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울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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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울산성 전투는 임진왜란 시기인 1597년 12월부터 1598년 1월까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을 공격한 전투이다.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부총병 양호가 이끄는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저항과 증원군 도착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퇴각했다. 전투 결과 연합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양호는 울산 전투 실패로 인해 베이징으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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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8년 1월 - 울산성 전투
울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한 전투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일본군에 패배했으며, 이는 정유재란의 전황과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598년 일본 - 노량 해전
노량 해전은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협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 함대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로서 일본 수군을 맞아 크게 승리한 해전으로, 일본군의 철수를 막으려는 조명 연합군과 철수를 돕고자 한 일본군의 목적이 충돌하며 발생했으며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전사했다. - 1598년 일본 - 왜교성 전투
왜교성 전투는 1598년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를 유정이 이끄는 명나라군과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 연합군이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저항과 사천성 전투 패배 소식으로 공략에 실패하고 감시 체제로 전환된 정유재란 막바지의 주요 전투이자 조명 연합군의 총공세가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제1차 울산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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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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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정유재란의 일부 |
날짜 | 1598년 1월 29일 ~ 1598년 2월 19일 |
장소 | 울산, 울산왜성 |
결과 | 일본군의 승리, 조선 및 명나라 군대 철수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및 명나라 |
교전국 2 | 일본군 |
지휘관 및 지도자 | |
명나라 | 양호 마귀 |
조선 | 권율 |
울산성 |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
증원군 | 모리 히데모토 나베시마 나오시게 하치스카 이에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
병력 규모 | |
명나라 | 40,000명 |
조선 | 10,000명 |
울산성 | 10,000명 |
증원군 | 13,000명 |
사상자 규모 | |
명나라 (명나라 측 기록) | 사망: 1,621명 부상: 2,908명 |
일본군 | ~9,000명 |
2. 역사적 배경
양호, 마귀, 권율은 1598년 1월 26일 경주에서 만나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울산으로 진격했다.
2. 1. 조선의 상황
양호, 마귀, 권율은 1598년 1월 26일 경주에서 만나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울산으로 진격했다.2. 2. 명나라의 참전
양호, 마귀, 그리고 권율은 1598년 1월 26일 경주에서 만나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울산으로 진격했다.2. 3. 일본군의 전략
양호, 마귀, 권율은 1598년 1월 26일 경주에서 만나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울산으로 진격했다.3. 제1차 울산성 전투 (1597년 12월 ~ 1598년 1월)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부총병 양호는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 중 누구를 먼저 쳐야 할지 의논했는데, 울산이 일본군의 본거지라는 이유로 1598년 1월 29일(1597년 음력 12월 23일) 가토 기요마사의 1만 5천 명 군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을 공격했다. 이때 조명연합군은 조선군 1만 1천 5백 명, 명군 3만 6천 명으로, 명나라 제독 마귀도 합세했다. 연합군은 1월 29일 울산에 도착했다.
전투는 일본 수비대를 정면 공격으로 유인하기 위한 가짜 후퇴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500명의 손실을 보고 패배하여 토산산성으로 후퇴해야 했다. 연합군은 울산 시를 점령했다.
1월 30일, 연합군은 산성을 포격한 후 토산의 외벽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식량 보급품의 대부분을 버리고 내성으로 후퇴했다. 연합군은 내성을 공격했고, 한때 벽의 일부를 점령했지만 심각한 사상자를 냈다. 산성이 너무 높이 위치해 있어서 대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공격은 중단되었고, 긴 포위가 시작되었다.
2월 19일, 연합군은 다시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일본군의 증원군이 도착하는 것을 본 양호는 포위를 풀고 후퇴하기로 결정했지만, 혼란스러운 이동으로 인해 많은 낙오병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3. 1. 전투 발발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부총병 양호는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 중 누구를 먼저 쳐야 할지 의논했는데, 울산이 일본군의 본거지라는 이유로 1598년 1월 29일(1597년 음력 12월 23일) 가토 기요마사의 1만 5천 명 군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을 공격했다. 이때 조명연합군은 조선군 1만 1천 5백 명, 명군 3만 6천 명으로, 명나라 제독 마귀도 합세했다. 연합군은 1월 29일 울산에 도착했다.전투는 일본 수비대를 정면 공격으로 유인하기 위한 가짜 후퇴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500명의 손실을 보고 패배하여 토산산성으로 후퇴해야 했다. 연합군은 울산 시를 점령했다.
1월 30일, 연합군은 산성을 포격한 후 토산의 외벽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식량 보급품의 대부분을 버리고 내성으로 후퇴했다. 연합군은 내성을 공격했고, 한때 벽의 일부를 점령했지만 심각한 사상자를 냈다. 산성이 너무 높이 위치해 있어서 대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공격은 중단되었고, 긴 포위가 시작되었다.
