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호리고에 공방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리고에 공방은 1457년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고가 공방 아시카가 시게우지에 대항하기 위해 이복 형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하면서 이즈 호리고에에 세운 기관이다.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호리고에에 머물렀으며, 호리고에 공방은 간토 간레이 등의 지원을 받았지만, 막부의 실권 장악과 간토 다이묘들의 지지 부족으로 취약한 구조였다. 1491년 마사토모 사후, 아들 아시카가 자차마루가 2대 공방이 되었으나, 1493년 이세 소운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호리고에 공방은 이즈 지역을 경제 기반으로 삼았으며, 무로마치 막부 쇼군 가문의 혈통을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간토 공방 -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이자 무로마치 막부의 제2대 쇼군으로, 간노의 소란 이후 막부의 정무를 맡아 남북조 시대 혼란 수습과 막부 권력 강화를 위해 소송 제도 정비, 유력 수호 세력 억압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 간토 공방 - 고가 공방
    고가 공방은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교토쿠의 난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시작된 간토 지방의 정치 세력이었으나, 다른 세력과의 대립 및 후호조 씨의 영향력 아래 쇠퇴하여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사망과 함께 소멸하며 간토 지방 전국 시대 개막에 영향을 주었다.
  • 무로마치 막부 - 다이묘
    다이묘는 일본 역사에서 유력 무사를 지칭하는 용어로, 시대에 따라 슈고 다이묘, 센고쿠 다이묘로 변화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막부 통제 하에 번주로서 막번 체제를 구성하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사라졌다.
  • 무로마치 막부 - 고가 공방
    고가 공방은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교토쿠의 난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시작된 간토 지방의 정치 세력이었으나, 다른 세력과의 대립 및 후호조 씨의 영향력 아래 쇠퇴하여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사망과 함께 소멸하며 간토 지방 전국 시대 개막에 영향을 주었다.
  • 아시카가 장군가 - 오닌의 난
    오닌의 난은 1467년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로 시작되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11년간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며, 아시카가 막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센고쿠 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다.
  • 아시카가 장군가 - 아시카가 요시마사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8대 쇼군으로, 오닌의 난 발발의 원인 제공자 중 하나로 지목되지만 히가시야마 문화를 꽃피우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호리고에 공방
기본 정보
아시카가 씨의 문장
아시카가 씨의 문장
별칭무로마치 막부 가마쿠라 부교
유형가마쿠라 공방
존속 기간1439년 - 1455년
위치무사시국 호리고에
종교선종
씨족아시카가 씨
역대 공방
초대 공방아시카가 마사토모
폐지아시카가 마사토모의 이즈국 이동

2. 역사

조로쿠 원년(1457년) 12월,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대립이 깊어지는 고가 공방(古河公方)·아시카가 시게우지에 대한 대항책으로, 덴류지에서 승적에 있던 이복 형인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환속시켜, 정식 가마쿠라 공방(鎌倉公方)으로서 교토에서 보냈다. 마사토모는 교토를 출발한 뒤 오미 온조지에서 일단 멈추고, 이듬해 초로쿠 2년(1458년) 5월 25일(6월 8일이라고도 함)에 정기가 넘겨져, 간토로 출발했다.

그러나, 마사토모는 쟁란과 정치적 이유로 가마쿠라에 들어갈 수 없었고, 앞선 이즈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 가마쿠라의 요해지를 서국 원정군과 간토 제후들이 다투는 것으로, 제2의 겐페이 합전의 형태로 되지 않도록 조심한 것이라고 한다. 마사토모가 이즈에 도착한 것은 5월 25일 이후부터 8월 13일 사이로 생각된다. 그리고, 마사토모는 처음에는 나고야의 국청사를 진소로 삼았지만, 초로쿠 4년(1460년) 4월에 시게우지 측에 의해 불태워졌기 때문에, 호리고시로 옮겨 엔조지를 접수하는 형태로 호리고시 고쇼를 지었다.

한편 시게우지는 가마쿠라에서 쫓겨났지만, 시모사의 고가 성에 거점을 두고 간토 동부를 중심으로 건재했으며, 가마쿠라 공방이 양웅이 나란히 서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마사토모는 고가의 가마쿠라 공방 시게우지에 대한 호리고시의 가마쿠라 공방으로서, 호리고에 공방이라고 칭했다.

호리고에 공방에는 간토 간레이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나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 교토에서 파견된 간토 단다이 시부카와 요시키와 우에스기 노리아사·마사노리 부자 등이 따랐으며, 간토의 막부 측 장수들에게 대한 군사 명령권은 마사토모에게 없고 막부가 직접 명령을 내려, 실권은 모두 교토의 막부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취약한 구조였다. 또한, 간토 측의 장수들은 초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토우지 이래의 혈통인 시게우지에 대한 충성심이 두터웠고, 간토의 세력으로부터의 지지·협력도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시부카와 요시키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간토 집사(간토 간레이의 구칭)라고 칭했기 때문에 내분을 일으킨 데다, 병량료소를 결소지나 이즈·사가미의 재지 영주의 소령에 충당했기 때문에 사가미를 지배하고 있던 오기야쓰 우에스기 가와도 대립하여, 간쇼 3년(1462년, 다음 해 4년(1463년)이라고도 함)에 오기야쓰 우에스기 가와의 대립 결과, 실각했다. 그리고, 이즈에 정비한 호리고에 공방 거관 주변으로의 간토 무가의 집주 즉 재창제에 대신하는 「재이즈 제도」라고 불러야 할 제도를 확립하지 못한 것도, 호리고에 공방의 간토 통치 권력으로서의 성립을 방해하게 되었다.

