의 후임으로 대사도에 기용되었다.[1]
그러나 한흠은 항상 숨김없이 직언했기 때문에, 광무제는 그의 의견을 항상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조회에서 광무제가 외효와 공손술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을 읽는다고 하자, 한흠은 "망국의 군주도 모두 재능이 있었습니다. 걸과 주도 그러합니다"라고 말했고, 광무제는 크게 노하여 기괴한 행동을 한다고 여겼다.[1] 게다가 한흠은 곧 기근과 흉년이 될 것이라고 논증하며, 마음대로 발언했다.
건무 15년(39년) 1월, 한흠은 연좌로 인해 대사도에서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갔다. 광무제는 한흠을 파면한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사자를 파견하여 조서를 통해 그를 질책했다. 사례교위 포영이 사면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한흠과 그의 아들 한영은 자살에 이르렀다. 한흠의 명성은 높았고, 죽음이 죄에 걸맞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광무제는 후에 한흠의 유족에게 금전과 곡물을 하사하고, 예에 맞도록 장례를 치렀다.[2]
2. 1. 초기 생애와 경시제 섬김
한 경시제를 섬겨 하내태수를 지냈다. 후한 광무제가 하내군으로 나아오자 동향인 잠팽과 대책을 논의했는데, 잠팽은 광무제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런데 광무제가 이미 하내군의 치소인 회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변해 광무제에게 투항했고, 원래 한흠의 계획을 안 광무제에게 주살될 뻔했지만 잠팽이 광무제에게 한흠을 용서하고 등용할 것을 권해 등우의 군사(軍師)가 되었다.[1]
등우가 적미군을 정벌할 때 군사로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졌다.[1]
경시제(유현)의 부하로서, 하내태수로 임명되었다. 경시 2년 (24년), 유수(후의 광무제)가 하내로 진공하려 하자, 한흠은 동향의 부하인 잠팽과 하내 방위에 대해 상담했다. 이때 잠팽은 유수에게 항거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한흠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나 유수가 회현(하내군)까지 진군해 오자, 한흠은 급작스럽게 항복하고 만다. 한흠이 처음에는 항거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된 유수는 그를 베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새로 부하가 된 잠팽이, 한흠은 남양의 호족이므로 유용하다고 진언했기 때문에, 유수는 그를 사면하고 부하로 삼았다.[1]
그해 말, 등우가 삼보(三輔) 진공을 위해 군대를 편성하자, 한흠은 그 군사로 기용되어 종군했다. 이를 포함한 전공으로, 한흠은 부양후에 봉해졌다.[1]
2. 2. 광무제와의 만남과 등용
한 경시제를 섬겨 하내태수를 지냈다. 후한 광무제가 하내군으로 진군하자 동향인 잠팽과 대책을 논의했는데, 잠팽은 광무제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나 광무제가 이미 하내군의 치소인 회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변해 광무제에게 투항했고, 원래 한흠의 계획을 안 광무제에게 주살될 뻔했지만 잠팽이 광무제에게 한흠을 용서하고 등용할 것을 권해 등우의 군사(軍師)가 되었다.[1]
등우가 적미군을 정벌할 때 군사로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졌다.[1]
처음에는 경시제(유현)의 부하로서, 하내태수로 임명되었다. 경시 2년 (24년), 유수(후의 광무제)가 하내로 진공하려 하자, 한흠은 동향의 부하인 잠팽과 하내 방위에 대해 상담했다. 이때 잠팽은 유수에게 항거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한흠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나 유수가 회현(하내군)까지 진군해 오자, 한흠은 급작스럽게 항복하고 만다. 한흠이 처음에는 항거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된 유수는 그를 베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새로 부하가 된 잠팽이, 한흠은 남양의 호족이므로 유용하다고 진언했기 때문에, 유수는 그를 사면하고 부하로 삼았다.[1]
그해 말, 등우가 삼보(三輔) 진공을 위해 군대를 편성하자, 한흠은 그 군사로 기용되어 종군했다. 이를 포함한 전공으로, 한흠은 부양후에 봉해졌다.[1]
2. 3. 군사로서의 활약과 부양후 책봉
원래는 한 경시제를 섬겨 하내태수를 지냈다. 후한 광무제가 하내군으로 나아오자 동향인 잠팽과 대책을 논의했는데, 잠팽은 광무제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런데 광무제가 이미 하내군의 치소인 회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변해 광무제에게 투항했고, 원래 한흠의 계획을 안 광무제에게 주살될 뻔했지만 잠팽이 광무제에게 한흠을 용서하고 등용할 것을 권해 등우의 군사가 됐다.[1]
등우가 적미군을 정벌할 때 군사로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졌다.[1]
| 작위 | 부양후 (扶陽侯) |
|---|---|
| 소속 | 경시제 → 광무제 |
2. 4. 중앙 관직 진출과 좌씨춘추 논쟁
그 후, 한흠은 상서령에 임명되었고, 건무 4년(28년)에 『춘추좌씨전』(좌씨춘추) 박사를 설치하려 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박사 범승과 대립하고 논쟁했다. 또한 패군 태수를 역임하고, 건무 13년(37년) 3월, 사망한 후패의 후임으로 대사도에 기용되었다.그러나 한흠은 항상 숨김없이 직언했기 때문에, 광무제는 그의 의견을 항상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조회에서 광무제가 외효와 공손술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을 읽는다고 하자, 한흠은 "망국의 군주도 모두 재능이 있었습니다. 걸과 주도 그러합니다"라고 말했고, 광무제는 크게 노하여 기괴한 행동을 한다고 여겼다.[1] 게다가 한흠은 곧 기근과 흉년이 될 것이라고 논증하며, 마음대로 발언했다.
