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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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흠은 후한 말, 조위 시대의 인물로, 여러 차례 관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하진, 동탁, 원술, 손책, 조조 등을 섬기며 상서령, 어사대부, 사도 등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청렴하고 공정한 성품으로 칭송받았으며, 위나라 건국에 기여하여 안락정후에 봉해졌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순수하고 덕망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세설신어》 등 다양한 문헌에서 그의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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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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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화흠 |
원어 이름 | 華歆 |
로마자 표기 | Hwa Heum |
자 | 자어(子魚) |
시호 | 경후(敬侯) |
관직 정보 | |
관직 | 태위(太尉) |
임기 시작 | 227년 1월 또는 2월 |
임기 종료 | 232년 1월 30일 |
군주 | 조예 |
후임 | 사마의 |
관직 (2) | 사도(司徒) |
임기 시작 (2) | 220년 12월 11일 |
임기 종료 (2) | 227년 1월 또는 2월 |
군주 (2) | 조비 |
후임 (2) | 왕랑 |
관직 (3) | 상국(相國) (조비의 봉국 내) |
임기 시작 (3) | 220년 4월 6일 |
임기 종료 (3) | 220년 12월 11일 |
군주 (3) | 헌제 |
승상 (3) | 조비 |
선임 (3) | 종요 |
관직 (4) | 어사대부(御史大夫) (조조의 봉국 내) |
임기 (4) | 217년 8월 경 – 220년 4월 |
군주 (4) | 헌제 |
승상 (4) | 조조 |
관직 (5) | 상서령(尚書令) |
임기 (5) | 212년–? |
군주 (5) | 헌제 |
승상 (5) | 조조 |
선임 (5) | 순욱 |
관직 (6) | 예장태수(豫章太守) |
임기 (6) | 192년–199년 |
군주 (6) | 헌제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57년/158년 |
출생지 | 위청(산둥성) |
사망일 | 232년 1월 30일 (74세) |
가족 | 화기(華緝) (형) |
손자 | 화연(華姸) (화병(華炳)의 아들) |
증손녀 | 화방(華芳) (화병의 손녀이자 화연의 딸; 왕준의 아내) |
배우자 | 등씨(滕氏) 뤄퉁의 어머니 |
자녀 | 화표(華표) 화박(華博) 화주(華周) 화병(華炳) 뤄퉁 (의붓아들) |
직업 | 정치가 |
작위 | 박평후(博平侯) |
2. 생애
고당은 제의 지방으로 이름난 번화가였는데, 관리들은 그곳에서 놀고 있었으나, 화흠은 휴일에도 문을 닫고 집에 있었다. 그는 논의에 있어서 항상 공평했고,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은 하지 않았다.[15]
같은 군의 도구홍과 명성을 두고 경쟁하였는데, 영제 치세에 기주자사 왕분이 황제 폐립을 시도할 때, 그 계책에 동참하려던 도구홍을 엄하게 충고하여 도구홍도 화흠을 인정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郎仲)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89년, 영제가 붕어하자 대장군 하진의 부름으로 정태, 순유 등과 함께 하진을 섬겼고, 화흠은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하진은 십상시들에게 살해되었고, 동탁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191년, 반동탁 연합군의 결성으로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려 하자, 화흠은 하규현령(下糾縣令)으로서 동탁에게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병 때문에 임지에 가지 못했다.
이후 장안을 빠져나와 남양으로 도주하여 원술을 섬겼다. 화흠은 원술에게 동탁을 공격할 것을 진언했지만, 채택되지 않아 원술의 곁을 떠났다. 마침, 마일제가 장안 조정에서 관동 안정을 위해 파견되었기 때문에, 화흠은 그의 속관이 되었다. 또한, 동쪽의 서주(徐州)까지 왔을 때, 조서에 의해 예장태수(太守)로 임명되었다.