막부는 고가 공방을 멸하고, 호리고에 공방을 가마쿠라 공방로 확립하기 위해 간토에 원군을 파견하려고 했지만, 원군의 중심 세력으로 기대되었던 시바 씨가 내분을 일으키고(초로쿠 합전·부위에 소동), 오우의 여러 다이묘들도 출진하려 하지 않아 잘 되지 않았고, 오닌 원년(1467년)에 오닌의 난이 발생, 막부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도 중신인 나가오 가게하루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리고, 말려든 오기야쓰 우에스기 가도 시게우지 정벌은 어려워졌다.

분메이 14년(1483년) 11월, 막부는 고가 공방과 화해하여, 시게우지는 막부로부터 사면되었다(도비 화목). 막부로부터 가마쿠라 공방으로 보내진 마사토모는 사다리가 치워진 형태로, 화해 조건 중 하나에 시게우지는 이즈를 마사토모에게 양도한다고 하여, 마사토모는 간토의 주가 아니라 이즈 일국의 영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마사토모는 막부의 항쟁을 이용해(호소카와 마사모토와 연계했다고 함), 조카인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폐하고 자신의 차남 기요아키(후의 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다음 쇼군 직에 앉힐 계획을 꾀하지만, 메이오 원년(1491년)에 병사했다.

마사토모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고, 장남 차차마루는 소행이 불량하여 폐적되어 옥에 갇혀 있었다. 차남 기요아키, 삼남 준도지는 측실 엔만인의 아들로, 기요아키는 차기 쇼군 후보가 되기 위해 출가하여 교토에 있었기 때문에 호리고에 공방의 후계는 준도지로 결정되어 있었지만, 갇혀 있던 옥에서 탈출한 차차마루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살해당하여, 2대 호리고에 공방에는 차차마루가 취임했다.

메이오 2년(1493년) 10월, 호리고에 공방의 거성인 호리고에 고쇼가 이마가와 씨의 외척으로 이마가와의 군세를 이끈 이세 소운(호조 소운)에게 공격을 받아(이즈 토벌), 차차마루는 고쇼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종래에는 게코쿠조의 전형이라고 말해졌지만, 최근에는 메이오의 정변에 의해 요시즈미가 11대 쇼군에 취임한 것으로, 요시즈미의 명에 의해, 차차마루가 소운에 의해 "쇼군의 생모와 동생" 살해범으로서 토벌되었다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우에스기 사다마사의 획책이 있었다고도 한다). 여기에, 호리고에 공방은 불과 38년 만에 멸망했다.

그 후, 차차마루는 메이오 4년(1495년)까지 이즈에서 저항했고, 그 후에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나 다케다 씨를 의지해 이즈 탈환을 노렸지만, 메이오 7년(1498년) 8월에 가이로부터 인도되어 자결하게 되었다. 호리고에 공방의 멸망 시기에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적어도 15세기 후반에는 이즈가 고호조 씨의 전신인 이세 씨에게 빼앗긴 것은 확실하며, 여기에 호리고에 공방은 멸망하고, 가마쿠라 공방의 계보를 잇는 것은 고가 공방뿐이 되었다.

불과 2대(실질적으로 1대)로 멸망한 호리고에 공방이지만, 그 혈통은 교토의 아시카가 쇼군 가에 계승되었다. 요시즈미부터 15대·아시카가 요시아키까지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모두 호리고에 공방의 혈통이며, 마사토모의 자손이다. 또한, 히라시마 공방가를 거쳐, 현재도 혈통은 이어지고 있다.

2. 1. 성립 배경

조로쿠 원년(1457년), 무로마치 막부 제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고가 공방(古河公方) 아시카가 시게우지와의 대립이 심화되자, 이복형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새로운 가마쿠라 공방(鎌倉公方)으로 임명하여 간토 지방으로 파견하였다.[1] 그러나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입성하지 못하고 이즈 국 호리고에에 머무르며 어소(御所)를 건설하고 호리고에 공방을 세웠다.[1] 한편, 시게우지는 시모우사 국 고가 성(古河城)을 본거지로 삼아 간토 북부를 세력권으로 유지하여, 가마쿠라 공방이 양립하는 상황이 되었다.[1]

호리고에 공방은 간토 간레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과 교토에서 파견된 간토 단다이(関東探題) 등이 뒷받침했지만, 실권은 교토의 막부가 장악하고 있어 매우 취약했다. 또한, 간토 지역 다이묘들은 아시카가 모토우지 이래로 시게우지에게 충성심이 두터워, 지지를 얻기 어려웠다.[1]

막부는 간토에 원군을 보내려 했으나 시바 가문(斯波氏)의 내분과 오닌의 난 발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분메이 14년(1482년)에 막부와 시게우지는 화해하였고, 시게우지는 이즈 국을 마사토모에게 양도하였으나, 마사토모는 이즈 1국의 영주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 후, 마사토모는 아시카가 요시키를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쇼군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메이오 원년(1491년) 병사하였다.