건무 15년(39년) 1월, 한흠은 연좌로 인해 대사도에서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갔다.
2. 5. 대사도 임명과 직언
등우가 적미군을 정벌할 때 군사로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졌다. 패군태수로 재직하다가 건무 13년(37년) 3월, 후패의 후임으로 대사도에 임명되었다. 한흠은 직언하기를 좋아하고 꺼리는 것이 없었다.[1]광무제는 한흠이 직언을 하자,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결국 건무 15년(39년) 정월, 연좌를 이유로 대사도에서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갔다. 광무제는 한흠을 파면한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사자를 파견하여 조서를 통해 그를 질책했다. 사례교위 포영이 사면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한흠과 그의 아들 한영은 자살에 이르렀다. 한흠의 명성은 높았고, 죽음이 죄에 걸맞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광무제는 후에 한흠의 유족에게 금전과 곡물을 하사하고, 예에 맞도록 장례를 치렀다.[2]
2. 6. 광무제와의 갈등과 죽음
광무제와 갈등하기 전, 한흠은 한 경시제를 섬겨 하내태수를 지냈다. 광무제가 하내군으로 진출하자, 한흠은 동향인 잠팽과 대책을 논의했다. 잠팽은 광무제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으나, 한흠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러나 광무제가 이미 하내군의 치소인 회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흠은 갑자기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원래 한흠의 계획을 알고 있던 광무제는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잠팽이 광무제에게 한흠을 용서하고 등용할 것을 권하여 등우의 군사가 되었다.등우가 적미군을 정벌할 때 한흠은 군사로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졌다. 이후 패군태수로 재직하다가 건무 13년(37년) 3월, 후패의 후임으로 대사도에 임명되었다. 한흠은 직언을 즐겨하고 꺼리는 것이 없어, 결국 광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건무 15년(39년) 정월, 한흠은 면직되었고, 아들 한영(韓嬰)과 함께 자결하였다.[1]
건무 4년(28년), 한흠은 『춘추좌씨전』(좌씨춘추) 박사를 설치하려 했으나, 박사 범승이 이에 반대하여 둘은 논쟁을 벌였다. 건무 13년(37년) 3월, 한흠은 사망한 후패의 후임으로 대사도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한흠은 항상 숨김없이 직언했기 때문에, 광무제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회에서 광무제가 외효와 공손술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을 읽으려 하자, 한흠은 "망국의 군주도 모두 재능이 있었습니다. 걸과 주도 그러합니다"라고 말했다. 광무제는 크게 노하여 한흠을 기괴한 행동을 한다고 여겼다.[1] 또한 한흠은 곧 기근과 흉년이 닥칠 것이라고 주장하며, 거리낌 없이 발언했다.
건무 15년(39년) 1월, 한흠은 연좌되어 대사도에서 파면되고 향리로 돌아갔다. 광무제는 한흠을 파면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자를 보내 조서를 통해 그를 질책했다. 사례교위 포영이 사면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한흠과 그의 아들 한영은 자살했다. 한흠의 명성은 높았고, 그의 죽음이 죄에 비해 과하다고 여긴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었다. 이에 광무제는 한흠의 유족에게 금전과 곡물을 하사하고, 예법에 어긋남이 없도록 장례를 치르게 했다.[2]
3. 평가
신나라 말기부터 후한 초기까지 활동했던 한흠은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이 건국되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그의 평가는 시대적 배경과 그의 행적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참조
[1]
서적
漢書 王莽伝
[2]
문서
成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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