화흠의 정치는 간결하고 공정했기 때문에, 관민은 이를 다행으로 여겼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위략(魏略)》에 따르면, 강동 정벌을 준비하던 손책의 군대에 합류하여 손책은 그를 귀빈으로 대우했다.[4]
200년, 손책이 암살된 후, 조조 휘하의 조정은 화흠을 낙양으로 불렀다. 손권은 그를 보내는 것을 망설였지만, 화흠은 그의 출발이 조조에 대한 선의의 신호가 될 것이라고 손권을 설득했다. 결국 화흠은 순욱을 대신하여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출발할 때는 수천 명의 빈객들에게 전송을 받았고, 전별금도 거액에 달했지만, 화흠은 전별금에 표시를 해두고, 마침내 출발할 때가 되자, 빈객들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빈객들은 화흠의 덕의에 감탄했다고 한다.
213년, 화흠은 조조가 손권과의 전쟁에서 군사(軍師, 군사 고문)가 되었다. 217년 8월,[5] 화흠은 조조가 위왕(魏王)이 된 후 조위에서 최초의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2. 1. 후한 시기
고향인 고당은 제의 지방으로 이름난 번화가였는데, 관리들은 그곳에서 놀고 있었으나, 화흠은 휴일에도 문을 닫고 집에 있었다. 그는 논의에 있어서 항상 공평했고,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은 하지 않았다.[15]같은 군의 도구홍과 명성을 두고 경쟁하였는데, 영제 치세에 기주자사 왕분이 황제 폐립을 시도할 때, 그 계책에 동참하려던 도구홍을 엄하게 충고하여 도구홍도 화흠을 인정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郎仲)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89년, 영제가 붕어하자 대장군 하진의 부름으로 정태, 순유 등과 함께 하진을 섬겼고, 화흠은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하진은 십상시들에게 살해되었고, 동탁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191년, 반동탁 연합군의 결성으로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려 하자, 화흠은 하규현령(下糾縣令)으로서 동탁에게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병 때문에 임지에 가지 못했다.
이후 장안을 빠져나와 남양으로 도주하여 원술을 섬겼다. 화흠은 원술에게 동탁을 공격할 것을 진언했지만, 채택되지 않아 원술의 곁을 떠났다. 마침, 마일제가 장안 조정에서 관동 안정을 위해 파견되었기 때문에, 화흠은 그의 속관이 되었다. 또한, 동쪽의 서주(徐州)까지 왔을 때, 조서에 의해 예장태수(太守)로 임명되었다.
화흠의 정치는 간결하고 공정했기 때문에, 관민은 이를 다행으로 여겼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위략(魏略)》에 따르면, 강동 정벌을 준비하던 손책의 군대에 합류하여 손책은 그를 귀빈으로 대우했다.[4]
200년, 손책이 암살된 후, 조조 휘하의 조정은 화흠을 낙양으로 불렀다. 손권은 그를 보내는 것을 망설였지만, 화흠은 그의 출발이 조조에 대한 선의의 신호가 될 것이라고 손권을 설득했다. 결국 화흠은 순욱을 대신하여 상서령(尚書令)이 되었다. 출발할 때는 수천 명의 빈객들에게 전송을 받았고, 전별금도 거액에 달했지만, 화흠은 전별금에 표시를 해두고, 마침내 출발할 때가 되자, 빈객들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빈객들은 화흠의 덕의에 감탄했다고 한다.