2월 19일, 연합군은 다시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일본군의 증원군이 도착하는 것을 본 양호는 포위를 풀고 후퇴하기로 결정했지만, 혼란스러운 이동으로 인해 많은 낙오병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3. 2. 공방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을 격퇴하며 울산성을 지켜냈다. 조명연합군은 새벽에 압도적인 숫자로 성을 사면에서 공격했지만,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퇴각했다. 1월 29일 울산에 도착한 연합군은, 일본 수비대를 정면 공격으로 유인하기 위한 가짜 후퇴 작전을 펼쳤으나 500명의 손실을 입고 패배하여 토산산성으로 후퇴해야 했다. 연합군은 울산 시를 점령했다.1월 30일, 연합군은 산성을 포격한 후 토산의 외벽을 점령했지만, 일본군은 식량 보급품 대부분을 버리고 내성으로 후퇴했다. 연합군은 내성을 공격하여 한때 벽의 일부를 점령했지만, 심각한 사상자를 냈다. 산성이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하여 대포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결국 공격은 중단된 채 긴 포위가 시작되었다.
25일 명나라군은 조선군의 도원수 권율에게 다음날 조선군 단독으로 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일본군이 조총으로 조선군을 격파하여 권율은 대패하여 퇴각했다. 이후에도 조명연합군은 계속 공격했지만 모두 대패하였다.
2월 19일, 연합군은 다시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일본군의 증원군이 도착하는 것을 본 양호는 포위를 풀고 후퇴하기로 결정했지만, 혼란스러운 이동으로 인해 많은 낙오병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계속된 패배로 조명연합군은 공격을 중단하고 대치했다. 일본군은 군량이 충분하지 않았고 겨울이었기 때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지는 병사들이 발생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할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겠다며 계속 투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명연합군은 일본 지원군 파견을 두려워했고, 결국 일본군이 도착하자 조명연합군은 격파당했다.
3. 3. 연합군의 퇴각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을 상대로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수성에 성공했다. 조명연합군은 새벽에 압도적인 숫자로 성을 사면에서 공격했지만, 일본군에 대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퇴각했다. 25일, 명나라군은 조선군의 도원수 권율에게 다음날 공격을 지시했다. 권율은 조선군 단독으로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조총 공격에 다시 패퇴했다. 이후에도 조명연합군은 계속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계속된 패배로 조명연합군은 공격을 중단하고 대치했다. 일본군은 식량이 부족하고 겨울 추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조명연합군은 일본 지원군 파견을 우려했고, 결국 일본군이 도착하면서 조명연합군은 격파되었다.
연합군은 1월 29일 울산에 도착하여, 일본 수비대를 유인하기 위해 거짓 퇴각 작전을 펼쳤다. 일본군은 500명의 손실을 보고 토산산성으로 후퇴했고, 연합군은 울산 시를 점령했다.
1월 30일, 연합군은 토산의 외벽을 점령했으나, 일본군은 내성으로 후퇴하여 저항했다. 연합군은 내성을 공격했지만, 큰 피해를 보고 공격을 중단했다. 2월 19일, 연합군은 재차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일본 증원군이 도착하자 양호는 포위를 풀고 후퇴했으나, 혼란 속에서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4. 제2차 울산성 전투 (1598년 9월)
4. 1. 재정비와 재공격
4. 2. 공방전의 재개
4. 3. 일본군의 항전과 연합군의 퇴각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명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명 연합군의 사상자는 전사 798명, 부상으로 인한 사망자 823명으로 총 1,621명이었다.[1] 부상자는 2,908명에 달했다.[1]
하울리(Hawley)에 따르면, 울산성 일본 수비대는 10,000명이었으며, 포위 공격에서 1,000명 미만이 생존했다. 그러나 1차 사료에 따르면 원래 수비 병력은 20,000명에서 23,000명이었다.[1]
양호는 1598년 8월 12일 울산 전투 실패로 결국 베이징으로 소환되었다.
5. 1. 조선의 피해
명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명 연합군의 사상자는 전사 798명, 부상으로 인한 사망자 823명으로 총 1,621명이었다.[1] 부상자는 2,908명에 달했다.[1]5. 2. 명나라의 입장 변화
조선-명 연합군의 사상자는 전사 798명, 부상으로 인한 사망자 823명으로 총 1,621명이었다.[1] 부상자는 2,908명에 달했다.[1]하울리(Hawley)에 따르면, 울산성 일본 수비대는 10,000명이었으며, 포위 공격에서 1,000명 미만이 생존했다. 그러나 1차 사료에 따르면 원래 수비 병력은 20,000명에서 23,000명이었다.[1]
양호(楊鎬)는 1598년 8월 12일 울산성 전투 실패로 결국 베이징으로 소환되었다.
5. 3. 일본군의 전략 변화
명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명 연합군의 사상자는 전사 798명, 부상으로 인한 사망자 823명으로 총 1,621명이었다.[1] 부상자는 2,908명에 달했다.[1]하울리(Hawley)에 따르면, 울산성 일본 수비대는 10,000명이었으며, 포위 공격에서 1,000명 미만이 생존했다. 그러나 1차 사료에 따르면 원래 수비 병력은 20,000명에서 23,000명이었다.[1]
양호는 1598년 8월 12일 울산 전투 실패로 결국 베이징으로 소환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日本戦史. 朝鮮役 (本編・附記)
https://dl.ndl.go.jp[...]
[2]
웹사이트
A critique of Samuel Hawley's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 Part 2: The second invasion
https://greatmingmil[...]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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