2. 2. 전개

조로쿠 원년(1457년), 무로마치 막부 제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고가 공방 아시카가 시게우지와의 대립이 심화되자, 이복형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하여 간토 지방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입성하지 못하고 이즈 호리고에에 머무르며 어소(御所)를 건설하였다. 한편, 시게우지는 시모우사 국 고가 성을 본거지로 삼아 간토 북부를 세력권으로 삼아 건재하여, 가마쿠라 공방이 양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호리고에 공방은 간토 간레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과 교토에서 파견된 간토 단다이 등의 지원을 받았으나, 실권은 막부가 장악하고 있어 취약한 구조였다.[1] 간토 지방 다이묘들은 아시카가 모토우지 이래로 시게우지에게 충성심이 두터워 지지 기반이 약화되었다.[1] 더욱이 시부카와 요시카네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에 대항하기 위하여 스스로 간토 시쓰지(関東執事)를 칭하여 내분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막부는 간토에 원군을 보내려 했으나 시바 가문의 내분, 무쓰·데와 다이묘들의 출진 거부, 오닌 원년(1467년) 오닌의 난 발발 등으로 원조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도 나가오 가게하루의 반란(나가오 가게하루의 난)으로 궁지에 몰려 고가 공방과의 대립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분메이 14년(1482년), 고가 공방과 화해하고 시게우지는 막부의 사면을 받았다.[3] 화해 조건으로 이즈 국을 양도받았으나, 실질적으로 이즈 1국의 영주에 불과하게 되었다. 아시카가 마사토모는 막부 내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을 쇼군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메이오 원년(1491년) 병사하였다.

2. 3. 멸망

아시카가 마사토모 사후, 차남 아시카가 준도지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이복형 아시카가 자차마루에게 살해되었다. 아시카가 자차마루는 2대 호리고에 공방으로 취임하였다.

1493년(메이오 2년), 이세 모리토키(후의 호조 소운)가 이마가와 가문 군을 이끌고 호리고에 어소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아시카가 자차마루는 자결하거나 도주했다는 등의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이로써 호리고에 공방은 36년(혹은 38년) 만에 멸망했다.

이후 이즈 국은 고호조 가문의 전신인 이세 가문이 차지하게 되었고, 가마쿠라 공방의 계보는 고가 공방만이 남게 되었다.

3. 역대 호리고에 공방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는 1457년부터 1491년까지 재임하였다. 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이복형이다. 새로운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되었으나, 가마쿠라에 입성하지 못하고 호리고에 공방을 세웠다.

아시카가 자차마루는 아시카가 마사토모의 아들이다. 1491년부터 1493년까지 재임하였으나 멸망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이복동생을 살해하고 호리고에 공방을 계승하였다. 이후 이세 모리토키(호조 소운)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3. 1. 제1대: 아시카가 마사토모 (足利政知)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는 1457년부터 1491년까지 재임하였다. 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이복형이다. 새로운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되었으나, 가마쿠라에 입성하지 못하고 호리고에 공방을 세웠다.

3. 2. 제2대: 아시카가 자차마루 (足利茶々丸)

아시카가 자차마루는 아시카가 마사토모의 아들이다. 1491년부터 1493년까지 재임하였으나 멸망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이복동생을 살해하고 호리고에 공방을 계승하였다. 이후 이세 모리토키(호조 소운)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4. 경제 기반

호리고에 공방의 경제 기반은 주로 이즈 지역에 한정되었다.[1] 원래 가마쿠라 호조 씨의 저택이었던 엔조지(円成寺)를 거점으로 삼고, 주변 토지를 영유하며 곡창 지대로 활용했다.[1] 시모다 가도와 가노 강에 접해, 수륙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다.[1]

정치에 교토에서 따라온 측근들은 이즈 국내의 교토 사찰령과 가마쿠라 고잔령을 압령하여 자신의 소령으로 삼았다.[1] 봉행인인 후세 타메모토는 교토·신뇨지 쇼묘인령의 아큐고 및 가마쿠라·조치지령의 가노고를, 아사히 쿄테이는 교토·다이고지 지장원령의 우카가고·시모다고를 압령했다. 이러한 압령 행위는 호리고에 공방의 경제 기반을 강화했지만, 간토 지역의 질서를 혼란시키고 호리고에 공방에 대한 지지를 제한하는 원인이 되었다.[1]

5. 평가 및 의의

참조

[1] 서적
[2] 서적
[3] 웹사이트 北条早雲の伊豆討入 https://www.city.oda[...] 小田原市 2020-07-2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