213년, 화흠은 조조가 손권과의 전쟁에서 군사(軍師, 군사 고문)가 되었다. 217년 8월,[5] 화흠은 조조가 위왕(魏王)이 된 후 조위에서 최초의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2. 2. 원술, 손책, 조조 섬김
189년 영제가 붕어하자 대장군 하진의 부름으로 정태, 순유 등과 함께 하진을 섬겼고,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4] 그러나 하진은 십상시들에게 살해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탁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16]191년 반동탁 연합군의 결성으로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려 하자, 화흠은 하규현령(下糾縣令)으로서 동탁으로부터 지방으로 벗어나려 하였으나 병에 걸렸기 때문에 임지에 가지 못했다.[16]
그러나 후에 장안을 빠져나와 남양으로 도주하여 원술을 섬겼다.[16] 당시 남양에 머물러있던 원술에게 동탁을 토벌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원술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화흠은 원술에게서 나왔다.[16] 이때 마일제가 장안의 조정에 의해 관동(關東)의 안정을 위해 파견하였으므로, 화흠은 그의 속관이 되었다.[16]
192년, 화흠은 예장(豫章) 태수로 임명되었다. 유요가 양주 자사로 죽자, 그의 군대는 화흠에게 태수 자리를 넘겨주려 했다. 화흠은 한나라의 신하로서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4] 이후 예장태수로 임명되었다.[16]
197년, 양주자사 유요가 손책에게 추격당해 죽자, 그의 가신들이 화흠에게 의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화흠은 멋대로 임명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거절하였다.[16]
이 후, 강동 정벌을 준비하던 손책이 화흠을 공격하자, 화흠은 손책이 용병술에 교묘한 것을 알고, 갈건(葛巾)을 쓰고 항복하였다. 이때 손책은 화흠의 명성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그를 상객으로서 대우하였다.[4][16]
200년, 손책이 죽자 손권을 섬겼으나, 조조의 부름으로 관도(官渡)로 떠나려하는데, 손권이 이를 말렸으나, 화흠은 손권과 조조와의 국교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데 손권을 위해 움직일 수 있게 간청하였기 때문에 손권은 장굉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떠나게 하였다.[16] 출발하기 직전에 수천 명의 빈객들에게 전송받아, 전별(餞別)도 많았으나, 화흠은 전별에 표시를 남겨두어, 겨우 출발할 때가 되자, 빈객들에게 전부 돌려줬다. 빈객들은 화흠의 덕의에 감탄하였다.[16]
중앙으로 향하자 의랑(議郞)으로 임명되어, 사공의 군사로 시작으로, 상서(尙書)·시중(侍中)이라고 하는 중앙의 요직에 취임하게 되어, 순욱을 대신하여 상서령(尙書令)에 임명되었다.[16] 217년 8월,[5] 화흠은 조조가 위왕(魏王)이 된 후 조위에서 최초의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조조가 손권을 정벌하려고 한 때에는 화흠이 군사로 요구되었다.[16]
216년, 조조가 위왕이 되자 화흠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되었다.[16]
220년 4월, 조비가 위왕이 된 후, 화흠은 위나라의 승상이 되었고, 안락정후(安樂亭侯)에 봉해졌다.[4] 12월 말, 조비가 한나라를 찬탈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화흠은 사도에 임명되었다.[4]
2. 3. 위나라 건국 이후
화흠은 중앙으로 부임하여 의랑(議郞)으로 임명되었고, 사공의 군사에 참여했다. 이후 상서(尚書), 시중(侍中) 등 요직을 거쳐 순욱을 대신하여 상서령(尙書令)에 임명되었다. 216년, 조조가 위왕이 되자 화흠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되었다.220년,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자 화흠은 상국에 임명되었으며,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도에 임명되었다. 화흠은 위의 제신 중에서도 제일 우대를 받았으나, 청빈한 삶에 만족하여 봉록이나 은상을 구족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집에 저축이 없었다. 어느 날, 공경(公卿)이 하명되었을 때 화흠은 자신의 집에 있던 하녀들을 신분에서 해방시켜 다른 가문으로 시집 보냈다. 이에 문제(조비)는 화흠을 칭찬하였다.
또 어느 날 삼공(三公)의 역소에서 인사에서는 덕행을 존중해야 하므로, 경전 시험의 비중을 가볍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나왔을 때 화흠은 학문의 존립이야말로 왕도가 성하는 것이라고 반론하였다. 그 후, 화흠은 독행의 군자가 천거되자, 자신의 벗인 관녕을 소개하였다. 문제는 차를 준비해 관녕을 맞아들이려고 하였으나, 관녕은 요동에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임관을 거절하였다.
226년, 문제가 죽고 그의 아들 조예가 그 뒤를 잇자 화흠은 박평후(博平侯)에 봉해져, 500호의 기증을 받아 1300호를 다스리게 되었고 태위로 전임되었다. 이 무렵에 화흠은 노령을 이유로 태위직을 친구인 관녕에게 양도하고 은거하고 싶다고 탄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산기상시(散騎常侍) 무습(繆襲)을 파견해 강한 어조로 출사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화흠은 어쩔 수 없이 출사하였다.
