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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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형개는 명나라의 관료로, 융경 연간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만력 연간에 감찰어사, 산서우참정 등을 거쳐 요직을 역임했으며,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조선에 파견되어 군무를 총괄했으나, 울산성 전투에 대한 허위 보고로 정응태의 무고 사건을 야기했다. 만력 40년(1612)에 사망했으며, 사후 태보에 추증되었다.
형개는 만력 21년(1593) 남경병부우시랑(南京兵部右侍郞)으로 승진하였다.[9] 만력 22년(1594) 남경병부좌시랑 겸 우첨도어사 총독천귀군무(南京兵部左侍郞兼右僉都御史總督川貴軍務)로 임명되어[10] 파주(播州)의 양응룡(楊應龍)의 난을 진압하였다. 관직은 소보 겸 태자태보(小保兼太子太保)에까지 이르렀다. 만력 40년(1612) 음3월 8일, 73세로 사망하였으며,[11] 다음 해인 만력 41년(1613) 태보(太保)에 추증되었다.
2. 생애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융경 5년(1571)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밀운지현(密雲知縣)에 임명되었다. 만력 4년(1576) 3월 20일, 절강도어사(浙江道御史)로서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었고,[1] 같은 달 24일 감숙순안어사(甘肅巡按御史)로 전직하였다.[2] 만력 6년(1578) 2월 16일, 절강순안어사에서 하남첨사(河南僉事)로 승진하였다.[3] 만력 10년(1582) 정월 3일, 섬서원마시소경(陝西苑馬寺少卿)에서 산서행태복시경겸첨사(山西行太僕寺卿兼僉事)로 승진하였다.[4] 만력 12년(1584) 8월 12일, 산서행태복시경겸첨사에서 산서우참정(山西右參政)으로 승진하였다.[5] 만력 13년(1585) 2월 7일, 산동참정(山東參政)에서 섬서참정겸첨사(陝西參政兼僉事)로 승진하였다.[6] 만력 18년(1590) 3월 11일, 섬서우포정겸첨사(陝西右布政兼僉事)에서 산서양화병비도(山西陽和兵備道)로 기보(起補)하였다.[7] 같은 해 9월 4일, 산서우포정사겸안찰사부사(山西右布政使兼按察使副使)에서 대동순무(大同巡撫)로 승진하였다.[8]
2. 2. 임진왜란 참전
1597년 만력 25년, 형개는 병부상서 겸 도찰원우부도어사 총독계료보정군무 겸 이양향경략어왜(兵部尙書兼都察院右副都御史總督薊遼保定軍務兼理粮餉經略禦倭)에 임명되어 조선에 파견되었다.[12]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 군대를 총괄 지휘하며 임진왜란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2. 2. 1. 울산성 전투와 정응태 무고 사건
1598년 만력(萬曆) 26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대가 주둔한 울산 도산성(島山城) 전투에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적장 100여 명을 체포하거나 사살하고, 수급 1200여 급을 얻는 등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순무(巡撫) 양호(楊鎬)의 전공이 있었다는 형개의 보고가 북경에 도착하였다.[13] 이는 제1차 울산성 전투에 대한 승전보였으나, 사실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승리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감찰관 정응태(丁應泰)가 양호 등을 탄핵하고 조선이 일본과 결탁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른바 ‘정응태의 무고’ 사건이 발생하였다.[14]
같은 해 6월 4일, 병부동정찬획주사(兵部東征贊畫主事) 정응태는 울산성 전투에서 패전했음에도 조선경략요동순무(朝鮮經略遼東巡撫) 양호, 총병관 마귀, 부장(副將) 이여매(李如梅)가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으며, 차보대학사(次輔大學士) 장위(張位)와 삼보대학사(三輔大學士) 심일관(沈一貫)이 양호와 비밀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를 은폐하려 했다고 탄핵하였다. 정응태는 양호가 왜적에게 패하고 많은 군사를 잃자 수비 태세로 돌아섰고 패전 사실을 숨겼다는 것, 마귀는 군사를 버리고 도주하였음에도 사실을 은폐하였다는 것, 이여매는 수수방관하였다는 것, 장위는 양호와 함께 화복이해(禍福利害)를 같이 하겠다고 서신을 보낸 것, 심일관은 패전 상주문이 먼저 올라가게 되면 나중에 만력제의 사면이 있을 것, 어사(御史) 왕선안(汪先岸)이 양호를 계속 중임할 것을 황제에게 건의할 것이라고 양호에게 서신을 보낸 것 등을 탄핵 내용으로 제시하였다.
이에 장위와 심일관은 만력제에게 해명하고 자신들의 파면을 요청하였으나 만력제는 장위와 심일관을 유임시켰고, 양호를 탄핵시키는 한편 형개를 한양으로 파견하여 경략 직책을 계승하도록 하였다.[15]
1599년 정월 25일, 정응태는 형개 등이 일본에 뇌물을 주고 나라를 팔아먹었으며 조선이 일본과 결탁하였다는 상주문을 올려 형개를 탄핵하였으나, 만력제는 정응태의 상주가 근거 없다고 보고 각하하였다.[16]
3. 저서
참조
[1]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76-03-20
[2]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76-03-24
[3]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78-02-16
[4]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81-01-03
[5]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84-08-12
[6]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85-02-07
[7]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90-03-11
[8]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90-09-04
[9]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93-08-11
[10]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94-10-15
[11]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602-03-08
[12]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97-03-29
[13]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98-02-05
[14]
문서
조선실록 기록: 丁應泰 관련 내용
[15]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98-06-04
[16]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159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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