230년, 조진이 자오가도(子午街道)를 통해 촉한을 침공하자 명제(조예)가 허창(許昌)에서 행차했지만, 화흠은 천명을 기다려야 한다며 「비전론」을 주장하였다. 이때 명제는 자신의 천명을 함부로 무력에 호소하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해 화흠의 충고에 감사의 뜻을 보였다. 결국 여름에 폭우가 내렸기 때문에 조칙에 의해 조진군은 퇴각하였다.
231년, 화흠은 향년 75세로 병사하였다. 시호는 경후(敬候)이며, 아들 화표(華表)가 그의 뒤를 계승하였다.
3.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화흠을 순결하고 덕성을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 배송지는 《위략》의 화흠이 용의 머리, 관녕이 용의 꼬리라는 평가에 대하여 관녕은 화흠보다 높이 평가되고 있으므로, 순서를 착각한 것이라 반론하였다.
화흠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세설신어』에 기록되어 있다. 화흠과 왕랑이 배를 타고 피난을 가던 중, 한 사람이 배에 오르기를 청했으나 화흠은 망설였다. 왕랑은 "다행히 배에 아직 여유가 있으니 괜찮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이후, 도적들이 쫓아오자 왕랑은 그 사람을 버리려 했다. 화흠은 "내가 처음 망설였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오. 이제 그에게 몸을 의탁받았으니, 위급하다고 해서 버릴 수는 없소."라고 말하며, 결국 그를 전과 같이 배에 태워 구했다. 이로써 사람들은 화흠과 왕랑 중 누가 더 훌륭한지를 판단했다.[6]
손자인 화교의 『보서』(선조의 계보를 서술한 글)에 따르면, 서경의 난(동탁에 의한 장안 천도) 때 정태 등과 함께 무관을 향해 탈출하려 했다. 도중에 한 남자가 일행에 끼고 싶다고 하자, 다른 일행들은 승낙했지만, 화흠은 반대했다. 하지만 버리기에는 차마 안 된다고 다른 일행이 말했기에 결국 동행을 허락했다. 그 남자가 도중 우물에 빠지자 일행들은 버리려 했다. 화흠은 "이미 일행으로 받아들였으니 버리는 것은 신의에 어긋난다"며 그를 구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화흠의 대의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보서』는 자손에 의한 조상 현창의 색채가 강하며, 손책에게 항복한 뒤 손책과 여러 신하들에게 존경받았다는 "화독좌"의 일화 또한 『보서』에서 언급하고 있다.
남조 송의 『세설신어』에서는, 앞서 언급한 정태 등과의 일화를 왕랑과 화흠이 손책으로부터 도망칠 때의 일로 각색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 일화 외에도, 『세설신어』에서 화흠은 "엄격하면서도 정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으며, 육조 시대에는 그러한 이미지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와 동시에 "덕행편"에서는, 관녕이 금전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데 반해, 화흠이 약간의 미련을 보이거나 귀족의 수레를 보려고 공부를 중단했기 때문에 관녕은 자리를 찢어 좌석을 분리하고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며 절교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오나라 사람의 저작으로 여겨지는 『조만전』에서는, 건안 19년(214년)에 조조가 복황후를 폐하려 했을 때, 화흠이 희려의 부사로서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가 벽 속에 숨어 있던 복황후를 끌어냈다는 폭거를 저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수의 『삼국지』 위서의 "화흠전"에는 이 이야기가 채용되지 않았지만, 배송지는 "무제기" 주에 『조만전』의 기사를 덧붙였다. 『삼국지』가 완성된 지 1세기 이상 후에 완성된 범엽의 『후한서』 "복황후기"에서는 『조만전』의 기사를 거의 그대로 채용하고 있다.
3. 1. 긍정적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화흠을 순수하고 덕성을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 배송지는 《위략》의 화흠이 용의 머리, 관녕이 용의 꼬리라는 평가에 대하여 관녕은 화흠보다 높이 평가되고 있으므로, 순서를 착각한 것이라 반론하였다.화흠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세설신어』에 기록되어 있다. 화흠과 왕랑이 배를 타고 피난을 가던 중, 한 사람이 배에 오르기를 청했으나 화흠은 망설였다. 왕랑은 "다행히 배에 아직 여유가 있으니 괜찮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이후, 도적들이 쫓아오자 왕랑은 그 사람을 버리려 했다. 화흠은 "내가 처음 망설였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오. 이제 그에게 몸을 의탁받았으니, 위급하다고 해서 버릴 수는 없소."라고 말하며, 결국 그를 전과 같이 배에 태워 구했다. 이로써 사람들은 화흠과 왕랑 중 누가 더 훌륭한지를 판단했다.[6]
손자인 화교의 『보서』(선조의 계보를 서술한 글)에 따르면, 서경의 난(동탁에 의한 장안 천도) 때 정태 등과 함께 무관을 향해 탈출하려 했다. 도중에 한 남자가 일행에 끼고 싶다고 하자, 다른 일행들은 승낙했지만, 화흠은 반대했다. 하지만 버리기에는 차마 안 된다고 다른 일행이 말했기에 결국 동행을 허락했다. 그 남자가 도중 우물에 빠지자 일행들은 버리려 했다. 화흠은 "이미 일행으로 받아들였으니 버리는 것은 신의에 어긋난다"며 그를 구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화흠의 대의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보서』는 자손에 의한 조상 현창의 색채가 강하며, 손책에게 항복한 뒤 손책과 여러 신하들에게 존경받았다는 "화독좌"의 일화 또한 『보서』에서 언급하고 있다.
남조 송의 『세설신어』에서는, 앞서 언급한 정태 등과의 일화를 왕랑과 화흠이 손책으로부터 도망칠 때의 일로 각색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 일화 외에도, 『세설신어』에서 화흠은 "엄격하면서도 정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으며, 육조 시대에는 그러한 이미지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와 동시에 "덕행편"에서는, 관녕이 금전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데 반해, 화흠이 약간의 미련을 보이거나 귀족의 수레를 보려고 공부를 중단했기 때문에 관녕은 자리를 찢어 좌석을 분리하고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며 절교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3. 2. 부정적 평가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 화흠은 손책의 부하로 처음 등장한다. 202년 조조의 부름을 받아 중앙으로 불려 간 후, 214년 복황후(孝獻皇后) 시해 사건 때 냉혹하고 아첨하는 악인으로 묘사된다.[17]220년에는 조식의 재능을 질투하는 조비에게 조식을 시험하여 처형할 것을 제안하고, 왕랑(王朗), 환계(桓階), 가후(賈詡), 허지(許智), 조홍(曹洪), 조휴(曹休) 등과 함께 헌제(獻帝)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위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다.
227년, 제갈량(諸葛亮)의 이간책에 넘어가 조예에게 사마의(司馬懿)의 병권을 박탈하고 주살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이후 제갈량이 조진의 군대를 격파하자 명제에게 모든 제후들을 집결하여 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고 진언한다. 그 후, 화흠은 등장하지 않는다.
4. 가족 관계
5. 기타
wikitext
그 후, 화흠의 자손들은 위와 진(晉) 두 왕조 시대에 활약하였다. 또한 화흠의 손자인 화교(華嶠)는 후한의 역사를 모은 『후한서(後漢書)』를 저술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고 있는 『후한서』는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저술한 것이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3]
간행물
Wang Jun Qi Hua Fang Muzhiming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문서
[7]
문서
華芳墓誌
[8]
서적
三国志
[9]
문서
[10]
서적
資治通鑑
[11]
서적
後漢書
[12]
서적
後漢書
[13]
서적
三国志
[14]
서적
三国志
[15]
서적
위략(魏略)
[16]
서적
오력(吳曆), 보서(譜敍), 강표전(江表傳)
[17]
문서
조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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